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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리더십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물론이고 그의 생가를 방문하거나 묘소를 참배하는가 하면 외형까지 흉내내고 있다. 딸인 박근혜 의원은 물론이고 이명박, 손학규, 고건 씨까지 가세한 형국이다.
1969년 외환위기가 왔다. (국내 상장기업 45%가 부실기업)
1974년 국가부도를 맞았다. 1979년 외환위기가 왔다. 1980년 외환위기는 계속됬다. 전두환이 일본에게 60억 달러 구걸해와 빚으로 빚의 이자나마 간신히 갚는 상황이었지만
언론은 진실을 보도하지 않고 박정희·전두환를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 구국의 영웅>이라 신격화만 했다.
1979년 박정희는 180억 달러, 세계4위 채무국, GDP 대비 55%가 넘는 빚에 시달리게 했고,
1985년 전두환은 550억 달러, 세계1위 채무국, GDP 대비 250%가 넘는 빚에 시달리게 했다. 언론은 이때 역시 국가부도 위기를 보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1997년에 1974년 이후 두번째 국가부도를 맞았다.
민주화 시대에도 언론은
외환 보유고가 38억 달러로 고갈되었지만
국가부도 하루 전날에도 국민들에게 한국경제는 문제 없다고 장담 했다. 이랬던 언론이.. 2000년 2/4분기 건국이후 최초로 순채권국에 입성하자 경제위기라고 보도하고,
2002년말 1200억 달러로 세계 4위 외환보유국에 입성하자 나라가 망한다고 보도하고, 2006년 대외 국가채무가 GDP 대비 30%로 건실하자, 경제위기라고 보도하고, 2006년말 대외 순채권이 900억 달러를 돌파하자, 나라가 망한다고 보도했다.
오늘도 언론과 국민은 박정희·전두환 시절이 좋았단다.
이들 때문에 우리가 먹고 산단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만들어 놓은 빚더미 부도열차에 마지막에 탑승해
역시 무능과 부패 속에 국가부도 시킨 김영삼.
저들에게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착취 당하고 세뇌 당한 50년 세월이 원통하고 안쓰러울 따름이다.
역사의 진실 앞에 입다물고, 지역주의와 부패의 늪에 빠져있는 한국경제학자들은 반드시 단죄 받아야 한다. |
◈ 숫자로 본 박정희시절의 경제 (랭킹 4위)
**성적을 조작하여 학급에서 1등이라고 하면 말이 되는가?
언론이 만든 허구에 근거하여
『5명이 주장하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고 한다.
박정희경제신화는 수구.보수세력들이 조작해 낸 허구일 뿐이다.
-다음의 글은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등의 글을 참고 했습니다.
***숫자로 본 박정희시절의 경제***
박정희시절(1961-80)에 년 평균 8.5%의 경제성장을 기록, 국민총생산은 약 4배로 커졌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1962년 87달러에서 1981년 791달러로 거의 열 배가 늘었다.
수출은 4천만 달러에서 약 210억 달러로 늘었다.
(경상대
[박정희시대의 소비자물가 상승률(cpi)]
박정희시절의 소비자 물가는 평균 년 16.5%의 상승률을 보였고
1974년 24.3%, 1975년 25.7%, 마지막해인 1979년에는 18.3%였다.
살인적인 물가상승이었다.
-
[박정희시대의 은행대출금리]
-60년대 은행대출 금리가 년17.5%-26%였다. 70년대는 15.5%-24%였다.
1965년도에는 금리가 년 30%까지 치솟았다. 이 역시 살인적인 수치이다.
-
[박정희시대의 수출현황]
그러나 결과는
-박정희시절; 233억불의 무역적자
-전두환시절; 8억불 무역흑자 (
-노태우시절; 132억불의 무역적자,
-김영삼시절; 366억불의 무역적자,
-김대중시절; 846억불의 무역흑자,
**이게 바로
(박정희정권은 언론과 합작으로 수출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나
엄청난 적자의 이야기는 속 빠진 체였다)
[박정권시절, 농민들 약 50%가 농촌을 떠나다]
-
박정희시절은 년간 약 50만 명씩 이농을 했다.
박정희정권 전기간에 걸쳐 농촌인구의 거의 절반이 도시로 떠났다.
농촌이 잘 사면 왜 이농을 하는가?
-1960년 농업인구가 58.3%였는데
미국에서 들여온 엄청난 잉여농산물로 살기가 어려워 그리고 농촌부채로
이농을 함으로 1975년에는 37.5%까지 줄었다. 1967-1976 년 사이에
67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를 떠났는데, 이는 한국전쟁동안의 인구이동보다 더 심대한 것이었다.
박정희시절은 수출을 위해선 저임금이 필요했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곡가 정책이 강행했다.
저곡가정책으로 농촌은 몰락해갔다.
-충남대 박진도교수의 말
(박정희시절은) 저임금으로 수출을 했다. 저임금으로 수출을 하자면 농촌에서 사람을 뽑아 내야 합니다.
그렇게 노동력을 충당했다. 그런 면에서 농촌을 잘 살게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박정희시절의 부동산]
63년 기준으로 하여 7년 후 강남의 부동산은 학동이 20배,
압구정동이 25배, 신사동이 50배로 올랐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같은 기간 서울의 중구 신당동은 10배, 용산구 후암동은 7.5배 상승했고,
전체적으로 서울의 땅값은 이기간 동안 14배나 폭등하는 혁명적 상황이었다.
-이래도
[도시빈민. 판자촌. 광주폭동]
-박정희시절에 살기 어려워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도시빈민층을 형성했다.
그들은 산동네에 판자촌을 이루어 살았는데 서울의 경우
도로도 없고,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 지역에 사람만 추방을 했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어 굶주리다 못해 대대적으로 저항에 나선 거였다.
20만 명의 철거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게 소위 광주폭동이라는 거다.
(민노당
너무나 배가 고파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자신의 아기를 삶았다고 한다)
[서민들이 삶]
1. 박정희시절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1. 임금은 미국노동자의 1/12 정도에 불과했고, 산업재해는 세계 최고였다.
1. 피고용인 가운데 1976년 74.9%, 1978년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태반의 근로자가 최저생계비조차 못 버는 상황이었다)
1. 60년대 초반 학교에서 점심을 굶은 아동수는 50%를 넘었다.
1. 1970년대 중반 서울인구의 1/3-1/5에 해당하는 100만-300만 명이 판자 촌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
1.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쫒겨 나든가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1. 서울 평화시장의 경우 17세 이하의 여성노동자 1만여 명이 하루 16시간 이상
1인당 1평도 안 되는 면적에서 최저임금의 1/5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혹사당했다.
[박정희시대의 경제성장률]
⊙ 단순 숫치상으로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은
⊙ 상대평가에서는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국:미,카,영,독,프,이,일,대)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하면
선진국에 갈수록 작아진다는 것을 참조하면
*
단 5년만에 대한민국을 IT강국, 전자제품강국, 생명공학의 강국으로 올려 놓았고,
수출 최대 그리고 흑자, 경상수지 흑자, 외환보유고 세계 4위로 올렸고,
한국의 영화산업을 세계 2위 수준으로 끌어 올렸고, 한류의 꽃을 피웠다.
*제주대
1위:
[
이 말은
말이고 (박정희숭배자들 이런 말을 많이 쓴다), 또
경제가 승승장구하여 드디어 세계 약 300개국 중에서 11위에 등극 한 것도
다
이런 주장의 80%는 거짓이다.
(다음의 경제학자
경제성장은 이미 1950년대(이승만시절) 후반부터 시동을 걸었다.
성장률이 57년에 7.6%, 58년 5.5%, 59년 3.9% 등을 기록하여 본격적인 성장가도에 들어섰던 것이다.
매년 50% 안팎으로 오르던 물가도 57년부터는 한 자리수로 안정되었다.
이승만정권이 붕괴되던 60년에는 성장률이 1.2%에 그쳤지만, 4ㆍ19혁명으로
사회혼란이 극에 달했다고 군사정권이 선전했던 61년에는 다시 5.9%로 뛰어올랐다.
또한 물가 역시 안정세를 유지했다.
**
(60년대 초반 학교에서 점심을 굶은 아동수가 50%를 넘었다)
처음 5년간은 부정부패이외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고,
한국경제가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베트남으로부터 돈이 들어오면서 좋아졌다.
말기에는 또 완전히 망할 정도로 몰락해 가고 있었다**
초기
1960년~1964(?)년의 연평균 GNP성장률은 5.5%로 박정희초기에는 별로 달라 진 것이 없었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 5만 명이 이 5년간 받은 수당은 1억3,000만 달라였다.
당시(60년대) 외화보유고는 3억 달라에도 미달 했으므로 한국외환 보유고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숫자였고, 또한 한국 총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거였다.
둘째, 박정희정권의 말기에는 경제는 거의 몰락상태에 있었다.
그 이후의 정권들이 잘했기 때문에
(다음은
경상수지는 사상최악인 41억5천만 달러의 적자를 냈고,
기름재고는 7일분 밖에 남지 않았고,
소비자 물가상승도 18.3%나 뛰었고,
외환보유고도 바닥을 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
MBC의 <5공화국>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
-경제학자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나아가 그것은 IMF 금융위기의 뿌리였다”
-고려대교수 이필상
**박정희시대는 물가상승, 집값 상승 등 정권에 불리한 내용은 언론에 내 보낼 수가 없었다.
물가상승도 물가조정이라는 말로 표현해야 했다.
박정희시절처럼 물가가 오르고 은행대출이자가 높으면
박정희가 권력을 잡고 바로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한게 아닙니다. 박정희가 1961년에 5.16으로 권력을 잡았죠. 그리고 나서 1965년까지 5년간 우리나라 경제 발전한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박정희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데 왜 5년동안은 아무 것도 한게 없을까요? 5년이면 현재 우리나라 대통령 임기인데 그 긴 시간동안 아무 것도 해내지 못했는데 과연 박정희가 경제적인 면에서 그렇게 대단하다고 말할수 있을까요? 그리고 박정희의 대단한 업적으로 알려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사실은 장면 정부에서 만든거였고 박정희가 그걸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후 정상적으로 장면 정권이 임기를 마쳤을 시기(1961년~1965년) 정도까지는 경제적으로 한게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장면보다 박정희가 낫다고 말할 근거가 없지요. 반대로 장면정부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해도 저시기에 박정희보다 못했을거라고 말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장면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1차 중점이 철강,시멘트 등을 비롯한 건설자재, 전력, 비료 등의 분야를 통항 불균형성장이론이었습니다.
막 그 계획들을 실행하려 하다가 박정희의 쿠데타로 무산됐죠.
그 후 박정희 정권에서 그것을 기안으로 경제성장의 기반을 닦게 되는 거죠.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한국 경제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개발계획의 수립은 외국기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유엔한국부흥단(UNKRA)은 네이산(Nathan)협회에 용역을 주었는데, 네이산협회에서는 1953년 3월 「한국경제재건계획」(일명 「네이산보고서」)을 발표했다. 한국인에 의한 경제개발계획은 1958년 3월 송인상 부흥부 장관의 발의로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수립 작업이 시작되었다.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장은 부흥부 장관이 당연직 위원장이었으며, 朱源 정위원이 위원장 서리를 맡아 실무작업 책임을 맡았다. 이 위원회에서 「경제개발 7개년계획」의 전반기인 「경제개발 3개년계획(1960~1962)」을 완성한 것이 1959년 3월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계획’ 의미를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의 의미로 오해하여 극히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제개발 3개년계획」이 시작되는 해인 1960년이 4개월이 지난 4월 15일에 이르러서야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다. 그러나 그 조차도 4.19혁명으로 실시되지 못했다.
장면 정권은 출범 직후인 1960년 9월부터 경제개발계획의 시행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미국측의 재정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10월4일 「한국의 경제개혁 비망록」이라는 외교문서를 미국에 수교했다. 장면 정권 하에서도 경제개발계획의 수립 작업은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추진하였다. 그런데 장면 정권의 출범하면서 부흥부 장관은 주요한, 김우평, 태완선으로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차균희 박사는 1959년부터 부흥부 지역사회개발위원회 위원장, 1960년 부흥부 기획국장 등을 역임한 뒤 장면 정권이 성립하면서 부흥부 차관이 되었다. 경제개발계획의 실무를 담당했던 산업개발위원회 책임자는 주원에서 재무부 이재국장을 역임한 바 있는 김종대로 바뀌었다.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으로 새롭게 추가된 사람은 임원택과 홍성유 등이었다.
1960년 12월 장면 정부는 국회 답변을 통하여 ‘자유당 정부가 수립해 놓은 3개년계획을 7개년 계획으로 연장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는 일방 장기개발계획의 입안과 집행․감독을 전담할 部의 신설을 고려 중에 있다.’고 했다. 이와같이 장면 정부는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을 교체하면서 이승만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수정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그 작업결과는 1961년 2월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으로 정리되었다. 이렇게 마련된 계획을 토대로 1961년 3월 내한한 찰스 울프 박사 일행에 대해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을 설명했다. 이 때의 브리핑은 김입삼이 맡았다고 한다. 찰스 울프 박사는 전체적인 찬의를 표하고 특히 민간 부문의 활기가 두드러지다는 점에서 성장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이후 장면 정부는 울프 박사의 견해를 듣고 참작하면서 경제개발계획을 가다듬었다. 이 작업은 4월말쯤에는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장면 국무총리는 1961년 4월 12일 참의원 본회의 답변에서 ‘정부는 외국의 전문가와 연구하여 강력하게 추진할 5개년계획을 세우고 실천이 되면 경제계에 대변모를가져올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변하였다. 이것은 4월 중에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거의 완성단계에 도달했으며, 그것의 성공 가능성을 장면 국무총리가 확신하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겠다. 4월말에 경제개발계획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한국측 대표가 5월 9일 미국 워싱턴의 AID를 방문하여 대한원조책임자 캐어리 과장을 만났을 때 경제개발계획안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 때 제출한 계획안은 2월의 「요강」보다 진일보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장면 정부가 수립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문서화되어 1961년 5월 12일 국무회의에 보고되었고, 동일자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부흥부 명의로 발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과 계획의 일부 내용은 당시의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현재 1961년 5월 12일자로 발표된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 원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과 1961년 7월 발표된 군사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과의 구체적 비교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유광호는 1961년 2월 민주당 정권에서 마련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과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비교․분석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 수립요강이 지니는 큰 의의는 3개년 계획서의 약점을 찾아 이를 보완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고, 그 후 군사정부의 경제발전5개년계획의 수립에 결정적 토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수립요강에서는 계획의 목적과 전략, 그리고 계획의 추진 방식 등에서 자유당 정부의 3개년 계획과 차별화를 보이면서 그 후에 등장하는 군사정부의 계획안과 유사성을 보였다. 무엇보다 ‘정부의 계획적 유도’ 등이 강조되면서 과거 ‘균형성장’ 전략에서 점차 ‘불균형 성장 전략’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신호를 보여주고 있다.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수립요강」에 대한 유광호의 견해는 타당하고 적절한 평가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장면 정권과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유사성에만 주목하고 있다. 오히려 장면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의의는 군사정권의 그것과 차이에 주목할 때 더 분명히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유광호는 장면 정권과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자유경제의 원칙과 정부 역할의 강조라는 점에서 일맥 상통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정부 역할의 구체적 의미에 대해서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장면 정부는 경제계획의 초점을 ‘정부 자체가 직접적인 정책 수단을 보유하는 부문’에 중점을 두고 ‘민간부문의 자발적 활동을 기대하며 이것에 필요한 유도정책’을 취한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군사정권에서는 자유기업원칙을 천명하면서도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추진방식을 채택하였다. ‘유도’와 ‘지도’는 의미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경제계획의 추진 방식과 절차에 있어서의 차이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면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 정권은 9개월 정도 존속한 단명의 정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혁명이라는 시대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진력을 다한 정권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9개월 동안 장면 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의 기조와 구체적 실행을 살펴 볼 때도 확인된다. 장면 정권에서 추진했던 국토개발사업, 경제개발5개년계획 등은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계승되어 시행되었다. 국토종합개발계획, 경제계획원과 건설부 설치 계획 등 장면 정권기에 구상되었던 정책 등은 군사정권에 의해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점은 장면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장면정권이 내세운 ‘경제제일주의’의 시정 방침은 당시의 심각한 경제적 위기의식의 소산이었다. 그리고 ‘질서와 발전’을 내세워 경제적 질서의 확립을 기반으로 한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정책은 경제의 민주주의 원칙을 천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장면 정권은 경제정책의 수립에 있어서 다양한 경제 주체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하고 그것을 조정․통합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의 중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종합경제회의를 개최하고 중앙경제위원회나 경제계획원과 같은 경제정책 기구를 설치 또는 구상하였다. 그리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구상은 각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산업개발위원회에 맡겼다. 그리하여 경제개발 계획에서도 정부와 민간 부문의 역할 조정에 유의했고, 국토건설사업의 시행은 민관협조 형식으로 추진하였다.
장면 정권은 경제 전문 관료 집단의 정책 결정 참여를 고무하고, 민간 부문의 경제 정책 건의를 폭넓게 수용하면서 경제정책을 구상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것은 ‘질서와 발전’을 경제정책의 기조로 채택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이승만 정권의 특권적 경제체제 하에서 잠복해 있던 각계의 경제정책 아이디어들이 자유롭게 개진되고, 이를 비교적 충실하게 수렴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시기에 구상되거나 실시되었던 경제정책이 이후 시대 경제정책의 토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경제적 질서’, 즉 절차와 과정의 민주주의적 원칙을 중시함에 따라 경제정책의 시행과 집행에 있어서 시간적 지체의 문제를 부득이한 한계로 감수하였다.
ps.
장면 국무총리는 1960년 2월 9일 추가경정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행한 시정연설에서 국토건설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실업자의 가동과 농촌 소득의 증대와 국토의 보존 및 사회자본의 증대를 연결하는 국토건설계획이 또한 그 조속한 실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미잉여농산물을 주로 한 400억환의 재원으로 연인원 약 4천 500만명을 동원하여 치산, 치수 등 공공사업을 하는 것이며, 한편 소양강 댐, 춘천강댐, 남강댐 등을 건설하는 것도 동 계획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 60-70년대는 누가 대통령 해도 고도 성장
"박정희 역대 집권자 중 내용상 4위"
1위 : 박정희 4,285명(28%)
2위 : 광개토대왕 2,257명(14%)
3위 : 세종대왕 1,93명 (11%)
4위 : 이순신 1,303명 (8%)
5위 : 김대중 807명 (5%)
위의 통계는 월간조선(3월호) 실린 한국 역사상 최고 인물 인터넷 여론조사이다. 박정희가 이순신 장군보다 3배 이상 더 존경받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아예 명함도 못비치고 있다. 참으로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다.
박정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독립투사를 토벌하는 일본군 장교가 됐다. 박정희는 당시 대구사범을 나와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는데도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본군 장교에 자원하여 일본에 충성하였다. 이런 민족반역자 박정희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보다 몇 십 배 더 존경받는 나라. 이 참담하고 비극적인 현실 앞에 나 역시도 이러한 나라의 국민의 한사람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수치스러울 따름이다.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박정희의 경제적 기여가 너무 커 친일, 남로당 가입, 유신독재, 인권탄압 등 온갖 죄악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한다. (경제적 기여를 가지고 존경여부를 따진다면 건설, 자동자, 조선산업을 일으킨 정주영 회장이 더 존경받아야 함) 도대체 박정희가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얼마나 기여를 했길래 박정희가 지은 죄악을 덮고도 남는지 한 번 조사를 해 보았다.
먼저 역대 우리나라 집권자들의 경제분야 종합성적표라고 할 수 있는 경제성장률을 분석해 보았다. 객관성을 높이기 기위해 경제성장률은 집권기간 연평균 실질성장률을 기준으로 했다. 통계청의 직원에게 물어보니 실질성장률이 한 나라의 실제 성장정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지표라고 한다.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은 전두환 9.3%, 박정희 8.5%, 김대중 6.8%, 노태우 7.0% 순으로 단순 수치상으로는 박정희가 2위이다. 그러나 각 집권자별 연평균성장률과 우리와 여건이 비슷하고 격차가 상대적으로 적은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국:미,카,영,독,프,이,일,대)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하여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대만은 10.0%, 주요국은 5.2%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이 기간 동안 비교적 소득수준이 높은 주요국의 성장률이 5.2%였다. 일반적으로 한나라의 경제개발에 시동이 걸리면 성장률이 일정수준까지는 급상승하나,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성장률이 둔화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주로 선진국으로 인 주요국 성장률 5.2%는 대단히 높은 수치이다. 뿐만 아니라 대만이 10%였다는 것은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국제적으로 엄청난 호황기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박정희는 18년이 넘는 집권기간 동안 연평균 8.5%의 성장에 그쳐 10.0%의 대만에 못 미쳤고 주요국보다 3.3% 높았다.
전두환은 집권기간(7년) 동안 연평균 9.3%의 성장률 기록하여 수치상으로는 역대 대통령 중 최고를 기록하였다. 전두환의 성장률은 대만의 성장률 8.5%보다 약간 높았고 주요국보다 5.7%나 높았다.
노태우도 연평균 7.0%의 성장률은 기록 수치상으로는 전두환에 약간 못 미쳤으나 주변국의 성장률과 비교할 때 전두환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김대중의 집권시기는 대만이 연평균 3.1%, 주요국이 2.0%에 불과해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 극심한 불황기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 기간동안 연평균 6.8%의 성장률은 기록하여 수치상으로는 1위의 전두환에 뒤졌으나 대만보다 3.7% 그리고 주요국보다 4.8% 앞서는 내용면에서 매우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이상에서 경제통계를 근거로 분석한 역대대통령의 경제성적표는 단순수치상으로 전두환 1위, 박정희 2위, 김대중 3위 순이다.
그러나 대외 여건을 감안한 내용적인 면에서 분석한 결과는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이다. 박정희가 “박정희가 대한민국 경제를 세우고 경제기적를 창조했다”라는 칭송을 듣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실적이다.
박정희 추종자들이 늘 내세우는 논리가 박정희 이전과 비교했을 때 박정희 때부터 급성장했다고 한다. 이승만 때의 4.1%의 성장률이 낮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종전 후 잿더미 속에서 맨 손으로 전후복구를 하고 나아가 4.1%의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평가 받아야 한다고 본다. 더욱이 역대 집권자의 재임기간 동안의 여건을 보면 이승만은 상상하기 힘든 전쟁피해 속에서 출발해야 했다.
전두환은 2차 석유파동의 후유증을 안았고, DJ도 IMF 환란을 극복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노태우와 YS 시절도 민주화의 과도기여서 절대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어떠했나. 우선 박정희는 이 전 정권의 전후복구와 빈약하기는 했지만 최소한의 국가기간산업의 유산을 받지 않았는가. 또 박정희 집권 초 우리 조상들의 흘린 피의 댓 가인 월남 파병으로 또 70년대에는 우리건설회사의 중동진출로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많은 달러가 국내에 유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도 언급했 듯이 60-70년대에는 국제적으로도 유례없는 장기간의 호황이 이어졌다. 또 박정희는 60-70년대 우리 군인들의 목숨의 댓가인 월남특수, 또 우리근로동자들의 피와 땀의 결실인 중동특수를 누릴 수가 있었다. 우리 군인들의 목숨과 우리 근로 노동자들의 피와 땀의 고스란히 박정희의 치적에 스며들었고 우리나라 경제발전이 오로지 박정희의 공으로 둔갑되었다.
그리고 당시 군부, 관계, 언론계 등에 포진해 있던 과거 친일분자들이 박정희를 우상으로 모시다시피하여 박정희는 누구보다도 좋은 여건이었다.
지금까지의 박정희 추정자건 비판자건 경제성장에 관한 한 박정희가 독보적인 존재로 알아왔다. 나 역시도 통계치를 분석하기 전에는 그런 줄로 알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통계치에 의한 분석결과를 볼 때 지금까지 박정희의 경제신화는 하나의 허상임을 알 수가 있다.
박정희 추종자들에게 이와 같은 통계분석 결과를 들이 대면 이 들은 처음에는 도무지 믿으려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통계치에 논리가 궁색하면 박정희에게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80불의 절대빈곤 속에서 이만큼 사는 것도 박정희 덕이라고 한다. 그럼 왜 이승만 정권이 잿더미 속에서 거의 맨손으로 전후복구를 하고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열악한 여건 속에서 발전소, 시멘트공장, 비료공장을 짓는 등 최소한의 기간산업을 육성하여 훗날 경제개발의 발판을 마련한 것에는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는가? 나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포스터 등을 이용해 늘 국산품을 애용하는 마음을 고양시켰고 또 당시 이승만 박사는 늘 소비재 원조에 치중하는 미국에게 생산재를 원조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박정희와 추종자들은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이승만과 장면정권을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으로 매장시키고 우리를 세뇌시켰다.
박정희 추종자들이 늘 써먹었던“80불의 절대빈곤 속에서 이만큼 사는 것이도 박정희 덕이다”라는 말 속에는 상당한 과장과 왜곡이 있다. 마치 국민소득 80불은 지금 생각하면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빈곤국을 연상시키고 이만큼 산다는 것은 지금의 국민소득 만 불을 연상시킨다. 보통 일반일은 경제학자나 전문가와는 달리 통계수치를 훤히 꿰차고 있지 않다.
박정희 추종자와 조중동이 늘상 박정희가 일으킨 경제를 YS와 DJ, 노무현이 말아먹었다는 것을 사실여부를 떠나 아예 기정사실화 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박정희가 죽은 79년 당시 국민소득은 지금의 1/8 정도인 1,600불 수준이었다. 또 박정희가 집권하던 61년 당시의 국민소득 82불은 당시 일본의 국민소득이 500불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절대빈곤의 최빈국 수준이 아니었다. 이토록 박정희의 경제신화는 실제보다 많이 과정되었다.
집권자별 실질경제성장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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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권 자 기 간 국내총생산(GDP) 한국연평균 비 교 대만연평균 주요국연평균
집권시/퇴임시 성장률(%) 대만 주요국 성장률(%) 성장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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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장면"53-"61 19,763/ 27,179 4.1 -3.2 -0.4 7.3 4.5
박정희 "61-"79 27,179/117,435 8.5 -1.5 3.3 10.0 5.2
최규하 "79-"81 122,412/122,412 2.1 -4.6 0.1 6.7 2.0
전두환 "81-"88 122,412/227,864 9.3 0.8 5.7 8.5 3.6
노태우 "88-"93 227,864/320,044 7.0 -0.1 4.3 7.1 2.7
김영삼 "93-"98 320,044/394,710 4.3 -1.9 1.3 6.2 3.0
김대중 "98-"03 394,710/547,839 6.8 3.7 4.8 3.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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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http://kosis.nso.go.kr/ 에서, "KOSIS > 자료출처별 검색(국제통계) > 국제금융통계,IMF > 국민계정" 순으로 선택한 후, 각종 경제지표를 나타내는 항목 중, 기준년도 불변가격 국내총생산으로 나라별, 기간별 경제성장률을 계산
2) 출처) 대만자료는 http://www.dgbas.gov.tw/, 行政院主計處 第三局
3) 국가선택-> 주요국 : 미국,카나다,독일,영국,프랑스,이태리,일본, 대만
4) 국내총생산(GDP)은 "95년도 불변가격임
5) 연평균성장율 = (집권년도불변가격수/퇴임년도불변가격)의 (1/집권기간(년))승
흔히들 달라로 환산한 1인당 국민소득이 한나라의 경제수준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과거 우리정부와 언론은 늘 국민들에게 그렇게 주지시켜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환율 변동 때마다 그 폭이 너무 커 실제 소득수준과 경제성장 정도를 나타내는데 문제가 있다. 김영삼 재임기간 중 집권당시인 93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7,811불이었는데 퇴임시기인 98년에는 7,355불로 오히려 400불 이상 감소했다. 그러나 불변가격을 기준으로 한 실질성장률은 연평균 4% 이상을 기록하여 재임기간 중 실제로 23%의 성장을 하였다.
박정희는 1인당 국민소득이 실질소득이 아닌 명목소득으로 계산할 때 82불로 시작하여 죽을 때인 79년 1636불을 기록하여 외형상 연평균 18%의 엄청난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60년 12월까지 달러 당 65원이었던 환율이 집권시기인 61년 130원으로 두 배 올랐다. 또 박정희가 죽을 때 환율이 485원이었는데 74년부터 6년간 지속되어온 이 환율이 두 달 후인 80년 1월에는 20% 상승한 580원이었고 연말에는 700원에 육박하였다. 다시 말해 박정희는 집권 직전 2배의 환율 상승으로 저평가 된 국민소득액($82)에서 출발하여 환율상승 전에 죽는 바람에(485원의 환율이 6년간 유지됨) 고평가된 국민소득액($1,636)을 유지한 상태에서 죽었다. 즉 박정희는 집권과 종료시 환율변동을 잘 타는 바람에 외형상 성장률이 엄청나게 증폭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실질성장율은 이 거품이 빠지는 바람에 8.5%에 그치고 주변국들과 비교할 때 내용상으로는 김대중, 전두환, 노태우보다 뒤지게 된다.
박정희 추종자들은 늘 “80불의 절대빈곤 속에서 이만큼 사는 것이도 박정희 덕이다”라는 말로 상징조작에 성공한 것이다. 유신독재시절 박정희를 우상화시키는 일이 성공의 지름길이었고 박정희에 불리한 비판은 있을 수가 없었다. 또 박정희가 죽은 후도 조선, 중앙, 매일신문 등에 의해(박정희 전기 연재를 통해) 박정희의 우상화가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집권자별 명목국민소득증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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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권 자 기 간 1인당국민소득 한국연평균 비 교 대만연평균 주요국연평균
집권/퇴임 증가률(%) 대만/주요국 증가률(%) 증가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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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장면 "53-"61 67/ 82 2.6 3.8 -2.1 -1.2 4.7
박정희 "61-"79 82/ 1,636 18.1 3.0 6.1 15.1 12.0
최규하 "79-"81 1,636/ 1,749 3.4 -14.5 -3.0 17.9 6.4
전두환 "81-"88 1,749/ 4,268 13.6 0.3 4.8 13.3 8.8
노태우 "88-"93 4,268/ 7,811 12.8 1.4 7.6 11.4 5.2
김영삼 "93-"98 7,811/ 7,355 -1.2 -3.6 -3.9 2.4 2.7
김대중 "98-"03 7,355/12,646 11.4 10.1 9.5 1.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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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은행, IMF / http://climate.snu.ac.kr/wrms/DATA/econo_data/main.html
재정경제부 / http://home.hometer.com/GNP.htm
재정경제부 / KOSIS > 온라인통계간행물 > 주요경제지표
대만자료는 http://www.dgbas.gov.tw/, 行政院主計處 第三局
주1) 원칙적으로 1인당 GNI를 기준(GNI자료 수집이 불가한 경우 GNP)
주2) 국가선택-> 주요국 : 미국,카나다,독일,영국,프랑스,이태리,일본,대만
주3) 집권기간 연평균소득증가율 = (집권년도국민소득/퇴임년도국민소득)의 (1/집권기간(년))승
■ 박정희 18년간 무역적자 233억불 (수출 638억불 수입 871억불)
다음에 박정희와 추종자들이 그토록 내세우는 수출입국 건설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박정희의 18년간의 통치기간 매년 38%의 매우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전두환 때 16%, 김대중 때는 6%정도로 수출증가율이 둔화되었다.
이승만 정권 때는 자료입수 가능기간인 57년 이후부터 61년까지 연평균 15%의 수출증가율을 나타냈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 보면 57년 2천3백만불이었던 수출액이 58년에는 천4백만불로 감소하다가 이후 집권종료 전 1년간 3천7백만불을 기록하여 연평균 48%의 수출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박정희의 38%를 능가하는 수치로서 박정희 집권이전부터 이미 급격한 수출증가의 기미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수출에 관한한 전두환씨가 지금도 큰 소리 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집권기간 중 대한민국 유사 이래 최초로 무역흑자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총 638억불을 수출하고 871억불을 수입하여 수출이 급격히 늘었지만 수입 또한 그 이상으로 늘어났다. 집권기간 중 무려 233억불의 무역적자를 기록하였고 집권종료시기인 79년는 150억불 수출에 203억불을 수입하여 한 해에만 53억불 적자를 기록하였다. 70년대 후반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이 지금도의 1/10수준임을 감안하면 79년 한해의 무역적자만 지금의 500억불 적자규모와 같다고 볼 수가 있다. 박정희 집권기간 무역적자 233억불은 지금의 2000억불 이상의 무역적자 규모에 해당한다. 그러니 집권기간 중 8억불의 무역흑자를 기록한 전두환씨가 자랑할 만도 했다.
후임 집권자 중 노태우가 132억불 적자, 김영삼이 366억불 적자를 기록했고 김대중은 불과 5년 동안에 846억불의 흑자를 기록하여 지금까지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정리하여 보면 이승만 정권 때는 수출신장의 싹이 보였고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높은 수출증가를 이룩했으나 수입 또한 그 이상으로 늘어나 당시 경제규모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큰 규모의 무역적자를 나타냈다.
다시 말해 박정희때 외형은 크게 늘었지만 결국 크게 밑지는 장사를 했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운을 타고난 박정희는 대일청구권 자금, 월남특수, 중동특수 등으로 무역에서 펑크 나는 것을 메웠고 이것도 부족하여 매년 많은 차관을 도입해야 했다. 이 빚은 결국 후임정권이 짊어져야 했다.
최초로 흑자를 기록한 전두환은 남는 장사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또 흑자규모를 늘리고 지속적으로 유지한 김대중은 크게 남는 장사를 하여 현재는 1500억불이 넘는 외환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서도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박정희는 외형만 키웠고 실제적으로는 적자 투성이었다. 그러나 항상 수출이 늘어난 것만 보도되고 또 이 것이 전적으로 박정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홍보되었다.
무역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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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권 자 기 간 수출액(100만$) 연평균수출 집권기간 적자/흑자 집권기간
집권/퇴임 증가률(%) 총수출/총수입 누계 국민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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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장면"57-"61 23/ 37 14.5 107/ 1,644 -15억$적 67-> 82
박정희 "61-"79 37/ 15,057 38.4 63,809/ 87,122 -233억$적 82-> 1,636
전두환 "80-"88 18,369/ 50,670 15.6 217,241/216,427 8억$흑 1,749-> 4,268
노태우 "88-"93 50,670/ 77,845 9.0 341,939/355,218 -132억$적 4,268-> 7,811
김영삼 "93-"98 77,845/138,673 12.2 583,240/619,917 -366억$적 7,811-> 7,355
김대중 "98-"03 138,673/169,850 4.1 771,981/687,309 846억$흑 7,355->12,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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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료출처: KOSIS > 자료출처별 검색(국제통계) > 국제금융통계,IMF(International Financial Statistics) > 무역
2) 수출/수입액 : 집권연월이 속한 분기를 기준으로 1년간 실적
3) 총수출/수입액 : 집권연월에 따른 분기별 실적을 감안하여 계산
■ 경제개발 치적은 박정희만의 전유물 아니다.
다음으로 도로 및 발전설비 등 건설부문을 살펴보자. 박정희 정권은 모든 매체를 통하여 과거 정권을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으로 매도하고 마치 모든 경제개발이 5.16 이후에 이루어진 것처럼 졌다고 선전해 왔다. 과연 그런가? 생각해 보라! 이 좁은 땅에 2차 대전 때보다도 더 많고 가공할 포탄과 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을. 또 남북을 막론하고 완전히 초토화된 이 땅을 다시 복구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가를. 이승만 정권은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37만 Kw의 발전량(지금 생각하면 보잘 것 없지만)을 확보하고 충주비료공장 및 문경시멘트 공장, 인천판유리 공장, 방직시설 등을 건설하여 국가기간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박정희 집권 이전 정권에서도 경제개발의 의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의 전후복구와 위와 같은 국가기간산업의 육성이 훗날 박정희의 경제개발에 귀중한 발판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전 정권을 부패하고 무능한 집단으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마워 했어야 했다.
이제 박정희 추종자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치적인 고속도로건설을 살펴보기로 하자. 박정희는 18년이 넘는 집권기단 동안 총 1,225Km의 고속도로를 뚫었다. 이 가운데 경부선 428Km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거의 제한속도가 시속 70Km인 2차선이었다. 그리고 후임정권은 24년간 1,566Km(2002년 기준)의 고속도로를 뚫었다. 이 시기 건설된 도로는 대부분 4차선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전 간을 8차선으로 또 호남선을 4차선으로 확장하는 등 많은 고속도로를 넓혔다. 이 모든 것들을 감안하면 박정희 이후의 정권이 박정희보다 2.5배 이상 고속도로를 건설했다고 볼 수 있다.
발전설비는 어떤가? 이승만 정권 때 37만Kw,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766만Kw의 발전설비를 증설하였다. 그리고 후임정권은 무려 4,795만Kw의 발전설비 증설하였다. 발전소를 짓는데 수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때의 발전설비는 다소 늘어나리라 짐작된다. 그렇더라도 박정희 이후의 정권이 박정희정권에비해 무려 5배의 발전시설을 건설하였다. 이상에서 보듯이 국가기간산업 건설 측면에 있어서도 박정희가 유독 두드러지는 면이 없다. 집권기간을 감안했을 때 후임정권 때보다도 훨씬 부진했다. 다만 통계수치상 이승만 정권 때가 박정희정권 때보다 낮게 나왔으나 이승만정부가 전쟁 후 최악의 여건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승만정권도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다.
집권자별 건설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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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권 자 기 간 고속도로신규건설(Km) 2차선환산시(Km) 발전량(신규,만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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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장면 "53-"61 0 0 37
박정희 "61-"79 1,225 1,643 766
전두환 "80-"88 305 1,010
노태우 "88-"93 57 771
김영삼 "93-"98 389 1,576
김대중 "98-"03 815 4,668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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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선환산시 4,668Km는 전두환부터 김대중까지 22년간의 합계임
출처) 한국도로공사
출처) 한국전력
출처) 통계청,「인구주택총조사보고서」각년도
출처) 통계정보시스템(KOSIS)
■ 추종자들이 그토록 향수를 느끼는 70년대의 생활수준
이제 마직막으로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유신독재, 인권탄압 등의 박정권의 죄악상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겠다. 이해를 돕기 위해 나의 경우를 예로 들겠다. 박정희 정권 말기인 70년대 말 두 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우리 집 세 식구가 살았다. 그 작은 방 옆에 손바닥만한 부엌이 있었고, 건너편에 냄새가 풀 풀 나는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당시 만해도 연탄을 땠는데 윗목은 온기가 가지 않아 겨울이면 걸레가 얼어붙곤 했다. 연탄불에 겨우 물 한바가지 정도 데워 그것으로 세수하고 머리감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때려 한참 말려야 했다. 동네에서 차 가진 사람이라곤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고 같은 학년의 친구 중 열명에 한두 명 꼴로 대학엘 갔는데 그나마 아버지가 은행원이나 고급공무원인 경우에나 가능했다. 보통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공소에 취직하거나 직업하사관으로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따끔 9급공무원이나 은행 등에 취직하면 동네에서 부러워했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잘사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손톱이 빠지도록 벌고 안 먹고 안 쓰고 하여 막내인 나는 형의 희생덕분에 (일찍 취직하여 내 학비를 댐) 70년도에 대학문턱에 가보는 행운을 누렸다. 78년도에 취직하여 받은 초봉이 15만원 이듬해 17만원으로 13%올라 좋아했는데 그 해에 정부에서 발표하는 소비자물가가 18%였다. 70년대에는 물가가 20% 이상 뛰는 경우가 많았는데도 TV는 물론 조선, 중앙 등 신문도 외형적인 성장만 강조할 뿐 급격한 물가상승 등 정부의 실정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못했다. 아마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권에서 물가가 10%만 상승했다면 박정희 추종자와 조중동이 온갖 선동으로 무능한 대통령으로 뒤집어 씌워 끌어내렸을 것이다.
내 말이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되었다는 사람들을 위해 실제 통계치를 조사해 보았다. 박정희 시절 1000명당 승용차 보유대수가 6.4대, 1인당 주거 면적이 2.5평, 2년제 전문대를 포함하여 대학 진학자수가 18만명이었다. 그런데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을 거쳐 김대중 집권 말인 2003년에 1000명당 승용차 보유대수가 204대, 1인당 주거 면적이 6.1평, 2년제 전문대를 포함하여 대학 진학자수가 60만 명이었다.
나는 70년대 초반 군대생활을 했는데 훈련소에서 동초근무를 선 후 새벽 2-3시경 잠자리에 들어서도 너무나 배가고파 뜬 눈으로 잠을 지새운 적이 많았다. 당시 쌀과 보리를 합쳐 1인당 하루 규정량이 732gr이었지만 정작 배식되는 밥은 몹시 적었고 부식이래야 콩나물국에 김치 몇 쪽이었다. 1주일에 한 번 돼지고기 국이 나왔는데 고기는 온데간데없고 비계덩이만 몇 개 떠 있곤 했다. 실무에 가서도 오히려 훈련소 생각이 날 정도로 배가 고팠다. 전방 오지일수록 정도는 더욱 심했다. 요즘 군대에서 배곯는 병사가 있는가? 요즘 우리생활 수준이 어떤가? 물론 요즘 취직이 안 되어 고통을 당하고 아직도 달동네에서 적은 수입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도 있지만 웬만한 아파트 단지에 가보면 차를 2대 이상 가진 집이 많고, 조금만 덥거나 추워도 냉난방시설 틀어놓고, 웬만한 가정에는 컴퓨터에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식구마다 휴대폰을 차고 다니는 세상이 아닌가? 만약 요즘 소득수준으로 13평짜리 연탄 아파트에 차도 안 굴리고 휴대폰 대신 공중전화를 이용한다면 얼마나 풍족하고 여유로울가?
박정희 시절 작은 집에서 살고 차도 안 굴리고 밤낮으로 일만 하고 살았으니 먹고, 입고, 애들 학비 외에는 돈 들어 갈 일이 없었으니 불편만 감수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삶이 편했던 것 뿐이지 박정희 시절이 결코 잘 살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역대 집권시기 생활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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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권 자 기 간 조사년 1인당주거면적(평) 조사년 대학/전문대진학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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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장면 "53-"61 통계무 1961 통계무
박정희 "61-"79 1975 2.5 1979 178,289
전두환 "80-"88 1985 3.4 1988 305,109
노태우 "88-"93 1990 4.2 1993 400,039
김영삼 "93-"98 1995 5.2 1998 621,583
김대중 "98-"03 2000 6.1 2003 60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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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통계청,「인구주택총조사보고서」각년도
출처) 통계정보시스템(KOSIS)
* 이승만/장면 집권시 통계수집 불가
박정희의 경제 Vs 이명박의 경제
박정희가 추진한 고속도로와 포철은 그 당위성이나 필요성에 있어서 누구나 공감한 일이었다.
다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그 수단과 방법 그리고 당시 우리 기술로 제대로 완공할 수 있을지 이의를 제기했을 뿐이다.
반면에 이명박의 대운하는 수단과 방법 등에서도 문제지만 결정적으로 그 필요성과 당위성 자체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효성 없는 한반도 대운하에 대해 경제,경영,토목,건축,역사,환경 등 각계 각층의 학자들과 모든 국민들이 반대하는 소리는 당연한 것이다.
그 목적의 의의부터가 서로 다르단 말이다! 명박의 귓구멍은 뭘로 만들어졌기에 알아듣지를 못 하는지...
김형기 경북대 교수는 “이명박은 국민을 섬기는 정부로 國政방향 설정,
처음부터 국민 정서에 反하는 장관.참모를 기용하는 등 人事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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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는 결코 우리에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자기 민족만 잘 나서 자기 민족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국수주의"이고,
국수주의를 앞세워 다른 민족을 적극적으로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제국주의"이며,
자기 민족은 물론 다른 민족의 전통과 장점도 모두 인정하고 공생하는 것이 "민족주의"이고,
나아가 다른 민족도 동등하게 하나의 민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세계주의"이다.
따라서 "세계주의"는 언뜻 골고루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좋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세계주의는 제국주의의 가면이기 때문이다.
즉, 미국과 같이 강한 나라가 "세계주의"를 부르짖음은 약한 나라를 침략하자는 술책이요,
한국과 같이 약한 나라가 "세계주의"를 부르짖음은 스스로 강한 나라의 노예가 되자는 미련한 짓이다.
"세계주의"의 개념을 경제적으로 표현할 때 이를 "신자유주의"라고 하며
그러한 개념으로 된 세계적인 협정이 브레튼우즈 협정, 우루구아이 협정, FTA 등이다.
현 정권이 줄기차게 부르짖는 금산분리정책도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강력한 금산분리정책에 의하여 발전한 월스트리트 금융산업의 붕괴로 인하여
지금 전 세계의 경제는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그래서 세계 각국은 지금 다시 "보호무역"의 울타리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정책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사상누각이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FTA 체결에 앞서 먼저 철저하게 분석하여 전체적인 손익계산을 잘해야 한다.
지피지기 백전불태...자신과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어제의 역사로부터 오늘 교훈을 얻지 못하면 결코 보다 밝은 내일이 없다.
구한말 한미수호통상조약 이후에 문화제국주의의 일환으로 들어온 "개독교"에 국민정신이 망가지고,
소위 혈맹과 우방이라는 미국의 식민지(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 등등)로 전락한 현실을 보라.
또한 멕시코가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체결 이후에 빈민국으로 전락하고,
쌀 대국인 필리핀에서 FTA 이후에 97%의 국민들이 쌀 배급받고 있는 현실을 보라.
지금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한미 FTA"를 섣불리 맺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한미FTA(안)"에는 우리나라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독소조항들이 매우 많다.
독소조항
1) 래칫(톱니바퀴의 역진방지장치) 조항
: 한번 개방된 수준을 되돌릴수 없게 만드는 조항. 한마디로 개방 때문에 국민들의 생활이 파탄이 나도 되돌릴수 없다는 것인데, 유럽이나 개도국들의 FTA에도 없는 독소조항이다.
예) 1. 쌀개방으로 필리핀처럼 국민들이 쌀배급 받는 상황이 되어도 예전으로 돌릴수 없음.
2. 광우병 소고기로 광우병이 걸려도 수입 막지 못함.
3. 의료보험 민영화 되면 다시 예전으로 되돌릴수 없음.
4. 전기 민영화 되면 다시 예전으로 되돌릴수 없음.
5. 학교 자율화(사기업화) 되면 다시 예전으로 되돌릴수 없음.
필리핀은 쌀대국으로서 예전에 잘살다가 미국과의 FTA 체결 이후에 상위 3%에 들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쌀을 국가로부터 배급받아야 하며 노예나 가정부처럼 살 수밖에 없다. 멕시코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 이후로 세계적인 빈국으로 전락했으며, 협정체결 당시의 멕시코 대통령은 퇴임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2) 서비스 시장의 네거티브 방식 개방
: 개방하지 않을 분야만 유보 리스트에 명시하고, 나머지는 모두 개방하는 것.미래에 생길 서비스업은 무조건 개방 형태가 된다.
예) 카지노, 경륜, 경마, 경정, 윤락 산업, 피라미드 등등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런 게 들어와서 우리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도 앞의 <래칫조항>과 "투자자 국가 제소권" 때문에 한국인들은 그냥 살아야 한다.
3) 미래의 최혜국 대우 조항
: 앞으로 다른 나라에 미국보다 더 많은 개방을 할 경우에는 자동적으로 한미FTA에 소급 적용. 미국에 대한 개방폭은 점점 늘어나기만 한다.
예) 중국하고 FTA 체결하여 콩을 개방하면 원래 한미FTA에 없던 콩도 미국에게 개방해야 됨.
4) 투자자 국가 제소권 - 가장 골때리는 조항!
: 초국적기업이 자신의 이윤 확보를 방해하는 정부의 법과 제도 및 관행을 제3의 민간기구에 제소할 수 있는 권리. 한마디로 말해서 기업 이익에 방해가 되면 다 족치겠다는 것이다. 헌법상의 사법권, 평등권, 사회권을 무너뜨릴 것이며 정부는 거의 모든 공공정책을 사실상 포기하게 된다.
5) 비위반 제소
: 세금, 보조금, 불공정거래 시정조치 같은 정책으로 인하여 "기대 이익"을 얻지 못했다고 판단되면 FTA협정을 위반하지 않았어도 일방적으로 국가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 즉, 자기들의 잘못으로 돈을 못벌었더라도 국가에 소송해서 막대한 배상금을 타낼 수 있다.
6) 정부의 입증 책임(necessity test)
: 어떤 규제든 그것이 필요불가결함을 "과학적으로" 입증해야하는 책임. 눈에 보이게 입증을 하지 않으면 무조건 개방이다.
예) 과학적으로 입증이 불가능한 국민 여론이 분분하면 무조건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
7) 간접수용에 의한 손실보상
: 미국인에게는 우리나라의 법보다 한미FTA가 우선적으로 적용된다. 한마디로 한국인을 보호해주는 법 자체가 유명무실해진다. 따라서 FTA가 한국의 법보다 우위에 있게 되고 사실상 한국은 주권을 상실하게 된다.
8) 서비스 비설립권 인정
: 사업장을 필수적으로 우리나라에 설립하지 않아도 영업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 사업장이 없는 미국의 회사는 한국 정부가 국내법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처벌할 수 없다. 이게 식민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9) 공기업의 완전 민영화 + 외국인 소유지분 제한 철폐
: 미국의 거대 자본이 한국의 공기업과 알짜 기업들을 먹겠다는 것이다.
예) 의료보험공단, 한전, 석유공사, KT, 농수산물 유통공사, 주택공사, 수자원공사, 토지공사, 도로공사,
KBS, 중소기업은행, 도시가스, 수도공사, 우체국, 주택공사, 지하철공사, 철도공사, 국민연금, 공무원 연금 등등이 미국의 거대 자본에게 넘어가 민영화됨. 이런 공기업이 미국의 거대 자본에게 넘어가게 되면 당장 수도료, 전기료, 지하철요금, 가스료, 핸드폰 요금, 의료보험료 등이 줄줄이 대폭 인상된다. 즉 서민경제 파탄나는 것이다.
10) 지적재산권 직접 규제 조항(Trips+)
: 한국인과 한국기업에 대한 지적재산권의 단속권을 미국이 직접 행사하게 된다. 고가의 오리지널 약보다 값싸고 효과 좋은 카피약은 생산이 불가능하게 된다.
예) 1. 미국의 사회보장번호가 있는 사람의 경우 성인 1인당 매월 700불(4인 가족 기준 : 월 2천불)
2. 카페지기, 블로거, 싸이트운영자 등은 지적재산권 문제로 엄청난 벌금과 징역형을 받게 된다.
3. 감기에 걸렸을때 최소 10~20만원의 진료비를 지불해야 함. 미국 국민의 40%는 아예 이런 보험도 못든다. 그래서 미국인들의 개인 파산신청의 첫 번째 원인이 의료비다.
11) 금융 및 자본시장의 완전 개방
: 한국을 국제 투기자본의 놀이터가 되게 한다. 1997년의 IMF 구제금융사태의 진짜 원인이 국제 투기자본(특히 일본의 엔캐리자금)이었다는 것은 모두 알 것이다.
예) 1. 외국 투기자본이 한국 내에서 은행업을 할 수 있게 됨.
2. 외국 투기자본이 국내 은행의 주식 100%를 소유할 수 있음.
3.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감소로 많은 중소기업이 부도남.
4. 사채 이자율의 제한이 없어짐.
5. 현금 인출수수료의 상승.
12) 재협상불가 조항
: 앞으로 예상치 못한 심각한 상황이 발생해도 재협상이 불가하다. 즉, FTA가 국회에서 비준되어 통과되면 재협상이 불가하다. 이제 FTA 비준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한국은 미국의 공식적인 노예국가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출처 : 콜트레인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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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쎄요 일단 경제적인 문제는 워낙 수치적인 문제라 의견차이가 많지만 이부분은 동일한 국내의 경제적 여건에서 시작한게 아니라는게 문제라고 봅니다 더군다나 이농현상에대한 부분은 분명 이승만때 57년 이전까지 원조경제가 급증하였고 이름바 삼백산업이 전성기를 누리던때 였죠 수치상의 경제성장은 있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공산품 경공업품생산 시설나 공업 시설 발전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70년대 말이면 이름바 케인져주의의 황금기가 이미 끝나던 때이고 당시 각국의 경제사정은 급속도로 냉각되어 한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던때이기도 하였었죠 더군다나 김대중도 경제부분에서는 그닥인게 IMF극복한다고 내수와 벤
처열풍을 불게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을 어였한 중소기업으로 연결시키거나 수출산업에대한 비중을 줄인것도 아니었고 되려 대출 가계빛 증가와 신불자 대량 양산 그리고 비제도권 금융확대등의 부작용을 낳았죠 솔직히 이 비판은 이런것과 다른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결론인 FTA부분은 쉬어가는 개그 코너인가 싶네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연관성에대해서나 뭐 문화적인 부분에 일환으로 들어온 개독교라는 거나 식민지 운운하는 사소하고 무지식적인 부분을 버리더라도 우선적으로 한국의 경제적 체질이 바뀌지 않는 한 수출에 의존할수 밖에 없는데 일본도 잃어버린 10년세의 강력한 수출 추진 정책을 보여 각국의 이런저런 악제에 지금 휘청하는 판에 보호주의 장벽을 높인다는 것이 마냥 좋게 보이는 것인지 또한 케인져주의의 황금기가 끝났을때 시카고 친구들은 이 사람과 같은 예기를 했었죠 한마디로 하자면 완벽한 경제 이론은 없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유주의가 실패했다하여
그것을 케인져주의와 보호주의로의 선회를 뜻하는 것도 아니며 그 사상이 사상누각이라고 단정하는 것 자체가 이번 경제 위기에대해 전혀 배운것이 없다는 반증이라는 예기죠 물론 한미FTA에대해서 한국이건 미국이건 양쪽다 서로 불리하다고 할 정도고 때문에 신중해야되는것은 맞습니다만 멕시코의 심각한 사회적 혼란 이를테면 4대 마약카르텔이라든지 정부기관이 휘청거리는 불안정한 정국등을 빼고 단지 경제적인 수치만 보자면 전혀 꿀릴게 없죠 또한 필리핀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FTA로인 한 혼란이라기에는 필리핀자체의 정치 경제적 독점 독제체제는 필리핀자체의 근본적인 문제라는것은 알만한 사람은 알죠
그리고 또한가지 세계에서 3번째였나 2번째였나 아무튼 EU와의 FTA문제는 일절 함구령이라도 떨어진건지 타결직전까지 갔다 결렬되기는 했지만 찬찬히 살펴보며 이래저채 따져보면 한미 FTA보다 더 많고 어지러운 장치들이 곳곳에 숨어있고 여기에 나와있는 부분도 최혜국 조항을 제외한 나머지는 많이 포함되어있는데 왜 태클이 없을까요
쉬어가는 코너 맞습니다...틀렸다해도 따져볼수는 있죠
어랏! 초기에는 박정희 대통령때 경제이야기 하다 뒤에는 FTA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그 당시 당장의 경제는 좋지 않았더라고 그때 닦아두었던 공업을 계속 쓰고 있으므로 단기적으로 이야기하기엔 무리라고 봅니다.
분리하는줄 그었습니다....틀렸다 할지라도 참고하셔도 좋을거 같아서요....^^
결론은 누구~?? 말하고 싶은 사람을 말하면 되는데 ... 엉뚱하게 돌아가신분을 걸구 넘어가는 이유는 먼가요~??
???
님 댓글보고 한참동안 생각 했습니다만...혹시...제가 김대중을 말하고 싶어한다 보셨나요?....그렇다면 잘못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으셨네요....얼마전 소쩍새님의 댓글 때문에 생각나서 올렸습니다만... 물론 김대중도 제평가 하고는 있습니다.제가 어려서부터 김대중이 간첩이라고 세뇌를 너무많이 받아서요...제스스로 세뇌받은거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이 간첩이라뇨???무슨예기죠???
간첩??
지금 나이가 30대 후반이상 대는분 치고 김대중 간첩이란 교육 안받은분 없습니다....
당장 부모님에게 확인하시면 됩니다....
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그리고 안기부 김대중 도쿄 납치 사건 거기에 광주민주화운동 주동설 뭐 이런걸로 엮어서 싸그리 지은 개그를 말씀 하시는 거군요 갑자기 간첩예기가 나와서 어리둥절 했습니다
하기사 당시에 김대중 김영삼 만큼 정치적으로 박정희 정적만한 인물도 없었으니 하지만 당시에 정치적 상황으로 봤을때 정부 발표를 얼마나 믿었을지는......잘나가던 정치 야당 지도자 두명이 순식간에 한명은 사형선고 받고 한명은 완전히 바보되어서 정치활동을 중단되었다는건 솔직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좀........
뭐 근현대사를 다룬 책을보면 박정희 전두환대통령때 정말 김대중 전대통령을 심하게 비하하는글이 많더군요.. 교과서랑 많이 다른 내용들이 많아서 정말 혼란스러웠습니다.. 다른예기지만 교과서에 꼭 나와야할 서해교전같은 많은 부분도 좀 실었으면 합니다...
황무지에서 빚 없이 시작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공감합니다.... 저는단지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세뇌되어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희 아버지세대라 저는 도저히모르지만..그래도 어느정도는 잘했다고 보는것도 있습니다..
역시 공감합니다.... 다만 일정부분 지지하는것은 인정하지만 (저역시 님처럼 칭찬하는부분이 있습니다)... 너무 떠받드는 것이 못마땅할 뿐입니다(조금만 비방해도 욕설이 나오죠)
어차피 매맞을건 죽을떄까지 맞고 칭찬할일은 크게 칭찬해야 다음에 좋은일을 하는거니깐요...
성장보다는 밑바탕을 잘 깔아놨다는 시각으로 저는 보고있습니다만....이것도 아무나 할일은 아니었죠
맞습니다.. 뭐 인정하긴 싫지만 박정희 전대통령으로 인해 우리경제가 성장한건 사실이니까요... 글고 인정하긴 싫지만 저희 집안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은혜를 입은 집안이긴 합니다..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냥 경제발전을 할수있게 토대를 만들었고, 그 뒤는 국민과 기업이 열심히 해서 키운거다라고 생각듭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도 기업 욕할거없다고 정치인이 열심히 하여 경제가 성장한건 하나도 없다고 하더군요.
박정희도 그냥 기업이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해서 자기들 발판 마련한거다라고 하더군요...
어찌보면 저희아버지는 많이 깨어있는 분 같습니다. 박정희를 비판할건 할줄 아시는 50대이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