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대 복음사도 만나 처음 세례받은 조선인들 만주서 ‘한국 신앙공동체’ 꽃피웠다
한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노력은 여러 갈래로 이루어져 갔다. 앞서 소개했던 귀츨라프나 토머스 외에도 조선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그중 한 사람이 만주에 주재했던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이었다. 그는 비록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했으나 만주에서 조선 선교를 위해 후원했다. 그는 1855년 런던선교회(LMS)의 파송을 받고 중국에서 일했지만 과로로 2년 뒤 귀국했다.
1863년부터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 파송으로 다시 중국에서 사역했다. 1865년 무역을 목적으로 지푸에 온 조선의 천주교인 김자평(金子平)과 최선일(崔善一)을 통해 천주교 박해 소식을 접한 그는 조선 선교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토머스 목사의 두 차례에 걸친 내한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가 북중국, 만주, 동몽고와 한국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두 권의 책을 엮은 것을 보면 한국에 관한 그의 관심을 헤아릴 수 있다.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소속 의료선교사 다우드웨이트(Arthur W Douthwaite)가 1883년 한국을 방문하고 선교를 시도한 일이 있는데, 이것도 윌리엄슨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로스와 매킨타이어
비록 우리나라에 입국하지는 못했으나 한국인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선교활동은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 1837∼1905)와 존 로스(John Ross, 羅約翰, 1841∼1915)였다.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는 1862년부터 중국 선교를 시작했다.
1871년 이후로는 윌리엄슨의 지도로 산둥반도를 주 선교지로 정하고 만주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1871년 중국으로 파송된 매킨타이어와 1872년 중국에 온 존 로스 목사는 조선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록 로먼드 지방의 루스(Luss) 출신인 매킨타이어는 에든버러의 연합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하고, 1865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871년 중국으로 왔고, 후에 로스의 여동생과 결혼하게 된다. 매킨타이어보다 4세 연하인 로스 또한 연합장로교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1872년 2월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해 3월 25일에는 스튜어트(M A Stewart)와 결혼한 후 1872년 가을 중국에 왔다.
이미 산둥반도에는 여러 선교사들이 있었으므로 그는 만주지방 선교를 계획하고 잉커우(營口)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그는 중국어를 공부하며 중국의 관습과 문화를 익혀갔다. 그해 그의 부인이 첫 아기를 출산하다가 사망하게 되자 아이의 양육을 위해 누이동생 캐서린을 임지로 오게 했는데, 그가 독신으로 있던 매킨타이어와 결혼함으로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처남·매부지간이 된 것이다. 이 두 선교사는 윌리엄슨으로부터 조선에서의 종교적 상황과 토머스의 순교 사실을 듣고 한국인과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의 첫 수세자 세 청년
로스는 압록강 상류인 린장(臨江)까지 여행한 일이 있으나 조선에 입국할 수는 없었다. 조선에 대한 영적 부담을 느낀 그는 한국인과 접촉하기 위해서 1873년 10월 잉커우를 떠나 가오리먼(高麗門)을 방문한 일이 있다. 가오리먼은 남만주 펑황청(鳳凰城) 투카라는 곳에 있는 책문(柵門)의 하나로 의주에서 약 120리 되는 곳이었다.
이곳은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지역으로 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로스는 조선인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1874년 4월 말에 다시 가오리먼을 방문했다. 거기서 한국인 이응찬(李應贊)을 만나게 되었고, 곧 그를 통해 한글을 배우게 된다. 또 이응찬의 도움으로 1875년에는 한국인 김진기(金鎭基), 이성하(李成夏), 백홍준(白鴻俊, 1848∼1893) 등 세 사람의 의주청년과 접촉하게 된다.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의 궁극적 목표는 한글성경 번역이었다. 이 일을 위해 한국인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네 사람의 조선청년은 신앙을 갖게 되었고, 1879년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한국인의 첫 수세였다.
존 로스는 이 역사적 사건을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 선교지(United Presbyterian Missionary Record)에 이렇게 보고했다.
“매킨타이어는 네 사람의 조선인 유생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이야말로 장차 거두어들일 풍성한 수확의 첫 열매라고 확신한다. 현재로서는 조선이 서방세계와 철저히 단절되어 있지만 곧 쇄국의 빗장이 풀릴 것이다. 천성적으로 조선인은 중국인보다 덜 악하고 종교성이 깊으므로 기독교가 전파되기만 하면 급속도로 확산될 것으로 기대한다.”
곧 인삼 행상인이었던 서상륜(徐相崙)도 선교사와 접촉하게 되었고 1879년 만주 뉴좡(牛莊)에서 존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883년에는 서간도의 한인으로서 성경 인쇄를 위해 채용되었던 김청송(金靑松) 또한 세례를 받음으로 한국인 수세자는 6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이 공식적인 한국인 첫 수세자로서 후에 언급할 한국어 성경 번역에 기여하게 된다.
한국인 수세자들과 함께 만주와 그 변방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인에 의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갔다. 한국인들은 적어도 1879년 세례받기 이전부터 정기적인 집회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만주에서의 첫 신앙공동체였다.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내한하기에 앞서 한국인 스스로가 만주 지방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기독교영입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