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넥센의 기세가 무섭다. 시리즈 후반 폭발적인 상승세를 보이며 와일드카드로 올라온 기아를 가볍게 일축하더니,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시즌 내내 투타에서 탄탄한 안정세를 유지하며 11년 만에 가을야구에 등장한 한화마저 3:1로 물리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러다 플레이오프에서 SK마저 꺾고 ‘두산 나와!’ 하는 건 아닌지 기대가 된다.
사실 올 시즌 개막 때만 하더라도 넥센은 하위권으로 예상되던 팀이었다. 공금 횡령으로 구단주가 구속되고 선수 이적에 따른 뒷돈 거래로 구설에 오르는 등 팀 분위기가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돌아온 4번타자 박병호와 2년생 징크스를 완벽하게 탈피한 ‘바람의 손자’ 이정후 등 몇몇 스타들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모기업도 없는 구단이 내년 시즌에는 어떤 변수에 부닥칠지 여전히 걱정이다.
해마다 시즌이 끝나면 포로야구 팬들은 저마다 그해의 명장면을 하나씩 간직하게 된다. 두산의 원년 팬인 내게는 포수 양의지의 빛나는 프로정신이 올해의 명장면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듯싶다. 지난 5월 22일 대전에서 벌어진 두산 대 한화 경기 때였다. 1회 2사 상태에서 한화 투수 김재영은 잇달아 볼넷을 허용하여 실점 위기에 몰렸다. 타석에는 5번 타자 양의지가 들어섰다. 볼카운트 1:1 상황. 그런데 노련한 포수 양의지의 눈에 상대편 투수의 투구 폼이 아무래도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양의지는 김재영이 그 전 경기에서도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야, 올라가봐.”
양의지는 타격자세를 풀고 상대편 포수 최재훈에게 조언했다. 투수가 몸 상태가 좋지 않거나 심리적인 동요를 보일 때면 포수가 올라가 상태를 점검해보고 긴장을 풀어주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최재훈은 상굿도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고, 이를 눈치 챈 양의지가 비록 적군이지만 후배 포수에게 조언을 해준 것이다. 최재훈은 그제야 마운드로 올라가 투수 김재영과 대화를 나누며 투구동작을 점검하고 내려왔다. 꼭 그 덕분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김재영은 양의지를 3루수 앞 땅볼로 잡아내고 1회를 무사히 넘겼다. 그리고 그날 경기도 한화가 8:7로 승리했다. 구장을 가득 메운 한화 팬들은 1위 팀 두산을 꺾은 경기결과에 환호하며 가을야구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다.
두산 구단과 코칭스태프와 선수들과 팬들에게는 그날 양의지의 행동이 이적행위로 비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골수팬인 나를 비롯하여 아무도 양의지를 비난한 사람은 없었다. 두산베어스의 홈페이지에는 프로야구의 동반 발전을 위해 비록 상대팀이지만 적절한 조언을 해준 양의지의 진정한 프로정신에 오히려 박수를 보내는 팬들의 글이 가득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속사정이 있었다.
올해부터 한화 감독을 맡은 한용덕은 작년까지 두산의 수석코치로 활약했었다. 두산 팬들은 두산에서 활약하다가 다른 팀의 코칭스태프나 선수로 이적한 이들을 응원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두산에 있다가 NC로 이적한 김경문 감독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한용덕은 한때 야구판을 떠나 트럭 조수를 비롯하여 온갖 궂은일을 하다가 야구선수로 복귀하여 성공을 거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어느 팀으로 가든 두산 팬들의 존경심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덕장으로 평가되는 한용덕 감독은 올해 처음 지휘봉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꼴찌 후보였던 팀을 시리즈 성적 3위로 끌어올리는 저력을 발휘하여 신롸를 저버리지 않았다.
두산 팬들이 모두 알고 있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때 마스크를 쓰고 있던 최재훈 한화 포수 역시 두산에서 이적한 선수다. 포수로서 투수 리드뿐만 아니라 타격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지만 두산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다. 리그 최고의 포수인 양의지의 그늘에 가려 있기 때문이었다. 최재훈이 두산에 있을 때 야구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다른 팀에 가면 당장 주전으로 뛸텐데 하며 아쉬워했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양의지다. 자신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한 최재훈에게 적잖은 마음의 빚을 느끼고 있었을 터, 그런 후배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준 양의지의 태도야말로 진정한 야구팬이라면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페어플레이 정신인 것이다.
올해 양의지는 본연의 투수 리드뿐만 아니라 타격에서도 절정의 기량을 꽃피워 한때 수위타자에 오르기도 하는 등 두산 팬들에게 기대 이상의 성적을 보여주었다. 한국시리즈가 끝나면 FA규정에 따라 최소 100억대의 계약금 및 연봉을 받을 게 확실하다. 두산에 남을 수도 있고 이적할 수도 있지만, 양의지가 어느 팀을 선택하든 두산 팬들은 계속 그를 응원할 것이다.
올해 두산은 시즌 내내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며 일찌감치 매직넘버를 완성하고 한국시리즈에 직행하여 SK와 넥센의 플레이오프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두산 팬들은 이미 올해의 성적에 만족하고 있다.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면 더욱 좋겠지만, 혹 일이 꼬여 지더라도 크게 낙담하지는 않을 것이다. 야구장에 응원을 나오면 팀이 졌을 때도 끝까지 남아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도 두산 팬들의 미풍 가운데 하나다. 팀이 지더라도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미덕, 그게 건강한 팬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첫댓글 야구와 멀어진지 오래..
오늘 이 글을 계기로 해서,
나도 야구에 슬슬 재미 좀 붙여볼까....
우선 우리 대구고등학교가 요즈음 슬슬 부상하고 있다고 하던데...
거기부터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