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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아이파크 팬카페 BIFC 원문보기 글쓴이: 문현기
이제 12월 6일인가요? 그 때 2007 K리그 신인왕 발표 및 각종 시상식이 있겠군요. 그런 의미에서 한해도 마무리 할 겸 K리그 신인왕의 역사를 차근차근 총정리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스크롤 압박이 조금 심합니다만 나름 쓰느라 애좀 먹었답니다 ㅎㅎ 찬찬히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K리그 신인왕은 85 시즌부터 신설되어 지금까지 총 22명이 배출되었습니다. 곧 있으면 2007 K리그 신인왕도 발표 되니 총 23명이 되겠군요. 이 22명 중 수비수는 91년 조우석, 93년 정광석 2명에 불과하고 미드필더와 공격수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양상입니다. 신인왕 선발은 각 구단마다 1명씩 신인왕 후보를 추천한 후 기자단 투표로 결정되며 (참고로 K리그 올해의 MVP, K리그 올해의 감독상도 마찬가지로 기자단 투표로 결정됩니다.) 총 투표 수는 65~80표 정도더군요.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신인왕 수상자들의 활약상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85시즌 첫 신인왕은 이흥실. 85시즌 포항제철에서 MF로 데뷔 후 21경기 출장 10골 2도움의 빼어난 활약으로 85시즌 신인왕을 거머쥔데 이어 2년차 징크스를 가볍게 무시하며 86시즌 축구대제전 MVP를 차지했었죠. 거기에 87시즌에는 29경기 12골 6도움으로 득점순위 2위, 도움순위 2위에 오르면서 가히 K리그의 자타가 공인하는 최정상 키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합니다.. 88시즌 부상으로 16경기 1골 2도움에 그쳤지만 89시즌 39경기 출장 4골 11도움으로 도움왕 타이틀까지 거머쥐며 80년대 K리그를 평정해버렸습니다. 85년부터 92년까지 오직 포항만을 위해 뛴 포항의 레젼드이자 5차례의 K리그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 선정에 K리그 5경기 연속골 기록 타이틀 보유까지.. 득점왕을 제외하고 K리그 선수로서 받을 수 있는 영예를 모두 거머쥔 K리그의 전설. 8년간의 약간은 짧은 프로생활을 끝내고 93년부터 2005년까지 마산공고 감독으로 재직하시다 2005년 가을에 전북 수석코치로 선임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공석인 경남 감독에 링크되어 있습니다.
86시즌 신인왕은 함현기. 당시 현대에서 FW로 데뷔, 86시즌 35경기 17득점 2도움을 기록합니다. 특히 86프로선수권대회에서만 9득점으로 득점왕까지 거머쥐는 초특급 신인으로 K리그에 입성했었죠. 물론 고려대 시절부터 약관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선발되는 등 프로 입성 전부터 함현기 선수의 명성은 익히 알려져 있었습니다. 박주영 선수랑 비슷하다고 느끼는 건 저뿐인가요 ? ;;; 함현기 선수는 아쉽게도 2년차 징크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87시즌 29경기 출장 1골 2도움. 함현기씨의 회고에 따르면 87년 당시 국가대표 차출로 해외에 있는 경우가 많아 소속팀에 쏟을 여력이 없었다고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88시즌 현대에 새로 부임한 김호 감독 아래 함현기 선수는 23경기 10골 5도움으로 득점순위 2위, 도움순위 공동 1위에 오르며 부진을 털어내고 다시금 비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89시즌에도 국가대표 차출등의 이유로 13경기 무득점에 그쳤고 90,91시즌에도 예전의 폭발적인 득점력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러자 연봉부담을 느낀 현대는 함현기 선수와 LG의 임재선 선수와 91년시즌 중반에 트레이드 시킵니다. 트레이드 후 LG에서도 팀 전술에 융화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던 함현기 선수는 결국 92시즌을 끝으로 K리그 선수 생활을 마칩니다. 폭발적인 신인 시절과 2년차의 부진 3년차의 부활과 씁쓸한 퇴장으로 이어지는 함현기 선수의 여정은 신인왕의 저주(?)라고 칭해도 될 정도로 유독 신인왕 수상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함현기 선수는 K리그에서 선수생활을 청산 후 J리그로 날아가 당시 3부리그였던 오이타에 입단 팀을 2년만에 1부리그로 승격시켜놓고 33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합니다. 이후 강릉상고 감독을 거쳐 현재는 묵호 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재임 중에 있습니다.
87시즌 신인왕 그 이름은 김주성. 당시 김종부 스카우트 파문으로 혼란과 혼탁함으로 얼룩진 프로축구판에 등장한 김주성 선수는 87시즌 FW로 데뷔 28경기 10골 4도움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87프로축구대회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대우를 우승시키는 대활약을 펼치며 신인왕을 거머줘었는데요. 이후에는 국대차출에 언제나 1순위로 뽑혔기 때문에 K리그에서의 출장기록이 정말 적습니다. 88시즌부터 90시즌까지 27경기 출장 8골 7도움에 그쳤죠. 하지만 이 시기 김주성 선수는 아시아 최고의 축구 선수의 반열에 올라섭니다. 89,90,91 3년연속 아시아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는 전후무후한 기록을 세웠고요. 91시즌에는 37경기 14골 5도움의 활약 그 뒤 92시즌부터는 분데스리가의 VFB 보쿰에 2년 임대로 해외이적에 성공하는 등 그야말로 탄탄대로의 성공가도를 질주했습니다. 하지만 분데스리가에서 쓰라린 실패를 맛보았죠. 2년동안 30경기 미만 출장에 2골이라는 실망스러운 기록만 남기고 대우로얄즈로 복귀합니다. 국내 복귀 이후부터는 스트라이커에서 수비수로 보직을 변경했고 99시즌까지 부산과 함께 모든 영광스러운 기록을 함께했습니다. 그야말로 부산의 최고의 레젼드 유일한 영구결번 선수입니다. 현재 축구협회 국제부 부장으로 축구행정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88시즌 신인왕은 황보 관. 유공에서 MF로 데뷔해 데뷔 시즌 23경기 출장 7골 5도움으로 득점순위 4위와 도움 순위 공동 1위에 오르며 신인왕을 차지합니다. 이후 89년부터 본격적으로 국가대표로 발탁, 90년 월드컵 본선에서 그 대회에 참가한 대한민국의 유일한 득점으로 기록된 시속 114KM짜리 벼락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며 황보 관 선수의 이름 석자를 사람들에게 확실히 각인 시키게 됩니다. 국대에서도 K리그에서도 캐논슛터로서의 명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황보 관 선수는 유공에서만 88시즌부터 95시즌까지 꾸준히 출장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94년 정규리그에는 12골 4도움으로 득점순위 3위, 도움순위 3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95시즌을 끝으로 J리그로 이적한 황보 관 선수는 오이타 트리니타에서 2년간의 선수생활을 마무리짓고 수석코치로 발탁, 오이타를 1부리그로 승격시키며 능력을 인정 받았습니다. 그 결과 오이타 감독의 사임 후 잠시 감독직을 승계 받기도 했습니다만 성적부진으로 사임했었었죠. 현재는 오이타 트리니타 유소년 총괄본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상당히 J리그를 높게 평가하는 축구인사중 한명으로 활동 중입니다.
89시즌 신인왕은 고정운. 당시 막 창단한 일화에 입단한 신인 MF로 31경기 출장 4골 8도움을 기록, 도움순위 2위에 오르며 같은 신인왕 유력 후보였던 최문식 차상해 선수를 따돌리고 신인왕에 등극합니다. 그래도 고정운 선수의 능력이 진정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91시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91시즌 13골로 득점순위 4위, 7도움으로 도움순위 2위를 차지하고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에 공격수 부문에서 선정되며 프로 데뷔 이후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됩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국가대표로 발탁되면서 고정운 선수의 유명세가 수직상승하기 시작했죠. 특히 94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적토마라는 별명을 코흘리개(접니다 ;ㅅ;)도 읊조리게 만들었던. 90년대 대한민국 축구의 전설 좌 고정운 우 서정원 ㅎㄷㄷ;; 일화에서 오랜 시간을 뛰었는데 제 기억에는 포항 선수로서의 고정운 선수가 더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GS 코치였던 것은 여러모로 에러. 다행히(?) 지금은 브라질 연수에 이어 잉글랜드에서 코치 연수 수업을 받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90시즌 신인왕 수상자는 송주석 선수입니다. 포지션은 FW로 현대에 입단한 뒤 29경기 출장 3골 7도움을 기록하며 도움 순위 공동 1위에 랭크되고 90시즌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에 공격수 부문으로 선정됐었죠. 송주석 선수는 90시즌 당시 쟁쟁한 신인왕 후보들이었던 김현석 선수와 하석주 선수를 제치고 신인왕에 등극했습니다. 특히 김현석 선수와는 대학시절부터 김현석 선수는 연세대, 송주석 선수는 고려대를 대표하며 강력한 라이벌 구도를 이루다 나란히 현대에 입단, 김현석 선수는 28경기 출장 5득점 3도움을 기록했는데 신인왕을 뽑는 기자단 투표에서 송주석 선수에게 6표차로 뒤지며 아쉽게 신인왕을 거머쥐지 못했습니다. 하석주 선수도 아주대를 졸업하고 대우에 입단한 첫 해에 24경기 4골 3도움을 기록하며 앞의 두 선수 못지 않은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90시즌 신인왕 등극 이후 송주석 선수는 90년부터 99년까지 오직 울산에서만 뛰며 울산의 레젼드라 호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활약을 선보였습니다. K리그 통산 4000호골의 주인공이기도 하고요. 통산 5개의 레드카드를 받으며 이 부문 최다 기록 선수로도 올라있습니다. 장신의 키로 제공권을 장악하며 팀의 공격루트를 개척하는 역할을 전담했었습니다. 김현석 선수와 함께 울산의 대표 공격수 이자 국내용 공격수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국가대표로서의 활약은 미미한 편이었습니다.
91시즌 신인왕은 조우석 선수입니다. 91년은 처음으로 수비수가 신인왕에 등극했던 해로 기록돼있습니다. 여담으로 91 시즌 MVP도 수비수인 정용환 선수가 차지했었는데요. 조우석 선수는 일화에 입단해 37경기 출장 3골 4도움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91시즌 이후로 98년 은퇴할때까지 1년에 출장 횟수 평균 20경기 미만에 그치며 기대했던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선수로 남아있습니다. 92시즌 13경기 출장, 93시즌에는 11경기 출장에 5장 경고를 기록하는 등 신인왕 징크스를 증명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92시즌 신인왕은 신태용 선수입니다. 92시즌 신인왕 경쟁은 정말 치열했는데요. 그도 그럴것이 홍명보 선수, 10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올라버린 임근재 선수, 신태용 선수까지 신인왕 후보로 올라왔으니 말입니다. 결국에는 MVP는 홍명보 선수, 득점왕은 임근재 선수, 신인왕에는 신태용 선수로 나눠먹기(?)를 했습니다. 신인들이 주요 수상을 독식하는 시즌이었던 것이죠. 신태용 선수는 고교시절부터 U-17 대표로 발탁, 87년 제 2회 세계 U-17 청소년 축구대회에 출전해 대한민국을 8강에 올려놓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는 등 초특급 신인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MF로 일화에 입단했었습니다. 그 명성에 걸맞게 올림픽 대표 차출로 18경기만 뛰고도 7골 4도움을 올리는 환상적인 기록을 작성하며 신인왕 타이틀을 가져갑니다. 이후의 활약은 그야말로 성남의 레젼드를 넘어 K리그의 독보적인 레젼드라는 최고의 자리에 신태용 선수를 앉혀놓게됩니다. 이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요? ;; 성남의 마지막 초유의 무개념 짓만 없었더라면 완벽했을텐데 괜히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네요.
93시즌 신인왕은 정광석 선수입니다. 91시즌에 이어 수비수가 신인왕을 탄 시즌이 93시즌이었습니다. 대우에 입단해 26경기 출장 1도움 경고 4, 퇴장 1번을 기록했습니다. 정광석 선수는 위의 신태용 선수와 함께 U-17 세계 청대 대표로 발탁되었던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93년 당시 신인으로는 유상철, 이임생, 조준호 등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모두 제치고 신인왕을 차지했기에 상당한 기대를 받았을 껍니다. 그러나 94시즌 14경기 출장 1득점에 그치며 2년차 징크스에 빠지는 듯 했고 대우는 정광석 선수의 군입대를 결정합니다. 선수로서 가장 만개해야할 시기에 군복무는 상당한 치명타가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결국 97년 부산으로 복귀한 정광석 선수는 이듬해 98년 은퇴하면서 짧은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합니다. 리그 통산 79경기 출장 3골 2도움. 우연인지는 모르나 2명뿐이 DF 신인왕 모두 K리그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는데 실패했군요. 은퇴 후 최근 소식은 용인 FC 중등부 코치로 있으시다가 현재는 전남 유소년 코치로 선임되셨다고 들었습니다.
94시즌 신인왕은 최용수 선수입니다. LG의 FW로 입단한 첫 해 35경기 출장 10골 7도움을 기록했습니다. 정규리그 득점 순위는 9골로 5위, 도움은 3위를 기록했었죠. 95,96시즌에도 2년차 징크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플레이로 안양의 주 공격수로 활약했습니다. 그러나 최용수 선수의 진정한 전성기는 97,98 안양을 떠나 군입대한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군입대 후 클럽에 구애받지 않고 국가대표로 자유롭게 차출되면서 98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에서 보여준 활약으로 일약 대한민국 대표 공격수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던거죠. 국대에서뿐만 아니라 군복무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99시즌 27경기 14골 4도움을 기록한데 이어 2000년 시즌에는 안양의 K리그 우승을 이끄는 주역으로 K리그 선수로서의 기록에 화려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 뒤에는 J리그로 건너가 J리그를 평정해버렸죠. 1시즌당 평균 25골을 넣는 초특급 활약으로 J리그 연봉 TOP 5 안에 들어갔고요. 아직도 J리그 스카우터들이 한국 선수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원흉(?)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GS 코치라서 역시 에러.
95시즌 신인왕은 노상래 선수입니다. 전남의 FW로 입단해 신인왕과 득점왕을 동시에 차지했었죠. 정규리그 26경기 출장 15골 5도움 득점순위 1위, 도움순위 공동 4위를 기록했습니다. 실업팀인 주택은행에서 뛰다 전남에 입단한 중고(?)신인, 26살의 신인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신인은 신인이었습니다. 당시 95년 신인으로는 윤정환 선수가 있었습니다만 올대 차출로 클럽에 쏟을 여력이 없었죠. 하지만 당시 노상래 선수보다 윤정환 선수가 몇갑절은 유명했었더라는 ;ㅅ; 96시즌에도 2년차 징크스 없이 13골 7도움을 기록하며 승승장구 96 아시안컵에 발탁된것 까지는 좋았는데 인도네시아전에서 부상 당하면서 이란에게 2:6 대패 당하는걸 지켜봐야했었죠. 국대와는 그다지 좋은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노상래 선수에게 2년차 징크스는 없었지만 3년차 징크스(?)에 걸려 넘어지며 97시즌에는 17경기 출장에 그칩니다. 그래도 7골 기록. 이후 2001년까지 전남의 에이스 오브 에이스이자 캐논슛터의 계보를 잇는 호쾌한 중거리 슛팅으로 광양구장의 만원관중몰이에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그러나 2002년 시즌 노상래 선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자 전남은 이 프렌차이즈 스타를 방출해버리고 맙니다. 이미 나이도 은퇴기로에 접어든 상황이었지만 노상래 선수는 신생구단 대구로 입단해 선수생활의 황혼기를 불태웁니다. 결국 기어이 K리그 통산 50-50의 대기록을 작성하시고 2004년 은퇴하게 됩니다. 전남 프론트진이 정말 무개념 짓을 했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군요. 지금은 김희태 축구센터 코치로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96시즌 신인왕부터 드디어 현역 선수가 나옵니다. 박건하 선수죠. 뭐 플레잉 코치니까 코치나 다름 없습니다만 선수등록은 돼있으니까요. 95년 이랜드에서 1년을 뛰면서 가볍게 실업축구를 평정하고 수원에 FW로 입단, 28경기 11골 6도움으로 득점 순위 6위, 도움 순위 공동 7위에 랭크되었고 신인왕을 뽑는 기자단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박건하 선수가 신인왕에 등극하게 됩니다. 여담으로 96년에는 각종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는데요. 외국인 전설 라데 선수의 1시즌 10-10 달성 기록도 나오고요, 신태용 선수는 두경기 연속 해트트릭을 작성하며 득점왕에 등극 92년 신인왕 95년 MVP에 이어 96년 득점왕 까지 통산 개인 타이틀 3개를 독식하는 기록을 세웁니다. 앞서 이흥실 선수가 80년대 신인왕 MVP 도움왕 독식한 것에 이은 대기록이었습니다. 덧붙여 신태용 선수는 5시즌 연속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에 선발되는 동시에 천안 일화를 아시안클럽챔피언십 우승, 아프로-아시안클럽챔피언십 우승, 아시안수퍼컵 우승으로 이끌면서 선수로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보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박건하 선수 소개가 아니라 신태용 선수 찬양으로 도배되는 것 같군요 ;ㅅ; 진정하고.. 박건하 선수도 2년차 징크스에 흔들렸는데요. 97시즌 17경기 2골 4도움에 그쳤고 그 여파로 98시즌까지 22경기 2골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박건하 선수는 화려하게 99시즌 부활하며 수원의 첫 우승을 견인합니다. 39경기 12골 6도움을 기록했죠. 이후에도 팀의 주 득점원은 아니었지만 결코 없어선 안될 공격수로 수원에서 활약합니다. 수원이 워낙 외국인 공격진의 면면이 화려했기에 (샤샤,비탈리,산드로 ㅎㄷㄷ) 박건하 선수의 꾸준한 출장 기록은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2002시즌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전향하는데 성공한 박건하 선수는 이후로도 꾸준히 경기 출장을 이어가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1년동안 수원을 위해 뛰었고 앞으로도 수원을 위해 뛸 수원의 레젼드 no.01
부산으로서는 결코 잊지 못할 97시즌의 신인왕은 신진원 선수입니다. 사상 첫 시민구단을 표방한 대전시티즌에 입단한 MF로 대전이 첫 시즌 대전이 주체할 수 없는 하위권의 나락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97시즌 32경기 출장 6득점 1도움 특히 정규리그에서만 5골을 성공시키며 정규리그 득점순위 5위에 랭크되어 신인왕 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후 98시즌에는 32경기 출장 8골 3도움으로 대전의 미들진을 책임지는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합니다. 불행히도 99년 치명적인 부상으로 7경기 출장에 그쳤고 그 여파로 2000년에도 리그 26경기 출장 중 풀타임 소화는 9경기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6도움을 올리며 도움순위 6위에 랭크되는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결국 2001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신진원 선수는 전남으로 이적하게 됩니다. 대전이 재계약 하기엔 부담이 컸거니와 풀타임 출전도 불확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죠. 결국 예측대로 전남으로 이적한 신진원 선수는 26경기 출장 중 6경기만을 풀타임으로 소화하는데 그쳤습니다. 2골 1도움으로 공격 포인트도 기대이하였죠. 결국 2002년 8경기 출장을 끝으로 전남에서 다시 대전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전 복귀 이후도 예전의 전성기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2004년 시즌을 끝으로 일찍 프로 은퇴를 선언합니다.
98시즌 신인왕은 이동국 선수입니다. 에휴.. 괜히 한숨이 나오네요. 98년은 K리그 황금기였죠. 당시 신인왕 경쟁도 황금기(?)였습니다. 신인왕 후보부터 화려하기 그지 없으니까요. 안정환 박성배 이동국 백승철. 백승철 선수도 정말 비운의 선수지만 이때만 해도 포항의 보배같은 존재였었죠. 전설로 남은 울산과의 플레이오프 타임 휘슬 불기 직전의 환상적인 프리킥 골부터 시작해서 10골을 득점하며 득점순위 3위에 랭크되었고 박성배 선수도 전북에서 10골을 득점 다만 출전경기수가 백승철 선수보다 적기 때문에 득점순위 2위를 차지했었습니다. 이동국 선수는 15경기 출장 7골 2도움이었지만 청소년대표 차출로 공백이 있음을 감안했고 결정적으로 당시 이동국 선수의 인기가 막강했기에 기자단 투표를 통해 이동국 선수가 신인왕의 영예를 차지합니다. 참고로 안정환 선수는 17경기 5골 2도움이었습니다. 신인왕 이후 이동국 선수의 인생역정이야 더 써봐야 손만 아플뿐이지 다들 잘 아실테니 딱히 쓸 말도 없군요 ;; 다만 2001년 베르더브레멘 임대 후 첫 경기. 당시 자신의 앞길에 장미빛 미래만을 꿈꾸며 행복하게 필드를 뛰었던 이동국 선수의 모습을 지금 다시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끝나면 이동국을 보고 함께 웃고 울었으며 언젠가는 비상하기를 바라며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수많은 팬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이동국 선수 본인에게는 더더욱 그럴테구요.
99시즌 신인왕은 이성재 선수입니다. 부천의 화려했던 영광과 뒤이어 드리운 몰락의 그림자를 모두 겪으며 사라진 선수죠. 부천에서 FW로 데뷔 31경기 출장 9골 2도움을 기록했습니다. 독특한건 단 1경기도 풀타임을 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리그 통산 139경기 출장 중 19경기만 풀타임 출장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열거된 신인왕 중 제일 기록이 처지는 편이긴 합니다. 99시즌 당시 신인왕 후보가 이렇다할만한 선수가 없었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당시 신인왕 후보로 거론되던 선수는 진순진, 성한수, 김경일, 임중용 정도였습니다. 모두 부상으로 제대로 경기 출장도 못해본 선수들이었죠. 그랬기에 이성재 선수가 거저먹기로 신인왕에 올랐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록만으로 선수의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부천팬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선수에는 반드시 이성재 선수가 들어가니까요. 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실력을 갖췄지만 지속시간이 짧았다고 해두는게 맞을 겁니다. 2000년 시즌에도 39경기 출장 2경기만을 풀타임으로 뛰었으며 7골 2도움을 기록하며 부천팬들의 기대에 보답합니다. 그러나 2001년 9경기 출장 1골에 그치며 부진했고 2002년에는 15경기 1골 2003년에도 20경기 1골로 실망스러운 기록만을 남겼습니다. 이 3년간의 이성재 선수의 하향세는 부천 프론트 진의 자폭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막장 행보와도 일맥상통하죠. 결국 최후의 일격처럼 부천 프론트 진은 이성재를 방출시키고 이성재 선수는 2004년 부산으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부산에서도 리그 무득점, 컵대회에서 10경기 출장에 2골 2도움을 기록하며 부활의 찬가를 울릴 것이라 기대했었습니다만 부산에서 1시즌만에 방출 당합니다. 그리고 얼마안가 부천이 사라졌습니다. 울산에서 잠깐 뛰었지만 없느니만 못한 기록이기에 빼겠습니다.
칼럼작성 - BIFC 명예기자 박지훈(pakaji1.egloos.com)
부산아이파크 팬카페 BIFC
첫댓글 동국..ㅜㅜ
추가하자면 2000년 양현정, 2001년 송종국, 2002년 이천수, 2003년 정조국, 2004년 문민귀, 2005년 박주영, 2006년 염기훈... 2007년은? 김형일? 하태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