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정성수鄭城守-
리어카에서 젊은이가 사과를 팔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과 사세요 사과
기가 막혀요
사과를 들고 생각한다
사과
얼마나 붉고 탐스러운 말인가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소리
사람답고 짠한 말
그 말 뒤
동전 몇 닢에 정신없이 손을 뻗었던 일
누군가의 죽음 앞에 무심했던 일
저녁 강을 바라보며 한 사람을 미워했던 일
언제 한번 자존심을 버리고
사과다운 사과를 했던가
젊은이가 건네준 맛보기 사과 한 알을 들고
자신에게 조차 못했던 말을 꺼내어
사과를 한다
오래토록 사과를 들여다본다
□ 시작노트 □
사과의 목적은 상대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이성을 찾게 하기 위한 첫 번째 절차다. '분노'는 인간의 감정인 ‘희로애락’ 중의 하나다. 분노를 그대로 표출시키는 사람은 겉으로 온화한 척하면서 속으로 음흉한 사람에 비해서 순수한 것은 사실이다. '천 길 물 속 깊이는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미소 속에 뼈가 있다' 는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감정을 읽어 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의분이냐 광분이냐에 따라서 개인적 관심이나 사회적 대우가 달라진다. 그것은 공적이냐 사적이냐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사과를 요구하는 쪽의 분노는 대부분 기대 또는 이상과 현실과의 혼동에서 발생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상대의 감정을 단번에 읽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사과의 말은 붉다. 붉은 것은 달다
무릎에서
-정성수鄭城守-
잠들지 마라 내 무릎을 베고 있는 그대여 잠들지 마라
먼 길을 돌아 온 그대가
무거운 눈꺼풀을 내려놓으면
그대의 머리카락도 잠들 것이니
취하고 싶다
그대의 머릿 내음에 젖어들고 싶다
사는 일에 무릎을 자주자주 꿇던 내 지난날이
그대에게 무릎을 맡겼나니
잠들지 마라
그대가 꿈길을 따라가면 내 먼저 가서
길 가에 사랑 한 자락 깔고 앉아 그대를 맞으리라
가슴으로 안으리라
우리들의 이야기 끝나는 그 시간까지
그대여 잠들지 마라
내가 무릎을 내 주고 있는 동안 잠들지 마라
□ 시작노트 □
연인이라는 말만 만들어도 속눈썹이 젖어온다. 연인라는 말 속에는 한때 가슴속에 한 살림 차렸던 사람의 머릿결 냄새가 난다. 연인에게 듣고 싶은 말 ‘보고 싶다’ ‘사랑해’ ‘너밖에 없어’ ‘너를 믿어’ ‘네가 최고야’ 그러나 연인에게 절대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가령 ‘말해봐. 너에게 난 뭐야?’ ‘비밀 번호 알려줘’ ‘치이! 오늘 너무 재미없다’ ‘옛날의 걔는 말이야’ ‘너 살쪘구나?’ ‘넌 몰라도 돼! 내가 알아서 할게!’ ‘남자가 말야, 여자가 말야’ ‘우리 헤어지자, 하하하!’ 무의식중이라도 이런 말을 하면 그 순간 찢어지고 만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 다는 옛말. 허투루 듣지 마시라. 조석으로 해도 물리지 않는 말 ‘사랑한다!’는 그 흔한 말.
발
-정성수鄭城守-
더럽다 더럽다 해도 발처럼 더러우랴
별에 별것 다 밟았으니
뒤따라오는 발자국마다 냄새다
한 시절 길가에 주저앉아
눈물을 돌팍으로 찧어 내린 손보다도
치사한 발
냇물에 발을 씻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답답한 구두 속에서 고생했을
발아 고맙다
발바닥 뒤집히는 그날까지 남은 길 함께 가자
□ 시작노트 □
발은 우리 몸 중에서도 가장 천대받는 부분이다. 하루 종일 무거운 몸을 받들고 주인이 가자는 데로 묵묵히 간다. 햇빛도 들지 않는 구두 속에서 답답한 하루를 보낸다. 발은 더럽고 냄새 나는 부위다. '발가락의 때처럼 여긴다'는 속담도 있다. 양말을 벗은 발은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는다. 다만 하루 동안 걸어 온 흔적이 배어 있을 뿐이다. 흔적은 바로 피로다. 요즘 ‘발씻겨주기 운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학교․ 가정․사회에서 전개하는 발씻겨주기인 ‘발씻김 예식’ 즉 ‘세족례’는 원래 유목민遊牧民인 유태인들의 예절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 교외의 한 소년원에서 재소자 12명의 발을 씻어주었다. 이 가운데에는 여성과 무슬림이 포함 됐었다. 교황은 이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준 다음 발등에 입을 맞추고 강복降福했다.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고통과 아픔을 만져주는 일이다.
낙과
-정성수鄭城守-
태풍이 김 씨네 과수원을 쑥대밭을 만들었다
김 씨의 앙다문 입
한물진 냇둑이 터지듯
-으메 조합 빚은 우째 갚으라고?
금년 농사는 완전히 조졌다며
낙과들을 붙들고
미친듯이 울부짖는다
게버끔을 문 김 씨가 허옇게 눈을 뒤집더니
-나도 낙과다
소리치며
뉴턴의 만류인력은 조또 아니라고
히죽히죽 웃는다
□ 시작노트 □
비바람이 세차게 과수들을 흔들자 과일들이 때를 맞추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졌다. 낙과들이다. 이런 낙과들은 애당초부터 틀실하지 못하여 비바람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익기 전에 떨어질 운명에 놓인 것들이다. 벌레를 먹었거니 생육상태가 좋지 않는 과일 정도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과일나무는 반드시 과일이 익어야만 결실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스스로 자기가 훌륭하다고 자만하는 순간 바로 추락하게 된다. 과일나무가 과일을 껴안고 가을까지 묵묵히 비바람을 견디다 보면 어느덧 수확의 계절이 다가 오듯이 인간들도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자만하지 않으면서 겸허한 자세로 살아가야 때를 만날 수 있다. 어떤 과일도 설익은 채로 스스로 땅에 떨어지는 것들은 없다.
시한부 삶
-정성수鄭城守-
시한부 삶을 산다는 것은 작별할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작별할 시간이 있다는 것은
아직은 정리할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사조차 못하고 속절없이 떠나느냐
살아 있는 동안 사랑하자
후회 없는 삶을 위하여 지금 우리 눈을 맞추자
슬퍼하지 마라
여기는 약속의 땅이 아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바람 같은 생
잡은 손 놓는다고 눈물을 보이지 마라
가끔 사랑한다고 말해다오
뭉클한 한 순간을 위하여 남은 하루를 살겠다
□ 시작노트 □
언제까지 허락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시한부 삶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지금까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해왔는지 반문해 본다. 그것은 내 정체성의 확인이다. 그러나 내적 불만은 건강했을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가슴과 머리를 짓누른다. 시한부 삶을 받은 사람 중에는 마지막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사람, 맛있는 것 실컷 먹고 싶다는 사람 등 그 동안 못해본 것들을 해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내 시한부 삶은 여기까지 온 것을 감사하고 그 동안 체면과 예의 때문에 한번을 제대로 울지 못했던 울음 다 쏟아내고 싶다. 그리하여 이 세상 떠나는 날 그대의 따뜻한 손을 잡고 웃는 얼굴로 떠나겠다. 우리는 다 같이 시한부 인생이다. 다만 가야할 시간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첫댓글 여러편의시 감사합니다
좋은하루되시고
수고하셨습니다
운영장님 관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