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金起林(1908 ~ 미상)】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08년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임명동의 양반 가정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는 지주 김병연(金丙淵)의 1남 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1년 서울 보성고보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고 일본 도쿄 메이쿄 중학, 니혼대학 문학예술과를 거쳐 1929년 조선일보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1936년 도호쿠 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1939년에 졸업하였다.
김기림은 종래 1920년대 대한민국 시단을 지배하고 있던 내용 편향의 문학과 감상주의 문학의 지양을 외치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카프로 대변되는 계급문학과 백조파로 대변되는 감상적 낭만주의 시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시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기림이 주장한 새로운 시는 건강하고 명랑한 '오전의 시'이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근대적 감성을 담은 과학적 방법으로 쓰여진 시이다.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시는 기차, 비행기, 화물차 등의 근대적 사물을 다루면서 도시적 감각과 정서를 담은 근대성을 주된 정서로 다룬다. 또한 방법론적으로는 종래의 리듬 중시의 노래하는 시에서 벗어나 이미지와 의미, 음성 자질을 치밀하게 짜맞춘 과학적인 시이다. 문학사조론으로 볼 때는 차가운 이성을 강조하는 주지주의와 회화성을 강조하는 이미지즘의 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태준, 정지용 등의 모더니스트들과 함께 구인회 활동에 활발히 참여했으며, 시론, 평론 외에 실천적 창작도 활발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론가로서의 명성에 비해, 시의 문학적 성취는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0년대 모더니스트들 중에서는 정지용이 섬세한 언어 감각과 감정의 절제를 통한 생동감 있는 이미지의 창출로 가장 성공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방 이후는 모더니스트에서 일변하여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에 합류, 적극적인 현실 참여의 시를 쓰게 된다. 김기림뿐만 아니라 이태준, 정지용, 박태원 등 1930년대 모더니스트들의 상당수가 좌익 계열로 돌아서는 게 인상적인데, 그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이미 조선공산당 불법화 및 카프 해산 등으로 이념성의 문학이 사실상 금지되었던 시기였으므로 사상과 관계없이 내면의 문학으로 침잠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렇다고 소련을 지지하는 시를 내세우지 않았고 김구와 같은 남북협상파에 가까웠다. 미국과 소련 모두 경계해야하고 하루 빨리 통일된 정부를 가져야 한다는 포지션.
1948년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이 미군정의 탄압으로 와해되면서 상당수의 인사들이 월북하는 가운데, 김기림은 결혼해서 자식과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처지라 서울에 남아 대학 강단에서 시론을 강의하면서 후학 양성에 몰두해야 했다.
6.25 전쟁 발발 후 납북되었다. 이는 수필가 조경희가 부산에서 만난 김기림의 누나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소식을 들은 김기림의 누나는 조경희를 붙들고 거리에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조경희에 의하면 한강 인도교 폭파로 인해서 피난을 가지못한 김기림이 서울 사범대에서 회의를 마치고 을지로 방면으로 가던중 갑자기 지프차를 탄 2명의 남자(혹은 한명의 청년)가 찾아와서는 그를 서대문형무소로 끌고갔다고 한다. 이후 북한으로 납북되었는 것. 납북자들 대부분이 이후에라도 생사나 북한에서의 행적이 일부라도 확인되는 반면에 김기림은 아직까지도 생사가 확인되고 있지 않다. 일각에선 수감되어 있다가 인천 상륙 작전이후에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북으로 끌려가던중 사망한 이유로 생사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게 아닌가라고 보고있다.
일부에서 그가 납북된게 아니라 월북한 게 아니냐는 주장을 펴지만, 남은 기록들과 여러 정황들로 봤을때 김기림이 자의로 월북했을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우선 김기림의 정치성향이 좌파적이긴 했으나 박헌영류의 남로당쪽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 계열을 지지했다는 점이 꼽힌다. 이는 남로당과 조선문학가동맹이 불법화와 탄압으로 와해되면서 임화나 김남천은 월북했지만, 김기림은 월북하지 않고 남한에 남아 대학들에서 강의를 한 김기림의 행적을 통해서도 알수있는데 월북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남아있었단 점에서도 짐작할수 있다. 또한 자진 월북이라면 가족들을 안데려갈 이유가 없을텐데 가족들은 남겨두고 혼자갔다는 점, 북한에서의 행적은 물론 생사도 확인되지 않으며, 다른 월북문인들과는 달리 대접을 받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의 월북이 아닐것이라는 근거로 제시된다.
김기림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설들만 남아있다. 우선 58년 간첩으로 체포된 북한군의 증언으로 북으로 끌려간 김기림이 정지용과 더불어 집필금지 명령을 받았다는 설이다. 이는 김기림이 해방이전 모더니즘 시를 썼는데 이런 모더니즘 시들이 북한 입장에선 퇴폐적으로 간주되어서 집필금지 명령을 받았단 것이다. 그러나 이 북한군의 증언은 정지용이 북으로 끌려가던중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게 유력한 정설로 받아들여지면서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이 북한군이 김기림의 일은 정확하게 말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자의적으로 설명했거나 혹은 들은 확인되지 않은 풍문을 사실로 말한 게 아닌가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둘째는 김기림이 북한에 끌려가자마자 투옥되었는데 북한에 남아있던 친척들과 제자들,지인들이 탄원해서 풀려났다는 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석방된 김기림은 평양 극장의 말단직원으로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던중 남편과 불화로 별거중이던 장내 아나운서와 사랑에 빠져서 연애를 했는데 이게 북한 당국에게 들켜서 자숙해야 할 사람이 연애질이나 한다면서 다시 재수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뒷받침할만한 근거는 없다.
현재로선 김기림이 북으로 끌려가던중 정지용과 마찬가지로 폭격으로 사망한탓에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것이란게 가장 유력한 설명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