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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 연표
환국 환인 연표(BC 7198년 - BC 3898년)
1 안파견(安巴堅)
2 혁서(赫胥)
3 고시리(古是利)
4 주우양(朱于襄)
5 석제임(釋提壬)
6 구을리(邱乙利)
7 지위리(智爲利)
배달국 환웅 연표 (BC 3898 - BC 2333)
1 거발환(居發桓)
2 거불리(居佛理)
3 우야고(右耶古)
4 모사라(慕士羅)
5 태우의(太虞儀)
6 다의발(多儀發)
7 거련(居連)
8 안부련(安夫連)
9 양운(養雲)
10 갈고(葛古)
11 거야발(居耶發)
12 주무신(州武愼)
13 사와라(斯瓦羅)
14 자오지(慈烏支)(치우천황)
15 치액특(蚩額特)
16 축다리(祝多利)
17 혁다세(赫多世)
18 거불단(居弗檀)
단군조선 단군 연표(BC 2333 - BC 238)
1 왕검(王儉) 단군
2 부루(扶婁)
3 가륵(嘉勒)
4 오사구(烏斯丘)
5 구을(丘乙)
6 달문(達門)
7 한율(翰栗)
8 우서한(于西翰)
9 아술(阿述)
10 노을(魯乙)
11 도해(道奚)
12 아한(阿漢)
13 흘달(屹達)
14 고불(古弗)
15 대음(代音)
16 위나(尉那)
17 여을(余乙)
18 동엄(冬奄)
19 구모소(구牟蘇)
20 고홀(固忽)
21 소태(蘇台)
22 색불루(索弗婁)
23 아홀(阿忽)
24 연나(延那)
25 솔나(率那)
26 추로(鄒魯)
27 두밀(豆密)
28 해모(奚牟)
29 마휴(摩休)
30 내휴(奈休)
31 등올(登올)
32 추밀(鄒密)
33 감물(甘勿)
34 오루문(奧婁門)
35 사벌(沙伐)
36 매륵(買勒)
37 마물(麻勿)
38 다물(多勿)
39 두홀(豆忽)
40 달음(達音)
41 음차(音次)
42 을우지(乙于支)
43 물리(勿理)
44 구물(丘勿)
45 여루(余婁)
46 보을(普乙)
47 고열가(高列加)
북부여(고구려) 연표 (BC 239-BC 58)
1 해모수(解慕漱)
2 모수리(慕漱離)
3 고해사(高奚斯)
4 고우루(高于婁)
5 고두막(高豆莫)
6 고무서(高無胥)
7 고주몽(高朱蒙)
동부여(BC86-AD22)
1 해부루(解夫婁)
2 금와(金蛙)
3 대소(帶素) -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멸망
고구려 연표(BC37-서기668)
시조 동명성왕(BC 37-BC 19) 해모수와 유화 고주몽, 다물도
2대 유리왕(BC 19-AD 18) 유리의 지혜, 황조가, 태자 해명과 황룡왕
3대 대무신왕 (18-44) 부여 왕 대소의 죽음,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4대 민중왕(44-48)
5대 모본왕(48-53)
6대 태조왕(53-146) 아우 수성과 백고, 수성의 반심
7대 차대왕 (146-165) 재상 명림답부의 모반
8대 신대왕(165-179) 신대왕의 선정, 명립답부의 승리
9대 고국천왕(179-197) 어비류와 좌가려의 반란, 을파소 등용, 진대법 실시
10대 산상왕 (197-227) 형제(발기, 연우, 계수)간의 왕위다툼
11대 동천왕(227-248)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 밀우와 유유의 충성심
12대 중천왕(248-270)
13대 서천왕 (270-292) 동생 안국군 달고의 숙신족 정벌
14대 봉상왕(292-300) 국상 창조리의 충언과 반역
15대 미천왕(300-331) 미천왕 을불의 고행
16대 고국원왕(331-371) 연나라 모용황의 침략,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
17대 소수림왕(371-384) 불교와 승려 순도, 태학 설립
18대 고국양왕(384-391) 신라와 수교
19대 광개토대왕(391-413) 영토확장
20대 장수왕(413-491) 북연 풍홍 정벌, 백제 개로왕을 죽임
21대 문자명왕 (491-519) 부여합병
22대 안장왕(519-531)
23대 안원왕 (531-545)
24대 양원왕(545-559) 장안성 축조
25대 평원왕(559-590) 장안성 천도,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26대 영양왕(590-618) 수양제의 침입,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27대 영류왕(618-642) 천리장성 축조, 연개소문의 반역
28대 보장왕(642-668) 당태종의 침입, 안시성 양만춘의 선전, 연개소문의 죽음과 그의 아들들의 다툼. 고구려 패망
백제 왕 연표(BC 18 - AD 660년)
1대 시조 온조왕(BC 18-AD 28) 고주몽-온조-비류, 마한 정벌
2대 다루왕(28-77) 말갈과의 전투
3대 기루왕(77-128) 봄과 여름에 심한 가뭄
4대 개루왕(128-166) 아찬 길선의 반란, 도미의 처
5대 초고왕(166-214) 신라와의 전투
6대 구수왕(214-234) 말갈과 신라와의 전투
7대 사반왕 (234)
8대 고이왕(234-286)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시 낙랑과 전투
9대 책계왕(286-298) 대방과 연합으로 고구려에 대항, 낙랑 침입시 전사
10대 분서왕(298-304) 낙랑과 전투 및 낙랑의 자각에 암살당함
11대 비류왕(304-344) 내신좌평 우복 북한성에서 반란
12대 계왕(344-346)
13대 근초고왕(346-375) 고구려왕을 전사시킴, 박사 고흥의 서기 편찬
14대 근구수왕(375-384) 태자의 말발굽 자취
15대 침류왕(384-385) 진나라 호승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전래
16대 진사왕(385-392) 고구려 광개토왕 침입
17대 아신왕(392-405) 왜국과 우호
18대 전지왕(405-420)
19대 구이신왕(420-427)
20대 비유왕(427-455)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형성
21대 개로왕(455-475) 고구려 장수왕에게 전사
22대 문주왕(475-477) 탐라국의 조공, 병관좌평 해구에 의해 시해당함
23대 삼근왕(477-479) 해구, 연신의 반란
24대 동성왕(479-501) 신라와 혼인정책, 백가에게 시해당함
25대 무령왕(501-523) 좌평 백가의 반란
26대 성왕 (523-554) 고구려와 전투, 신라와의 화친과 전투(부상)
27대 위덕왕(554-598) 신라, 고구려와 전투
28대 혜왕(598-599)
29대 법왕(599-600) 살생금지등 불교의 교리를 충실히 지킴
30대 무왕(600-641) 신라 장군 무은과 귀산의 패배, 왕흥사 완성
31대 의자왕(641-660) 윤충과 품석, 유신과 의직, 성충의 간언, 멸망의 징조, 방어에 대한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 계백의 황산벌전투, 나당연합군에 멸망
신라 왕 연표(BC 57 - AD 935년)
1대시조 혁거세(BC 57-AD 4) 거서간, 시조의 신화, 박혁거세와 알영
2대 남해(4-24) 차차웅, 왜국과 낙랑과의 전투, 석탈해 등용
3대 유리(24-57) 이사금
4대 탈해(57-80) 탄생의 전설, 김알지와 계림
5대 파사(80-112) 가야와 전투 및 영토확장
6대 지마(112-134) 왜국과 화친
7대 일성(134-154)
8대 아달라(154-184) 아찬 길선의 반역, 연오랑 세오녀
9대 벌휴(184-196)
10대 나해(196-230) 포상팔국과 백제와의 전투
11대 조분(230-247) 감문국, 골벌국 정벌
12대 첨해(247-261) 백제의 침입
13대 미추(262-284) 김알지의 후손
14대 유례(284-298) 왜국의 침입
15대 기림(298-310) 국호를 신라로 칭함
16대 흘해(310-356) 왜국과 혼인 정책
17대 내물(356-402) 복병으로 왜병격퇴, 백제장수 투항, 대고구려에 볼모정책
18대 실성(402-417) 왜국에 미사흔을, 고구려에는 복호를 볼모보냄, 시해당함
19대 눌지(417-458) 마립간, 자객과 눌지, 박제상의 노력으로 미사흔 복호 환국, 묵호자가 불교전래
20대 자비(458-479) 왜국에 대승, 백제와 화친하여 고구려에 대응
21대 소지(479-500) 백제, 가야와 연합전선, 왕과 날사군의 여자 벽화
22대 지증왕(501-514) 순장금지, 왕호사용,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23대 법흥왕(514-540) 가야와 혼인, 이차돈의 순교, 살생금지, 가야항복
24대 진흥왕(540-576) 백제와 화친, 거칠부 역사책 편찬, 우륵과 가야금, 황룡사 건축, 사다함의 전공, 원화와 화랑
25대 진지왕(576-579) 백제와 전투
26대 진평왕(579-632) 대세와 담수와 구칠, 원광법사와 걸사표, 수양제, 당고조와의 외교정책, 유신이 고구려에 대승
27대 선덕여왕(632-647) 선덕여왕의 지혜, 백제의 침입과 김춘추의 대고구려 외교정책, 당태종과 연개소문, 김유신의 백제공격
28대 진덕여왕(647-654) 백제의 침입과 김유신의 방어, 김춘추의 대당 외교
29대 무열왕(654-661) 고구려의 침입, 백제와의 전투에서 반굴과 관창의 죽음,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 멸망, 백제 부흥군과 전투
30대 문무왕(661-681) 백제의 저항군 진압, 탐라국 항복, 신라에 계림 대도독부 설치, 백제의 부여풍, 복신, 도침의 저항, 연정토의 항복, 고구려 보장왕의 항복,
삼국통일
31대 신문왕(681-692) 대신들의 반란
32대 효소왕(692-702)
33대 성덕왕(702-737) 당 현종과 협력하여 발해를 침략했으나 실패
34대 효성왕(737-742)
35대 경덕왕(742-765)
36대 혜공왕(765-780)
37대 선덕왕(780-785) 김지정 주살하고 왕위에 오름
38대 원성왕(785-798) 독서삼품과 시행, 김현감호
39대 소성왕(798-800)
40대 애장왕(800-809) 불사신축 금지
41대 헌덕왕(809-826) 김헌창, 김범문의 반란
42대 흥덕왕(826-836) 장보고 청해진대사
43대 희강왕(836-838) 숙질간 왕위다툼
44대 민애왕(838-839)
45대 신무왕(839) 장보고의 도움으로 우징 왕이 되다.
46대 문성왕(839-857) 장보고와 염장, 장보고의 난
47대 헌안왕(857-861)
48대 경문왕(861-875) 최치원이 당에서 등과
49대 헌강왕(875-886) 왕건 탄생, 최치원 귀국
50대 정강왕(886-887)
51대 진성여왕(887-897) 향가집 삼대목 편찬, 궁예의 명주 습격과 장군호칭 사용, 견훤의 후백제 건국
52대 효공왕(897-912) 궁예 송악(마진, 왕으로 칭함)에 도읍했다가 철원(태봉)으로 천도, 양길의 패배, 견훤의 대야성전투 실패
53대 신덕왕(912-917) 견훤의 대야성 공격 실패
54대 경명왕(917-924) 궁예 파하고 왕건 추대, 고려와 수교, 견훤의 대야성 공격 성공, 신라의 삼대보물
55대 경애왕(924-927) 견훤과 왕건 화친실패,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왕을 죽이고 새 왕을 세움
56대 경순왕(927-935) 신라의 항복, 견훤 왕건에 항복,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
발해 왕 연표(渤海, 서기 698 ~ 서기 926)
1대 시조 고왕(698-719)
2대 무왕(719-737)
3대 문왕(737-793)
4대 폐왕(793)
5대 성왕(793-794)
6대 강왕(794-809)
7대 정왕(809-812)
8대 희왕(812-817)
9대 간왕(817-818)
10대 선왕(818-830)
11대 왕(이진 831-857)
12대 왕(건황 857-871)
13대 현석(871-894)
14대 위계(894-906)
15대 인선(906-926)
금광 가야(가락국)
1대 시조 수로왕(AD115-BC 42
2대 거등(42-199)
3대 마품(199-253)
4대 거즐미(253-291)
5대 이사품(291-346)
6대 좌지(346-407)
7대 취히(407-421)
8대 질지(421-451)
9대 경지(451-492)
10대 구형(492-521)
고려 왕 연표(918~1392)
1대 시조 태조(918-943) 훈요십조
2대 혜종(943-945) 왕규의 난
3대 정종(945-949)
4대 광종(949-975)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5대 경종(975-981) 전시과 제정
6대 성종(981-997) 관제개혁으로 중앙집권적 봉건제도 확립(사헌부, 중추원)
7대 목종(997-1009) 강조의 정변
8대 현종(1009-1031) 최질의 난(최초의 무신의 난), 강감찬의 귀주대첩, 대장경
9대 덕종(1031-1034)
10대 정종(1034-1046)
11대 문종(1046-1083)
12대 순종(1083)
13대 선종(1083-1094)
14대 헌종(1094-1095)
15대 숙종(1095-1105)
16대 예종(1105-1122)
17대 인종(1122-1146)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18대 의종(1146-1170) 정중부의 난, 이의방의 난
19대 명종(1170-1197)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 명학소의 난, 최충헌
20대 신종(1197-1204) 만적의 난
21대 희종(1204-1211)
22대 강종(1211-1213)
23대 고종(1213-1259) 저고여 피살사건, 8만대장경을 조판
24대 원종(1259-1274) 삼별초의 난
25대 충렬왕(1274-1308)
26대 충선왕(1308-1313)
27대 충숙왕(1313-1330, 1332-1339)
28대 충혜왕(1330-1332, 1339-1344)
29대 충목왕(1344-1348)
30대 충정왕(1348-1351)
31대 공민왕(1351-1374) 쌍성총관부 폐지, 명사살해사건
32대 우왕(1374-1388) 철령위 사건, 최영, 위화도회군
33대 창왕(1388-1389)
34대 공양왕(신종 1389-1392) 정몽주 피살
조선 왕 연표(서기 1398 ~ 1910)
1대 시조 태조(1392-1398)
2대 정종(1398-1400)
3대 태종(1400-1418)
4대 세종(1418-1450)
5대 문종(1450-1452)
6대 단종(1452-1455) 이징옥의 난
7대 세조(1455-1468) 훈구파, 이시애의 난
8대 예종(1468-1469)
9대 성종(1469-1494)
10대 연산군(1494-1506) 무오사화, 조의제문, 갑자사화, 중종반정
11대 중종(1506-1544) 삼포왜란, 기묘사화
12대 인종(1544-1545)
13대 명종(1545-1567) 을묘왜변, 임꺽정의 난
14대 선조(1567-1608) 정여립의 난, 임진왜란, 정유재란
15대 광해군(1608-1623) 모문룡사건, 인조반정
16대 인조(1623-1649)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17대 효종(1649-1659)
18대 현종(1659-1674)
19대 숙종(1674-1720)
20대 경종(1720-1724)
21대 영조(1724-1776) 이인좌의 난
22대 정조(1776-1800) 조선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 김범우
23대 순조(1800-1834) 신유박해, 황사영 백서사건, 홍경래의 난
24대 헌종(1834-1849)
25대 철종(1849-1863) 진주민란
26대 고종(1863-1907)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수신사, 신사유람단, 영선사 파견, 만인소 사건, 임오군란, 우정국 사건, 갑신정변, 거문도 사건, 교조 신원운동, 동학운동, 청일 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 만민공동회, 국채 보상운동, 헤이그 특사사건
27대 순종(1907-1910)
조선 총독 연표
1대 테라우치 마시다케 (1910.10.1-1916.10.15)
2대 하세가와 요시미치 (1916.10.16-1919.8.11) 토지사업, 무단통치
3대 사이토 마코토 (1919.8.12-1927.4.14) 문화통치
임시대리 우가키 가즈시게 (1927.4.15-1927.12.9)
4대 야마나시 한조 (1927.12.10-1929.8.16) 조선총독주 의옥 사건
5대 사이토 마코토 (1929.8.17-1931.6.16) 문화통치
6대 우가키 가즈시게 (1931.6.17-1936.8.4)
7대 미나미 지로 (1936.8.5-1942.5.28) 내선일체 주장, 강제징용, 위안부 징용, 일본어 사용, 창씨개명, 황국신민화 구호, 민족 말살정치
8대 고이소 구니아키 (1942.5.29-1944.7.23 학도병 제도 실시
9대 아베 노부유키 (1944.7.24-1945.9.28)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표(1919.4.10-1948.8.15)
대통령
수반 이승만(1919.4.10-1919.9.11)
1대 이승만(1919.9. 11-1922)
이승만 (1922 - 1925.3.21)
대리 이동녕(1924.6. 16- 1924.12.11)
대리 박은식(1924.12.11- 1925.3.24)
2대 박은식(1925.3.24- 1925. 9)
주석
1대 이동녕 (1927. 8- 1930.10)
2대 이동녕 (1930.10- 1933)
3대 송병조(1933.6.24 - 1933.10)
4대 이동녕 (1933.10- 1935. 10)
5대 이동녕 (1935.10- 1939)
6대 이동녕 (1939- 1940)
7대 김구 (1940- 1944.4)
8대 김구 (1944.4- 1947.3)
9대 이승만 (1947.3- 1947.9)
10대 이승만 (1947.9- 1948.8.15)
해방후 군정기 연표
남한
1대 아치볼드 아놀드 (1945.9.12-1946.1.4)
2대 아서 러치 (1946.1.4- 1947.9.11)
임시대리 찰스 헬믹 (1947.9.11-1947.11.25)
3대 윌리엄 딘 (1947.11.25-1948.8.15)
북한
1대 스티코프 (1945.8.14-1946.2.8)
대한민국 대통령 연표
1-3대 이승만(1948-1960)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1919-1925), 1950.6.25한국전쟁, 보도연맹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1952.1.18 평화선 선포, 1954 구황실 재산 몰수, 1954.11.27 사사오입 헌법개정, 1960.3.15부정, 선거, 1960.4.19 학생혁명, 1965.7.19 미국 하와이 사망
4대 윤보선 (1960-1962)
서울시장(1948-1949), 상공부 장관(1949), 1961. 2. 27 국토건설단 창단, 1961.5.16 군사쿠테타 발생, 1961.5.19 대통령직 사퇴와 번복, 1962.3 하야
5-9대 박정희(1963-1979)
만주국 대위근무, 1945.9.21 광복군 편입,1946.5.8 미군 수송선으로 타고 광복군 제2중대장으로 귀국, 1946.12.14 조선경비사관학교 소위임관 졸업, 춘천 8연대부임, 1948.11.11 여수 순천사건 관련 체포, 제대, 1950.6월 한국전쟁 중 소령 복귀, 1950.10.25 제9사단 참모장, 1950.12.12 육영수와 결혼, 1953.11.25 육군 준장,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 1957년 3월 20일 육군 소장, 1957년 제7사단 사단장, 1957. 7. 1 육군 제6관구사령관.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1961.5·16 군사정변, 1961.5월 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설치, 1961.6.10 정보부 설치, 1961.7.3 최고회의 의장 추대, 1962.4.10 구황실법 개정,
1962.3.22 대통령 권한 대행,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 당선, 1963.12.6 서독 방문, 1964.8 자유 베트남 파병, 1965. 한일협정, 1965년 7월 19일 이승만 사망
1966 한국과학기술원 설립,
1968.1.21 김신조 사건
1972. 10월 유신 독제 실시
1973. 새마을 운동
1974.8.15 육영수 암살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공산화 충격
1976년 8월 13일에 발생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76년 비무장지대에서 북한의 땅굴구축
1977.10.15 코리아게이트 사건
1978.12월 부가가치세 신설
1978.12.27 제9대 대통령 취임식
1979.10 yh 사건
1979.10,20 부마사태
1979.10.26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1979년 10월 26일 궁전동 안가에서 저격 사망
10대 최규하(1979-1980)
1979.12.6 통일주체국민회의 최규하 대통령 선출
1980.5.17 전국비상계엄
1980.7.30 김정렬의 대통령 하야 요구
1980.8.16 대통령 사임
11-12대 전두환(1980-1988)
1979.3 보안사령관
1979.10.27 합동수사본부 본부장
1979.11 육사11기 출신으로 반란모의
1979.12.6 이학봉의 제안으로 발란 실행 결정
1979.12.12 김계원 정승화 체포하여 군사반란
1980.1 미국에 미사일 포기각서 제출
1980.3 육군 중장 진급
1980.4.14 중앙정보부장서리
1980.5.17 전국비상계엄
1980.5.18 광주무력 충돌
1980.5.27 광주 유혈진압, 국보위 위원장
1980.8.27 대통령 출마
1980.8.29 육군대장 예편, 11대 대통령 당선
1980.9.1 11대 대통령 취임
1980.9 연좌제 폐지, 김재익 등용
1980.10.17 정당 해산령
1980.10·27 불교계 탄압 법난
1980.12.19 핵실험 및 개발을 포기했다.
1981 보호·감호법을 제정
1981.1 민주정의당 총재
1881.3 12대 대통령 취임 독제정치
1982.10.26 강원도 이승복기념관 준공식 참석
1983 3S(Sex, Screen, Sports) 정책을 실시
1983.5.18 김영삼 23일간 단식
1983 학생 두발 복장 자율화 실행
1983.10.9 미얀마 아웅산 묘소 참배 중 북한공작원이 설치한 폭탄 테러 발생 80 1983.10.13 아웅산 희생자 장례식을 서울 여의도광장 거행
1984 학생 두발 복장 자율화 폐지
1984. 민청학련 사건 사면 복권
1983.9.1 소련군이 대한항공 비행기 격추
1983.11 레이건 대통령에게 핵 개발포기 약속
1984 일본이 60억 딸러 한국 지원
1984.9 남해안 수해 발생
1984.9.8 북한 수해 지원
1985 이산가족 고향 방문
1985.2.10 12대 총선거에서 야당이 14% 더 확보
1985 남북 정상회담 제안
1987. 6월 항쟁
1988.11.23 백담사 도착
1995 기소되어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
1997 사면
수천 억대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으며, 일부 비자금은 밝혀지기도 했으나 정확한 액수는 밝혀지지 않았다. 반체제인사·민주화 운동가·학생운동가 등의 정적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과 삼청교육대 사건에 대한 비판
2008 일해공원 건립
국풍 21을 주도하고, 독립기념관의 건립을 추진
2006. 국무회의에서 서훈 취소, 훈장 환수, 훈장기록부에서 명단 삭제
전기환 노량진 수산시장 인수하고, 동생 전경환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으로 비리 연루
13대 노태우(1988-1993)
1955.2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사11기로 육군소위에 임관
1956 봄 육군 제5보병사단 소대장 발령, 북극성회(北極星會)에 가담했고
1959 하나회에도 가입
1960 군사정보대학 영어번역 장교
1961 학생군사교육단(ROTC의 전신) 교관, '군사혁명 지지 카퍼레이드'를 이끌었다.
1966 방첩부 방첩과장
1967 육군 중령으로 진급, 베트남 전쟁에는 맹호사단 재구대대(1연대 3대대)장으로 파견, 퀴논 전투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전멸시킨 공로로 특별히 을지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1968년 수도경비사단 대대장,
1970년 육군참모총장 수석 부관장교,
1971년 보병 연대장,
1974년 1월 1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공수특전여단 여단장 등을 지냈다.
부대장으로 재직 시 직접 부대 가를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1978.1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1980.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관여
1980.5.31 국가보위입법위원회 25인 비상대책위원, 김종필이 처세술 전수
1980.8 육군중장으로 진급,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직을 역임
1981.7.15 예비역 대장 서부전선 예편
1981.7.16 정무 제2장관
1981.11 대통령 특사 유럽 아프리카 방문
1982년 남북한고위회담 수석대표
1982년 3월 20일 체육부 장관
1982년 4월 28일 제41대 내무부장관,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역임
1983년 88올림픽조직위원장
1985년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의원 임명
1984년 KOC 위원장, 서울아시아경기 조직위원장에 선출
1987.6.10 민주항쟁
1987년 대통령을 풍자의 소재로 허용
1987.6.29 대통령직선제 선언
1987년 7월 전두환은 노태우의 6·29 선언을 전격 수용, 전두환 정권에 충성을 맹세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36% 득표 당선
1988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발표
1988년 서울평화선언을 채택
1989년 히로히토 일왕 장례식 조문단 파견
1989년 2월 북방 정책을 추진 큰 성과를 올렸다.
1989년 국제연합에 남한과 북한이 함께 가입
1989년 3월 4일 지방자치법개정안 거부권 행사
1989년 3월 16일 상도동 김 총재 자택 2층 서재에서 김 총재와 단 둘이 만나 중간평가 유보에 합의
1990년 소련과 수교, 소련붕괴 후 러시아와 재수교
1990년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
1990년 3월 민주자유당을 창당, 초대 총재
1990년 미국 프리덤하우스 '언론 자유국' 지위 부여
1990년 보안사 민간인 사찰사건
1991년에는 장준하 복권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1991년 11월 13일 비핵화 공식 선언
1991년 국제로터리클럽 폴해리스 명예회원에 선출
1991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 실시
1992년 중국, 몽골 외교 수립
1992년 8월 28일 노태우는 민자당 총재직을 사퇴
김영삼을 가리켜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권력투사처럼 행동했고, 그의 국정운영 능력을 의심했으나 달리 대안이 없어 후계자로 만들게 되었다"면서 "그는 민주주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었으니 나는 색맹환자였던 셈이며 역사와 국민 앞에 죄송하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1992년 8월28일 김영삼이 민주자유당의 총재로 취임
김대중에게는 20억 원 이상의 정치 자금을 지원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후보에게 3천억 원을 지원
1993년 헌정회 원로자문회의 위원
1993년 2월 김영삼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연희동 자택으로 퇴임
1994년 국회의원 서석재에 의해 4천억 비자금 설이 제기
1995년 대통령 재직 시 조성한 비자금 수수와 뇌물조성 혐의로 구속, 징역 15년, 추징금 2천6백88억 원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
1997년 12월 사면되었다. 2629억 원을 추징금을 선고받고 6월말까지 2286억 원을 납부하였다. 현재 남은 추징금은 387억여 원이다.
1999년 6월 전두환은 백범 김구 기념 사업회 고문
2008년 4월 동생과 조카와 소송에 패소
2011년 4월 기관지에서 침이 발견
2012년 소뇌 위축증을 앓고 있으며,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물태우의 기원은 재임 당시 물난리가 잦고 수재민 발생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존경하는 인물로 김구를 지목
14대 김영삼(1993-1998)
할아버지 김동옥은 마을 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였다.
1960년 어머니 박부련은 무장공비에 의해 살해
1985년 아버지 김홍조는 계모 이수남(李守南, 1925년생)과 재혼하였다.
알부자 집안이었다.
1934년 장목보통소학교에 입학
1940년 개명하여 가네무라 코유(일본어: 金村康右)
1943년4월 통영중학교에 입학
1945년 11월 김영삼은 경남중학교로 전학
1948년 9월에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로 진학했다. 모든 학문은 철학에서 시작된다는 안용백 교장의 훈시에 자극을 받아 교장 안용백 선생의 감화를 받은 김영삼은 철학 전공을 결심하게 되었다.
1951년 2월 학도의용군에 입대했다.
1951년 9월에 졸업했음을 보여주는 성적 증명서가 전시되어 있다.
1951년 10월 장택상 국회부의장의 비서관
1951년 3월 마산문창교회에서 손명순과 결혼식을 올렸다.
1954년 5월 20일에 있은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 당선
1954년 11월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3선 개헌 반대 건의가 묵살, 탈당
1955년 4월 민주당 창당발기준비위원회 33인 입당
1958년 5월의 제4대 총선 낙선
1960년 5월 대한민국 제5대 총선에서 당선
1960년 8월에 민주당 당원
1960년 9월 25일 거제군 외포리 무장간첩에 의해 김영삼의 어머니 박부련이 살해당함
1960년 12월 신민당 창당
1961년 2월 20일 신민당 원내부총무
1961년 2월 중석불 사건 관련
1961년 5.16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무위원장 조시형의 정치 참여 설득에 거부
1964년 6월 15일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출국
1964년 민중당 원내총무에 피선
1967년 신민당 입당
1968년 6월 17일 향토 예비군 설치 반대 법안 제출
1969년 6월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습격당함.
1969년 11월 8일 40대 기수론 제기, 신민당 원내총무직 사퇴
1970년 김덕용 발탁
1971년 제7대 대선 경선에 결선투표에서 김대중에게 패배
1972년 1월 전국학생 신앙 운동 동계 수양대회 강의
1973년 장택상의 추모 사업 참여, 김대중 납치 사건 규탄
1974년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 선명야당론을 주장하며 유신 체제에 대한 강력한 반대와 비판을 역설하였다.
1974년 5월 미국 방문
1975년 3월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그를 금주의 인물로 선정 보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
1975년 5월 21일 청와대를 찾아 대통령 박정희와 청와대 회동
1975년 10월8일 김옥선 의원 자진 사퇴
1976년 당총재 경선에 패배
1976년 8월 동남아시아 순방
1978년부터 김대중을 가택연금
1978년 7월 23일 총선 2개월 후 박대통령의 장기집권과 유신체제 모순 지적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 복귀
1979년 6월 11일 김일성 면담용의 발언
1979년 8월 9일 YH무역 여성노동자 면담
1979년 9월 8일 법원은 김영삼에 대한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979년 10월 뉴욕타임스지를 통해 미국에 대하여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
1979년 10월 4일 국회에서 공화당 단독으로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박탈을 의결, 김영삼은 "나를 제명하면 박정희는 죽는다!"고 호언장담하였다.
1979년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과 민주통일당 소속 의원들은 집단사퇴를 제출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민주선언문이 배포
1979년 10월 16일에는 다른 대학교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가담하여 대규모 독재타도, 반정부시위가 시작됐다. 부산에서는 김영삼에 대한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김영삼의 제명은 부마항쟁을 촉발했고, 이는 유신 정권 종식의 계기가 되었다.
1979년 10월 18일과 10월 19일에는 경상남도 마산시 및 창원시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당하고 청와대에 설치된 박정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였다.
1979년 10월 28일 측근들을 대동하고 청와대로 가서 박정희의 빈소에 조의를 표하고 나왔다.
1979년 12월 13일 강원용과 식당에서 면담, 민주당 구파 계열의 새로운 리더가 되었다.
1980년 봄, 그는 김대중, 김종필 등과 대권을 놓고 경쟁하였다.
1980년 5월 17일 오전 10시, 김영삼은 신군부 군인들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함.
1980년 5월 20일 자택에서 5·17 폭거'라는 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1980년 9월 장기간의 단식 투쟁을 단행
1980년 10월 이학봉의 강요로 정계 은퇴 선언을 발표
1981년 6월 9일 민주산악회 고문
1983년에는 김대중과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
1983년 5월 18일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 투쟁
1983년 6월 10일에는 23일간의 단식농성 종료
19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켰다.
1984년에는 이민우, 김대중 등과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제1 야당 득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
1986년 11월 6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와 김대중 지지 선언
1987년 6월 대통령 전두환이 호헌을 선언하자 그는 이를 정권연장의 수단이라며 반대했다.
1987년 김대중과 통일민주당을 창당
1987년 6월 제13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 출마, 유세
1987년 8월 8일 김대중의 재입당
1987년 9월 30일 대통령후보단일화 협상을 결렬
1987년 10월 18일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을 '천추의 한'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1987년 11월 김대중 평화민주당 창당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로 28%의 득표율을 얻어 민주정의당의 노태우에게 패배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 경상남도 지역에서만 압승을 거뒀을 뿐 수도권 지역에서는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패배하면서 제2야당의 당수로 밀려났다.
1988년 4월에 노무현 정치계에 발탁
1989년 4월 27일 이경현 살인폭력사태 국민대책위 결성에 참여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에 선임, 그는 구국적 결단이라고 주장하였다.
1990년 3월 19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자격으로 소련의 IMEMO 초청으로 출국하였다.
1990년 10월 4일 오후 6시 40분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 사건
1990년 10월 8일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내각제 폐기, 지방자치제 실시'등을 내걸고 단식 투쟁
1990년 10월 11일에 평민당사를 방문해 단식 중인 김대중 총재를 면회하였다.
1990년 10월 29일 김대중 총재를 찾아 내각제를 폐기하고 지방자치제를 실시 약속
1991년 1월 26일 여성단체협의회는 지자제 선거법 개정 건의문을 전달
1992년 3월 24일에 실시된 제14대 총선 참패
1992년 5월 18일에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에 재취임하
1992년 10월 13일부로 국회의원직을 사퇴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선거는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후보의 3파전으로 격돌,
1992년 12월 18일 14대 대선에서 김대중을 193만 표차로 꺾고 대통령이 된다.
1992년 12월 22일 그의 고향 마을에서는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당선 통지서를 들고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지 김홍조 장로에게 알리고, 어머니 박부련의 묘소에도 통지서를 들고 가 참배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1992년 숨겨둔 딸 공개 사건
1003년 개혁의 칼로 정치 경제 사회 쇄신
19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산
1993년 2월 27일 김영삼은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전격 공개
1993년 3월 13일 종군위안부 보상은 정부가 한다.
1993년 8월부터 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임정 요인들의 유해를 환국하는 사업을 지시, 추진했다
1993년 8월 9일에 김영삼은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총독부 청사를 해체하여 경복궁을 복원하고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을 국책사업으로 건립하라고 내각에 지시하였다.
1993년 7월에 한미 관계가 처음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김영삼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로 존경
1993년 8월 12일 대통령 긴급특별명령으로 금융실명제, 토지실명제 실시
1994년 전직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폭로하여 군사정권 몰락시킴
1994년 6월 15일부터 18일 까지 1차 북핵 위기 타결.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 사망, 정상회담 무산
1994년 10월 남한을 제외한 북·미간에 제네바 합의를 김영삼은 상당히 화를 냈다.
1995년과 1996년경 광주 민중 항쟁으로 기록된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항쟁’, ‘광주민중항쟁’으로 사회적으로 공식 격상시켰고 학교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1995·13 특별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경축식에서 총독부 청사 중앙돔 랜턴의 해체를 시작으로 철거에 들어갔다.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는 참사가 발생
1995년 7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
1995년 8월 2일, 총무처 장관 서석재가 전임 대통령 중 1인이 4천억 이상의 비자금 폭로
1995년 11월 24일 김영삼은 대통령 명령으로 5·18 관련 특별법 제정을 지시
1995년 11월 헌법재판소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가 구속되었고
1995년 12월 3일에는 전두환이 구속된다.
1995년 12월 19일 5.18 특별법이 국회에서 제정되었다.
1995년 12월, 검찰은 12.12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1996년 총선 신한국당은 139석을 얻어 승리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도 "독도는 일본영토"라고 발언
1996년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 처리 과정에서 클린턴과 김영삼의 갈등은 더욱 커졌다. 이 때문에 김영삼은 임기 말 외환위기 때 미국의 신속한 도움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6년 1월 23일 전두환과 노태우등 관련자 8명을 구속 기소한다.
1996년 2월 민주자유당의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고 첫 전당대회를 열었다.
1996년 8월, 각각 사형(전두환)과 징역 22년 형(노태우)을 선고받았으나
1996년 12월,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전두환)과 징역 17년형으로 감형됐고
1996년 9월 18일 북한 잠수함이 강원도 강릉에 침투하고 무장공비들은 11월에 완전 소탕
1996년 10월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
1996년 12월 조선총독부 완전 철거
1997년 12월 20일, 전두환과 노태우는 사면 복권되었다.
1997년 경제시장 악화와 함께 IMF 구제 금융을 불러오면서 비판 받음.
1997년 겨울, IMF사태가 터지자 한국은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1997년 2월, 황장엽 북한노동당 총비서가 남한으로 망명
1997년 2월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 분당의 자택에서 괴한에게 살해당함
1997년 7월 21일, 집권당인 신한국당은 최초의 자유 경선을 통해 이회창을 대통령후보로 선출
1997년 10월이 되자 아시아의 연쇄적인 금융위기로 한국도 IMF 사태라는 위기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왔고 종합주가지수는 500포인트 밑으로 추락했다.
1997년 11월 7일 김영삼은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1997년 11월 19일 김영삼은 경제팀 일부를 개편
1997년 11월 21일 민주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변경
1997년 김영삼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 신청
1997년 11월 22일 정부는 IMF에 200억 달러의 차관을 요청했다.
1997년 11월 30일 정부는 IMF와 협상
1997년 12월 3일 한국 정부는 IMF의 요구 저성장과 고실업을 받아들였다.
1997년 12월 11일 환율은 1700원대까지 폭등했다.
1997년 12월 12일 증권업계 4위인 동서증권이 부도 처리됐고 IMF는 IMF 협약을 반드시 준수하라고 한국 정부를 협박
1997년 12월 18일 새정치국민회의 대선 후보인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
1997년 12월 23일 환율은 사상 최악인 2000원대까지 폭등하고 대한민국의 외채는 무려 1천 6백억 달러에 달했다. 결국 1997년은 IMF사태로 마무리되었다.
1998년 2월 24일, 14대 대통령직에서 퇴임하였다.
1999년 6월 일본 출국 과정에서 김포공항에서 70대 남자 노인으로부터 얼굴에 '페인트 달걀'을 맞았다.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추대
1999년 4월, 대통령 퇴임이후 부산을 방문한 자리에서 "모든 주요직책에서 경상도사람이 다 쫓겨나고 있다"며 지역감정을 조장했고 김대중 대통령을 독재자라며 맹비난했다
2000년 9월 9일 YS사모 출범
2002년 4월부터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 특명 교수로 출강
2004년 3월, 대통령 노무현이 탄핵될 때 일방적으로 국정을 운영해서 이런 결과 냉정한 반응
2004년 12월 13일에는 전 조선노동당 비서 황장엽의 천거로 자유북한방송 방송위원회 명예위원장에 선임
2005년 8월 박철언에 의해 40억 원 이상을 직접 김 총재에게 전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2006년 4월 1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민주주의 이념연구회' 발족식에 참석 축사 낭독
2007년 12월 성균관대학교 김영일 교수와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국부, 김구는 정치 감각이 떨어지며, 박정희는 역사의 죄인 비판
2008년 5월 광주 MBC FM에서 전주환 비판
2007년 5월 22일 김영삼은 국립 5·18 민주묘지를 11년 만에 처음으로 참배했다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의 출마를 놓고 김영삼은 이회창을 맹비난하기도 했다.
2008년 3월 26일 김영삼은 한나라당 공천 결과가 편파적으로 진행됐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강력히 성토했다.
2009년 5월에는 노무현이 투신자살하자 《노무현국민장 장의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5월 29일 서울 경복궁 흥례문 앞에서 열린 노무현 영결식에 참석하였다.
2009년 9월 김영삼은 일본 잡지 《애플타운》 9월호 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에 대해 “국민장이 아니라 가족장으로도 충분했다”라는 발언
2010년 1월 18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생일축하 난을 받았다.
2011년 1월 5일 서울 상도동 자택과 거제도 땅을 포함해 50억 원에 이르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 할 뜻을 나타냈다.
2011년 2월 친자 확인 소송에서 패소 돼 또 다른 아들이 생겼다.
2011년 5월 상도동 자택 근처에 김영삼 민주센터가 건립되었다.
3당 합당을 통한 정권 획득에 대한 비판과 재임기간 IMF 구제금융사건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일으킨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연평균 대북지원 실적은 연평균 9천815만 달러에 달했다.
김영삼 정부는 경수로 건설비용 46억달러 가운데 70%에 해당하는 36억 달러를 부담했다.
전 신민당 총재 이민우는 말년에 김영삼이 이회창을 공천해 놓고는 자기 아들(김현철)을 2인자로 만들려고 이인제를 밀었다며 정치하는 사람이 그럴 수는 없는 법이며, 정치 도의도 없고, 신의도 없다며 비난하였다.
“YS는 오랜 세월 야당지도자로 있으면서 민심을 잘 읽는 정치를 해왔다.
대도무문(大道無門)
15대 김대중(1998-2003)
1936년 목포북국민학교로 전학했다.
1937년 목포북초등학교 수석으로 졸업,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1939년에는5년제 목포상업고등학교 1등으로 합격하여 입학해서
1943년 졸업 때까지 줄곧 반장을 할 정도로 뛰어난 통솔력을 보였다.
1943년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사원 입사
1845년 목포상선회사 경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
1945년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에 참여하여 선전부원, 목포 청년동맹 활동
1945년 9월 조선신민당에 조직부장,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
1948년 10월부터 목포일보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1950년 10월까지 활동하였다. 1950년엔 사업 관계로 서울로 출장을 가있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걸어서 목포로 귀가했던 일도 있었다.
1946년 말 더 이상 회사 경영위원회에 관여하지 않고 회사를 떠난다.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가 주도하는 전국 총파업이 단행되고,
1946년 10월 1일 대구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민항쟁이 일어난다.
1946년 10월 31일에는 목포에서도 파출소 습격사건이 발생하는데, 김대중은 밀고자에 의해 이 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20일간 경찰서에 구속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80년대 안기부가 작성한 김대중 조사 기록에 의하면 김대중은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의 지위로 배후 조종한 혐의를 받고 10일간 구속되어 조사를 받던 도중 한민당 목포시당 부위원장이던 장인 차보륜의 신원보증으로 다시는 좌익단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훈계 방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해방 후 좌익에서 전향한 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던 보도연맹에도 가입하여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47년, 김대중은 장인의 권고에 따라 한민당 목포지부에 입당하여 시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된다.
1948년 10월엔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1950년 10월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1949년 2월 유재식은 남로당 섭외부원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에게 자금 제공 혐의로 구속, 해군 목포경비부대 정보대장 오세동 중위와 헌병대장 박성철 소위의 신원보증으로 1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1949년 봄에 해방 뒤 부산에서 건립된 건국대학교(동아대학교와 합병) 정치외교학과 3학년에 편입했으나 이듬해 전쟁으로 인하여 학업을 중단했으며
1949년에 조직된 대한청년단 목포해상단에 부단장으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1950년 6월 15일 서울 출장
1950년 6월 25일 경기여자고등학교 뒤쪽에 있는 여관에 머물다가 도보로 목포에 와서 인민군인에게 체포 처형을 대기 중 탈옥하여 집의 천정에 숨어 있다가 국군의 해상방위대에 자진 입대, 전라도 지구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회사 선박을 동원하여 인민군 게릴라 소탕에 참전하였다고 한다.
1951년 3월엔 목포해운회사(현 흥국해운) 사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전남해운조합 회장, 한국조선조합 이사로 취임하였다.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목포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1955년 10월에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사상계》에 노동문제에 관한 글을 기고하면서 정계진출의 꿈을 키운다.
1955년 박화성의 소개로 박순천, 조재천 등과 민주당에 입당하게 된다.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장면 저격 사건을 목격하게 된 김대중은 장면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1957년 장면을 대부로 노기남(당시 서울대교구장) 대주교 집무실에서 천주교 영세를 받고 ‘토마스 모어’라는 세례명을 받게 된다.
1957년 8월엔 민주당 중앙상임위원 및 노농부 차장이 되었다.
1957년 대한웅변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김상현을 만나 이후엔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당 후보로 강원도 인제에 출마하려 했으나 자유당 나상근 후보가 중복추천을 통해 등록무효를 시켜 출마조차 하지 못한다. 그 뒤 나상근 당선인이 당선무효 판정을 받아
1959년 재보선에 다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자유당 전형산 후보가 제기한 색깔론에 의해 낙선한다.
1959년에는 부인 차용애가 병으로 사망
1959년 7월엔 민주당 강원도지구당 부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1월에는 민주당 강원도 인제군 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1960년 민주당 기획위원 겸 대변인이 되었다.
1960년 4월 6일엔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여하였다.
1960년 7월에 치러진 5대 국회의원 선거에 인제군 후보로 출마 낙선
1961년 5월 14일에 강원도 인제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민의원에 당선되지만 이틀 뒤에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결국 의원 활동은 하지 못했다.
1961년 민주당 선전부장, 당 대변인 등을 역임했다
1961년 이희호와 다시 만나 재혼
1963년에 민주당 소속으로 고향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재선 국회의원이 된다.
1964년 야당 초선 의원인 김대중은 본회의 연설에서 필리버스터를 해 국민들에게 적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1864년 4월 20일 김 의원 구속동의안을 전격 상정했으나 구속동의안 처리는 무산됐다.
1967년 2월에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신민당 정무위원 겸 대변인으로 발탁되었다.
1967년 이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당선
1968년 6월 3일 당수 유진오로부터 원내총무 후보자로 지명을 받았으나 의원총회 투표에 패배, 신민당 정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69년 당시 신민당과 3선 개헌 반대 범투위 소속으로 유세에서 경상도 정권 타도를 주장한 바 있다.
1970년에 치러진 신민당 내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이철승, 김재광 등과 제휴해 김영삼을 40여 표 차이로 꺾고 과반수선을 얻어 역전승, 대통령 후보자에 지명되었다.
1970년 1월 24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할 것을 선언하면서 ‘만일 1971년 선거에서 또다시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을 허용한다면 이 나라는 영원히 선거 없는 총통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971년 4월 18일 서울 장충공원 유세에서 총통제 가능성을 다시 폈다. 이 유세로 인하여 뒷날, 허위사실 유포 등 선거법 위반사범으로 입건도 되었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김대중은 539만 표를 얻어 634만 표를 얻은 박정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였다.
1971년 5월 11일부터 당수권한대행 김홍일이 전국 지원유세에 나섰고.
1971년5·25 총선을 대비해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은 전국에 파견되어 선거유세를 하였다.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된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차 일본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1971년 10월에는 10월 유신이 발생하자 “이처럼 되었는데도 내가 선동가냐”며 반문하였다.
1972년 10월 11일 일본 정계 순방을 위해 도쿄에 체류하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측근인 송원영의 설득으로 미국 망명을 결심한다.
1973년 하와이를 경유하여 1월 3일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대중은 조윤형, 김상현의 구속 소식을 접하게 된다.
1973년 3월 25일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교포 사회에서 강연 및 반정부 시위 활동을 벌인다.
1973년 7월 6일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여 초대의장에 추대된다.
1973년 7월 10일엔 한민통 일본지부 결성을 위해 일본에 입국
1973년 8월 8일에 납치되긴 했으나 15일 결성된 한민통 일본지부를 통해 미국과 일본의 교포를 규합하며 유신 반대 민주화 운동을 벌이게 된다.
1973년 8월 8일에 납치되긴 했으나 129시간 만에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난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국 공권력의 일본국의 주권침해라는 한·일 양국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가택연금과 동시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 당하였다.
1976년 3월 1일에는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주도하여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1977년 3월 23일에는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형을 확정(긴급조치 9호 위반) 받은 후 옥고를 치렀다.
1977년 5월 7일에는 진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접견 제한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했으며,
1977년 7월 1일에 일본 교토통신과의 회견에서 “한·일 두 정부가 반성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의 명예와 신뢰성에 상처를 입혀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에 대한 양국 국민의 눈을 가리려 한다면, 더욱 상세한 사실을 밝혀 양국 정부의 죄상을 고발하겠다. 라고 밝혔다.
1977년 10월 31일에 진주교도소 수감 중 격려차 찾아온 김수환 추기경과 면담하였고,
1977년 12월 22일에는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어 수감 되었다.
1978년 9월 6일 서울대병원 이송 후 교도소 때보다 제한(접견 차단, 창문 봉쇄, 서신제한, 운동금지)이 더욱 심하자 항의 단식하면서
1978년 12월 27일에 옥고를 치르면서 2년 9개월만에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된 후 장기 가택연금을 당했다.
1979년 4월 4일에는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등과 함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주도하여 공동의장으로 반유신 운동에 참여, 3차례 연행 당하였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암살당한 후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1979년 12월 8일 가택연금에서 해제 되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 발생
1979년 12월 14일 아침에 강원룡 목사와 만났다.
강원룡에게 “이미 끝났다. 강 목사님이 군(軍)이란 세계를 모르고 하는 말씀인데, 군은 통수권자에게 절대 복종한다. 박정희가 (살아) 있을 때는 박정희가 통수권자니까 거기에 충성했지만 이제 박정희는 죽었다. 장군들이 그 다음엔 내가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내게 충성하고 들어올 것이다”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1980년 5월 13일에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 공산집단이 우리의 과도기를 이용하여 남한에 대해 폭력에 의한 그들의 야욕을 성취하려는 음모를 획책하려는 일이 절대 없기를 엄중 경고한다”면서 “국민과 학생, 근로자들은 질서를 지키고 사회 안정을 유지하여 북한공산집단이 오판할 계기를 주지 말아야 한다. 라고 발표하였다.
1980년 5월 14일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한창 가열될 때 동아일보가 김대중을 인터뷰했다. 김대중은 “학생 시위가 계속되면 군부에 빌미를 줄 수 있으니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 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신군부의 검열에 걸려 기사화되지 못했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치활동 금지를 주요내용으로 한 포고령10호를 발표함과 함께 김대중을 포함한 재야인사 20여명을 사회혼란 및 학생, 노조 배후조종 혐의로 전격 연행하였다. 김대중은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80년 9월 17일자 보도 자료에 따르면 빌리 브란트 당시 사민당 총재는 “김대중 씨에 대한 사형 선고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1980년 독일 대통령을 지낸 폰 바이츠제커는 김대중이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자 하원에서 ‘김대중 구명 결의안’이 채택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국제적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1980년 12월 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서울 주재 로마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1차 편지를 발송해 김대중의 선처를 당부했다.
1981년 1월 18일에 전두환 대통령에게 제출된 김대중의 탄원서가 참작되어 1981년 1월 23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김대중 및 그와 연루된 11인에 대한 감형을 실시하게 된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김대중은 다시 20년형으로 감형되고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구속 된지 2년 7개월 만인 1982년 12월에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1984년 4월 26일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과 나는 민주와 평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지지한다.고 썼다.
1984년 6월 “84년 말까지 귀국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을 서신에 담아 전했다.
1985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이듬해 1986년에는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됐으나 당국에 의해서 취임이 저지되었다
1985년 2·12 총선 전에 귀국을 결심한 김대중은
1986년 5월 케네디 의원은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한 김대중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1986.5.3 인천사태와 10.28 건국대 항쟁 등으로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을 준비하자
1986년 11월 5일 조건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였다.
1987년 4월에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있다가
1987년 7월 9일 사면복권 되었다.
1987년 7월 10일에는 이중재·노승환·이용희·정대철 등이 함께한 동교동 자택 기자회견에서 “나는 대통령이 되는데 관심 없다. 현재로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하루 만에 불출마의사를 번복하게 된다.
1987년 7월 11일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하면 불출마 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전두환 대통령은 4·13 호헌 선언으로 이미 내 제의를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약속에 내가 묶여 있어야 하느냐는 논리가 나온다.고 하였다.
1987년 7월 17일 김대중을 지지하는 단체인 민권회가 ‘11·5 불출마 선언’ 백지화를 결의함으로써 김대중의 불출마선언 무효를 공식화한다. 한편 통일민주당에서는 김대중의 입당을 요청하였고, 김대중 계는 김대중의 통일민주당 입당여부를 놓고 의견이 둘로 나뉘게 되었다.
1987년 8월 6일에 김영삼과 만나 입당문제를 합의한 후,
1987년 8월 8일 통일민주당 사에서 입당식을 갖고 고문에 취임한다.
1987년 8월 11일 김영삼과 회동을 갖고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김영삼의 조기 단일화 주장과 김대중의 개헌 협상 후 조정 주장이 맞서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87년 9월 9일, 전라남도 목포를 방문하였다. 광주-목포 순방이 기대 이상의 열기를 보였다고 판단한
1987년 9월 14일 김영삼과 만나 36개 미창당 지구당 결성을 요청한다.
1987년 9월 29일에는 김영삼 총재, 김대중 고문 간 후보단일화 회담을 하였으나 이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1987년 9월 30일 김대중은 다시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출마를 김영삼과 야당 후보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양자 간의 시각차이만 확인하고 결렬되었다.
1987년 10월 10일, 통일민주당을 장악한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
1987년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였다.
1987년 11월 12일에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지역감정에 기댄 정치적 행보라는 비판과 대표 겸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이후 야당 후보였던 김영삼과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1987년 12월 16일에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노태우와 김영삼에게 밀려 611만 표를 얻고 낙선했다.
1987년 신동아 10월호에 김대중 납치 사건의 전말에 대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인터뷰 기사가 수록되었다. 김대중을 암살하려는 의도는 없었으며 교포사회를 중심으로 해외 망명정부를 세울 것을 우려해 납치를 계획한 것이라고 밝혔다. 1987년 9월 신동아 10월호가 인쇄되던 인쇄소에 안기부 요원을 파견하여 인쇄 작업을 중단시켰다.
1988년에는 제13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89년 1월 9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사망하자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를 역임 중이던 김대중은 주한 일본 대사관저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히로히토 영정 앞에 머리를 숙여 조문했다.
1989년 그레그 CIA 지부장이 주한 대사로 부임하게 되자 김대중은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서한에서 김대중은 “나는 개인적으로 귀하가 대사로 오게 돼 기쁘다. 1989년 8월 2일,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으로 중부경찰서에 강제 구인되어 14시간동안 수사를 받았다.[75]
1990년에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을 3당 야합이라며 반대하고 투쟁을 선언하며 규탄하였다.
1991년 4월 15일에 평화민주당을 신민주연합당으로 확대, 재개편한 후 당 총재에 취임했고, 곧 이기택이 총재로 있던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 민주당을 출범시켰다.
1991년 10월 8일, 삼당합당을 성토하고 내각제합의 폐기, 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외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1991년 10월 29일, 김영삼 대표와 만나 내각제합의 폐기와 지방자치제 실시에 대한 약속을 받고 단식투쟁을 그만두었다.
1991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가 치러지지만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벌어진 정원식 국무총리 폭행사건으로 인해 참패한다.
1992년 5월 15일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제14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800만 표를 얻었으나 김영삼에게 190만 여 표 차이로 낙선하였다.
1992년 12월 19일에 정계 은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93년 1월에 영국으로 출국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하다가 1993년 7월 귀국,
1994년 12월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FDL-AP, 통칭 아태재단)를 설립하고, 상임공동의장에 취임했다.
1995년 노태우의 비자금이 폭로되자 김대중은 분명히 20억 원 외에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1995년 6월 27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수도권을 장악하는 대승을 거두자 김대중의 정계복귀는 더더욱 구체화되었다.
1995년 7월 18일, 김대중은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79석밖에 얻지 못하는 참패
1997년 국민회의는 전당대회를 통해 김대중을 대통령후보로 선출한다. 김대중의 대선 맞수로는 신한국당의 이회창 대표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당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50%에 육박하면서 97년 대선에선 소위 대세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1997년 10월 24일 김영삼 대통령과 가진 영수회담에서 김대중 후보는 김영삼 대통령이 대선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보였다.
1997년 11월 3일, 국민회의는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며 자민련의 총재였던 김종필, 박태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다.
1997년 신한국당도 이에 대항해 민주당과 합당,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개명하였고 3김 시대 청산을 내세우며 민주당의 조순 후보와 단일화를 이뤄낸다. 이때 김원기, 노무현 등 국민통합추진회의 소속 8명은 국민회의에 입당하게 된다.
1997년 12월 18일까지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후보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TV 토론을 통해 서도간 치열한 대결양상을 보였다. 3후보 간의 공방은 갈수록 가열되어,
1997년 12월 14일에 열린 대선토론회에서 IMF 책임론에 대해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후보 간에 치열한 공방이 오고 가기도 했다.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 김대중 후보가 1032만 6천표를 획득해 이회창 후보를 39만 여 표 차로 누르고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98년 취임초기 IMF의 명령이라며 구조조정을 벌여 대량해직을 야기한 것에 대한 비판도 크다.
1997년 12월 IMF사태가 터졌을 당시 한국의 실업률은 3.1%에 불과했고 서울지역의 노숙자는 97년 12월 IMF사태 초기 5백여 명에 불과했으나 김대중 당선자가 98년 초 신년사에서 IMF의 협약을 충실히 이행해야한다며 국민들에게 강요했고
1998년 김대중 정권이 IMF라며 긴축정책과 대량해직을 벌이자 실업률은 98년 5월에 7%로 폭등하였다.
1998년 6월 29일,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대동은행, 동화은행, 동남은행, 경기은행, 충청은행에 퇴출명령을 내려 5개 은행들이 제거 당한다. 공무원도 5만 명 감축계획을 발표하여 실행에 들어갔다.
1999년 2월 실업률은 10%에 달해 사상 최악의 수준까지 폭등했다. 이후 99년 IT 코스닥 붐으로 경기가 회복되면서 실업률은 5%대로 감소하였으나 실업문제는 김대중 시절 내내 한국경제를 괴롭히던 문제였다.
1999년 뉴브리지캐피탈은 8조 4,0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제일은행의 지분 48.56%를 5000억 원에 구입하여 이를 5년 뒤인 2004년에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에 3조 4,000억에 되팔아 1조 5000억의 차익을 남기게 된다. 1999년 매각 당시 김대중 정부는 지분 70% 구입 의사를 보였던 HSBC의 제안을 거절하고 지분 48.56%를 5000억 원에 구입하겠다는 뉴브리지캐피탈의 제안에 맞추기 위해 대규모 유상 감자와 액면 병합을 거쳐 제일은행의 총 자본금을 4조 4806억 원에서 9806억 원으로 줄였으며 매각 후 3년 내 발생하는 모든 부실 여신에 손실이 있을 경우 정부가 손실을 보전해 주는 풋백 옵션까지 추가하였다.[
1998년 김대중의 아들인 김홍업은 한국전력 석탄 납품과 관련해 최재승 의원의 주선 하에 석탄 수입업자 구씨의 청탁 요구를 받고 3억 원의 금품을 수수했다 돌려준 혐의로 2004년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1998년 6월 북한과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에 합의했고 단독 사업자로 선정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경유해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경제협력에 대해 회의를 벌였다.
1998년 11월엔 첫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가 출항하게 되었고
1999년 12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소학관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진시황과 오다 노부나가를 "성공한 지도자"라고 칭송해 논란이 일었다
1999년 제1연평해전
1999년 2월 카드사의 현금대출 비중 50% 제한을 폐지하고 5월엔 신용카드의 현금 서비스 한도인 70만원을 전격적으로 폐지하면서 실시되었다
1999년엔 대북 사업을 위해 현대아산을 설립, 평양에 체육관을 건설하는 등 대북 협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러한 김대중의 노력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1999년 5월엔 홍콩의 시사주간 아시아위크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올랐다.
2000년 3월, 294포인트까지 폭등했던 코스닥 지수가 불과 9개월 만에 무려 80%가까이 폭락하여 120조원을 허공에 날린 사태가 벌어졌다.[213] 2000년 하반기 IT붕괴사태가 시작되자 주식시장과 코스닥은 거의 파괴되었고 그 이후에도 코스닥은 2001년에 50포인트 선을 밑돌게 된다. 투자자들은 2000년 하반기의 IT붕괴사태와 "진승현 게이트"[214] 로 피눈물을 흘리게 되었다.[215]
2000년 3남 김홍걸은 최규선과 체육복표사업자 선정 및 각종 이권에 개입해 금품을 수수한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돼 파문이 일었다. 2002년 최규선의 운전기사가 이 일을 폭로하면서 수사가 진행되었고 결국 같은 해 11월 김홍걸은 징역 1년 6월의 판결을 받게 된다. 최규선 게이트로 인해 김대중은 대국민 사과 성명까지 발표하게 되었다.
2000년 6월 15일에 있었던 남북 정상 회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골자로 하는 통일 방향에 합의한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개성공단 설립에 합의한다.
2000년 독재 정권 시절 한국의 인권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000년 2월 8일 일본 TBS 지쿠시 데쓰야 NEWS23 특별 회견에서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발언
2000년 6월 12일 5억 달러를 현대그룹을 통해 북한에 송금한 이 사건은, 2003년 특검으로 현대상선, 현대전자, 현대건설 등이 5억 달러의 비밀 자금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여기에 대북 불법 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햇볕정책은 본격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이 있기 전인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 차입금을 전액 상환했다.
2001년 진승현 게이트를 검찰 수사
2002년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국정원 도청문건을 제시하며 문제를 제기
2002년 제2연평해전 등 두 차례 도발을 감행했으며
2003년에 다시 카드사의 현금대출 비중을 50%로 제한하는 등의 규제 정책을 실시하여 수습에 나섰지만 많은 시민들의 가정들이 파탄난 뒤의 일이었다.[
2003년 8월,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2003년엔 미국과의 대화가 진행되지 않을시 핵실험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
2003년에는 동교동 사저 옆에 김대중 도서관을 개관하였다.
2003년 2월 24일, 김대중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2004년 김대중은 퇴임 이후 첫 외신과의 인터뷰였던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에서 "북한에 1억 달러를 지원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라고 대북 불법 송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렇듯 햇볕정책이라는 명분하에 2000년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하고 불법을 무릅쓰며 현금까지 지원했지만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북한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04년 1월 29일, 재심을 청구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되었고,
2004년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79년 12·12 사태와 80년 5·18을 전후해 발생한 신군부의 헌정파괴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행한 정당한 행위이므로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에 해당, 범죄가 되지 않는다. 고 밝혔다.
2004년 3월에는 대통령 노무현이 탄핵 당하자 ‘심각한 사태’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위기국면 극복을 위한 노력을 주문하였다. 반면 김영삼은 사필귀정이라며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2004년 5월 10일 유럽 3개국(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에서 순방과 함께 OECD와 노벨 위원회, WHO에서 연설을 했다.
2004년 8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에게 박정희 시절의 정치탄압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에 대해 한 방송과 인터뷰에서 박 대표의 사과에 “마음 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2004년 11월 14일, 그는 8박 9일 동안의 유럽 순방 일정을 마치고 낮 인천 공항을 통해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귀국했다.
2004년 새천년민주당이 기점으로 민주당과 열린 우리당으로 분열하였고
2005년 4월 19일, SBS의 시사 프로그램인 ‘뉴스추적’은 김대중의 ‘숨겨진 딸’이라고 주장하는 30대 여성에 대해 특종 보도했다.
2006년 2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1947년부터 1974년 사이의 비공개 외교문서를 공개하였고, 이로 인해 당시 납치 사건과 관련된 많은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006년 4월 16일, 김대중의 숨겨진 딸로 알려진 김모씨 문화일보에 제보, 현안 1호’의 중대성을 국정원 분류
2006년 불법 도청을 지시한 당시 국정원장 임동원, 신건 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그 결과 국정원은 야권인사 및 반정부인사들을 상대로 휴대전화 상시도청을 했으며, 일부 여권인사도 포함되었다. 여기에 검찰 수사 결과 도청 대상에 김대중의 숨겨진 딸이라고 주장하는 인물과 그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2006년 여기에 김대중의 측근인 박지원은 SK등 대기업 자금 1억 원 수수 및 대북 불법 송금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으며 특검은 종결되었다.
2008년 10월,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100억 원대 CD를 비자금은 김 전 대통령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2009년 6월 11일 저녁 7시,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에 특별강연자로 참석해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시작된 한반도 위기와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민주주의의 위기 등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같은 ‘독재자’에 비유하며 이명박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2009년 7월 13일, 흡인성 폐렴 증세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
2009년 8월 12일 DJ의 비자금 조성과 재산 해외 도피 의혹을 제기한 중앙일보의 《문창극 칼럼》이 ‘허위보도 확인 사례’를 조목조목 밝혔다.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1달여에 걸친 투병 끝에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86세로 사망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의 영혼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맡기시며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모든 대한민국 국민에게 평화와 힘을 주시도록 하느님의 축복을 진심으로 간구한다. 고 밝혔다
2009년 8월 18일 북미관계를 풀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고
2009년 9월 23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로 김대중을 선정했다.
2009년 8월 19일 오후 8시에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결정되었으며 유족 측과 이명박 정부는 서로 합의하여 국장으로 치르되 경제위기를 고려해 6일장으로 결정하였다
2009년 8월 2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미국·일본의 지식인들이 110명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2009년 8월 23일 장례는 국장으로 정해졌으며, 영결식은 여의도 국회광장에서 거행되었다.
2009년 10월 5일에는 그의 비석이 세워졌는데 충남 보령의 오석(烏石)으로 제작된 묘비에는 전면과 측, 뒷면에 각각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묘’란 문구와 고인의 주요 공적, 경력, 가족 사항 등이 기록돼 있다.
2009년 11월 13일, 김 전 대통령의 추모행사가 일본 도쿄 아사히신문사에서 열렸다.
2009년 12월 19일, 뉴스위크 인터넷 판이 ‘올해 세상을 떠났지만 잊히지 않을 저명인사’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해 전 세계 36명의 명사를 선정해 소개했다
2011년 8월, 김대중이 서거 전까지 네 가지 고민을 했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그 내용으로는 '6ㆍ15와 9ㆍ19로 돌아가라', '민주당과 야당, 시민세력은 단결하고 연합하라', '이명박 정부는 불행한 길을 걷지 말라',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 등이었다.
16대 노무현(2003-2008)
1946년에 아버지 광주 노 씨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현 김해시 진영읍)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953년 대창초등학교에 입학했으며
1959년 2월 대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월 진영중학교에 진학했다.
1963년에 진영중학교를 졸업했고,
1966년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 제 12사단(을지부대)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71년 육군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1973년 초등학교 동창인 권양숙과 결혼했다.
1973년에 아들 노건호,
1975년에 딸 노정연을 낳았다.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는 네 번째 도전에서 이루어진 성과였고 노무현은 제17회 사법시험에서 유일한 고졸 출신 합격자였다. 대전 지방법원 판사로 발령되었다. 그러나 7개월 만에 판사직을 스스로 사퇴하였다.
1978년 5월,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고,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이후 주로 조세 및 회계사건 등을 통해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
1981년 부림 사건의 변호에 참여
1982년에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고
1984년 부산 공해문제 연구소 이사
1985년에는 부산 민주시민 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해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 상담소를 열기도 했다.
1986년, 당시 천주교 부산교구 당감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송기인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아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얻었지만, “열심히 신앙생활도 못하고 성당도 못 나가 프로필의 종교란에는 ‘종교가 없다’고 쓴다.라고 말한 적 있다.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산 본부 상임 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그 해 8월 22일의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 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9월에 제삼자 개입, 장식(葬式) 방해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1987년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1988년 4월 26일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88년 11월에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전 국가 안전 기획부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 전 법무부장관 이종원,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등을 상대로 한 증인 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이어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등의 언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1989년 초 국회 5공 비리·광주 민중 항쟁 특별위원회의 증인 출석 여부를 둘러싼 정부·여당의 집요한 방해 책동에 항의해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가 이를 번복하고 사퇴서를 거둬들이기도 했다.
1990년 1월 12일 3당 합당 선언을 노무현은 3당 합당을 ‘밀실야합’이라고 규정
노무현은 노태우 정부 하에서 국군 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 되어 감시당했다.
1991년 10월 조선일보는 주간조선 보도를 통해 이력과 재산을 문제 삼았다.
1992년 민주당 (1991년)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하면서 재선에 실패했다.
1993년 민주당(1991년)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다.
1995년에는 민주당(1991년) 후보로서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36.7%의 득표율을 얻었으나 결국 낙선했다.
1995년 노무현은 민주당 부산시장 경선에 출마하여 황백현 부산진을 위원장을 13표차로 누르고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지역감정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했다.
1996년 4월 11일에 실시된 15대 총선에서 노무현은 서울 종로구에 통합민주당(1995년)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한국당의 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종찬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1997년 11월 노무현은 김정길, 김원기 등의 집행위원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1997년 12월 18일,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노무현은 사상 처음으로 여당에 몸담게 되었다.
1998년 2월 서울특별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자진 사퇴하였다.
1998년 7월 21일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노무현은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하게 되었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일명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렸던 국민 경선제는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 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2002년 3월 16일 광주 지역 경선부터 본격적인 노풍(盧風)을 일으켰고, 언론들은 그의 신선한 매력이 신기한 듯 부쩍 관심을 보였다.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4월 말 노무현의 지지율은 당시 역대 대통령 후보 가운데 사상 최고치라는 60%를 기록했다.
2002년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의 노무현에게 큰 타격을 줬고, 지지율은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새천년민주당은 지방 선거에서 광역 단체장에서 호남과 제주의 4석만 건지며 참패했다.
2002년 6월 20일, 대통령 후보 시절에 서울 종로구 혜화동 가톨릭대 주교관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방문했다.
2002년 8월 16일 천정배 국회의원, 지구당 위원장 연석회의에서 반노 진영의 행동은 ‘경선 불복 행위’라고 말했다.
2002년 10월 1일 아내 권양숙은 당시 대선을 앞두고 합천 해인사에 머물고 있는 조계종 종정인 법전(法傳) 스님으로부터 보살계와 ‘대덕화’(大德花)라는 법명을 받았는데, '대덕화'는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가 받은 법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법명 수계는 불교계의 민심이 실린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불교계의 기대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노무현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해인사를 무려 세 차례나 방문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다 방문을 하였다. 2003년 12월 22일에 노무현은 부인 권양숙과 함께 경남 합천 해인사를 불시 방문해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 총무원장 법장스님과 환담한 뒤 오찬을 함께 했다. 사패산 터널 문제에 대한 공약을 못 지키게 되었다면서 양해를 구했다.
2002년 11월 19일 후보 단일협의회는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
2002년 11월 24일 텔레비전 토론을 거쳐 노무현 후보는 극적으로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승리했다.
2002년 11월 새천년민주당 후보였던 그는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전국 농민대회’에 참석했다가 성난 농부들이 던진 달걀에 얼굴을 정면으로 맞았다.
2002년 12월 18일 저녁 10시 정몽준은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했다.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역전극을 반복하다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57만 표 차로 이기고 당선됐다.
2003년 1월 14일, 대통령 당선자인 노무현은 “토론을 국정운영 방법으로 정했으면 한다. 라면서 “토론공화국이라 말할 정도로 토론이 일상화되면 좋겠다. 라고 덧붙였다.
외교 방식은 동북아 균형자 론을 표방하였다. 반미주의자, 한나라당은 그를 좌파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2003년 한일 정상회담 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하지요?'라며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표현을 써 파문이 일었다.
2003년 2월 25일 참여정부를 표방하며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2003년 2월 26일에는 고건 총리 임명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2003년 2월 27일 참여정부 조각 발표로 새 내각을 출범시켰다.
2003년 3월 9일, 검찰 개혁의 향배와 검찰 인사를 놓고 검찰이 일선 검사들과 마찰을 빚자 노무현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일선 검사들이 함께하는 ‘대통령과 전국 검사와의 대화’(토론회 명칭)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방송 3사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이 자리에서 검사들은 검찰 개혁을 외치면서 대통령이 인사위원회도 2003년 3월 20일,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파병을 요청하자 그는 “국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 라며 이라크 파병이 ‘전략적 선택’이라고 표현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2003년 3월 24일, 원칙대로 운용되지 못하고 자의적으로 운용되거나 국회의원들이 유용해 온 특별 교부금에 대해 폐지 또는 보통 교부금에 통합하는 등 개선을 명령했다.[70] 그러나 2008년 12월까지 이러한 관행은 개선되지 않았다.[71][72]
2003년 4월 18일, 노무현의 지시에 따라 청남대가 개방되고 모든 관리권이 충청북도로 이관하였으며 현재는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다.
2003년 5월 21일, 각종 사회적 갈등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자 그는 “이러다가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생긴다.[73][74]며 국정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였다.
2003년 10월, 청와대 총무비서관인 최도술이 SK 비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터지고, 10월 10일에는 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에다가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 윤성식 감사원장 임명 동의안 부결 등의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하자, 그는 청와대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국회는 2003년 12월 29일 여야 합의로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이른바 신행정수도법)을 통과(찬성167, 반대13, 기권14표) 시켰다.
2004년 1월 14일, 연두 기자 회견에서 “지난 수십 년간 끊어내지 못했던 정치와 권력, 언론, 재계 간 특권적 유착 구조는 완전히 해체될 것이며,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로 성큼 다가설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1월 16일, 2003년 말에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된 신행정수도법을 공포했다.
그 밖에도 취임 1년차에는 대통령 취임식 당일인 2003년 2월 25일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5월 15일에 미국을 방문하여 부시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였다.
2004년 1월, 당시 딸을 순산한 노무현의 며느리 배정민이 개인 홈페이지에 150만 원짜리 유모차가 사고 싶어서 엄마, 아빠(노무현 부부로 추정)에게 사 달라고 졸라야겠다는 글을 올렸다. 이른바 ‘유모차 해프닝’이다. 그 뒤 항의가 일자 배정민은 홈페이지를 폐쇄했다.
2004년 3·1절 치사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하여 일본의 지도자(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지만 문맥상 고이즈미를 가리킨다고 판단됨)를 강하게 비판했다.
2004년 3월 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민주당이 고발한 노무현의 열린 우리당 지지발언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중립 의무 위반이 있다고 인정하고 선거중립의무 준수요청을 했다.
2004년 3월, 그의 형인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으로부터 청탁성 명목으로 뇌물을 수수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2004년 3월 11일 남상국은 한강에서 투신했다.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다. 그로 말미암아 노무현의 대통령 직무 수행이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직무 권한 대행의 역할을 맡았다.
2004년 3월 12일 ~ 3월 27일 보름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탄핵무효 부패정치 척결을 위한 범국민행동’(약칭 탄핵무효 국민행동)이 주도하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무효를 주장하는 촛불 집회가 열린다. 13일 날에는 가장 많은 인파가 촛불을 들고 탄핵 무효를 주장했는데, 주최 측 추산 10만, 경찰 추산 5만 명의 인파가 모였다. 한편 80여 개의 보수 단체로 이루어진 ‘바른 선택 국민행동’이 주도하는 탄핵 찬성 집회도 3월 27일에 2000여 명(경찰 추산)이 운집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2004년 4월 15일, 총선에서 ‘정신적인 여당’인 열린 우리당이 탄핵 후폭풍으로 지지도가 크게 상승하여 원내 과반수를 차지해 제1당이 되었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기각했다. 헌법재판관들의 개별 의견은 공개되지 않았다.
2004년 5월 21일, 노무현은 열린 우리당에 “수석 당원”으로 입당하여 열린 우리당은 공식적인 여당이 되었다.
2004년 8월 11일, 1월에 공포한 신행정수도법에 따라 국회는 신행정수도를 연기군과 공주시의 일부를 신행정수도의 입지로 정했다.
2004년 8월, 노무현에게 숨겨놓은 딸이 있다는 악성 댓글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로 기소된 H(49세) 씨에 대해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의 증거 조사 결과 그런 사실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특별법은 서울을 수도로 보아온 관습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수도는 서울이라는 것이 관습 헌법에 해당하므로, 수도 이전을 위해서는 헌법 개정을 통해 수도의 위치를 삽입하거나, 수도가 서울이라는 법적 확신이 소멸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8:1로 위헌 판결을 내렸지만 ‘관습 헌법’이라는 일반에 생소한 개념까지 동원하며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자 수긍할 수 없다는 일부 여론이 있기도 했다. 어쨌든 이에 따라 그가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행정수도 이전이 차질을 빚게 된다.
2004년 12월 16일 FTA 추진 지시를 내렸다.
2005년 3월 2일, 행정도시 특별법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행정도시 특별법은 신행정수도특별법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나자, 몇몇 부분을 수정한 뒤 입안한 법이다.
2005년 2월 14일, 그가 직접 고안한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 ‘e지원’이 노무현과 청와대 업무 혁신 비서관인 강태영 등 시스템 구축에 관여한 5명 명의로 특허를 출원해 특허를 취득했다. 2005년 7월 행정자치부에 시범 도입됐다.
2005년 3월 7일,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과 영유권 주장 등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동북아 역사재단을 지시, 설립하였다.
2005년 6월 29일,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탄핵 심판에서도 소수 의견 공개가 의무화되었다.
2005년 8월 3일, 국가보훈처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서훈이 추서되었다. 지난 3·1절 여운형 등 54명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사 서훈에 이어 주요한 사회주의 활동가에 대해 재조명해 뒤늦게 서훈이 추서되었다. 하지만 보수파의 반대와 훈격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05년 독도 갈등
2005년 8월 30일, T-50 골든 이글 양산 1호기 출고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 목조 불상인 쌍둥이 비로자나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해인사에 들러 비행기 사고 없이 잘 날아다니고 잘 팔아 달라고 부처님께 기도를 했다. 취임 이래 두 번째 해인사 방문이다. 해인사 대비로전 건립에 30여억 원의 국고 지원을 즉석에서 약속했다.
2006년 3월 23일, 노무현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네티즌들과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를 갖고 포털 사이트를 통해 온라인 생중계로 대국민 토론회를 진행했다.
2006년 6월 3일, 미국에서 4월에 귀국한 딸 노정연이 딸을 출산했다. 이로써 노무현은 친손녀 1명, 외손녀 2명 등 손녀 3명의 할아버지가 됐다. 청와대 관계자는 “원정출산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곱지 않은 점을 감안해 노정연 씨가 곽 변호사와 상의해서 한국에서 출산키로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2006년 11월 30일, 노무현은 여당 내 신당 창당 움직임에 대해 “나는 신당을 반대한다. 말이 신당이지 지역당을 만들자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며 신당 창당에 반대했다. 이어 “당적을 유지하는 것이 당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탈당을 하는 것이 당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말해 열린 우리당 사수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다시 지역당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지역당으로는 어떤 시대적 명분도 실리도 얻을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2006년 11월 APEC 정상회의와는 별도로 열린 아베 신조 총리와의 양자 회담에서 동해를 예를 들어 ‘평화의 바다’ 또는 ‘우의의 바다’로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고 청와대가 확인했다.
2006년 12월 6일 5.7%대의 낮은 지지도를 기록하였다. 이는 당시까지 재임했던 대한민국의 대통령 가운데 최저치였다. 이는 그 당시까지 역대 최저치였던 임기 말 김영삼 전 대통령의 8.4%보다 2.7%포인트 낮은 수치였다.
2006년 12월 헤럴드 경제는 여론조사기관인 ‘케이엠조사연구소’에 의뢰하여 노무현 정부에 대한 ‘최근 국정현안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를 설문 실시했다. 이 조사에서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매우 잘한다.는 1.0%, ‘잘한다.는 4.7%로 집계돼 국정운영 지지도는 5.7%에 불과했다. 반면 ‘못한다.(37.0%), ‘매우 못한다.(27.7%)는 부정적인 답이 주류를 이뤘으며 ‘보통이다’(29.6%)는 응답도 많았다. 이번 조사와 유사하게 실시된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노 대통령의 지지도는 지난 5월 9일 31.0%로 정점에 달한 후 8월 16일 20.6%, 10월 24일 12.9%, 11월 14일 11.0%로 하락 추세를 보여왔다. 이는 현 대통령 지지율 산출방식인 4분 척도와는 달리 통상적으로 지지율이 낮게 측정되는 5분 척도로써 조사된 결과이다.
2006년 12월 8일, 기자 회견에서 북한이 “미국이 한국 내 핵무기를 배치하고 있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는 것과 관련, “북한은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언론 보도에 대한 의견을 말해 달라”는 질문에 “한국에 미국의 핵무기는 없다”며 “미국의 핵우산이라는 것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두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공지의 사실”이라고 말했다.
2007년 1월 9일, 노무현은 그간 5년 단임제에서 4년 연임제로 헌법 개정을 제안했다.
2007년 2월 22일, 그는 집권 여당인 열린 우리당 탈당을 선언, 이와 함께 한명숙 국무총리가 3월 초순께 총리직에서 물러나 당으로 복귀하기로 했다. 한편 노무현은 이날 당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면서 ‘탈당’ 대신 ‘당적 정리’라는 표현을 썼다.
2007년 1월 23일, 신년 연설에서 그는 “권력형 비리는 없고 밀실, 측근 가신 이런 말도 사라졌다”라고 말했다.
2007년 2월 28일, 열린 우리당을 탈당했다.
2007년 6월 3일, 참여정부 평가포럼(약칭 참평포럼) 특강이 열린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강연하였다. 참여정부와 역대 정부의 성장률, 수출 증가, 주가 추이 등에 대한 지표를 조목조목 들면서 “어느 정부와 비교해서 실패라는 얘기냐”라고 반박했다. 이어 “아무런 전략도 없이 참여정부의 성과를 파탄이니, 실패니 공격하는 것만으로 우리 경제를 일류로 만들 수 없다”라며 한나라당과 이명박, 박근혜 대선 주자를 비판하였다.
2007년 6월 8일, 참여정부 평가포럼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에 대한 내용을 발언하였고, 한나라당은 노무현을 선거법 위반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고발하였다. 이에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중립 위반이라고 결정했다. 노무현은 그 결정에 대해 선거 중립 의무에서 “어디까지가 선거운동이고 정치중립인지 모호한 구성요건은 위헌”이며, “세계에 유례가 없는 위선적 제도”라고 주장했다.
2007년 6월 10일, 6월 민주항쟁 기념일로 지정한 이래 처음으로 열리는 공식 기념식에서 노무현은 6월 민주항쟁은 국민의 정의와 민주주의가 승리했다는 점과 군사 독재의 시대를 끊어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민주 세력의 분열과 수구 세력의 기회주의가 6월 민주항쟁의 성과를 반으로 깎아내리고 있음을 덧붙였다. 이어 기득권 세력과 수구 언론이 개혁을 반대하고 진보를 가로막고 있음을 말하면서, “민주 세력 무능론까지 들고 나와 민주적 가치와 정책이 아니라 지난날 개발 독재의 후광을 빌려 정권을 잡으려 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과거 언론 보도와 관련하여 수구 언론이 지난날 독재 권력의 앞잡이에서 지금은 그들 스스로 권력으로 등장해 민주 세력을 흔들고, 수구의 가치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말하며 “1987년 이후 숙제로 남아 있는 지역주의 정치, 기회주의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수구 세력에게 이겨야 한다는 명분으로 다시 지역주의를 부활시켜서는 안 될 것이고 기회주의를 용납해서도 안 된다”라고 말했다.
2007년 9월 12일, 노무현은 제주도 서귀포에서 열린 ‘제주 혁신도시 기공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통해 “균형 발전 정책은 참여정부의 상징적인 국가 발전 전략”이라고 소개하였다. “균형 발전 정책이 국가의 정의로운 목표로 뿌리 내려 어떤 정부도 이를 흔들 수 없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수도권 규제 완화 등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세력이 있고, 그에 따라 2단계 균형 발전 정책으로 세제 혜택 등 유인책을 제공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한편으로는 성공 여부는 그 지방의 역량에 달려 있음을 아울러 강조하면서 국토균형 발전 정책의 지속적이고 자발적인 추진을 강조했다.
2007년 9월 호주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당시 노무현은 부시에게 “평화조약에 대해 더 분명히 말해 달라”고 여러 차례 외교적 결례에 해당하는 요구를 하자, 부시가 짜증내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2007년 10월 발행한 '2007 방위백서'의 한글번역본에는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고 있다.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남북 관계 발전 및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을 발표하였다. 흔히 10·4 남북정상선언 또는 2007 남북정상선언으로 불린다.
2007년 11월 8일, 노무현은 무안공항 개항식 후 나주 중흥리조트에서 열린 광주-전남 주요 인사 오찬 간담회에서 “호남 뭉치자는 말만 하며 저급한 말만 쓰는 호남지역 국회의원들과는 답답해서 일을 못해먹겠다”라고 말해 한동안 논란을 일으켰다.
2007년 11월 24일, 그는 해인사 대비로전(大毘盧殿) 낙성 대법회에 참석하면서 축사를 하였는데 세 번째 해인사 방문이었다.
2007년 12월 20일, 남상국의 처 김선옥과 동생 등 유가족이 남상국의 명예훼손 혐의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2008년 2월 마이클 그린 전 미 NSC 선임보좌관은 인터뷰에서 한미 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2008년 2월 25일, 차기 대통령인 이명박의 취임식에 참석한 후 KTX를 타고 밀양을 거쳐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 봉하마을로 귀향했다.
2008년 4월 20일, 그는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에 위치한 노씨 문중 선산에서 열린 종친회 삼릉단 제종회 대제에 참석해 제관인 초헌관 자격으로 제를 지냈다. 같은 날 오후에는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다.
2008년 7월, 국가기록원과 뉴라이트 전국연합에서 대통령 기록물을 사사로이 봉하 마을로 옮긴 건에 대하여 검찰에 불법적인 ‘무단 유출’로 기록물에 관련된 전 비서관과 행정관들을 고발하여 수사가 진행되었다.
2008년 7월 ‘태광실업 특별 세무 조사’에 대한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의 청와대 보고 후 시작됐다.
2008년 9월 18일, 그는 건전한 토론 문화 조성을 취지로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했다. 노무현 측은 사용자 참여 중심의 인터넷 환경인 ‘웹 2.0’에서 착안한 이름으로 체계적 토론을 통해 더 나은 민주주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뜻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2008년 10월 17일, 한국 정치학회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보수주의를 비판하였다.
2008년 10월 21일, 보수적 성향의 시민단체인 자유시민연대(대표회장 이강욱)는 노무현을 국가보안법 및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2008년 10월, 박연차가 정관계 인사 등에게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때 이명박의 친형 이상득 의원이 로비 상대로 거론되었다.
2008년 12월 4일, 노무현의 친형 노건평은 세종증권 매각비리 의혹과 관련, 농협의 인수 청탁과 함께 29억여 원을 받은 혐의로 영장 실질 심사를 거쳐 구속 수감되었다.
2008년 12월 5일, 자신의 친형인 노건평의 비리 사건에 대해 “내가 사과하면 형님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대(對)국민 사과를 거부하였다.[142]
2009년 4월 7일, 개인 홈페이지인 ‘사람 사는 세상’에 “저와 제 주변의 돈 문제로 국민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리고 있습니다.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껏 저를 신뢰하고 지지를 표해주신 분들께는 더욱 면목이 없습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라고 글을 올렸다.
2009년 4월 22일, ‘사람 사는 세상’을 폐쇄하고 ‘절필’을 선언, “나를 버려라”고 호소했다.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 버렸습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라고 글을 올렸다.
2009년 5월 23일 11시 양산 부산대학교 병원 측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의 직접 원인은 두부외상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공식 발표에 의하면 23일 8시 13분 경 인공호흡을 시행하며 양산부산대병원 응급센터로 이송됐다.
2009년 3월 26일, 이호철 전 민정수석과 정윤재 전 비서관이 금품을 수수했다는 오보를 문화일보 등에서 보도하였다. 이때 노무현 게이트라는 말을 문화일보에서 처음으로 사용했고, 이로 말미암아 이호철 및 정윤재로부터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렸다.
2009년 4월 7일, 노무현은 검찰이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을 체포하자 자신의 개인 공식 홈페이지에 부인 권양숙이 박연차로부터 돈을 받아 사용했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러나 사과문에 대해 한나라당 최고위원 박순자는 같은 날 기자 회견에서 “석고대죄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노회한 승부수를 던지는 모습에 국민들은 참담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라며 비판하였다.[75]
2009년 4월 10일, 검찰은 노무현에 대해 ‘포괄적 뇌물수수죄의 공범’ 혐의를 주장했다.
2009년 4월 11일, 기업인 박연차의 돈을 뇌물 수수한 혐의로 조카사위 연철호가 긴급 체포되었다.
2009년 4월 12일, 뇌물 수수 관련 혐의로 그의 부인인 권양숙이 검찰 소환 조사를 받았다. 이때 문재인은 변호인 자격으로 동행하였다. 같은날 아들 노건호가 소환 조사 받았다.
2009년 4월 19일, 권양숙 여사가 빌려 썼다는 3억 원에 대해 ‘검찰이 거짓임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권양숙 여사가 정상문 비서관에게 말해 박연차로부터 돈을 빌렸다고 진술했다.
2009년 4월 22일, 검찰이 노무현에게 박연차의 정관계 로비 의혹 수사와 관련된 서면 질의서 7장을 발송했다. 그에 대한 답변서(진술서)를 4월 25일 노무현이 검찰에 전자 우편으로 먼저 제출했고, 검찰은 이것을 검토하였다.
2009년 4월 30일, ‘포괄적 뇌물 수수죄’ 피의자 혐의로 노무현은 검찰에 출석, 10시간 가량의 조사를 받았다. 뇌물 수수에 관해 대체로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연차 태광실업 사장과 대질 신문은 노무현 측의 거부로 결국 실시되지 않았다.
2009년 5월 13일, 노무현의 부인 권양숙이 노무현의 회갑 선물로 받은 1억 원짜리 시계 두 개를 논두렁에 버렸다고 검찰에 진술하였다고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에 “부인·아들에 딸까지 돈을 받고 이제는 증거 인멸 시도까지 하느냐”며 강하게 비판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검찰은 노무현이 검찰 조사에서 “논두렁”이라는 말은 없었고, “집에서(권양숙 여사로부터) 버렸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진술했다고 확인했다.
2009년 5월 14일, 노무현의 딸 노정연이 받은 40만 달러를 놓고 검찰과 노무현 측이 진실 공방을 벌였으며, 검찰은 권양숙을 5월 16일 재소환하기로 했다.[
2009년 5월 23일, 과거 고시 공부를 했던 정토원의 법당에 모셔진 부모와 장인의 위패에 예를 표하고, 그 옆의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을 하였다. 봉하 마을 뒤편 봉화산에 자리 잡은 정토원은 그가 투신한 부엉이 바위에서 약 200미터 거리에 위치한 사찰이다.
2009년 5월 24일, 해인사의 승려 3백여 명이 분향소를 찾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하안거를 깨고 나와 조문을 한 것으로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이 자살함으로써 노무현에 대한 검찰 수사를 종료하였다.
두부의 외상이 직접 사망원인으로 판단되고 늑골골절, 척추골절 등 다발성 골절도 관찰됐다”고 말했다. 경남지방경찰청장은 “노무현은 수행 중이던 경호원 이병춘을 인근 정토사로 심부름을 보낸 후 자리를 비운 사이에 투신하신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호원은 자책감 때문에 노무현이 “담배 있나?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고 한 후 뛰어내렸다고 거짓 진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병춘이 진술을 번복하고, 경호관 사이에 있었던 휴대 전화 교신 기록이 발견되면서 이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경호관이 초기 수사에서 사망당시 곁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추고 진술을 계속 번복한 것에 대해 경찰은 “경호 실패에 대한 문책을 두려워한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노무현이 정확하게 언제 투신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인터넷을 중심으로 팔목 골절, 경호원의 병원 이동 경로와 시각, 유서의 발견 장소와 법적 효력이 없는 컴퓨터 파일로 작성된 점 등을 두고 경찰 발표에도 불구하고 당시 경위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며 논란이 벌어졌다. 또한 타살설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라는 음모론이 돌기도 하였다.
경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오전 8시50분께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가운데, 사망 원인이 ‘투신 자살’로 최종 확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오전 6시 40분께 경호원과 함께 간단한 복장으로 사저 인근 뒷산으로 등산하던 중 10분 뒤 벼랑에 떨어져 크게 다쳤다. 노 전 대통령은 7시 인근 김해 세영 병원과 양산 부산대 병원(오전 8시10분)으로 호송됐으나 이미 상태가 다발성 골절로 소생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사망했다. 경찰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 원인을 실족사에 무게를 두고 조사했으나 집을 나설 당시 평소와 달리 권양숙 여사, 보좌관 등 측근에게 알리지 않고 경호원만을 대동한 점, 뒷산의 경사가 완만하다는 점 등을 종합해 투신자살로 최종 공식 확인했다.
문 전 실장은 기자들과 만나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뒷산에서 뛰어내렸다”면서 “가족 앞으로 유서를 남겼다”고 확인했다. 김경수 비서관도 노 전 대통령이 유서를 남겼다고 밝혔다. 노무현이 5월 22일 검찰 소환 조사를 응하면서 ‘정치적 자살’을 선택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결벽증에 가까운 정치적 자산이자 무기인 ‘도덕성’이 상처를 입고, 검찰의 수사 내용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면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인간적인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면서 이와 함께 노무현은 자신으로 인해 자신들의 참모와 가족들까지 고초를 당하고 있는 것이 대해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했다. 그의 극단적인 선택은 전직 대통령의 오욕과 비운의 역사를 끊어내려는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 대한 ‘먼지털이식’ 수사가 반복되는 현대사의 비극이라는 평도 있으며 ‘정치적 타살’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참으로 믿기 어렵고 비통한 일”이라고 애도의 뜻을 표하고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어긋남이 없도록 정중하게 모시라”라고 지시했다.
유서(오전 5시 21분이었다고 밝혔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영결식
노무현의 영결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져 전국적으로 500만(봉하 마을 장례 위원회 추산)이 넘는 인파가 각지에 시민들이 마련한 분향소에 조문을 했다. 봉하 마을을 찾은 조문객의 수는 100만으로 사망 직후부터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총 301곳 이 설치되었다. 여론 조사에서도 60%가 넘는 사람들이 이명박과 검찰의 책임이라고 응답하였다.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총 301곳 이 설치되었다.
한명숙 전 총리의 추도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도사가 영결식 동안 진행되었다.
화장
화장 후 수습된 유골은 고향인 경남 김해 봉화산의 정토원에 49재가 끝나고 매장되기 전까지 안치되었다. 당초 작은 비석을 세워달라고 유언하였으며, 한때 국립묘지 안장 여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바로 고인돌 형태의 묘소에 납골당 형태로 안장되었다.
2009년 6월 12일, 검찰은 23일 박연차 사건과 관련하여 노무현을 조사하던 부분을 ‘공소권 없음’ 처분을 하고, 관련된 수사를 종결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박연차의 정·관계 로비에 관한 수사도 노 전 대통령의 장례가 마무리될 때까지 당분간 중단하기로 했다. 장례가 마무리된 이후에 검찰은 수사에 착수했으나, 노무현에게 뇌물 수수 혐의가 있다고만 했을 뿐 그 구체적인 내용이나 증거 등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했다. 또한 박연차로부터 금품을 직접 받은 민 모 전 전주 지검장, 박 모 부장판사, 이 모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과 박연차가 로비를 벌였던 이상득 의원 등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을 했으면서, 금품을 직접 받은 적이 없는 노무현에 대해서만 혐의를 씌운 검찰에 대해 형평성을 잃었다는 비판이 있다. 한편 박연차 관련 뇌물 수수 사건에서 박연차는 대가성을 부인하였다.
2009년 9월 9일, 해운회사로부터 비자금과 관련해 세무 조사를 무마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거액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던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1심부터 대법원까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9년 9월 23일 -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약칭 노무현 재단)이 출범했다.
2009년 9월 24일 - 노무현의 생가가 복원과 함께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2009년 9월 17일, 박연차가 여러 정치인에게 뇌물을 준 뇌물공여죄의 혐의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노무현 및 그 가족과 관련해서는 뇌물 수수 혐의가 확인되었다고 발표했으나 기소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보수 언론은 “노무현이 재판을 받았다면 유죄”라고 단정하거나 추정했다.
2009년 9월 17일 판결이 나오자 “이번 판결을 보더라도 노 전 대통령이 근거 없는 모함을 당한 것은 아니다”라고 단정했다. 또 “언론이 신속 정확한 보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며 자신들을 비롯한 언론이 검찰의 모욕 주기 수사·흘리기 수사를 받아쓰고, ‘아니면 말고’ 식의 보도를 했던 것을 정당화했다.
2009년 10월 29일, 노무현과 관련한 기록물 유출 의혹 사건을 노무현의 자살로 인하여 검찰에서 불기소 종결했다.
2009년 10월 1일 - 노무현의 회고록인 《성공과 좌절》은 출간한 지 열흘 만에 베스트셀러로 판매량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전국 7개 도시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멘토로 삼고 싶은 대통령” 에 대한 설문조사에 41.1%로 노무현이 1위를 기록했다. 서울 41.4%, 경기도 39.5%, 경상도 41.5%, 전라도 36.7%, 충청도 47.2%, 강원도 30%, 제주도 45%로 전국적으로 고른 인기를 얻었다. 또한 ‘2009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물’에는 12%로 2위를 기록했다.
2009년 12월 16일, 이호철 전 민정수석과 정윤재 전 비서관이 금품을 수수했다는 문화일보의 기사 내용이 오보이므로 손해배상 및 정정 보도를 하라고 판결했다.
2009년 12월 18일 정상문 유죄 판결문에서는 노무현이 3억 원을 빌렸다는 사실을 적시했다.
2009년 12월 18일, 박연차로부터 금품을 받은 정상문의 재판 판결문에서 노무현이 박연차로부터 돈을 빌렸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2009년 12월 18일, 박연차로부터 금품을 받은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항소심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노무현을 위해) 15억 원이나 관리하면서 박연차로부터 노무현이 3억 원이나 빌릴 때에도 그 돈을 내놓지 않고 차명 계좌에 은닉하고 있었다는 것을 믿을 국민은 없다”라고 판시하면서 노무현이 뇌물 수수에 관련되지 않았음을 밝혔다.
2009년 12월 19일 - 중국의 반관영 통신사인 중국 신문사가 선정한 《2009년 세계 10대 뉴스인물》 중 노무현이 3위에 선정됐다. 선정한 이유로 “그의 자살 사건은 한국 정치에 깊은 생각거리를 남겼다”라면서 “노 전 대통령은 많은 공헌을 남긴 평민정치가였지만 재임 기간의 공적, 특히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라고 전했다.
2010년 1월 1일 - G세대 505명을 대상으로 한 《지난 100년간 우리나라에서 훌륭한 인물》 조사에서 1위를 기록했다.
2010년 1월 8일, 세종증권 비리와 관련하여 관련자들이 무더기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10년 1월 14일, 세종증권 비리와 관련하여 노건평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0년 5월 23일 노무현 사망 1주기를 맞아 광주, 대구, 대전, 창원, 인천, 대전, 충남 등 전국 각지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
2010년 11월 14일 오후 1시경 한 60대 남자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에 평소에 노무현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다가 인분을 투척한 후 그 자리에 유인물 22장을 살포했다. 소설가 이외수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이런 사람들일수록 국격 자주 들먹거리면서 애국자 행세를 한다. 단세포적인 구토유발자들”이라고 맹비난했다.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도 “이번 불상사는 깊이 개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법에 따라 엄정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대 이명박(2008-2013)
1941년 12월 현재의 일본 오사카 부 오사카 시 히라노 구에 해당하는 일본 제국 오사카 부 나카카와치 군 가미 촌의 조선인 정착 지역에서 이충우와 채태원 사이에서 4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일본어 성씨는 쓰키야마(月山, 1945년까지 사용했음)이었다.
1945년 11월 귀국하여 경북 포항으로 이사 왔다. 형제 둘을 잃었으며 원래 호적에 올라 있던 이름은 이상정(李相定)이었으나 나중에 이명박(李明博)으로 바꿔 올렸다.
1949년 포항영흥초등학교 입학 하고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졌고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바로 위의 누나와 동생을 눈앞에서 잃었다.
1954년 포항영흥초등학교 졸업
1957년 포항중학교 졸업
1998년 한국체육대학교 명예이학박사
1999년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교 객원연구원
1957년 동지상업고등학교(현 동지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3년 내내 수석으로 장학금을 받아
1960년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야간)졸업하였다.
1960년 고려대학교 재학 중 학생 운동권의 리더로 활동했고 상과대학 학생회장을 지냈으며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다가 처벌받기도 했다.
1964년에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해 6.3 시위를 주도하다가 수배되었고, 계엄령 이후 도피에 성공했다.
1965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그런데 이 신문 공고가 나오고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수하여 계엄사령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서울교도소에서 복역했다.
1965년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한다.
1966년 입사 2년차에 대리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29세 이사에 이어 입사 12년 만인
1970년 김윤옥과 결혼해 1남 3녀의 자녀를 두게 된다.
1975년 현대건설 재직 중인 출시된 현대 포니 1세대 모델 개발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977년 35세의 나이로 현대건설의 사장이 되었으며,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막대한 공사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고
1988년에는 회장이 되었다. 30대에 현대건설 사장
1989년 KBS-2TV에서 ‘야망의 세월’이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14] 현대그룹 재직시절 세계에서 3번째로 긴 말레이시아 피낭 대교(연륙교)를 건설하고 이라크 화력발전소를 짓는 등 세계 각지에서 사업을 진행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수주했던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공사였던 주베일 항만공사의 성공으로 회사에 큰 이익을 주었다.
1990년~1991년 걸프 전쟁으로 인하여 미수 채권의 회수가 어려워져 이 탓에 퇴임 9년 뒤인 2001년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도 있다. 현대 건설은 이후 워크 아웃을 조기에 졸업하여 시공능력평가 1위 자리를 다시 되찾았다.
1992년 대선 시절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회장의 출마와는 반대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해 현대 정주영 일가와의 관계는 좋지 못하게 되었다.
1992년 정주영 회장과 결별하고, 그는 민자당후보로 14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재산공개 직전의 아파트 소유권 이전 및 부동산 가격의 불성실 신고 등으로 말미암아 비난을 받았다.
1993년부터 그는 불성실한 재산공개로 비난을 받았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정원식 전 국무총리와 민주자유당 서울시장 후보 경쟁에서 패배했다.
1996년에 그는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선거 비용을 속이고 증인을 국외로 도피시켰다는 사실이 밝혀져 선거법 위반으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하기 직전 의원직에서 사퇴하였다.
1999년 4월 대법원은 이명박의 범인 도피 혐의에 대한 유죄를 확정했다. 15대 재선 의원 때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2000년 광복절 특사로 복권되면서
2002년 민선 3기 서울시장선거에 출마, 당선되면서 정치 인생에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청계천 복원 등 주력사업을 추진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명박이란 이름을 각인시켰다. 32대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는 청계천을 복원하였다. 취임 직후 복원 작업에 착수
2003년 7월 청계고가도로를 완전 철거하고 이후 2년 3개월간 복원공사를 벌여
2004년 5월 27일 당시 서울시장 이던 그는 문화재 개방의 기조 아래 숭례문 개방을 공약하였으며 2006년 6월 28일 숭례문의 홍예문까지 개방하여 일반 시민의 접근성을 높였다.
2004년 7월 1일, 그는 서울시의 대중교통 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2005년 10월 4천여 회에 걸친 협상 끝에 20만 상인들의 협조를 얻어내 5.84㎞의 청계천을 복원하여 청계천을 시민 문화 시설로 변화시켰다.
2007년, 타임지는 청계천복원과 버스체계 개편 등을 이유로 이명박을 “환경영웅” 중 한 명으로 선정하였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정몽준 의원의 한나라당 입당으로 현대가와의 '화해'로 봐도 무리가 없다는 분석도 있다.
2007년 선관위는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의 전과가 1건이라고 공고했다.
2007년 3월에는 사석에서 "1970~80년대 빈둥빈둥 놀면서 혜택을 입은 사람은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106] 이 발언은 이 ‘빈둥 발언’은 민주화 세력, 즉 운동권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돼 안팎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됐다. 이처럼 그가 ‘운동권의 적’처럼 매도되었다
2007년 그에 대한 주요한 비판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후에 나타났다.
2007년 12월 17일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명박의 주가조작 등 범죄혐의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일명 BBK 특검법)을 주장했고 이를 이명박이 받아들여 국회에서 통과시키고 이에 따라 특별검사의 수사가 이뤄졌다. BBK사 건 뿐만 아니라 차명재산, 서울시장 시절의 특혜 의혹 등에 대한 이명박 특검법이 입안되어 특별검사의 조사가 이뤄졌다.
2007년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그는 박근혜, 원희룡, 홍준표 후보와 경선을 치러 2위인 박근혜 후보를 2,452표 차이로 누르고, 한나라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되었다.
2007년 17대 대선 정국이 진행 중이던 때 그의 동업자였던 김경준과 그가 설립한 BBK의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이명박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있었다.
2007년 12월 7일 17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기 직전인 “우리 내외가 살아갈 집 한 칸이면 족하며 그 외 재산 전부를 내놓겠다.며 재산의 사회환원을 약속했다.
2007년 12월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후보였으며,
2007년 12월 19일 각기 26%와 15%의 지지를 받은 대통합 민주신당 대표 정동영 후보와 무소속 이회창 후보를 제치고 49%의 지지를 받으며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8년 2월 10일에서 11일 사이에 일어난 숭례문 화재와 관련해서 서울시장 재임 당시 숭례문 주변을 개방한 이유로 책임론이 부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불분명하다는 점이 있다.
2008년 7월 15일 일본 홋카이도 도야코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에서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에게 독도의 영유권 주장에 관해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발언했다는 사실을 요미우리 신문이 보도하였고, 후에 아사히와 문예춘추도 이를 보도했던 것으로 드러났으나[132] 양국 정부는 이를 모두 부인했다.[133]주일대사 권철현은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을 항의 방문하여 요미우리의 보도내용에 대해 시정조치를 해 줄 것을 요구했다.
2008년 11월, 계약 내용과 달리 유흥주점 영업을 했기 때문에 가게를 비워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었다.
2008년 12월 26일에는 신문·방송 겸영에 반대하여 전국언론노동조합이 문화방송의 주도로 총파업을 하기도 했다.
2008년 멜라민 파동 당시 식약청을 방문하여 멜라민이 첨가되어 문제된 제품들을 살펴보는 중에 "(포장지에) 멜라민이란 말이 없네." 라는 발언을 해 논란을 일으켰으며
2009년 1월 정부가 제시한 녹색 뉴딜은 그 효과가 과장된 면이 크며 토목사업을 녹색으로 포장하려 한다거나 4대 강 정비 사업이 한반도 대운하의 전초전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2009년 5월 23일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검찰의 정치적 타살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2009년 6월, CBS 라디오 프로그램인 《시사자키》에서 진행자인 김용민 전 한양대학교 교수는 이명박의 정적에 대한 살해 행위에 대한 비판과 그에 따른 이 대통령의 비참한 최후를 이야기 한 후 “여기서 말한 이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현재까지는….”이라는 말로 이명박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였다.
2009년 6월 28일 일본에 방문하여 일본 올림픽 유치를 적극 지지하기로 했다고 발표하였다.[124] 그러나 국제대회 유치는 대륙순환 규정에 의하여 일본이 유치 할 경우 한국은 유치할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이나 2020년 부산하계올림픽 유치를 준비하고 있음에도 그 같은 발언을 한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이 있다.
2009년 7월 6일 장학·복지재단인 청계재단을 설립하여 일부 부동산과 동산을 제외한 재산의 상당부분을 재단에 기부한다고 발표했다.
2009년 12월 17일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15)에서 제이크 슈미트 미국 국제기후변화소장은 한국이 환경보전과 녹색성장을 함께 추구함에 따라 혁신기술과 청정기술이 성장동력이 되고 있으며, 이들 분야에서 2020년까지 약 150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전망했다.
2010년 4월 1일 현대건설 재직 중 현대중공업에서 선박 제작에 참여
2008년 2월 21일에 특검은 이명박에 대한 모든 의혹에 대해 증거가 없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한편 2008년 2월 11일 김경준의 누나인 에리카 김이 "주가 조작", "사문서 위조"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미 연방법원으로부터 유죄가 선고나 이의를 제기했다.
2008년 2월 25일 공식 취임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7% 성장, 4만 불 소득, 세계 7대 선진국’의 이른바 ‘747 성장’을 주목표로 내세웠다. 또한, 지속가능한 발전 위주의 ‘녹색 성장’을 패러다임으로 정했다.
대한민국 최초로 CEO출신의 대통령이라는 의의도 있다. ‘함께 가요, 국민성공시대!’ 라는 표어를 내걸고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엠블럼의 명칭은 태평고(太平鼓)로 북은 가장 힘차고 박진감 넘치며 전진을 상징하는 악기라는 점에서 모티브로 채택했다고 한다. 취임식에는 관련 인사는 물론 전체 4만 5000명의 참석자 중 2만 5000명을 일반 시민에게 신청을 받아 배정하였다. 또한 푸른색 바탕에 동아시아 지도와 태극기 그리고 노트북 컴퓨터를 든 그의 모습이 함께 그려진 취임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2008년 4월 18일에 캠프 데이비드를 방문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한미 FTA 협상 중 가장 민감한 현안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를 위한 협상하며 제시한 조건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의 반발이 커졌다. 이는 촛불 집회나 문화 집회 등으로 번져 갔는데, 이러한 집회들을 경찰이 진압하자 이명박의 지지율은 한때 7%를 기록하였다. 6월 말에 지지율 회복을 보이면서 강경 대응으로 선회했었다는 의견이 있다.
2008년 5월 29일 미국의 법원에서는 김경준 및 에리카 김에게 무죄를 선고하였고
이명박은 BBK의혹을 보도한 한겨레신문에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으며 한겨레는 2010년 5월 1일 2007년 8월 17일 BBK 보도에 대해 지면을 통해 허위주장을 보도한 것에 대한 사과문을 기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명박과 BBK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한 촛불집회 때 과잉진압을 풍자하면서 '가카'란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2009년 8월 28일 나로 우주 센터에서 연구원들을 격려하며
2009년 12월 1일 이명박은 박근혜 의원에게 "나도 지난 대선 때 어느 괴한이 권총을 들고 집에까지 협박을 하러 와서 놀란 적이 있는데, 경호원들이 붙잡고 봤더니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라고 말해 대통령 후보 때 권총협박을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2009년 12월 4일 브리핑을 통해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이 이명박 대통령의 '권총 협박' 발언을 날조된 거짓말이라고 비판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며 사과를 공식 요구했다.2008년 9월 한나라당에서 조사된 지지율에서는 25.6%로, 10월에는 23.9%로 조사되고 있다. 12월 16일에 조사된 지지율은 35.8%로, 2009년 1월 31일 조사된 지지율은 34.8%에 이르고 있다. 다만, 이런 지지율 상승 현상은 보수층의 결집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을 전후로 지지율이 다시 20%대로 내려간 상황이나 2009년 8월에는 31.4%로 지지율이 상승하였는데 이념적으로는 중도 층에서 지지율이 8.9%p 올랐고 계층별로는 중산층에서 4%p 올랐다. 이는 정부의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및 국립현충원 안장 결정과 북한 조문단과의 회담 이후 경색된 남·북 관계 회복에 대한 기대감 등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2009년 8~9월 지지율을 살펴보면 보수를 대표하는 신문은 50%, 진보를 대표하는 신문 등은 3~40%의 지지율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2010년 1월 4일 지지율 조사에 따르면 56.7%(매우 잘하고 있다 11.0%, 대체로 잘하고 있다 45.7%)로 나타났다.
2009년 8월 공식 청계재단은 330여억 원으로 출범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가 준비하는 동안 지지율이 53%로 높아졌다.
2010년 1월 25일 미국의 뉴스위크 아시아판 발행이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국을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변모시키려는 이명박 대통령 관련 특집기사를 실었다.
2010년 말 지지율이 50%를 웃돌았으나, 바닥 민심과는 차이가 크다는 지적을 야당뿐 아니라 여당에서도 하였다. 그 원인으로는 표본의 적정성 문제, 10%대의 낮은 응답률 등을 제시하였다. 한편 그에 대해 여론조사 기관에서는 조사비용을 낮게 책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여당에서는 각자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기에 조사하거나, 유리한 계층을 대상으로 조사하기 때문으로 풀이하였다.
2010년 초부터 지급되고 같은 해 3월 12일 청계재단 첫 번째 장학생 451명이 선발됐다. 재단은 이들 학생(중학생 218명, 고등학생 233명)에게 연간 141만 원가량의 학비를 지급하게 된다.
2010년 10월 29일부터 30일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아세안 관련 회의에 참석해 11월 서울 G20 정상회의 성공 개최를 위한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2011년 4월 시작한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는 '가카'가 대중화되는 데 기름을 부었다.
2011년 5월 8일부터 6박7일 일정으로 유럽 3개 나라를 방문했다
2011년 9월 미국의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미국 외교 관계자들은 이명박에 대해 '우리(미국)와 함께 헌신적으로 일하는 강한 친미주의자', '사실상 모든 주요 문제에 미국을 지원하는 성향' 이라고 평가했다.
2012년 8월 10일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
2012년 8월 10일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울릉도를 방문
이명박의 또 다른 별명인 "쥐박이" 별명"2MB" 별명"가카" 별명
저서
《신화는 없다》 (1995년)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2002년)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2005년)
《흔들리지 않는 약속》(2007년)
북한 세습 연표
1대 김일성(1948.9.9-1994.7.8) 1950. 6·25전쟁, 1950 군사위원회 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1956.04 당 중앙위 위원장,1966당 중앙위 정치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 총비서 ,1968 서울 무장공비 침투, 1972.12 사회주의헌법 채택, 국가 주석, 중앙인민위원, 국방위 위원장,1983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 1987 대한항공기 폭파, 1988 서울올림픽 불참, 1993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2대 김정일(1994.7.8-2012.12.17) 1997 노동당 총비서 취임, 1998 북미 금창리 지하 핵시설 사찰 타결, 2000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 2002 서해상 남북한 해군 교전 발생, 2003 베이징에서 제1차 북핵 문제 6자 회담,
2007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 2010 한국 천안함 격침,
3대 김정은(2012.12.17-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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