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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斯行諸(문사행저)
「(좋은 가르침을) 들으면(聞) 곧바로(斯) 실천(實踐, 行)해야 합니까?」
(좋은 가르침에 대한) 행위(行爲)는 성향(性向)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의미(意味).
聞 : 들을 문
斯 : 이 사
行 : 다닐 행
諸 : 어조사 저
『논어(論語)』 《선진(先進)》 第21章에
[子路問: "聞斯行諸?"]
[자로문: "문사행저?"]
어느 날 자로(子路)가 공자(孔子)에게 물었다.
"(좋은 가르침을) 들으면(聞) 곧바로(斯) 실천(實踐, 行)해야 합니까?“
•斯(사) : ~하면. 조건(條件)에 따른 결과(結果)를 표시(表示)하는 접속사(接續詞).
•諸(저) : 之乎(지호)와 같으며
之(지)는 聞(문) 즉(卽) '들은 것'을 가리키는 인칭대사(人稱代詞)이고
乎(호)는 의문(疑問)의 어기(語基)를 표시(表示)하는 어기조사(語基助詞)이다.
[子曰: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자왈: "유부형재, 여지하기문사행지?"]
공자(孔子)가 대답(對答)했다.
"부형(父兄)이 계시는데(在)
어찌(如之何) 자네가 들었다고(其聞) 즉시(斯) 행동(行動)으로 옮긴단 말인가?"
(반드시 그분들에게 여쭈어보고 행동해야지)
•如之何(여지하) : '어떠하다'라는 뜻의 관용어(慣用語)로서
부사어(副詞語) 또는 술어(述語)로 쓰인다.
如何(여하)·何如(하여)와 같다.
•其(기): 음절(音節)을 조정(調整)하고 어세(語勢)를 강(强)하게 하는 어기조사(語基助詞).
[冉有問: "聞斯行諸?"]
[염유문: "문사행저?"]
염유(冉有)가 물었다.
"(좋은 가르침을) 들으면(聞) 곧바로(斯) 실천(實踐, 行)해도 되겠습니까?"
[子曰: "聞斯行之."]
[자왈: "문사행지."]
공자(孔子)가 대답(對答)했다.
"들은(聞) 즉시(斯) 행(行)하라."
[公西華曰:]
[공서화왈:]
공서화(公西華)가 [이상(異常)하다는 듯] 물었다.
["由也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유야문: '문사행저?' 자왈: '유부형재.']
유[(仲由), 자로(子路)]가
"(좋은 가르침을) 들으면(聞) 곧바로(斯) 실천(實踐, 行)해야 합니까?" 물으면
공자(孔子)께서는
부형(父兄)이 있으니 (그들에게 알리고 나서 행하라) 하셨고,
[求也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赤也惑, 敢問."]
[구야문: '문사행저?' 자왈: '문사행지.' 적야혹, 감문."]
구[(冉求), 염유(冉有)]가
"(좋은 가르침을) 들으면(聞) 곧바로(斯) 실천(實踐, 行)해도 되겠습니까?" 물으면
공자(孔子)께서는
"들은(聞) 즉시(斯) 행(行)하라."하시니
적[(公西赤), 공서화(公西華)]이 의혹(疑惑)되어
감(敢)히 묻습니다(問).
[子曰: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자왈: "구야퇴, 고진지; 유야겸인, 고퇴지."]
공자(孔子)가 답(答)하기를
구[(冉求), 염유(冉有)]는 소극적[(消極的), 退]이니
그래서(故) 적극적[(積極的), 進]이라고 한 것이고,
유[(仲由), 자로(子路)]는 남의 몫마저 하려고 덤비는 겸인(兼人)이니
물러나게[(消極的), 退] 한 것이다.
•兼人(겸인) : 앞으로 나서서 남의 몫까지 다 할 정도(程度)로 적극적(積極的)이라는 뜻이다.
✱공자(孔子)의 교육방법(敎育方法)은
일반적(一般的)인 지식(知識)을 전(傳)하는 것이 아니라
피교육자(被敎育者) 개개인(個個人)의 성향(性向)에 맞추어
구체적(具體的)으로 계발(啓發)시키는 방법(方法)을 택(擇)한다.
자로(子路)는 진취적(進取的)이며 용맹(勇猛)한 성격(性格)에 걸맞게
군사(軍事) 분야(分野)에서 뛰어난 재능(才能)을 발휘(發揮)하였고,
염유(冉有)는 세심(細心)하고 꼼꼼하며 소극적(消極的)인 성격(性格)에 걸맞게
세무(稅務) 회계(會計)와 같은 분야(分野)에서 재능(才能)을 발휘(發揮)하였다.
◐자로[子路, BC543 ~ BC480]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이자, 공문십철(孔門十哲) 가운데 한 사람.
✱공문십철(孔門十哲)✱
중국(中國) 고대(古代)의 성현(聖賢)인 공자(孔子)의
뛰어난 10명(名)의 제자(弟子)들.
흔히 사과(四科)십철(十哲)이라 한다.
《논어(論語)》 〈선진편(先進篇)〉에 공자(孔子)가 진채(陳蔡)의 들판에서 위난(危難)을 당(當)하였을 때 함께 있던 제자(弟子)들 10명(名)의 이름을 들었다.
그는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 언어(言語)에는 재아(宰我)·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冉有)·계로(季路),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자하(子夏)가 뛰어나다고 하였다.
또 여기에 나오는
덕행(德行)·언어(言語)·정사(政事)·문학(文學)을 사과(四科)라고 한다.
자로[子路]의
본명(本名) : 중유(仲由)
별칭(別稱) : 계로(季路)
성(姓)은 중(仲), 이름은 유(由),
자(字)는 자로(子路)이며, 계로(季路)라고도 불린다.
지금(只今)의 산둥성[山東省] 쓰수이현[泗水縣]인 노국(魯國) 변읍(卞邑) 출신(出身)이다.
공자(孔子)의 제자(弟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10인(人)을 뜻하는 「공문십철(孔門十哲)」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공문칠십이현(孔門七十二賢)」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공자(孔子)의 사당(祠堂)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자로(子路)는 공자(孔子)보다 나이가 9세(歲) 어려서,
공자(孔子)를 수행(隨行)하던 제자(弟子)들 가운데에는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는 노(魯)나라의 세 경대부(卿大夫) 가문(家門)인 삼환(三桓) 가운데
하나인 계씨(系氏)의 읍재(邑宰)를 지냈으며,
처음에는 공자(孔子)를 업신여기고 포악(暴惡)하게 굴었다고 전(傳)해진다.
그러다 점차(漸次)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받으며 교화(敎化)되자,
다른 제자(弟子)들의 요청(要請)으로 공자(孔子)의 문하(門下)로 받아들여졌다.
《사기(史記)》에는 자로(子路)에 관(關)해
"성격(性格)이 거칠고 용맹(勇猛)스러운 일과 힘쓰는 일을 좋아하고
의지(意志)가 강(强)하고 정직(正直)하였다"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공자(孔子)는 그의 꾸밈없고 소박(素朴)한 인품(人品)을 칭찬(稱讚)하였으나,
성급(性急)하고 거친 성정(性情)은 주의(注意)케 하였다.
예(例)컨대 공자(孔子)는 자로(子路)를
"닳아빠진 솜옷을 걸치고 여우와 담비 가죽을 입은 사람과 함께 서 있어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자(者)"로 높이 평가(評價)하면서도
"일을 잘 헤아려 사리(事理)에 맞게 하는 것이 없다"고 지적(指摘)하기도 했다.
자로(子路)는 공자(孔子)가 노(魯)나라를 떠나 각국(各國)을 떠돌 때
그를 수행(隨行)하다가 지금(只今)의 허난성[河南省] 창위안[長垣]인
위(衞)나라 포읍(蒲邑)의 읍재(邑宰)가 되었다.
그러다 기원전(紀元前) 480년(年)
위(衞)나라 출공(出公)의 아버지인 괴외(蒯聵)가
영공(靈公)의 외손자(外孫子)인 대부(大夫) 공회(孔悝)와 함께
정변(政變)을 일으켜 출공(出公)을 쫓아내자,
자로(子路)는 자고(子羔)의 만류(挽留)를 뿌리치고
위(衞)나라의 도성(都城)으로 들어가
괴외(蒯聵)에게 공회(孔悝)를 죽이라고 간언(諫言)하였다.
그리고 괴외(蒯聵)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누대(樓臺)에 불을 지르려 하다가 석걸(石乞)과 호염(壺黶)에게 죽임을 당(當)했다.
《사기(史記)》에는 공자(孔子)는
위(衞)나라에 변란(變亂)이 일어났다는 소식(消息)을 듣고는
자로(子路)가 뜻을 굽히지 않고 목숨을 잃을 것을 예견(豫見)했다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자로(子路)는 죽은 뒤에 시신(屍身)이 소금에 절여지는
해형(醢刑)을 당(當)했다고도 전(傳)해진다.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에 '위후(衛侯)'로 추봉(追封)되었으며,
송(宋)나라 진종(眞宗) 때에는 '하내공(河内公)'으로 봉(封)해졌다.
아울러 송(宋)나라 도종(度宗) 때에는 '위공(衛公)'으로 봉(封)해졌다.◑
◐염구[冉求, BC522 ~ BC489]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이자, 공문십철(孔門十哲) 가운데 한 사람.
이칭(異稱) : 자유(子有), 염유(冉有), 염자(冉子)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末期)
주(周) 문왕(文王)의 열 번(番)째 아들 염계재(冉季載)의 후예(後裔)다.
『염씨가보(冉氏族譜)』에 따르면,
염옹(冉雍)의 부친(父親) 염리(冉離)가 안씨(顔氏)를 아내로 맞아
맏아들 염경(冉耕)을 낳았는데 자(字)가 백우(伯牛)이고,
차남으로 염옹(冉雍)을 낳았는데 자(字)가 중궁(仲弓)이다.
안씨(顔氏)가 죽은 후(後) 공서씨(公西氏)를 아내로 맞아
염구(冉求)를 낳았는데
자(字)가 자유(子有)이고, 염유(冉有), 염자(冉子)라고도 불렸다.
훗날 공서씨(公西氏)는 삼형제(三兄弟)를
공자(孔子)에게 맡겨 공부(工夫)를 시켰다.
염씨(冉氏) 삼형제(三兄弟)는 집안이 가난했지만
공자(孔子)의 격려(激勵)를 받으며 학문적(學問的)으로 성공(成功)하여 『일문삼현(一門三賢)』으로 일컬어졌다.
정사(政事)에 능(能)하고 다재다능(多才多能)하였으며 이재(理財)에도 밝았다.
이는 『논어(論語)』에 공자(孔子)가
"염구(冉求)는 재주가 있으니 정사(政事)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여러 차례(次例) 언급(言及)한 점(點)을 봐도 알 수 있다.
특(特)히 그는 일찍이 노(魯)나라의 권력자(權力者) 계강자(季康子)의 재상(宰相)이 되어 좌사(左師)를 이끌고 제(齊)나라 군대(軍隊)를 막는 큰 공(功)을 세웠다.
그는 계강자(季康子)를 설득(說得)하여
여러 나라를 두루 여행(旅行)하던 공자(孔子)를
다시 노(魯)나라로 모셔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공자(孔子)의 도(道)를 실천(實踐)하는 데
부족(不足)한 면(面)이 있었다.
『논어(論語)』 「옹야(雍也)」편(篇)에서 그는 공자(孔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의 도(道)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힘이 부족(不足)합니다."
이에 공자(孔子)는 이렇게 지도(指導)했다.
"힘이 부족(不足)한 자(者)는 중도(中途)에 포기(抛棄)하는 법(法)인데,
지금(只今) 너는 미리 한계(限界)를 긋는 것이다."
또한 『논어(論語)』 「계씨(季氏)」 편(篇)에서는
계강자(季康子)가 계속(繼續) 잘못된 행동(行動)을 하자
공자(孔子)가 염구(冉求)를 불러 이렇게 책망(責望)했다.
"힘을 다해 반열(班列)에 나아가 제대로 행(行)할 수 없을 때는
그만두고 떠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염구(冉求)가 계강자(季康子)를 위(爲)해
백성(百姓)들로부터 가혹(苛酷)하게 세금(稅金)을 거두어들이자
그를 비판(批判)하며
"염구(冉求)는 우리 무리가 아니다.
제자(弟子)들아, 북을 쳐서 그의 죄(罪)를 성토(聲討)하라."라고
배척(排斥)하기도 했다.
비록 한때 공자(孔子)에게 배척(排斥)받았지만
공자(孔子)의 72수제자(首弟子)를 가리키는
공문칠십이현(孔門七十二賢) 중(中) 한 사람이며,
후대(後代)에는 공자(孔子)의 10대(代) 제자(弟子)를 가리키는
공문십철(孔門十哲) 중(中) 한 사람으로 평가(評價)받았다.
그래서 동한[東漢, 후한(後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15년(年)인 72년(年)에
공자(孔子) 사당(祠堂)에 배향(配享)되었다.
당(唐)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27년(年)인 739년(年)에
′서후(徐侯)′로 추증(追贈)되었고,
송(宋)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樣符) 2년(年)인 1009년(年)에 또다시 ′팽성공(彭城公)′으로 추봉(追封)되었으며,
남송(南宋) 도종(度宗) 함순(咸淳) 3년(年)인 1267년(年)에
′서공(徐公)′으로 명칭(名稱)이 바뀌었다.◑
◐공서적[公西赤, BC509 ~ ?]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末期) 노(魯)나라 사람으로
성(姓)은 공서(公西),이름은 적(赤)이다.
자(字)는 화(華),또는 공서화(公西華)로 일컬는다.
공자(孔子)의 제자(弟子)로 공문칠십이현(孔門七十二賢) 중(中)의 한 명(名)이다.
공자(孔子)보다 42세(歲)가 어렸던 제자(弟子)인데
예의(禮儀)가 바르고 우수(優秀)한 외교적(外交的) 수완(手腕)을 지니고 있었다.
노(魯)나라 대부(大夫)였던 맹무백(孟武伯)이 공자(孔子)에게
공서적(公西赤)의 외교(外交) 수완(手腕)에 대(對)해 물으니
공자(孔子)는 이렇게 대답(對答)했다.
″공서적(公西赤)은 띠를 두르고 조정(朝廷)에 서서
빈객(賓客)과 더불어 말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어진 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겠다.″
이는 공자(孔子)도 공서적(公西赤)이 외교(外交) 부분(部分)에
일가견(一家見)이 있음을 인정(認定)한 것으로 해석(解析)한다.
공서적(公西赤)은 공자(孔子)를 위(爲)해
제(齊)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간 적이 있었다.
공서적(公西赤)은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27년(年)인 739년(年)에 ′소백(邵伯)′에 추증(追贈)되었고,
송(宋)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2년(年)인 1009년(年)에는 ′거야후(鉅野侯)′에 추봉(追封)되었다.
명(明)나라 가정(嘉靖) 9년(年)인 1530년(年)에는
′선현공서자(先賢公西子)′로 바꿔 부르게 했다.◑
[출처] 聞斯行諸(문사행저)
[출처] 聞斯行諸(문사행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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