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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사람들은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1866-1937, 한국명:민노아, 閔老雅)를
충북 선교의 아버지라 부른다.
1892년 11월 15일 부인 안나 라이네이크(Anna Reinecke)와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조선(한국)에서 45년간
봉직하는 동안 서울에서 9년 동안 활동하였고,
1902년부터 청주에서 37년간 활동하면서
경기남부와 중부권 복음화를 위해 그의 젊음과 온 생애를 바쳐 헌신하였다.
민노아 선교사가 내한하여 처음으로 맡은 일은
마포삼열 선교사가 맡고 있던 “예수교학당”(현 경신학교)을 물려받은 일이다.
그는 교명을 “민로아학당”으로 바꾸어 자신의 교육 방침대로
보통반과 특별반(실업반)의 새로운 학제를 만들어 실용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때 민족지도자 안창호(安昌浩)선생 등 제자들을 길러냈다.
조사 김흥경과 함께 1895년 연동교회 설립의 기초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구체적인 선교행위가 없는 교육 선교를 지양하라는
선교본부의
지시에 따라 민노아 학당은 1897년 10월 문을 닫게 된다.
그 후 아직 장로교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경기 남부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선교하기 시작한다.
당시 청주는 호남과 영남을 잇는 교통 중심지이어서
한강 이남에서 몇 째 안 가는 5일장이 열리고, 특별히 우시장이 유명하였다.
또한 기차역 조치원이 가까이 있어 접근이 편하고,
발전 가능성이 많은 지역으로 판단하였다.
1900년 조사 김흥경과 함께
청주시장에 답사와 전도를 위해 내려왔다가 놀라운 소식을 접한다.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 등이 죽산 둔병리교회 사경회에서 참석하여 예수를 믿고,
이들이 돌아와 자생적으로 교회를 세웠다는 말에 크게 고무된다.
그는 조사 이찬규를 보내 오천보의 집을 매입하여 세운 교회가
충북 최초의 교회인 신대교회이다.
이뿐 아니라 보은, 회인, 괴산
그리고 경상도 상주까지 교회 설립하는 일을 지도하였다.
민노아 선교사는 충북 사람들의 심성을 귀하게 보았다.
조용하고, 점잖을 뿐 아니라, 학식이 있고, 배움에 열의가 있는 것을 느끼고
청주 선교본부의 설립을 강청하여 1904년 가족과 함께 청주로 이사했다.
아직 선교비 지원이 되지 않았는데도 자비를 들여
무심천이 내려다보이고, 청주 시장거리와 우시장을 내려다보는
남쪽 탑동 언덕 산지 5만여 평을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청주에서는 처음 보는 붉은 벽돌의 2층 양관을 건립하였다.
이것은 청주의 명물이 되었다.
그는 1936년 12월 정년 은퇴하고 필리핀과 중국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와
1937년 청주에서 별세하였다.
조선(한국)에서 선교한지 45년째 되던 해 그의 유언에 따라 청주에 묻혔다.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무덤이 그의 여름 별장이었던 양화진에
묻혀 있음에도 자신은 청주를 떠나지 않았다.
그를 위한 기념일도 없고, 작은 흉상 하나 없으며,
기념관도 없고,
그저 초라하게 돌아다니는 사진 한 장, 꾸미지 않은 작은 기념비 하나가 고작인 사람이지만 그는 신앙의 거장이었다.
충남 홍성군 홍주성 서문 밖에 자리 잡은 홍성제일교회도
1900년, 민노아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서해안 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이며,
지역 내 많은 교회를 육성한 어머니 교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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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을 크리스토교 신앙인으로,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가로 인식하는 데 그리 익숙하지 않다.
그보다는 해방 직후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의 한 사람으로
좌우합작 운동을 견인하고 자주적 통일국가 수립 운동에 앞장섰던
정치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 점에 유념하여 이 글에서는 정치가 이전의
크리스토인(基督人)으로서의 김규식과 그가 30여 년간
중국 등 해외에서 항일민족운동가로서 활약상,
그리고 그 활동의 이면과 행간(行間)에 배어 있는
그의 크리스토교 신앙과 학문적 활동 등을 고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동안 김규식의 생애와 활동을 천착한 연구에서
크리스토교와 관련된 부분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면에 주로 초점을 둠으로써
자연스럽게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소략하게 취급되었다.
우사 김규식의 전 생애와 활동을 면밀히 검토해볼 때,
그는 크리스토교인으로 출발한 동시대의 여타 민족운동가, 예컨대 이동휘·이승만·김구 등에 비해 보다 크리스토교적 정체성(identity)을 견지했던 대표적 인물에 해당한다.
우사의 전 생애의 활동 이면에는 늘 크리스토교적 정신이 짙게 깔려 있었으며,
그의 언행에서도 항상 크리스토교적 신앙의 면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에 유념하여 크리스토인으로서의
우사의 신앙과 학문 및 항일민족운동을 기존 연구 업적에 의존해 개관해보고자 한다.
1. 크리스토교 신앙과 도미 유학생활(1881-1903)
한 인간의 삶을 결정짓는 요인은 여러 가지이다.
그중에도 인격이 형성되는 유년기와 성장기의 환경과 조건은
큰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김규식의 유년기와 성장기는 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함께였다.
그와 크리스토교와의 관계는 생애 출발부터 시작된다.
김규식은 1881년 1월 27일(양력 2월 28일) 청풍(靑風) 김씨 김지성(金智性)과 경주(慶州) 이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지성은 개항 직후 동래부(東萊府, 지금의 부산)의 외무 관리(宣傳官, 외교관)로 근무하였으며, 한국에 자전거를 처음으로 들여온 개화파 인물이었다.
이렇듯 일찍이 개화된 부친 김지성은 동래부 관리로 재직 중이던
1885년경 외국과의 불평등한 무역 관계를 시정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귀양길에 오르고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모친까지 돌아가 김규식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이때 김규식의 나이는 불과 여섯 살이었다.
2년 정도를 숙부 밑에서 자라던 중 1887년 한국 최초로 개원한(1886. 5)
언더우드의 고아학교에 들어갔다. 김규식이 고아학교에 들어간 경위를
훗날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언더우드(L. H. Underwood)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기 몸 역시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가마를 타고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 아이는 너무 굶주려서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내어 삼키려고까지 하였다.
김규식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사진에서도 확인된다.
고아학교에 들어간 직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에서는
13명의 고아원 원생(남자 어린이 9명, 여자 어린이 4명)과
훈장으로 보이는 4명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앞줄 한가운데에 어린 김규식이 서 있는데, 그 모습이 무척 병약해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김규식은 건강도 좋아졌고 특히 언더우드 부부의 남다른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언더우드가 김규식을 특별히 총애했던 것은 그가 어학과 암기력 등에 천재적 재능을 보이는 등 다른 원생들에 비해 남달리 총명하고 똑똑했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사진보다 1년 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또 하나의 사진을 보면
앞서 언급한 병약한 고아의 모습과는 달리 호피(虎皮)를 깐 의자에
머리를 서양식으로 빗어 넘겨 마치 ‘왕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한 장의 사진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나
아무튼 한동안 언더우드 부부의 총애를 받았던 것은 사실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에서 어린 시절 김규식이 언더우드의 ‘양자’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언더우드 부부의 총애는 적어도 1890년까지는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언더우드가 1889년 3월 여성 의료 선교사 릴리어스 호튼(L. S. Horton)과 결혼한 후,
아들 언더우드(H. H. Underwood, 元漢慶)가 태어난 것이 1890년 9월 6일이므로
그 이전까지는 아들과 같은 대우와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아학교 원생 시절 김규식이 ‘번개비’라는 별칭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그는 체구는 작았지만 매사에 민첩하고 재기가 넘쳤던 것 같다.
영문으로는 ‘존’(John, 요한)이라 불렸다고 한다.
김규식이 다니던 고아학교는 시간이 지나며 원생이 늘어나자 규모를 학당(學堂)으로
확장시키고 언더우드의 이름을 따 ‘원두우학당’(元杜尤學堂)이라 불렀다.
이 학당은 이후(1894) 학당 책임을 선교사 밀러(F. S. Miller, 閔老雅)가 맡으면서 ‘민노아학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때 청일전쟁의 전화(戰禍)를 피해
평양에서 서울에 왔던 안창호(安昌浩)가 “오시오. 오시오, 우리 집으로 오시오.
우리 집에 오면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고, 글도 가르쳐 줍니다.”라는
떠듬거리는 우리말로 전도하는 밀러 선교사의 인도를 받아 찾아간 곳이
바로 이 학당이었다.
안창호는 당시 민노아학당(후에 영신학교, 오늘날 경신학교의 전신)에서 2년간 학생 겸 접장 노릇을 하며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우사 김규식과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어린 시절 같은 학교를 다닌 동창 관계라 할 수 있다.
1897년 도미 유학길에 오르기 전까지
10년 동안 언더우드와 함께 생활한 김규식은
영어와 한문 및 서양의 자연과학 등에 관한 근대적 지식과 함께
크리스토교 복음에 대해 많은 것을 공부했을 것이다.
당시 언더우드의 도매서(都賣書, 勸書)이자 학당 접장이었던
송순명(宋淳明)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별명이 ‘송신약’(宋新約)이었다고 한다.
송순명은 신약성서 내용 전체를 암기했기 때문에 그런 별칭이 붙었던 것 같다.
안창호는 바로 이 사람과 여러 날 동안의 토론 끝에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송순명은 새문안교회의 초대 장로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보아 김규식이 어린 시절부터 성경공부를 하며
크리스토교 신앙을 간직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크리스토교에 입교하여 세례를 받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현재 새문안교회에 남아 있는 교적부에 의하면,
그가 세례를 받은 것은 미국 유학생활 2년째를 맞는 1898년으로 되어 있다.
다소 의구심이 없지 않으나 그랬을 가능성도 높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교회생활을 하였지만
세례는 자신의 신앙적 결단과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때 뒤로 미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김규식의 전기를 처음으로 쓴 이정식(李庭植) 교수에 의하면,
고아원과 학당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규식은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대목 일부를 옮겨본다.
비록 언더우드 부부의 총애를 받았다고는 하나 고아의 처지가 된
어린 규식이 행복할 리가 없었다.
19세기 말엽이라면 아직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한국 사회에서
외국 선교사가 경영하는 고아원에서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심리적 억압과 고통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중략) 그리고 사회신분을 중시한 사회에서
고아원의 신세를 진다는 것은 어린아이들 간에도 많은 경멸과 천대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을 것이다. (중략)
우사는 때때로 고아원을 뛰쳐나와 잃은 부친을 찾는다고 서울 시내를 헤매곤 하였다는데 이는 물론 부친을 흠모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나 심리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모 품에서 티 없이 자라야 할 10대에 부모를 잃고 외국인 밑에서 생활한다는 것,
그것도 남달리 영특하고 그러기에 더욱 예민했을 그에게는 때때로 소외감과 열등의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보통 아이들과 달리 외국인 밑에서 고아원 생활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10대 사춘기에 흔히 나타날 수 있는 반항심과 저항감을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1890년대 후반부터 언더우드 부부와의 관계가 점차 벌어지기 시작하여
종국에는 언더우드의 품을 떠나 해외 유학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여러 요인으로 규격에 짜인 학당 생활과 교회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갈망했을 ‘10대의 반항아’ 김규식에게 세례는 그렇게 절박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세례가 도미 유학 이후로 미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17세가 되던 1897년 김규식은 도미 유학길에 오른다.
그해 가을학기부터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에 있는 로녹대학(Roanoke College) 예과에 입학하여 향후 6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그가 누구의 도움과 알선으로 이역만리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단지 언더우드와 서재필(徐載弼)의 도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 증언에 따르면 언더우드의 도움보다는 서재필의 도움이 더 컸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철이 들며 김규식과 언더우드 부부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생겼기 때문에 언더우드가 김규식의 유학을 적극 도와주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서재필이 1896년 귀국해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창설하고
젊은이들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장했던 점,
그리고 마침 김규식이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일을 잠시 보았던 점 등에 유념할 때
서재필의 권유와 알선으로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와 다른 주장, 다시 말해 서재필의 도움보다는 언더우드의 추천으로 유학이 가능했을 개연성도 간과할 수 없다.
아무튼 미국으로 건너간 김규식은 열심히 공부하며 새로운 세계를 접했다.
그가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잘했는가는 그의 성적표에 잘 나타난다.
1897년 가을학기 수강한 예과 과목 성적을 보면
영어 88점, 초급 라틴어 94점, 역사 87점, 영독 94점, 수학 88점, 상업수학 80점,
영작 89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1898년 봄학기 성적은 더욱 우수하여 영어 92점, 라틴어 91점과 96점, 역사 94점,
수학 97.7점으로 나타나 있다. 이 같은 우수한 성적으로 그는 더 이상의 예과 과정이 필요없다고 인정되어 그해 가을학기부터 본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미국 대학생활은 학교 성적을 올리는 데에만 머물지 않았다.
유학 3년이 지나면서 미국인 학생들과 폭넓은 교제를 갖는 한편, 대학 서클 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뜻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역동적인 대학생활을 하였다.
즉 학내 웅변클럽인 데모스테니언 문학회(Demosthenean Literary Society)를 통해 미국 및 세계정치 문제 토론에 참가하여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서클활동에 얼마나 활동적이었는지는 그가 이 서클 회원으로 참가한 지 1년도 안 된 1898년에 서클의 통신서기로, 1900년 1월에는 기록서기로, 같은 해 11월에는 부회장을 거쳐 1902년 1월에 회장에 피선된 사실이 잘 말해준다.
그가 이렇듯 회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실함 외에 특히 연설을 잘했던 것이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00년 6월에 개최된 강연대회에서 1등을 수상했으며, 1901년 5월에 있었던 전교 강연대회에서 2등을 차지하는 등 연설가, 웅변가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학생 기고가, 평론가로서의 명성도 높아갔다. 김규식은 로녹대학에서 출간하는 잡지 「로녹 콜리지언」(Roanoke Collegian)에 “한국어”(Korean, 1900년 5월호), “동방의 서광”(The Dawn in the East, 1902년 2월호)이라는 제하의 글을 기고하여
‘코리아’를 미국 사회에 알리는 한편, 현재 한국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는 글을 여러 차례 기고하였다.
이정식 교수에 의하면 이 글들은 마치 한 편의 시와 같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시사평론적 성격의 글 “동방의 서광”에서 김규식은 “서양에서는 근대문명이 꽃 피고 있는 반면에 동쪽은 암흑의 밤이 깊이 들어 있다.”라고 하며 “동양의 거목들은 한때 은빛의 이슬로 빛났으나 지금은 겨울의 깊은 눈에 싸여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다. 그러나 깊은 밤은 곧 지나갈 것이고 한국에도 서광이 비칠 것이니 도둑들은 물러갈 것이고 나라의 부를 약탈하는 무리들이 없어질 것이며 필경은 외국의 횡포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민족이 처한 현실의 어려움을 직시하면서도 조국을 향한 애정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평론가 및 학생 논객으로서 김규식의 자질과 면모는 1903년 5월 「로녹 콜리지언」에 “러시아와 한국 문제”(Russia and the Korean Question)라는 제하의 시사 논문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이 글에서 김규식은 머지않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며 당시 극동의 사정, 곧 러시아와 일본과 중국의 정치, 역사적 역학관계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와 동시에 전쟁의 전운(戰雲)이 감도는 가운데 어려움에 처한 한국의 사정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100년 전 극동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으며, 동시에 국제문제에 대한 청년 김규식의 해박한 식견을 엿볼 수 있다.
먼저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으로 그는 “러시아는 1억 2900만의 건장하고 왕성하고 거칠고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야만적이기까지 한 인구로부터 선발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상비군(常備軍)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아주 영민한 정치가들과 예리한 외교관들로 구성되어, 충성하는 신민을 보호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종족들을 통제하며, 국제 분쟁에서는 종종 경쟁 국가들을 속여 넘긴다.”라고 하면서 이에 반해 한국의 사정을 아래와 같이 비통한 심정으로 술회하였다.
한국은 3600년 전에 역사가 시작됐음에도 현재까지 비활동적이고 보수적이다.
위대한 이웃인 중국으로부터 문명을 수용한 이래로 한국은 학문의 전당이었으며,
용맹한 무인의 고향이었다. 공자의 철학과 석가의 가르침으로부터 유래한
조상숭배라는 유력한 종교의 영향으로
한국인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옛 어른들을 능가함은 잘못이라는 생각과 선대에 위대한
인물이 있은 후에는 그를 능가하는 인물은 다시는 출현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젖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한국의 발전이 왜 더딘지를 쉽게 알 수 있다.
3000년 동안 즉 여러 왕조의 통치기간 동안 한국은 독립국이었으나,
15세기 초 남쪽의 이웃 나라와 동맹의 필요성을 느꼈고 어린애같이 보호를 청하였다.
그 결과 1866년(?)까지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
이웃나라인 남쪽의 중국과 북쪽의 러시아와 비교할 때,
한국은 지도상의 한 반점에 불과하고, 9만 2000평방마일 면적의 반도이며,
현재 타락하고 무분별하며 불성실한 정부의 절대통치를 받는 비활동적이고 비진취적인 1500만의 주민을 가지고 있다.
지난 3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외국과 교섭을 거부했으므로 ‘은자의 나라’라고 불렸다.
한편 이 글에서 그는 일본과 중국에 대해서
“일본은 최근 적극적이며 대국의 대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단지 48년 전 미국 해군의 페리 제독이 그 자물쇠를 부숨으로써 문이 열리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일본은 강한 해군과 육군을 가진 열강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 일본은 그 주변 지역에 러시아의 침투를 막을 준비가 되어 있다.
한편, 중국은 동아시아와 그 문명의 모태임을 자랑하지만 한국처럼 국가 쇠망의 길에 빠져 있고 국토를 외국의 전쟁터로 내어주고 있으며,
자신을 세계인의 탐욕을 위한 고기 덩어리로 만들어주고 있다.”라고 하며
향후 한국의 운명은 러시아와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일본 사이에 달렸다고 규정하고 종국에는 일본에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예견하였다. 그 이유로 “러시아는 한국을 단지 원할 뿐이지만 일본은 한국을 자신들의 잉여 인구와 에너지의 배출구로 삼는 등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라고 진단하였다.
이 같은 그의 예견은 불행하게도 역사적 사실이 되었으니,
세계 정세를 바라보는 청년 김규식의 예리한 안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위의 글 끝부분에서 김규식은 향후 한국의 국운은 러일전쟁의 결과에 따라 운명 지워질 것이라고 하면서 당시 상황으로는 한국의 운명이 러시아보다는 일본에 넘어가는 것이 “비록 소유물과 권리를 빼앗기지만 입고, 먹고, 교육받고, 평온하게 제국의 훌륭한 신민이 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어 주목된다. 이 부분을 자세히 보기로 하자.
한국 사람은 일본에 속하는 것이 좋으냐 아니면 러시아에 속하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한국인은 결국에는 둘 중 어느 한 나라에 속할 것이므로 이 불쌍하고 불운한 민족이 소위 독립국이라는 현재의 정부 체제 아래서 신음하며 지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러시아의 손아귀에 있는 한 진보의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마지막 날까지 러시아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노역을 강요당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비호 아래에서는 한국인들은 비록 소유물과 권리를 빼앗기지만 입고, 먹고, 교육받고, 평온하게 제국의 훌륭한 신민이 될 것이다. 만약 불행한 한국이 이제라도 각성한다면, 박두한 압제를 곧 벗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일본은 한국을 기꺼이 이웃으로 대할 것이다.
당시 일본에 대한 이와 같은 긍정적인 인식은 비단 김규식만이 보인 것은 아니었다.
이 글에서 다 거론할 수 없지만, 당시 한국의 관리들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에 주재하던 서양 외교관과 선교사들의 인식도 예외 없이 러시아보다는 일본의 승리가 한국의 장래에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한국을 그들의 식민지로 강점하였다.
김규식의 미국 유학시절 생활 중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 신앙생활이다.
로녹대학 재학시절 어느 교회를 나갔는지를 말해주는 자료는 현재 없다.
그러나 그의 교적부에 1897년에 수세(受洗)를 받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로녹대학 재학시절에 세례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미국 유학시절 교회를 나갔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후술하거니와 1904년 귀국 후 여러 유혹을 물리치고 언더우드 비서역할을 하며
새문안교회의 집사와 장로로 봉사한 것이며,
1930년대 중국 망명시절 신변의 안전 등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도 교회 출석을 했던 점, 그리고 해방 후 귀국하여 역시 교회생활을 열심히 했던 점 등으로 보아
미국 유학시절 교회 출석을 열심히 하며 신앙생활을 돈독히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註)
1 김규식의 생년월일에 대해서 다소 기록의 차이가 있다. 〈淸風金氏 世譜〉에는 1881년 1월 27일(庚辰 2월 28일)로 되어 있고[이정식, 『김규식의 생애』(신구문화사, 1974) 11쪽], 〈자필이력서〉에는 음력 庚辰年 2월 28일(양력으로 하면 1881년 1월 29일)로 되어 있어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2 L. H. Underwood, 이만열 옮김, 『언더우드: 한국에 온 첫 선교사』(기독교문사, 1990), 55-56; 이정식, 위의 책, 13-14.
3 1886-87년경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에는 당시 고아학교 교사(校舍)로 추정되는 건물을 배경으로 고아원 원생과 훈장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윤경로, 『새문안교회100년사(개정증보판)』(새문안교회 역사편찬위원회, 2019), 96.
4 이 사진은 1887년경에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으로 본 새문안 100년』(새문안교회, 1987)
5 이정식, 앞의 책, 14.
6 주요한, 『安島山全書』(삼중당, 1963), 23-26; 윤경로, 『새문안교회100년사』, 120 참조.
7 윤경로, 『새문안교회100년사』, 119-120.
8 윤경로, 『새문안교회100년사』, 148-150.
9 이정식, 앞의 책, 16.
10 이정식, 앞의 책, 18. 김규식이 언더우드의 양자와 같은 대우를 받다가 1890년 9월 언더우드의 첫 아들이 태어난 후부터는 자연히 소원해졌을 것으로 보아 이러한 추정을 더해준다.
11 이정식, 위의 책, 21-22.
12 현재 로녹대학에는 김규식이 대학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던 글이 보관되어 있다. 필자는 새문안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 편찬작업을 하면서 로녹대학에 서신을 보내 김규식이 로녹대학 재학 중 기고한 글을 받아 『새문안문헌사료집(1)』(1987)에 실었다.
13 이 글의 전문은 『새문안문헌사료집(1)』에 실려 있다. 이 글에 대한 이하의 인용 역시 해당 사료집에 따른 것이다.
14 이 시기 재한 미국인 중 대표적인 친한적 인물인 헐버트(H. B. Hulbert)도 동일한 입장이었다. 윤경로, “헐버트의 한국에서의 활동과 한국관”, 『한국근대사의 기독교사적 이해』(역민사, 1992), 224-225.
15 윤경로, 『새문안교회10년사』, 188-189.
윤경로|한국 근대사를 전공하였다. 한성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동 대학의 명예교수이다. 저서로 『105인사건과 신민회 연구』, 『한국 근현대사의 성찰과 고백』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