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영등포역 6번 출구로 나와 영등포 역전파출소 주위로 걸어가면 전혀 다른 세상이 나타난다. 속칭 ‘영등포 쪽방촌’이다. 지난 7월 12일 오전 11시, 영등포역 6번 출구 옆 쪽방촌을 찾았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부분 지역의 수은주가 섭씨 30도를 넘은 날이었다. 좁은 골목길에 슬레이트 지붕을 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골목 양옆으로는 다시 더 작은 골목이 있었다. 그 안에는 허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 수십 개 보였다.
파리가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골목에선 쿰쿰하고 역한 냄새가 풍겼다. 날씨가 더운 탓인지 문을 닫아 놓은 방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알록달록한 그물망이 드리운 방도 있었다. 대낮인데도 어둡고 침침한 쪽방에는 누런 러닝셔츠만 입은 채 누워 있는 남성의 모습이 보였다. 좁은 골목길에 물을 뿌리고 빗자루로 쓸어내는 여성도 보였다.
“밥 먹고 가. 저기 가서 뒤에 줄서 있으면 밥 줘.” 회색 캡 모자를 쓰고 허리가 구부러진, 7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내게 말했다.
영등포 쪽방촌에서 쪽방 5개가 있는 건물 2채를 소유한 주인의 도움을 받아 한 쪽방에 들어갔다. 텅 빈 쪽방은 후끈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마자 이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언뜻 보기에도 바깥보다 5도는 높은 듯했다. 벽면에 달린 선풍기 한 대로는 역부족이었다. 바닥에 놓인 얇은 꽃무늬 이불이 더워 보였다. 무덥고 습한 쪽방보다 먼저 눈에 띈 것은 방의 크기다. 대학가의 고시원이 좁다는 것을 표현할 때 흔히 두 팔을 벌리면 양쪽 벽면이 닿는다고 한다.
쪽방은 차원이 다르다. 이곳에서는 팔 하나도 제대로 펼 수가 없다. 천장에 머리가 닿아 똑바로 일어설 수도 없다. 누워서 팔의 위치를 바꾸려면 팔을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들어 움직여야 한다. 성인 남성 한 명이 들어가면 아무 것도 더 들어갈 공간이 없다. 공간이 워낙 작으니 안에 든 것도 별게 없다. 화면이 손바닥만 한 TV 한 대와 작은 이불이 전부다. 뒤척일 때도 제자리에서 자세만 바꿀 수 있다. 이불이 몸 크기와 같아 이불에서 구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빈방에 깔린 이불에 누워 보니 천장의 형광등에 눈이 희미해졌다. 방이 아니라 ‘관(棺)’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쪽방’은 말 그대로 ‘쪼개어 쓰는 방’이라는 뜻이다. 집의 한 부분인 방을 또 쪼개 방을 만들었다. 쪼갠 방에 한 명씩 들어가 잠을 잔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널리 알려진 쪽방은 도시 빈민의 마지막 잠자리로 기능해 왔다.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과 영등포본동, 문래동에 걸쳐 있는 영등포 쪽방촌은 서울에서 세 번째로 큰 쪽방촌이다. 가장 큰 쪽방촌은 용산구 동자동에, 다음은 남대문로 일대에 있다. 거주자가 2000명이 넘어 인위적으로 둘로 쪼갰지만 두 쪽방촌은 사실상 같은 권역이다. 다음으로 큰 쪽방촌이 영등포 쪽방촌이다.
540개 쪽방 600여명 거주
영등포 쪽방촌은 영등포역 인근에 있는 사창(私娼)가가 모태다. 6·25전쟁 직후 서울 도심 기차역 주위로는 사창가가 자연히 형성됐다. 저마다 사연을 품고 모여든 윤락녀들은 벌집 같은 방에서 먹고 자며 손님들을 상대했다.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이곳에 있던 사창가는 규모가 크게 줄었다. 영등포구에 따르면 7월 현재 영등포 쪽방촌에는 총 67동의 쪽방 건물이 있다. 방 개수로 따지면 540개가 넘는다. 여기에 사는 인원은 602명으로 이 중 약 500명이 상시 거주자다. 나머지 100명은 매일 방세를 내며 오가는 일시 거주자다. 50대 이상 남성이 가장 많고, 60대 이상 고령자가 다음을 차지한다. 여성도 60대 이상의 고령자가 많다. 20대 이하는 거의 없다.
쪽방촌 거주자들 가운데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많다. 영등포 쪽방촌 거주자 602명 중 53%인 341명이 기초생활수급자다. 이 중 140명 이상은 신체에 장애가 있다. 매달 20일 돈을 받아 월세로 20만원가량을 납부한다.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닌 거주자들은 근처 인력시장을 통해 일을 해 모은 돈으로 방세를 낸다. 이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 ‘일세’다. 다달이 ‘월세’를 낼 만한 목돈이 없는 일용직 노동자들을 위해 생긴 납부방법이다. 일세는 대략 7000~8000원 선에 형성되어 있다.
“여긴 우리들한텐 천국이여”
여름철 쪽방촌 사람들에게 가장 고역은 폭염(暴炎)이다. 외부 벽면에 접한 쪽방에는 창문 시늉을 한 것이 있지만, 그나마도 그물코가 촘촘한 방충망에 가려 통풍이 되지 않는다. 조금 나은 방은 선풍기라도 있다. 하지만 창문이 없는 쪽방은 말할 필요가 없다. 날이 더우니 서로 얼굴 붉힐 일도 늘어난다. 더운 방에 다닥다닥 붙어 살다 보니 마찰이 빈번하다. 뜨거운 한낮에 주민들은 주로 밖에서 생활한다. 영등포역으로 가는 길에는 쉼터가 있다. 하지만 대다수 주민들은 쪽방촌 길 옆 블록에 걸터앉아 쉰다.
제대로 씻을 공간도 없다. 두 건물 사이로 난 미로처럼 좁은 길을 따라가니 물내림 밸브가 없는 흰색 소변기가 보였다. 지린내가 진동하는 변기를 지나 들어가니 5명이 함께 쓰는 공용 공간이 나왔다. 수도꼭지 하나에 시멘트 바닥에 빨간 대야가 놓인 화장실에는 날벌레가 날아다녔다. 목욕은 공용 공간의 수도꼭지를 이용해서 한다. 사방이 뻥 뚫린 곳이라 속옷을 입고 다녀야 한다. “물은 잘 나와요. 그래도 여름에는 씻을 때뿐이야. 저렇게 지붕이 함석인 집은 엄청 더워. 기와지붕도 더운데. 주인이 나쁜 사람이야.” 쪽방촌 수도시설은 괜찮냐는 질문에 한 70대 남성이 대답했다.
대부분의 쪽방에 취사시설은 따로 없다. 거주자들은 주로 밖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무료 급식을 주는 곳은 많다. 7~8곳의 급식 제공 기관이 돌아가며 점심·저녁을 제공한다. 아침을 주는 곳도 한두 곳 있다. 요일별로 쉬는 곳이 달라 밥을 굶을 염려는 없다. 때에 맞춰 줄을 서기만 하면 된다. “여기는 빈민들한텐 천국이여. 밥 공짜로 주지. 약 공짜로 주지. 이발도 공짜에 도시락도 줘.” 푸른 캡 모자를 쓰고 회색 남방을 입은 희끗희끗한 머리의 60대 남성 김모씨가 말했다. 그는 “14년 동안 영등포 쪽방촌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김씨의 말처럼 영등포 쪽방촌에 몰려드는 도움의 손길은 많다. 대표적인 것이 종교단체들이다. 영등포역 6번출구를 나와 좌회전해 걷다 보면 ‘토마스의 집’이라는 노숙인 무료급식소가 있다. 이 일대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몰려드는 급식소다. 천주교 단체가 운영한다. 염수정 추기경이 영등포성당 주임신부이던 시절인 1986년 세웠다. 목요일을 제외하면 주 6일 점심을 제공하는 이곳에서는 하루 400인분이 넘는 급식을 한 끼 200원에 제공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광야교회에서 식사를 한 노숙인이 다시 토마스의 집에 와서 밥을 먹는, 이중 식사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고 한다.
낮 12시 점심시간, 무료급식을 받기 위해 모여든 쪽방촌 주민과 노숙인들이 줄을 길게 늘어섰다. 이날 메뉴는 쌀밥에 오이초고추장무침과 된장국, 멸치볶음과 김치 등이었다. 쪽방촌 거주민 조경호(63)씨는 “광야교회는 밥을 더 달라 해도 안 주는데 여기는 원하는 만큼 밥을 먹을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토마스의 집에서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요셉의원은 공짜 상비약을 주고, 화요일이면 무료 이발도 해준다. 영등포보건소 등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찾아가며 지원한다. 근처의 광야교회, 한국교회 등도 영등포역 고가다리 밑에 천막을 치고 쪽방촌 주민들과 노숙인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이 때문에 점심시간이면 영등포역 주위 급식소에는 각지에서 노숙인들이 몰려든다.
이동식 급식소도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이면 영등포 쪽방촌을 찾는다. 대한성공회가 운영하는 급식단체인 ‘성공회푸드뱅크’의 이동식 급식소다. “차 온다!” 도시락을 기다리던 쪽방촌 주민 70여명이 일사불란하게 두 줄로 늘어섰다. 한 줄은 빵 줄, 다른 한 줄은 밥 줄이다. 이날 도시락 반찬은 닭고기고추장볶음과 양파장아찌, 김치, 김이었다. 하얀 스티로폼 용기에 가득 담긴 따뜻한 쌀밥도 함께 주어진다. 이날 푸드트럭은 평소보다 40분가량 늦은 오후 3시40분경에 쪽방촌에 도착했다. 각 50인분씩 준비된 도시락과 빵은 5분 만에 동이 났다. “아 X발, 한발 늦었네.” 트럭이 떠나고 뒤늦게 도착한 남성이 욕설을 내뱉었다. “좀 일찍 오지.” 푸른색 눈화장을 진하게 한 50대로 보이는 여성이 안타까운 듯 말했다.
무료 급식을 타기 위해 외부에서 발품을 팔아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올해 83세인 여성 A씨는 매주 화·금요일 오후 3시면 무료 도시락을 받기 위해 대림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와 3시간을 기다린다. A씨는 무료로 도시락을 타가면서 되레 쪽방촌 주민들에게 역정을 냈다. “젊어서부터 일을 안 한 사람은 손이 맨질맨질해. 일 안 해도 여기저기서 먹을 거 퍼주니까 일 안 하고 먹기만 하는 거지.” A씨는 “여기저기서 옷도 주고 빵도 주고 하니 요즘 이 동네 사람들은 물건 아까운 줄 모르고 막 버린다”며 쪽방촌 주민들을 비판했다. 차기영 성공회푸드뱅크 실장은 “어떤 때는 줄선 사람들이 말도 못하게 많다”며 “매일 금방 동이 난다”고 했다.
쪽방촌 터줏대감 최복식 할머니
“이런 데는 처음 와보지? 허름한 집이지만 한 명 잠자기엔 괜찮아. 내가 여기 세 놓아서 자식 셋 모두 대학 보냈어.”
올해 82세인 최복식 할머니는 60년 넘게 영등포 쪽방촌에 살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난 최씨는 1945년 광복 직후부터 영등포에 살았다. 다리가 불편한 남편을 만나 2남1녀를 낳아 키웠다. 근처 영등포시장에서 생선과 야채 등을 팔았다.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다니느라 요통은 끊일 날이 없었다. 최씨는 알뜰하게 모은 돈으로 세들어 살던 집을 집주인으로부터 사들였다. 쪽방이 5개 달린 2층짜리 집이었다. 최씨가 서른 살 되던 해 크리스마스날이었다. 그는 “잊어버리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영등포 쪽방촌 한가운데 있지만 최씨의 방은 쪽방이 아니다. 냉장고와 TV, 옷장 등 방 하나에 있을 것은 다 있다. 선반처럼 쓰이는 김치냉장고와 식기세척기도 보였다. 나중에 쪽방촌의 집 한 채를 추가로 사들였다. 두 집은 앞뒤로 붙어 있다. 최씨는 안쪽 집의 방 2층에 살고 있다. 안쪽 집 1층에 있는 방 5개는 모두 쪽방이다. 사람 한 명 들어가면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갈 공간이 없다. 5개의 방 중 현재 2개가 비었지만, 바깥쪽 집에는 5개 방이 세입자들로 꽉 찼다. 간혹 추운 겨울에 빈 방은 ‘응급 쪽방’으로 이용된다. 서울시 산하 서울특별시사회복지회가 운영하는 노숙인복지시설인 ‘햇살보금자리’가 월세를 대신 내주고 추위로 생명의 위협에 처한 근처 노숙인들을 재워준다.
최씨는 “60년간 지켜온 영등포 쪽방촌을 떠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영등포역도 가깝고, 영등포시장도 가깝고, 내가 살기에는 편하다”고 이유를 말했다. 현재 받는 월세는 대부분 병원비로 들어간다. 5년 전에 중풍까지 겪은 최씨는 매일 서너 가지의 알약을 복용한다. “집 한 채 다 털어먹고 죽으려나 봐.” 집 앞 골목에 의자를 놓고 앉은 최씨가 말했다.
쪽방촌 인근에 몰려드는 노숙인을 보는 외부 시선은 곱지 않다. 대낮부터 막걸리에 취해 소리를 지르고 아무데나 누워서 자는 사람들을 반길 리 없다. 쪽방촌 뒤에는 보행자용 육교가 있다. 경인로에서 내린 영등포동 주민이 철길을 건너려면 쪽방촌을 지나 육교를 건너야 한다. 육교로 가는 길 주변에는 노숙인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고 있기 일쑤다. 육교로 오르는 계단 앞에는 폐지수거용 손수레와 쓰레기 더미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최근 이 육교에는 계단이 하나 더 생겼다. 2014년 서울시 주민참여 사업으로 선정된 ‘영등포역 횡단 보도육교 정비사업’을 통해서다. 새 계단을 통하면 영등포동 주민들은 쪽방촌을 덜 거치고 버스정류장이 있는 경인로로 나갈 수 있다. 쪽방촌을 피하기 위해 만든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실제로 이날 양산을 쓴 채 쪽방촌을 지나는 여성들은 종종걸음을 쳤다.
도시 빈민의 마지막 보금자리 ‘쪽방’에서도 고난을 이겨내기 위한 몸짓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첫댓글 이런 곳도 있군요. 섬기시는 분들이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