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의 문헌서원과 관련 있거나 관심 있는 분들에게 알림. 이성중의 한산군수 재직기간을 자세히 알려면, 먼저, 坡谷 李誠中의 柳川 韓俊謙이 辛酉年(광해군13년, 1621년)에 지은 묘지명과 龍洲 趙絅이 甲午年(효종5년, 1654년)에 지은 묘갈문과 淸沙 金在魯의 壬午年(영조38년, 1762년) 시장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을해년(선조8년, 1575년) 동서파동이 일어 나 한산군수로 갔고 신사년(선조14년, 1581년) 의정부 검상으로 복귀 하였다고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사년(1581년, 8월 파곡 이성중이 모친상을 당해 부친과 합장할 때 묘지명을 지은 친구 省菴 金孝元에 의하면 이성중의 관직은 의정부 사인과 지제교 춘추편수관을 겸하고 있습니다. 신사년 초부터 의정부 검상으로 복귀하여 곧 사인으로 승진하였고 8월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휴직하였습니다. 또 1640년 인조18년 경진년 문집 坡谷遺稿를 발간 할 때 발간사에서 손자인 李命雄이 조부의 한산군수 재직 기간은 병자년(선조9년 1576년) 에서 신사년(선조14년 1581년) 이전까지 라고 밝혔고. 동서인 尹國馨(윤선각, 선조조 판서))의 회고록 문소만록 중후반부분에서 파곡의 한산군수 재직 기간을 위와 동일하게 말하고 있으며 주변 인물 즉 동인, 남인 동아리인 공저 이성중 형제와 성암 김효원, 추연 우성전, 김우옹 허봉등등에 대한 자세한 인물평과 을해년 동서파동 사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으며 문소만록 초반부에서는 자신이 목은의 외손이며 신묘년 이성중 후임으로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한산을 순시하면서 목은 묘역을 참배하고 서원은 이성중이 건립하였다고 밝히고 있으며 자신의 아들 경립이 어사로 가서도 참배 하였다고 합니다. 윤경립의 어사 활동기간을 살펴보니 임진왜란이 일어 난 뒤부터였고 충청도관찰사로 간 것은 문헌서원이 새로 세워졌다는 1611년이었습니다. (한국고전번역원 한글번역 대동야승의 윤국형저 갑진만록과 문소만록) 또 이성중의 문집 파곡유고를 살피면, 신감사와 수창한 시가 많아 자세히 살펴 본 바 어성 申湛이었으며 파곡이 한산에 부임 한 2년차인 1577년 충청감사로 부임하였고 1578년 3월 병가로 휴직 중 고향 한산에 머물며 폐를 끼쳤다하여 1578년 4월 파직되어 파곡이 떠나고 없던 1581년까지 고향인 한산에 계속 머물다 1582년 임오년부터 관직에 복귀하였는데 아계 이산해의 신담 묘비글과 파곡유고를 대조해도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파곡유고에 한산군수로서의 생활이 자세하게 실려 있으며 년차를 알 수 있는 시가 있어 1576년부터 1580년 말 까지 재직 하였다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한산군수 재직은 병자년(선조9년,1576년) 음력 1월부터이며, 봄 3개월은 부모님 생각하여 참고 부임하여(사직서내고 싶지만) 억울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마침내 병이 나서 3년간 자주 병석에 누워 있었습니다. 한양을 벗어 난 적 없이 바쁘게 화려한 삶을 살다 한적한 시골 수재로 가족 없이 홀로 부임한 첫 해는 일도 적어 견디기 힘들었으나 1577년부터는 충청감사 신담이 와서 위로해주고 1577년 봄 이웃 서천군수로 동아리 친구며 대과급제 동기인 息庵 黃暹이 부임하여 자주 어울리게 됩니다. 마음을 바꿔 병을 다스리며 의학을 공부하여 병을 스스로 치료하다보니 주민에게 의술을 베푸는 경지에 이르렀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유학을 증진시키는데 힘쓰는 한편 임금의 부를 날을 대비하여 경서공부에도 열중합니다. . 현 한산면사무소 앞에는 이임 이듬 해 1581년 신사년에 고을 주민들이 세운 송덕비가 있습니다. 백과사전에 1575년 을해년 동서파당 사건 때문에 한산군수로 왔다는 기록은 그 사건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을해년 부임해서 상당기간 근무 했을 것으로 생각 할 수 있으나 을해년 인사 조치는 음력 10월 말 겨울에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한산은 을해년 동서파당 사건으로 오게 된 것이지만 그 다음 해 1576년 병자년 초부터 고을을 다스리기 시작 하였습니다. 실록의 1576년 3월 3일 철산군수 발령은 오류로 을해년 말에 일어난 일을 선조실록이 임진왜란에 유실되어 석담일기등에서 옮겨 적다보니 날짜가 맞지 않습니다. 실록의 1576년 8월 16일 홍문관 부교리 제수는(한산을 떠났다는) 잘못 된 인물정보로 백과사전에도 실려 있어 인용 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좀 더 자세하고 충실하게 문헌서원기를 정리하고자 자료를 찾는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자료인 것입니다. 당시 인물들의 문집이나 파곡유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당시 정황을 잘 알 수 없습니다. 병자년 1576년은 한산군수로 부임 한 첫 해인데 8월 16일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 되어 떠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뒤로 계속 관직 이력이 정리되어 있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한산군수 재직 기간은 불과 8개월입니다. 또 1576년 3월 3일 철산군수 기록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한산군수로는 1575년 10월 말-1576년 3월 3일까지 4개월 있었다는 말이 되고 철산군수로는 1576년 3월 3일부터 1576년 8월 16일 까지 5개월 재직한 것이 됩니다. 4개월 혹은 8개월 근무하고 떠난 수령에게 몇 년 지난 1581년에 송덕비를 세우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파곡 이성중이 한산군수로 오게 된 내막을 살피자면, 이율곡의 석담 일기등을 보면 1575년 을해년 10월 말(겨울 음력) 지나친 동서 대결로 이른 바 동인과 서인의 영수인 성암 김효원과 심의겸을 외직으로 보낼 때 심의겸은 외척이라 개성부사로 보내고 김효원은 함경도 두만강변 국경지대 경흥부사로 보내자 형평에 어긋난다며 동인 측에서 크게 반발 하였고 김효원의 세력을 꺾기 위해 서인 측에서 친구인 이성중과 친척인 허봉 도 탄핵하여 이성중이 평안도 압록강변 위원군수로 가자 율곡 이이가 김효원도 죄 줄일 없는데 허물없는 이성중을 탄핵 한 것은 심하다며 서인측 인사들을 나무랐지만 적극 나서지 않아 율곡은 동인측의 거센 비난을 받았고 곧 공격당했으며 이성중은 특명이라 즉시 출발하여 2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이들이 부임 하는 도중에 조정에서는 서생들에게 국경지대를 맡길 수 없다며 율곡등이 건강이 나빠진 김효원에게 선처를 호소하여 경흥부사에서 부령부사로 조정 되고 며칠 후 다시 최종 강원도 삼척부사로 조정 되었습니다. 형평에 따라 추가로 이성중등도 조정 된 것으로 보이는데 위원군 동헌에서 남긴 시에 높은 고개를 수없이 넘어 왔다 하고 다시 철산군수로 조정 되어 부임 도중 도착 전에 다시 한산군수로 조정되어 부임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를 많이 쓰던 사람인데 철산군 동헌에서 남긴 시가 없는 것으로 보아 부임하지 않았으며 구성 도중이란 시에 남쪽 (즉 한산군을 지칭)으로 가고 있습니다. 위원군은 평안도 국경지대로 험난한 지형이고 거리가 멀어 한산으로 부임하기 까지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보이며 수천리길 오간 것은 모두 한겨울 2개월 사이에 일어 난 일들로 겨울이라 섣달 말에 부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얼음판 길이니 역참에서 좋은 말을 계속 갈아탔어도 수일내로 오가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1576년 8월 16일 홍문관 부교리 제수는 아마도 동인측 이조전랑이나 경연관등이 대궐로 복귀시키려고 임금께 조심스레 천거 하였으나 거절 되었거나취소된것으로보입니다. 당시 신진사대부들의 추앙을 받던 김효원의 세력을 꺾으려고 김효원이 장원급제 한 인재임에도 중간 중간 추천을 받아드리지 않았기에 그 후 평생 삼사요직에 오르지 못한 것이며 승진시키지 않아 외직으로도 낮은 변두리 고을을 다스리게 되었고 그가 매우 근신하며 치적을 쌓았어도 알아주지 않아 불우하게 49세로 일생을 마쳤을 정도로 선조대왕의 파당에 대한 의지가 단호했습니다. 파곡 또한 후일에 홍문관 경연관, 이조참의, 이조참판에 재직했으므로 당연히 김효원을 추천 했을 것이며 유성룡등 김성일등도 적극 추천하였을 것 입니다. 이성중 한산군수도 재직 중간에 대궐 서찰 한 통 받아 본 적 없고 임금의 정치적인 계략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파곡의 집에 동인 동아리가 자주 모였다는 점 이외에는 상대당을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청렴하고 허물없는 사람으로 평가 받던 사람이라 탄핵이 과했다는 평이 있었으므로 동료들이나 파곡 일가도 구명에 나섰으리라 여겨집니다. 파곡이 부임 전 중부 순천도정에게 불려가 하루 종일 꾸중 들었고 부임 다음 해 세상을 떠났고 계부 홍천수에게 노수신이 편지 보낸 것으로 보아 소재 노수신과 한마을 친구인 숙부들이 구명 운동 벌였을 가능성은 있으나 노수신도 김효원등을 외직으로 내보낼 것을 주장한 사람이라 둘 다 한마을 후배들이고 친구 자제들인데 파곡만 형평성에 어긋나게 그렇게 빨리 대궐로 돌아가게 도와주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그보다 한마을 살 던 선조대왕비 의인왕후와 친척이고 총애 받던 종친인데도 만 5년간 철저히 임금에게 버림 받았습니다. 어느 날 표문을 올려 임금의 마음을 얻었고 마침내 돌아가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성중등 동인 측 이조관리가 전원교체 되는 등 서인에게 주도권이 넘어가자 친구인 유성룡과 김성일등 동인들이 반발하여 사퇴하고 고향집에 내려가 돌아오지 않고 시위 하였고 그후 파동에 파곡은 외직으로 내쳐져 부임 도중 들리는 친구들에게 임금 사랑 독차지하기 어렵고 영원하지도 않구나 하며 탄식하였습니다.(유성룡 운암일기, 후광세첩, 이이의 석담일기, 이이의 율곡집, 유희춘 미암집, 연려실기술, 국조보감 참조.) 여러 자료나 정황상 파곡 이성중은 한산에서 결코 4개월, 8개월만 머문 것이 아니며 특명으로 위원군수로 부임 한 적은 있으나 불과 며칠이며 철산군수로 간 적은 없으며 5년간 한 번도 한산군수 자리를 비운 적이 없습니다. 이성중은 한산에 1575년 을해년 섣달그믐 도착 혹은 1576년 병자년 1월 초 부임하여 만 5년 근무하고 1580년 경진년 12월 말 이임 하였습니다. 지금은 높은 학문과 절개로 추앙 받는 목은이지만 이태조의 개국에 협조하지 않은 인물로 조선 후대 임금들이 꺼리고 일부 학자들마저 불교를 살피고 학술이 정미하지 않다느니 폄하 하였고 선조대왕이 유학을 증진시켜 국가 부흥의 기틀을 삼으려 힘쓰는 사이 전국에 6-70개의 서원이 난립하였으나 정작 목은은 높게 받들어지지 않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문중이나 사림과 함께 목은사당을 중수하여 주민들에게 선현의 고을로 자부심을 일깨워주고 직접 강의하며 유학을 증진시키려 애쓴 한산군수 이성중의 5년 노고가 파묻히지 않았으면 합니다. 단순히 미루어 짐작해도 임금의 미움 받고 쫓겨 온 신하로서 그 일을 추진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지며 다른 사람들이 그 일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평가해도 좋으나 후손으로서는 답답하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