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2:1-4 /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본문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많은 것들에 비유되어진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의 ”...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
히브리서 기자가 유대인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가 유대인들에게 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형제들”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들과 구분하고 싶을 때는 그들을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칭하여 분명한 구분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진다.
1) 유대주의로 돌아가기 시작한 진정으로 구원받은 유대인들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었던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유대인 친구들과 가족들로부터 큰 억압을 당하게 되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록 그들이 구원받았으나 그들은 옛 관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여 옛 절기들을 지키며, 옛 제사들을 드리고, 옛 제사장들에게 매달려서 옛 성전의 규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받지 않기 위해 유대적인 형식들에로 다시 빠져 들기 시작했다.
히브리서는 원초적으로는 이러한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에게 유대주의의 옛 형식에 빠지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의 자리를 지키라고 말해 주기 위하여 씌어졌다.
이 서신을 통하여 그는 ”당신들은 더 좋은 언약을 가지고 있으며 더 좋은 결과들을 가져올 더 좋은 제사를 드릴 더 좋은 제사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지적(知的)으로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신하나 발설하기는 주저했던 유대인들
즉, 그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졌으며 유대인으로부터 배척을 받았으며 사로잡히고 배신자라고 낙인찍히게 되는 등등의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을 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3) 확신하지도 구원받지도 못했던 반대파 유대인들
당신들은 그리스도께로 와야만 합니다. 경주에 참가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주이며 당신은 그 안에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올바르게 참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와서 경주에 참가 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관망만 하며 앉아 있는가?
사람들이 관망하고 앉아 있기란 대단히 쉬운 일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들이 동료들의 억압이나 가족들의 억압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거나,
그들이 유대인이므로 배척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자신들이 동거하고 있는 여인을 포기해야 될까를 두려워하거나,
도덕적인 자각을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말한다면 그들의 사업에서 도덕성을 유지해야만 할 것임을 깨닫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경주에 참가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경주를 하도록 부르심을 입고 있다. 1절에서 ”경주”라는 단어를 주목하라,
이것은 헬라어로 「아곤」(ag n)인데, 여기서 영어의 agony(고통)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바로,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다.
「아곤」이라는 단어는 단거리 경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마라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이 마라톤이 「휘포모네」(hupomon )를 가지고 경주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휘포모네」는 ”인내”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승리를 향해 인내를 가지고 경주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다.
인내로써 경주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강건함, 주의력, 자기 희생과 자기 부인이 요구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안연히 쾌락을 누리는 삶이 아니다.
우리는 편하게 꽃침대 위에 뒹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려운 훈련과 연습이 요구되는 자발적인 자기 희생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군인의 생활인 것이다. 바울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딤후 4:7 상반절) 라고 말했다.
그의 삶에는 위임 명령과 훈련의 의미가 있음이 분명하다.
아모스는 아모스서 6장 1상반절에서 ”화 있을진저 ...안일한 자와...”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안일하고 나른한 삶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기 위해서는 약함과 우상 숭배와 게으름과 무지 그리고 죄와 싸우는 전투하는 그리스도인의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경주에 참가하고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께로 와서 관망하는 태도를 버리고 경주에 참가하라.
당신이 이미 경주에 참가하고 있다면, 그것을 계속하라!
그리고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경주는 훈련을 요구하는 인내의 경주라는 것이다.
1. 고린도전서 9장 2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바울은 25절”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이것은 그가 결코 방종하지 않았으며, 훈련 규율을 결코 깨뜨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어떠한 일에 대하여 ”아니오!” 라고 말할수 있어야만 하며 당신 자신을 세상과 정욕으로부터 단절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경주를 위한 훈련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가히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바울은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라고 말한다. 우리의 경주가 얼마나 위대한 경주인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2. 디모데후서 2장 3-4절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살아남고 승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1절 초두에서 ”그러므로”를 보고 있는가?
이 말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11장에서 그것은 믿음으로 산 모든 성도들의 명단 이었던 것이다. 즉, 아벨(4절), 에녹(5-6절), 노아(7절), 아브라함(8-19절), 이삭(20절), 야곱(21절), 요셉(22절), 모세의 부모(23절), 모세(24-29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30절), 라합(31절), 기드온(32절), 바락(32절), 삼손(32절), 입다(32절), 사무엘(32절), 다윗(32절), 선지자들(32절) 등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바로 증인들이다.
11장에서 증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믿음의 삶은 승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싸움터와, 사자 굴과, 칼과, 전쟁과, 핍박과, 계속되는 위험을 통하여 그 경주를 계속하였습니다. 그것은 승리하는 믿음의 삶이며, 우리는 당신이 인내로써 그 경주를 경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살아있는 증인들이며, 하나님에서 마지막에는 당신을 존귀하게 하실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증인들의 증거 위에서 경주를 경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게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관망만 하는 채로 있다면, 믿음으로 살면서 위대한 승리에 대한 생각으로 위험들을 통과했던 여러분의 선조들의 역사를 상기시켜드리지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항상 승리하실 것이므로 그들의 믿음을 하나님께 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물들(1하반절)
”...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당신이 경주할 때 알아야 하는 것은 가벼운 차림으로 경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습할 때에는 발목에 무거운 것을 달고서 두터운 옷을 입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주에 참가할 때에는 그것들을 모두 벗어버려야만 한다.
당신은 짐을 벗고 가장 가벼운 차림으로 경주해야 한다.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를 뒤쳐지게 할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 한다. 당신은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무거운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Ⅰ. 무거운 것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우리를 내리누르고 방해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다.
물질주의, 성적 타락, 야망과 같은 것들이 분명히 경주께서 우리를 억누를 것이지만 내가 믿기로는 히브리서 기자가 생각하는 무엇이 있었던 것 같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로 오는 것을 방해했던 가장 무거운 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였던 것이다.
죽은 행위들이 이 유대인들 가운데 만연하여 있었다.
그는 경주에 참가하여 경주하라고 그들에게 말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모든 율법주의와, 의식(儀式)과 제사와 관례 그리고 그들이 유대교에서 지켜 왔던 모든 규례들을 가지고 경주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잡동사니들을 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경주하십시오,
믿음을 좇아 생활하며, 행위를 좇아 살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Ⅱ. 죄
1절에서 언급된 두번째 장애물은 ”얽매이기 쉬운 죄”이다. 이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의심이다. 믿음의 삶을 망쳐버리는 죄는 의심이다.
의심에 대항하여 우리를 방어할 것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6절에서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라고 말한다.
로마의 커다란 방패인 「투레온」(thureon)의 크기는 폭이 0.7m에 길이가 1.4m나 되었으며 기름에 적신 두꺼운 가죽으로 치워져 있었다.
이 가죽에 박히는 어떠한 불화살(화전)도 즉시로 꺼져 버렸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방패는 믿음이다. 사단이 유혹의 불을 던질 때 우리는 믿음의 방패로 그것들을 꺼버리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사단아, 너는 엄청난 거짓말장이이다. 네가 말하는 것은 한 마디도 참된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가 참된 것이니 나는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한 가지 죄는,
하나님보다는 오히려 마귀를 믿는 행위인, 의심인 것이다.
본보기(2 상반절)
”... 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셨고, 비록 예수께서 세상의 죄악을 짊어질지라도 구속자가 되어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며 세상이 있기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갈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만일 여러분이 믿음의 본보기가 필요하다면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위험을 지나시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있었기에 승리한 분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Ⅱ. 우리의 초점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구절을 헬라어에서 보면, ”멀리 예수를 바라보다”가 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당신의 초점은 반드시 당신 자신에게서 탈피해야 한다.
사실 당신이 눈을 자신으로부터 빨리 테면 뗄수록 당신은 더욱더 나은 사람이 된다.
2절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말한다.
”주”(主)라고 번역된 말의 헬라어는 「아르케고스」(arch gos)이며 그 뜻은 ”창조자, 선구자, 지도자, 조상, 상전”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 혹은 다른 어느 곳에서 나오는 사람들보다 훨씬 위대한 믿음의 총지도자시라는 말이다. ”온전케 하시는 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텔레이온」(teleion)인데 ”완성하기까지 수행하다, 완전하게 혹은 철저하게 하다”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믿음을 완전하게 지키신 가장 중요한 실례(實例)가 되시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시작으로부터 끝까지 완전한 믿음을 좇아 사셨다.
종결(2하반절)
”...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 경주의 마지막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즐거움과 승리감, 두 가지이다.
즐거움은 주관적인 것이며 승리감은 객관적인 것이다.
즐거움은 당신이 이겼다는 커다란 기쁨의 느낌이며
승리감은 하나님의 실질적인 보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경주에 참가하지 않고 있다면 와서 경주에 참가하도록 하라.
거기에는 당신을 위하여 상(賞)이 기다리고 있으니 ...
곧 즐거움과 승리감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