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령으로 인해 의병이 봉기하고 나주군수를 처단하면서 관찰사가 광주로 피신갔으며, 차후 의병이 없어져도 나주로 안 돌아갔기에 광주에 도청이 생김
1896년 13도제로 개편함에 따라 전라남도청을 나주가 아닌 광주에 둠으로써 전라남도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는 발판이 됨
구한말 전남도청이 옮겨진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주는 크게 발전하게 되는데, 광복 이후에도 이 추세가 지속되어 과거 전통적으로 전라도 수부도시로 취급받던 전주의 인구를 확실히 추월하게 되고, 전라도의 유일 광역시이자 최대 중심도시로 올라가게 됨
광주로의 관찰도 이전 과정=조선총독부는 1896년 전남 관찰도의 광주 이전은 초대 전남 관찰사인 윤웅렬의 선택이었다고 적고 있다. 1895년 10월8일 을미사변, 같은 해 11월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 1896년 2월11일 친일세력에 위협을 느낀 고종의 아관파천 등이 이어지면서 이 해 전국 각지에서 일제에 반발하는 의병들이 봉기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조선을 장악한 친일세력들은 쇄신책의 하나로 1896년 8월4일 지방제도를 기존의 23부에서 13도로 개편하는 칙령(제36호)을 반포했고, 초대 관찰사로 윤웅렬이 부임했다. 이 윤웅렬은 한일강제병합 후 남작과 자작의 작위를 받은 관료였다. 문제는 전남에서 가장 의병의 기세가 두드러졌던 곳이 관찰도가 있던 나주였다는 점이다. 나주는 연일 의병들의 항거가 계속됐고 결국 지방관리인 김창균 등 군수와 군사책임자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관찰사 윤웅렬은 나주에서 도망쳐 광주에 도착했고, 이 시기부터 광주를 관찰도 내재지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주의 의병이 진압된 뒤에도 윤웅렬은 나주로 돌아가지 않았다. 또 관찰도 나주 복귀 논의도 없었다. 그 이유를 이 문건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다시 관제 개혁, 전라도를 2개도로 나눈 결과 나주로 복귀하는 논의가 없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나주의 양반과 지방관리들이 다른 군 양민을 무시해 인심이 없고, 또 하나는 이미 윤웅렬 관찰사가 (의병 봉기에 대한) 두려움으로 광주에 있는 관찰도청사에 밀접하게 진위대영을 조영하고 중앙정부에 간청해 광주에 영주하는 방침을 수립한 것이 광주에 도청을 설치하는 이유가 된 것이다.”
첫째 이유는 명분으로 내건 것이고, 사실 윤웅렬 초대 전남 관찰사가 이미 비교적 ‘안전한’ 광주에 눌러앉은 것이 도청 소재지가 된 결정적 배경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광주에 있던 관찰도는 전남도청이 되고, 1909년부터 일본인 관료들이 배치되면서 이후 정착되게 된다. 광주에서 집무를 시작한 윤웅렬 관찰사는 사실상 광주에 일본인으로서는 첫 입성한 일본인 승려 오쿠무라 엔신과 오쿠무라 이오코를 후원하고 남구 불로동 일대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2줄 요약
나주에 있던 도 관찰사가 의병을 피해서 디펜스가 유리한(무등산이 등뒤를 감싸는 형국)광주로 피신했는데
첫댓글 이런 이유가... 나주가 평야와 영산강을 끼고 있어 물산이 진짜 풍부하거든요.
저때 아예 이전됐군요.
저런 이유도 있었으나,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왕건 정권의 우대가 더 이유가 큽니다. 거꾸로 그 전에는 광주가 나주보다 앞서나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