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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을 쓰십시다
언어사회학서설 2
이 청 준
ㅡ나의 말은 나의 말이 아니며 나의 웃음은 나의 웃음이 아니다. 나의 말은 관객의 말이며 내 웃음 또한 관객과 청중의 웃음일 뿐이다. 내 말과 웃음이 이미 나의 말과 웃음이 될 수 없으매·…‥
우스운 노릇이었다.
인기 코미디언 피문오―아는 이는 이미 알고 있듯이 그것이 우리 시대의 코미디언 피문어씨의 본명 이다―씨가 지욱에게 그의 자전적 반생기(自傳的半生記) 『흐르지 않은 눈물』 (가제)의 원고 집필을 의뢰해온 것은 그러니까 가위 한 시대의 무대 우상(舞뢰禹像)이 그의 시대가 끝나고 난 다음까지도 의연히 그들의 우상으로 남아살아 있고 싶은 욕망에서, 그의 관객과 청중들을 압도할 요지부동한 자기 동상을 지으려 함에 다름 아니었다. 혹은 지금까지의 그의 인기에도 오히려 아쉬움이 남아 그의 청중과 관객 앞에 한 불변의 우상으로 군림하려는 피문오씨의 오만스런 자기 다짐이라 해도 무방한 것이었다.
그것은 피문오씨 특유의 어떤 체험이나 삶의 집적이 아니었다. 원고의 내용이나 말들은 피문오씨 개인의 삶이나 인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것은 다만 그의 인기를 좀더 오래 지속시켜나가기 위해 꾸며낸 허황스런 말들의 집 합이며 분식(粉飾)일 뿐이었다. 더더구나 그런 말들을 모아 짜서 그 말로 된 동상을 짓는 데도 피문오씨 자신은 전혀 직접적인 간여가 없어온 터이었다.
―윤선생께서 적당히 알아서…… 아 거 윤선생께선 자서전 전문가시니까 다 잘 아실 거 아뇨? 내가 갖고 싶은 책이 어떤 거라는 걸 말할 필요도 없이. 그저 사람들이나 실없이 웃겨먹고 사는 무식쟁이 어릿광대가 아니다…… 이 피문오란 인간도 어느 놈 못지않은 깊은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노라…… 왜 그런 거 있지 않소? 일테면 날 좀 쉽게 보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거 말요.
―그야 뭐 내가 실제로 그런 식으로만 살아왔다면 새삼스럽게 이런 일을 마음에나 두겠소. 그러니까 선생께서……
피문오씨의 주문대로 그의 반생은 오로지 지욱의 머릿속에서 그 전말이 다시 엮어져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원고를 꾸며나가고 있는 지욱은 물론 이야기의 주인공인 피문오씨에게조차도 그것은 전혀 알맹이가 없는 남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지욱은 아무래도 이야기를 진행해나갈 수가 없었다. 오접 전화소동 때문에 찢어 팽개쳐버렸던 원고지의 내용을 떠올려가면서 다시 일을 계속해나가보려 했으나 깡그리 헛수고였다. 거기서부터는 이야기를 한 발짝도 더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나의 말은 나의 말이 아니며, 나의 웃음 또한 나의 웃음이 아니매……
오접 전화사건이 지욱에겐 역시 지울 수 없는 충격이었다.
―아,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 33국의 × × 번입니까?
―호호…… 윤선생님이 누구시냐구요. 선생님은 참 이상한 걸 다 물으시네요. 윤선생님은 자신의 일을 누구에게 묻고 계신 거예요?
―선생님은 제가 정말 어떤 말괄량이 아가씬지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그야 선생님이 궁금해하지 않으셔도 상관은 없는 일이에요. 전 기어코 제가 누군지를 선생님께 아시게 해드리고 말 테니까요.
―선생님은 제가 누구였으면 좋으시겠어요? 어떤 계집아이가 되어드렸으면 좋으시겠느냔 말씀예요. 하지만 서두르진 마세요. 전 조금씩만 즐거워지고 싶거든요. 지금 이야기를 더 계속하다간 전 한꺼번에 너무 즐거워져서 기절을 하고 말 거예요.
한동안 계속되어오던 그 오접 통화에서 흘러나온 아가씨의 말들이 아직도 지욱의 귀청 근처를 빙빙 떠돌고 있었다. 바퀴벌레처럼 금세 소굴을 튀어나오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전화기 속의 그 부랑아와도 같이 뻔뻔스럽고 염치없는 말들, 소리소리 고함을 치거나 혹은 엄살을 떨면서 서물서물 종이 위를 간지럽히며 기어다니는 신문지의 활자어들, 뱀처럼 음흉스럽고 그리고 쉴 새 없이 꼬리를 뒤흔들며 쏟아져나오는 라디오의 전파음들……
지욱의 방 안에는 아직도 그 실체가 없는 말의 유령들이 수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말들은 과연 이제 정처가 없었다. 말이 존재의 집이라면, 말의 집은 또한 존재의 실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들은 이제 그 실체의 집을 떠난 지 오래였다. 집을 떠난 말들은 그가 깃들였던 실체와의 약속을 잊어버린 지도 오래였다. 그것은 일견 말들의 자유스런 해방처럼 생각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체와의 약속을 저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말들의 해방은 그 실체에 대한 지배력도 함께 단념해야 했다.
허공을 떠돌면서 저희끼리 자유롭고 음란스런 교미를 즐기다가 그것이 지치고 나면 아무 때 아무 곳이나 깃들여 쉴 곳을 약탈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당해온 학대와 사역에 대한 무서운 복수를 음모한다.
말들은 정처도 없었고 주인도 없었다.
지욱이 꾸며온 수많은 회고록과 자서전들에 동원했던 말들 역시 그러했다. 그가 써온 원고지의 말들에는 애초부터 그것을 부리고 다스릴 수 있는 진짜 주인이 있을 수 없었다. 자서전의 주인공들은 애초부터 지욱이 동원해온 말들과는 인연이 없는 위인들이었다. 지욱이 그런 위인들을 위해 강제 봉사를 시켜왔을 뿐이었다 말들은 마침내 스스로의 성실성에 둔감해졌고, 스스로의 신뢰를 단념하기에 이르렀다. 말들의 슬픈 해방이었다. 지욱은 이제 고삐를 벗어버린 말들의 유령을 부릴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피문오씨의 일을 더 이상 계속해나갈 수가 없었다.
지욱은 초조했다. 그럭저럭 사오 년 가까이나 지탱해온 호구지책이 속절없이 무너져가는 판이었다. 오접 통화극으로 인한 그 혹심한 자기 모멸감에도 불구하고 뭉그적뭉그적 며칠이 못 가 다시 원고지 앞으로 이끌려가 앉아야 했을 만큼 지겨운 요즘의 생활이었다.
하지만 지욱은 이제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문오씨를 단념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최상윤 선생(충청북도 어느 산간벽지에서 10만 평의 황무지 야산을 개간, 젖과 꿀물이 흐르는 옥토로 일궈 냈다는 그 의지의 사나이 말이다)에게나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최상윤 선생 一그 자신의 땅에서 자기 손으로 가꿔 얻은 감자만을 먹고 산다는 고집스런 사내에게서라면 그의 회고록의 대필자로서나마 어떤 구체적인 인간사의 알맹이를 체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문오씨의 경우에서처럼 공허한 말의 유희에는 심신을 덜 시달려도 될 것 같았다. 적어도 그 최상윤 선생에게만은 그에게 봉사시킬 말과, 그 말들을 거짓 없이 부릴 수 있는 소박하고도 떳떳한 삶의 실체가 여물어가고 있을 것 같았다.
최상윤 선생을 생각하자 지욱은 마침내 피문오씨의 일을 단념할 용기가 생겼다.
그는 자서전 원고지를 걷어치웠다. 그리고 기왕 결단이 선 김에 그의 일을 하지 않게 된 데 대한 작자의 양해도 구할 겸해 솔직한 해명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一경 애하는 피문오 선생님께.
지욱은 우선 원고지 위에다 서두부터 점잖게 뽑아놓았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일을 맡았다가 되돌려주는 것은 이쪽의 실수였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말을 점잖고 정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뽑아놓고 나서도 지욱은 얼핏 다음 말이 이어나가지지를 않았다.
―잘 좀 살펴서 해주슈. 난 다른 일도 바쁘니까 따로 신경 쓰지 않게끔 말이오. 내 일이 끝나고 나면 윤선생을 섭섭하게 대접하진 않으리다. 그야 나도 그쯤 기분은 살 만한 놈이니까.
순박해 보일 만큼 속된 몸짓에다 말씨까지 상스럽트록 고압적이던 피문오씨가 지금 당장 그 앞에 나타나 두 눈을 크게 부라려대고 있는 것 같았다.
지욱은 잠시 눈을 감은 채 꺼림칙스런 환각이 가실 때까지 조용히 펜을 멈추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 환각을 박차버리듯 힘있게 펜을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경애하는 피선생님. 피선생님의 무대 회상기 일이 한창 진행되고 있어야 할 시기에 이런 갑작스런 글을 올리게 되어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더구나 이 일이 아니더라도 주위가 항상 분주하실 선생님께서 저의 이번 글월로 하여 다소나마 마음을 따로 쓰시게 되신다면 그 더욱 사죄드릴 길을 찾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오나 선생님의 추궁이나 힐책이 두려워 언제까지나 진실을 숨기고 지낼 수는 없는 일로 사료되었삽기, 무례를 무릅쓰고 감히 솔직한 고백 말씀을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넓으신 아량으로 관용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올릴 말씀은 다름이 아니오라, 기왕 선생님께서 제게 대임을 맡겨주신 선생님의 자전적 반생기 『흐르지 않은 눈물』의 대필작업을 제게서 다시 거두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지욱은 단숨에 거기까지 적어놓고 나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묶인 몸이 반쯤이나 풀려난 듯 속이 훨씬 후련했다.
그는 손을 멈춘 채 다시 한동안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가슴속에 소용돌이쳐오는 갖가지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피선생님께서는 의외로 여기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런 식으로 갑자기 일을 중단하고 만 사유를 듣고 싶으실 줄 믿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된 끝에 지욱은 이윽고 다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당연한 요구이신 줄 압니다. 저 역시 선생님께 이번 일을 중단하게 된 데 대한 솔직한 사연을 말씀드리는 것이 제 도리요 의무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으니까요. 일을 끝마쳐드리지 못한 데 대한 제 책임도 또한 절감하고 있는 터이구요. 소상한 사연들은 차차 설명 올리겠지만, 한마디로 저의 이번 결정은 선생님의 일이 전혀 저의 능력 밖의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 데에 그 첫번 이유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일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제 능력 밖의 일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고 무모하게 작업을 떠맡고 나선 저에게 그 책임과 허물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용서하시는 데 도움이 되실 수만 있다면 이제부터 좀더 자세한 경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을 맡았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선 또 무엇 때문에 새삼 선생님의 일이 저의 능력 밖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인지 그 상세한 사연을 말씀드립니다.
지욱의 머릿속 생각과 손놀림은 여기서부터 점점 더 속도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전 그동안 수없이 많은 분들의 자서전과 회고록 같은 책들을 대필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선생님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책의 주인공의 삶에 대한 감동이나 구체적인 궤적의 체험 위에서 이루어진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대충대충 이야기나 조금 듣고 저 혼자 창작을 하다시피 해온 것들이었지요. 그런 식으로 저 혼자 머릿속에서 꾸며 쓴 자서전류의 책들이 아마 지금 당장 기억해낼 수 있는 것만도 열 권은 넘을 것입니다. 교육자도 있었고, 사업가도 있었고, 정치인·종교인도 있었습니다. 드물긴 했지만 선생님 같은 인기직업 종사자도 한두 분은 계셨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남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제 머릿속에서 멋대로 창작해내고 그럴듯하게 분장시켜나가는 일에만 매달리다보니, 언제부턴지 모르게 제겐 차츰 허망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군요. 이토록 열심히 남의 이야기만 꾸며내고 있는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무어냐. 아마도 제가 그분들의 야야기를 머릿속에서만 꾸며내려 하지 않고, 간접적으로나마 그리고 얼마쯤이나마 그분들의 값진 삶의 내용을 체험할 수 있었다면 원고지 대필업일망정 그 나름의 보람을 지닐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있어본 일도 없는 삶의 내력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꾸며내다보니 저 스스로가 먼저 자신의 일에 공허감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남의 자서전을 대신 써주는 일에 회의가 오기 시작했지요. 하기야 제게 일을 맡겨온 분들 중에 정말로 저를 감동시키고 제 일에 보람 같은 걸 느끼게 할 만한 삶을 살아오신 분이 계셨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서전류의 책으로 쓰는 것이 어찌 대필을 용납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자기 일을 자신이 적는데도. 사람이란 늘 과거를 미화하고 과장하려는 습성 때문에 기술(記述)의 공정성을 잃기 쉽다는 게 자서전 집필의 일반적인 통폐로 지적되고 있는 실정인데, 하물며 자기 과거사의 기술 자체를 남의 손에 의지하려는 일부터가 엉터리없는 기만행위지요. 하지만 이 시대가 원래 그 피난보따리 같은 자기 알리바이 신앙시대가 되어 그랬는지 너나없이 그런 자서전류의 책들을 갖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고, 그 덕분에 저는 이 몇 년 동안은 변변치도 못한 필력 하나로 먹고 자는 걱정 하나는 잊고 지낼 만한 세월을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저는 저의 일에 대한 회의도 늘어가고 있었던 셈이구요.
당연한 노릇이었지요. 이유 없는 회의가 아니었습니다. 그 짓을 몇 년간 계속하다보니 서당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저 역시 제가 하고 있는 일을 돌이켜 생각해볼 기회가 많았고,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나름대로의 자서전 논리 같은 걸 세워보기도 했었거든요. 눈에 보이지 않는 죄악을 범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자신의 과거사를 고백하는 데 있어, 남의 입을 빌린다는 그 원초적인 대필업의 오류는 이미 재언할 필요도 없는 일이겠지요. 뿐만 아니라 자기의 정직한 생의 궤적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의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또 자서전 집필의 본뜻이 되어야 할 한 시대나 역사에 대한 진실의 증언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적어도 자기의 지난날을 뼈를 깎는 참회의 아픔으로 다시 들춰내 보일 수 있는 정직성이나 그 부끄러움을 박차고 나설 용기, 또는 자신의 과오를 폭넓은 이해와 사랑으로 어루만질 수 있는 성실한 자기 애정 같은 것들과도 아무 상관이 없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 것들보다도 제가 이런 일을 대신해줌으로써 범해온 보다 큰 죄악은 제게서 그 자서전을 지어 받아간 분들이 아무도 그들의 어두운 과거에서 밝고 참된 자기 해방을 맞을 수가 없게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자기 자서전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성향으로 보아 대개 굳건한 자기 신념의 소유자들이거나 자신의 과거에 대해 유독 심한 갈등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외견상으로는 누구보다 굳건한 신념의 소유자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갈등을 일사불란한 신념의 옷으로 위장할 수밖에 길이 없는, 신념이 강해 보이면 강해 보일수록, 그만큼 내면의 갈등 또한 우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뜻이 컸으니까 갈등이 심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뜻이 클수록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도 많았을 터이고, 실현이 용납될 수 없었던 과거는 그만큼 갈등도 심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리고 그 갈등이 심했던 과거의 빛깔은 어둠이 아닐 수 없었겠지요. 어쨌거나 그와 같은 과거에 대한 갈등은 내일을 향한 이들의 전진에 참을 수없는 장애가 되었을 게 당연합니다.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물론 자신의 과거지사를 극복하고 넘어서야만 내일에의 전진이 가능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불행히도 대부분이 자신들의 지난날을 정직한 참회나 부끄러운 과거를 부끄럽지 않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용기로써가 아니라, 또는 자신의 과오를 허심탄회하고도 따뜻한 눈길로 되돌아볼 수 있는 애정으로써가 아니라 단순한 망각으로 그것을 넘어서려고들 합니다. 과거사를 잊어버림으로써 그것을 이기려고 합니다. 자서전 대필업자로서의 최소한의 윤리적인 책임 때문에 의뢰인의 과거사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볼라치면 모두가 한결같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망각만으로도 부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망각으로도 안심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은 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잊고 싶은 과거 위에 새 이력서를 만들어 두꺼운 도배질을 해버립니다. 자신의 과거사와는 거의 상관도 없는 새로운 내력을 지어가지는 것이지요. 거짓 자서전 말입니다. 저는 결국 이들의 과거를 지우고 그 위에 번쩍번쩍 화려한 도배지를 덮쳐 발라주는 뱃심 좋은 도배장이 역할을 해온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실로 그 사람들이 그의 어두운 과거에서, 그 과거의 갈등에서 해방이 될 수 있었던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분들은 그 엉터리없는 자서전으로 하여 보다 치명적인 자기기만에 빠져 그 두꺼운 도배지 속에 감금된 과거로부터 영원히 풀려날 길을 잃고 만 것입니다. 저는 제 자서전 대필업으로 하여 그들을 과거의 갈등으로부터 해방시켜준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것 속에 감금시키는 일을 계속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일이 이분들에게 행해온 악덕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거짓 자서전은 그의 주인공을 영원한 과거 속에 감금시키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해독이 보다 광범하게 확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서전에 씌어진 말들이 그 주인공의 삶과는 별로 상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누차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자서전은 한번 씌어지고 나면 거꾸로 그의 살아 있는 주인공을 사로잡고 그를 지배하는 이상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의 자서전들은 그 대부분이 실상은 과거의 시제를 빌려 쓴 미래의 자기 암시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서전들은 살아 있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그의 새로운 미래상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실현을 꿈꾸게 합니다. 그릴듯하게 꾸며진 이야기니까요. 어두운 과거도 아름답게만 회상되고 과오도 미덕으로 미화되기 쉬운 것이 자서전 집필의 위험스런 함정일진대, 하물며 그런 과거에서조차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꾸며낸 인간사라면 그것이 얼마나 완벽하고 위대해 보일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위대한 정치가요 언제나 존경받을 기업가요 신념 깊은 장군, 교육자, 천재적인 예술가요 변호사요 의사요 종교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서전의 살아 있는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가슴속에 그 화려한 동상을 지닙니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로 실현해내고자 탐욕스런 지략을 다 짜냅니다. 때로는 소망대로 자신의 동상을 세인들 사이에서 완성해낸 듯이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경우라 하더라도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과거를 뼈아픈 참회로 극복하고 넘어선 사람들이 아니며, 만인 앞에 자신과 자기 시대의 적나라한 진실을 증언할 용기를 가졌던 사람들도 아니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거짓 증언한 위인들이기가 쉽습니다. 동상은 지으려 해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어져서 지어질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지으려고 해서 억지로 짓는 동상은 탐욕의 거짓 표상일 뿐입니다. 속임수일 뿐입니다. 능력이 없는 자가 억지로 지어낸 동상들―무모한 어문학자가 지닌 20세기의 세종대왕, 지략도 용기도 없는 군사령관의 제2의 패튼 장군, 품위 없는 희극배우가 꿈꾸는 위대한 찰리 채플린, 부의 윤리와 사회적 책임에 둔감한 기업가가 맹신하는 카네기나 오나시스……그러나 그 가짜 동상들을 현실에서 탐욕스럽게 완성해내려 할 때의 무리를, 한 사람의 거짓 동상을 위해 그 거짓 동상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무고한 피해와 희생을 우리는 감히 눈감아버릴 수가 없습니다. 동상의 주인공은, 그리고 그와 이웃한 수많은 사람들의 소중스런 삶은, 그 한 사람의 동상을 위한 시험의 재료가 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서전으로 미래의 이야기를 쓰려는 것을 탓할 수만은 물론 없습니다. 자서전은 실상 과거의 시제를 빌린 미래의 이야기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미래는 자서전을 쓰는 주인공의 미래가 아니라, 그것을 거울삼을 다음 시대 사람들을 위한 만인의 미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일사천리로 여기까지 글을 써버리고 나니 지욱은 이제 스스로도 머릿속 생각들이 어지간히 정리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쓰다보니 그것은 피문오씨에 대한 사과의 글이라기보다 지욱 자신의 작업에 대한 푸념이었고,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한 어떤 회의의 확인이었다. 애꿎은 공박을 당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피문오씨 쪽이었다.
그가 늘 즐겨 입고 다니던 윤기 나는 가죽점퍼 차림의 피문오씨의 모습이 눈앞을 잠시 스쳐갔다. 그 가죽점퍼의 목깃에 싸인 피문오씨의 굵은 목덜미는 그가 가끔 자기 주먹으로 뒤통수를 툭툭 두들겨대고 있을 때가 아니더라도 혈압이 늘 높아 보였었다. 혈압 때문에 항상 신열이 돋은 것처럼 불그스레한 얼굴색의 피문오씨는 역시 손에는 좀처럼 끼이는 일이 없는 가죽장갑 한 켤레를 늘 한쪽 손에 질끈 몰아쥐고 다녔었다.
지욱은 그 피문오씨의 환영을 지워버리기 위해 한동안 다시 눈을 감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공연히 자꾸 마음속이 허전해왔다.
썰물이 가슴속을 씻어내려간 것처럼 기분이 허허했다.
하지만 지욱은 이윽고 소스라치듯 다시 펜대를 힘 있게 꼬나 쥐었다. 어쨌거나 편지는 마무리를 지어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꾸 피문오씨의 환영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지욱은 마치 그 피문오씨의 환영을 단숨에 쫓아버리려는 듯 그리고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에 대한 화풀이를 대신하려는 듯, 말투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말씀을 드리다보니 피선생님과는 직접 상관도 없는 소리들을 지루하게 늘어놓고 있었던 것 같군요. 게다가 또 제가 드린 말씀들은 워낙 제 자신의 직업윤리(이것도 무슨 직업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와 양심에 관한 것들이라서 피선생님께는 전혀 이해력 밖의 이야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긴 말씀을 드리게 된 기본 동기는 어디까지나 이번 일의 중단 책임이 피선생님 쪽이 아닌 저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밝혀드리고자 함에서라는 점만을 이해해주십시오. 그리고 제발 화를 내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일을 제게 맡겨오신 선생님 쪽에 설령 어떤 허물이 있으셨다 해도 그것은 피선생님 개인의 허물이 아니라, 선생님 이전에 제게 대필을 의뢰해오신 많은 분들, 이미 그분들에게서부터 비롯된 상습적이고도 일반적인 병폐의 결과일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를 불문하고 자신의 삶에 정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깊이 싸덮고 두꺼운 도배질을 하여 세상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터무니없는 자기 동상에의 탐욕으로 애꿎은 이웃까지 괴롭히기를 서슴지 않는 위험스런 요술꾼들 말씀입니다.
하지만 애초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들의 일을 즐겁게 거들어온 저 자신에게 있음을 재삼 사과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나마 좀 다행인 것은 이제 전 뒤늦게나마 저의 그런 배반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제겐 근래 그럴 만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 자세한 사건 내용까지 설명드릴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전 어쨌든 이번의 그 소동으로 해서 마침내 저 자신의 소중스런 생활 능력으로 여겨오던 것들이 송두리째 쓰러져나가버리는 처참스런 좌절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 이제 글을 쓸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적어도 피선생님의 일을 대신해드릴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이 되고 있습니다. 말이 저의 뜻을 따라주지 않습니다. 말들이 오히려 저를 비웃고 희롱합니다. 그동안 제가 행해온 일들에 복수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께는 또 다시 이해의 한계를 넘고 있을 소리들을 하고 있군요.
어쨌거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용납해주신다면, 선생님께 용서를 구하기 위해 저 역시도 제 과실에 대한 저 나름의 도리로써 값을 대신 해드리고 싶습니다.
다름 아니라 아마도 선생님께서 이 글을 받고 나시면 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같은 일을 부탁하려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으로는 가능하면 이 기회에 아주 단념을 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아, 그야 물론 선생님께서 원하신다면 다른 사람에게라도 얼마든지 일을 대신시킬 수는 있으시겠지요. 하지만 앞서도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선생님 자신의 과거에 대해 그것을 있는 대로 솔직히 시인하실 정직성이 없으시다면, 있는 대로 그것을 증거하고 참회하실 용기가 없으시다면, 그것이 아무리 추하고 부끄럽더라도 선생님 자신의 것으로 그것을 사랑하고 또 그것을 넘어서실 자기 애정이 없으시다면, 그 정직성과 용기와 애정 이 생길 때까지 그것을 단념하고 계시는 것이 옳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자서전 작업이란 원래가 남의 손으로는 대신될 수 없는 성질의 일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만한 용기와 사랑과 지혜에 대한 신념이 없이는 더더구나 그에 대한 소망을 지녀서는 안된다는 것이 저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일을 맡았다가 되돌려드리는 허물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 싶은 충정 에서 감히 이런 권고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지욱은 마침 내 펜을 놓았다.
모든 허물을 자신에게 돌리는 식의 어조이긴 했지만,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을 거진 다 쏟아버린 기분이었다. 글을 쓴 대상이 굳이 피문오일 필요도 없이 지욱은 마치 자기 지난날의 질곡에서 해방이 되어 나온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피문오란 인간이 갑자기 어리석고 가엾어지기조차 했다. 그야 애초부터 그 피문오씨에 대한 일말의 연민조차 없었더라면 내친김에 그 최상윤 선생에 대한 자신의 기대까지도 함부로 털어놓을 뻔했던 지욱이었다. 피문오씨 당신의 일은 단념하지만 아직도 난 최상윤 선생에 대한 기대만은 저버릴 수가 없노라 은근히 그를 더 매도해주고 싶던 지욱이었다. 하지만 가련한 피문오씨에게 그런 애꿎은 자기 모멀감까지 불을 질러줄 필요는 없었다.
지욱은 그쯤에서 일단 피문오씨에 대한 해명의 글을 끝맺었다.
이튿날 아침.
지욱은 잠자리를 빠져나오자마자 옷을 대충 걸쳐 입고 그길로 곧장 하숙집 대문을 나섰다.
집을 나오다 그는 잠시 길 옆 우체국엘 들러 밤새 써둔 편지를 등기속달로 부치고 나서 용산 쪽 시외버스정류소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이쪽 결정을 피문오씨에게 알리는 것은 시기가 빠를수록 좋을 것 같았고, 그런 식으로나마 그 일에 대한 결단이 내려진 이상, 이젠 최상윤 선생에 대한 그의 마지막 기대에 대해서도 조속히 판가름을 내야 할 사정이었기 때문이다.
용산에서 발차 직전의 C읍행 버스에 몸을 싣고 나서, 그 버스가 영등포, 시흥 등지를 거쳐 완전히 교외지대로 벗어져나가기 시작할 즈음부터 지욱은 새삼 기분이 홀가분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일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지욱은 그 최상윤 선생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큰 기대를 지니려고 하지 않았다. 뭔지 모르게 속이 후련해오고 기분이 갑자기 들뜨기 시작한 것은 최상윤 선생에 대한 기대에서가 아니라 모처럼 만에 답답한 도심을 벗어져 나온 해방감과, 동화의 한 장면처럼 소리 없이 차창을 흘러 지나가는 적막스런 겨울 들판의 풍경 때문이었다. 영하의 기온 때문에 군데군데 잔설이 쌓인 겨울 들판만 끝없이 이어져나가고 있는 창밖 풍경은 지극히도 단조롭고 삭막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욱은 그것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 조금도 지루하거나 피곤하지가 않았다. 버섯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은 도로변의 초가집들이나 햇볕에도 녹지 않고 하얗게 반짝이는 잔설 속의 산골짜기들, 그리고 벌판 건너 먼 산등성 이 너머로 비껴 흘러간 무연스런* 겨울 하늘들이 지욱의 기분을 갈수록 포근하게 감싸왔다.
그는 방금 커다란 수렁 속을 빠져나가고 있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매연과 소음의 수렁에서, 거짓과 속임수의 수렁 에셔, 피곤한 말과 소문과 사람들의 수렁에서, 무엇보다도 그 정처 없는 말들의 수렁에서 다행스런 구원을 얻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산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들판도 단조로울망정 자신을 꾸미려 하지 않는다. 그것들의 어느 구석엔가는 그가 찾고 있던 말의 참모습이 깃들어 있을 것 같았다. 그 하늘과 산과 들판에서, 그가 가꾼 가난한 감자만을 먹으며 살고 있는 최상윤 선생에게는 고집스러우나마 그만의 정직한 말이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자서전에 봉사시킬 말들에 값할 거짓 없는 삶의 내력이 간직되고 있을 것 같았다.
단조롭고 허허한 차창 풍경이 오히려 지욱을 점점 흥분시키고 있었다. 말하지 않는 산과 들판과 하늘이 오히려 지욱으로 하여금 최상윤 선생에 대한 벅찬 기대감에 부풀게 했다. 그리고 지욱의 그런 기대는 이날 오후 그가 막상 그 최상윤 선생을 만나고 있는 동안에도 간단히 그를 배반해버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지욱이 최상윤 선생을 만난 것은 그러니까 그가 용산에서 버스를 올라탄 지 두 시간 남짓 시골길을 달리고 난 뒤였다. 포장도로가 없는 버스편은 그나마도 그 C읍까지뿐이어서, 최상윤 선생의 ‘개미마을’ 농장까지는 C읍에서 차를 내려 다시 한 반 시간가량 도보길을 걸어가야 했다. 사람들이 선생의 농장 이름만 듣고도 쉽게 일러준 길을 따라, 군데군데 붉은 황토가 흘러내린 야산지대를 몇 굽이 돌아 넘고나니, 일대에선 그중 윤곽이 뚜렷한 산세로 둘러싸인 분지형의 구릉지대가 나타났고, 그 구릉지대의 한쪽 숲 곁으로 최상윤 선생이 야산 개간의 근거지로 삼고 있다는, 무슨 시골 간이학교 교사처럼 보이는 암회색의 블록건물이 나타났다. 수확이 끝난 겨울철이라 군데군데 널려진 가축사와 곡물 저장창고 따위를 제외하고 나면, 과수나 여름철 곡량 재배지가 어디까지인지도 얼핏 분간해낼 수가 없었지만, 그 시골 간이학교 교사처럼 보이는 농장 본부건물을 중심으로 한 10만여 평의 분지지역 일대가 그동안 최상윤 선생이 10년 이상의 세월에 걸쳐 자신의 의지와 땀으로 황폐한 야산을 옥토로 개간해놓은 신화의 땅 ‘개미마을’ 농장이었다.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선생은 처음 예고도 없이 불쑥 그를 찾아온 지욱의 처사가 조금은 의외인 모양이었다.
“아, 이거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럽소. 떳떳지도 못한 일로 노형께 이런 번거로운 걸음걸이를 하시게 하다니.”
그의 뜻과 영농기술을 배우러 온 몇몇 청년들과 함께 고구마 저장소 손질을 돕고 있던 선생은 지욱이 자기소개를 끝내고 나서 일부러 농장까지 그를 찾아온 용건을 설명하자 서두부터가 무척 조심스런 어조였다.
“일이 여기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내 처음부터 부질없는 생각을 먹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흙 묻은 손을 털고 나서 지욱을 건물로 안내해 가면서도 선생은 그의 소탈스런 거동과는 달리 여전히 좀 소심스럽고 결백스런 겸사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지욱은 그 모든 선생의 말들이 공연한 치렛말이 아님을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최상윤 선생은 짐작대로 회고록 집필에 대한 그의 소망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쓰는 일의 본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더더구나 그것이 남의 손을 빌려 씌어질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라는 점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을 알고 있었다.
“노형께 이런 말 하는 건 뭣한 소린지 모르지만, 나 이런 일을 누구한테 대신 써받을 생각을 먹었다는 거 낯이 뜨거워 견딜 수 없구려.”
농장 관리사무실 겸 휴게소로 쓰고 있는 방으로 지욱을 안내해 간 선생이 난로 위에 얹어놓은 주전자에서 뜨거운 물을 한 컵 따라 건네주며 고백조로 털어놓았다.
“내가 그새 무얼 했다고 감히 그런 일을 맘에 두게 되었는지. 게다가 남의 손을 빌려가면서까지 그런 염치없는 짓을……”
지욱은 그런 선생의 몇 마디에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다. 선생은 적어도 차 속에서 생각했던 만큼은 그의 기대를 빗나가지 않고 있었다. 선생에 대해서라면 조심스레 기대를 걸어봐도 좋을 것 같았다.
“선생님께서 그 점을 부끄러워하신다면 전 더욱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전 아예 이런 일을 전문으로 살아온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이번에 선생님의 일에 대해서는 저도 좀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고, 그래서 오늘 당돌하게 선생님을 뵙고자 찾아온 길이오니 그 점 너무 거북하게 생각지 말아주셨으면 싶습니다. 아마 선생님께서 회고록을 갖고 싶어하신다거나 그것을 남의 손으로 대신 쓰게 하신 데 대한 석연찮은 느낌을 지니신다면, 그건 이번에 제가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기까지 수없이 생각을 거듭해온 제 부끄러움과도 무관할 수가 없습니다. 감히 말씀드린다면 선생님과 전 결국 같은 부끄러움을 지니고 있는 처지들이고, 그 부끄러움을 최소한까지 줄여가는 데는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마음을 보태야 할 입장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만 도와주신다면 그것은 아마 가능한 일로도 생각됩니다……”
지욱은 우선 선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의 속마음부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노형을 돕는다면……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노형을 잘 돕는 길이겠소?”
최상윤 선생이 마침내 마음이 훨씬 가벼워진 표정으로 지욱에게 물었다.
“우선은 있는 대로 선생님을 제게 보여주십시오. 선생님의 내력과 주위를, 이 농장에서 그간 선생님이 겪으신 일과 생각들 모든 것을 가감 없이 제게 보여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제게 다시 선생님의 일을 대신해드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 하도록 해주십시오.”
지욱은 솔직하게 주문했다. 최상윤 선생도 이젠 지욱의 그런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듯 처음보다 훨씬 수월하게 승낙을 해왔다.
“그건 아마 어려운 일이 아닐 게요. 자, 그럼…….”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를 보여줄 것 인가를 물어왔다.
선생이 그처럼 선선히 응낙을 해오자 이번에는 지욱 쪽에서 오히려 일이 좀 급하게 서둘러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닙니다. 선생님께선 특히 마음을 쓰실 만한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선 다만 제가 얼마 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선생님 곁에 머물러 지내면서 선입견 없이 선생님을 느끼고 생활을 배우게만 해주신다면요. 하지만 좀더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 실상 제가 선생님 곁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청원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어떨지에 대해서도 아직은 제 마음을 분명히 결정짓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지욱은 선생의 비위가 상하지 않도록 공손한 어조로, 그러나 그가 아직 선생의 회고록 대필을 떠맡아야 할지 어떨지까진 분명한 작정이 서 있지 않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최상윤 선생 쪽도 그걸 섭섭하게 여길 만큼 협량*은 아니었다.
“그러시다면 오늘은 우선 주변이나 대강 둘러보시고 노형의 뜻이 정해지기를 기다려야 할까보군요. 그 뭐 난 어느 쪽이라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 노형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알아보고 싶은 대로 알아본 담에 생각을 정하도록 하오그려, 허허.”
선생은 모처럼 만에 커다랗게 소리를 내어 웃으면서 다시 한 번 지욱을 안심시컸다.
“보시다시피 지금까지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온 건 굳이 무슨 회고록 같은 걸 남기고자 해서 그걸 위해서였던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외다. 안 그렇소, 노형?”
원고를 쓰게 되거나 말거나 하는 데는 별로 상관을 않겠노라는 선생의 말처럼 지욱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는 일은 없었다.
그 말은 선생의 본심이 거의 분명한 것 같았다. 그리고 선생 자신의 지금까지 이룩해온 것들에 비해 자기 책을 갖게 되거나 안되거나 서운함이 없으리라는 그의 겸허한 마음가짐이야말로 지욱은 무엇보다 그의 일을 맡아도 좋을 만한 만인에 대한 미덕이 아닐 수 없을 것 같았다.
최상윤 선생의 값진 삶은 과연 한 권의 회고록과 같은 자서전류의 기념비를 남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감사와 외경심이, 그것을 맡은 자의 부끄러움 없는 봉사와 성실성이 비로소 완성해낼 수 있었던 선생의 일생이었다. 회고록 집필에 대한 고려는 선생의 삶의 목적이 아니라 겸허하고 성실하게 그것을 살고 난 다음의 한 결과로서의 여망(餘望)일 뿐인 것처럼 보였다. 선생은 아직도 그의 과거를 한 권의 회고록 형식으로 정리하고 싶은 지극히 인간적인 소망에조차도 함부로 휘둘리지 않을 만큼한 절제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의 일생사는 이제 그 최상윤 선생 자신의 것만은 아니었다. 선생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성실한 주역의 몫을 다해온 것으로 충분했다. 그의 삶의 결실은 오히려 만인의 것이었다. 선생 자신이 그의 생애를 책으로 정리해 보이려 하지 않을수록 그 일은 자기 삶의 지표를 마련하지 못한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 되어야만 했다.
―이것은 더구나 나 스스로 선택이 가능한 일인 것이다.
마음에도 없는 일을 부실한 생계와 의뢰자의 체면 때문에 늘 반어거지로 떠맡고 나서야 했던 지욱으로서는 무엇보다 그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지욱은 이날 한나절 최상윤 선생의 주변사를 두루 다 둘러보고 선생 자신의 말을 통해 그의 체취와 생각들을 어느 만큼 가까이 접해보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일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스럽게 자꾸 마음에 거리껴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너무도 견고하고 일사불란한 선생의 신념 때문이었다. 자서전을 꿈꾸는 사람들은 참되거나 말거나 누구든지 그 신념이라는 걸 곧잘 내세웠다. 한 가지 신념으로 생애를 온통 일관해온 것처럼 보이기를 좋아했다. 지욱은 그 점 물론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의뢰인의 주문에 따라 그가 만족할 만큼한 인스턴트 신념을 제조해내는 데에도 인색함이 전혀 없었다. 하다보니 지욱 자신은 자연 어떤 사람의 삶에 있어서나 그 신념이라는 걸 대단스럽게 여길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역겨운 것이 오히려 그 신념 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상윤 선생에 대해서만은 지욱으로서도 일단 느낌이 딴판이었다. 선생에 대해서는 물론 지욱 쪽에서 그런 걸 꾸며대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것은 선생 자신의 생활과 의식 속에 자연스럽게 용해되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한 인간의 삶을 추호의 낭비도 없이 곧게 지탱해올 수 있었던 그 살아 있는 신념의 체험은 지욱으로 하여금 이상스런 두려움 같은 것을 먼저 느끼게 했다.
최상윤 선생은 우선 그의 의식주 생활 일반에서부터 그런 인상이 역연했다.
“난 남을 속이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나 자신을 속이는 일에도 한가지로 두려움을 가져야 할 줄 아오.”
지욱과 점심상을 마주하고 앉게 되었을 때 최상윤 선생이 한 말이었다. 때가 됐으니 요기를 하자면서 내오게 한 점심이라는 게 삶은 고구마 몇 뿌리와 밀가루식빵 몇 덩이, 그리고 소금에 절인 퍼런 야채 보시기 하나가 상 위에 올려진 것이 전부였다. 그 보잘것없는 점심상을 앞에 놓고 최상윤 선생은 거리낌 없이 설명을 계속해나갔다.
“나를 속이지 않는 첫째 일이 이렇게 내 손으로 심어 가꾸고 내 손으로 거둔 것으로 배를 채워 살아가는 것이오. 그래서 내 식탁은 보시다시피 늘 우리 땅에서 자신의 손으로 거둬들인 것만을 올리게 하고 있는 것이오. 내 땅에서 내 손으로 거둔 것으로 배를 채우는 일이 자신을 속이지 않음이란 이 땅과 하늘만 드리우면 사람은 원래 그곳에서 자족할 능력을 점지받고 있기 때문이오. 그 섭리에 순응하여 스스로의 능력을 계발해 사는 것이 이 하늘과 땅과 햇빛을 속이지 않는 것이요, 땅을 속이지 않는 것이 그것을 일구어서 살아가야 할 인간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일의 기본이 되기 때문인 게요.”
최상윤 선생은 고맙고 신기한 듯 조심스럽게 삶은 고구마 한 뿌리를 집어 올려 천천히 껍질을 벗기면서 말을 계속해나갔다.
“그야 자기를 속이지 않는 것이 어디 여기에서 그쳐야 할 일이겠소. 이 음식 섭생 한 가지만 두고 봐도 끝이 없을 일이지요. 보시다시피 난 음식을 취하는 데도 한 가지 곡식으로는 절대 두 가지 음식을 만들지 않는 것이 그간의 오랜 섭생법이오. 감자는 소금물에 삶아낸 것만으로, 밀가루는 간을 친 식빵덩어리로, 야채 푸성귀는 소금에 절인 풋김치로…… 입맛을 내게 하는 다른 양념들은 첨가를 금하게 하고 있지요. 땀을 내기 위해 고춧가루를 섞어 넣고, 코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깨를 부숴 넣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한 가지 곡물로는 한 가지 음식만을 만들어 먹는 것 그것이 곧 섭생의 기본이기 때문이오. 사람은 소가 들판의 풀을 뜯고 개울물을 마시는 것으로 살아가듯이, 땅에서 거둔 것을 불에 익혀 먹는 것으로도 필요한 자양을 얻어 살아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저것 양념을 섞고 기호를 좇아 혓바닥과 콧구멍을 달래는 일이 곧 자신의 육신을 속이는 일이요, 육신을 속임이 곧 영혼을 속이는 일이 되지 않겠느냐 말이외다. 하기야 이건 너무 원시적인 섭생법이라 아니할 수는 없을 게요. 그러나 우리는 우선 여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그게 지금 우리의 처지를 속이지 않는 길이요, 가난을 속이지 않는 일이요, 자신을 속이지 않음의 기복이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란 말이오. 더욱이나 내 땅에서 내 손으로 캐낸 감자라 해도 그나마 내 맘대로 혼자 먹을 감자는 아닌 게요. 난 내 몫을 늘리자고 이 넓은 땅에 감자를 심고 과수를 기르고 있는 건 아니란 말이외다. 우리 손으로 거둔 것으로도 이웃까지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을 만큼 처지가 달라진다면야 그때 가서는 먹고 마시는 것을 보다 낫게, 맛있게 할 방법을 생각해도 무방한 일일 테지요. 하지만 지금이야 어디 남의 손 빌리지 않고는 넘치고 남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게요…….”
자기 땅에서 자기 손으로 거둔 것만을 먹는 것이 그 땅과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면서 그의 감자와 밀가루빵만으로 시장기를 견디는(견디는 것 이상일 수가 있는가) 선생의 그 결백스런 생활철학은 그러나 조박한 섭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입음새도 오직 활동의 편의만을 위주하고 있었고, 집과 잠자리를 관리하는 데도 구들을 덥히기 위해 푸나무*를 베오지 않았다.
최상윤 선생은 아예 자신의 잠자리를 위한 온돌방을 만들지 않고 있었다. 거처방뿐만 아니라 농장 관리실로 사용하고 있는 블록건물은 안벽이 모두 외풍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한 이중 흙벽으로 되어 있었고, 잠자리 도구라고 짚북데기를 속에 넣은 매트리스와 이불 몇 점이 전부였다. 사람의 육신은 원래 바깥에서 열을 구해 들이지 않아도 활동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한 체온을 구존하고 있는 터이므로 그 체온을 밖으로 빼앗기지 않도록 하는 단속만 있으면 더 이상의 난방장치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온돌방과 영양식이 아니더라도
아침 6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밤 10시에 다시 잠자리로 들어가는 규칙적인 생활 하나로 아직까지 나이답지 않은 건강을 누리고 있노라는 최상윤 선생은 자신 있게 단언했다.
“비바람 막자고 집을 짓고, 훈기 간직하자고 방을 들이고, 그러고도 아직 마음이 놓이질 않아 오 척 단신 좁은 등짝 하나 눕히기 위해 나무를 마구 잘라다 세 평 네 평 돌구들장을 달궈대는 미련한 백성은 이 지구상엔 다시 없을 게오다.”
병이 났을 때나 유아기 어린이들을 위해, 어른이라 하더라도 활동성을 높이기 위해선 보다 나은 난방설비가 필요할 수도 있지 않으냐는 지욱의 의견에 대해서도 선생은 전혀 주의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건 버릇일 뿐이오. 사람이 편한 버릇을 들이기로만 한다면 끝이 없으리다. 바람직스럽지 않은 버릇은 처음부터 뿌리를 잘라버려야 하오. 시작이 늘 중요하니까. 시작이 죽고 나면 나중 버릇도 좋아지게 마련이지요. 자 날 좀 보아요. 어쨌거나 난 이런 식으로 먹고 이런 식으로 입고 이런 식으로만 살아왔어요.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크나작으나 내 일과 나 자신의 삶을 여기까지 이끌어왔고 또 이룩해왔지요. 세상이 이 모든 것을 한낱 쓸데없는 허섭스레기로 내팽개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라면 이런 늙은이의 방법에도 그 나름의 뜻을 지닐 수가 있었을 게 아니겠소?”
매사에 대한 이해가 다 그런 식이었다. 세상일을 무엇이나 그의 방법대로 외곬으로 이해하고 평가하고 주장했다.
점심 요기를 끝내고 나서 농장 주위를 둘러보러 나갔다가 추위도 잊은 채 축사 손질에 열중하고 있는 오륙 명의 청년들을 마주쳐 지나게 됐을 때였다.
“선생님께 감화를 받은 탓인지 이 추위 속에서도 모두들 일이 무척 즐거운 얼굴들이군요.”
청년들을 비켜 지나간 다음 지욱이 일부러 좀 과장 섞인 치하의 말을 건네자 최상윤 선생은 이번에도 그의 독특한 생활관의 일단을 드러내 보였다.
“내게 무슨 감화를 받았다기보다는 이젠 제법 자신감들을 얻고 있으니까요. 첨엔 굉장히 게으르고 무기력한 젊은이들이었다오. 내가 저들에게 뭘 해줄 수 있었다면, 글쎄 실의에 빠진 저들에게 무슨 자신감 같은 걸 심어준 거라고나 할까……”
“저들에게 무슨 자신감을 심어주실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궁금스러운 듯한 지욱의 말투에 최상윤 선생의 설명은 일사천리로 이어져 갔다.
“그거야 간단했지요. 저들이 자신을 잃고 있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뭔가를 이룩해낼 수 있는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인 게요. 한데 우리 쉬운 말로 저들이 요즘 신용하고 있는 그 능력이라는 게 근거가 뭔 줄 아오? 학력이라는 게요. 남들처럼 제대로 학교를 못 다녔으니까, 학력이 모자라니까 남들처럼 일할 능력이 없는 걸로 스스로를 포기해버리고 있기 일쑤였단 말이외다. 남들처럼 상급학교엘 갈 수 없었던 경제능력의 부족을, 그때의 실망을 일생 동안 무슨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떠메고 다니면서 자기 게으름의 구실을 삼는 게요. 그래 난 일러줬지요. 나 세상 살다보니 번드레한 대학 건물에서 공부한 사람 일층집에서 일하고, 그다음 높은 중등학교 건물에서 공부한 사람 이층집에서 일하는데, 일층 건물에서 소학교 공부밖에 못한 사람 가운데서 오히려 칠층 팔층 높은 건물에서 훌륭한 일 하는 사람 많더라―높고 편한 공부 많이 했다 해서 세상 나와서도 반드시 편한 일 훌륭한 일만 하는 건 아니다, 학교 공부 많이 했다 해서 세상 편하게 살 꾀나 늘고, 되지도 않을 바람만 크게 가지고 게으름 부리면 오히려 공부 적게 하고도 조그만 소망을 소중히 하여 차근차근 부지런히 일해나가는 사람보다 이루어내는 일이 적게 되는 법이다, 분에 맞게 생각하고 작은 일이라도 보람을 가지고 신념껏 일하는 것이 앞서가는 일이요, 자신을 이기고 남을 이기는 길이 되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건 일종의 교육 불신론 비슷한 소리였다.
뿐만 아니라 최상윤 선생은 정치나 사회상의 변화에 대해서도 그의 농장 수련생들에겐 일체의 무관심을 강요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난 저들에게 오로지 일에 대한 신앙 한 가지로 세상을 살아가라고 권해오고 있는 게요.”
선생의 어조는 시종토록 일사불란했다.
“학력에 대한 그릇된 우상을 깨부숴준 대신으로 난 저들에게 새로운 마음의 지주를 마련해줘야 했었지요. 주님 앞으로 길을 인도했어요.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신라·고려 조의 국세는 불교의 앉아먹자주의로 기울었고, 이조 오백 년의 국세는 유교의 누워먹자주의로 쇠퇴했으니, 서서 일하고 먹어야 하는 그리스도교의 생활윤리야말로 신앙처럼 받들면서 서서 일을 하고도 오히려 부족함이 많은 이 땅의 사람들에겐 가장 바람직한 생활교리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오. 난 저들이 즐겨 일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소개한 거란 말이외다.”
신념이란 때로 논리를 초월한 자기 믿음일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일테면 최상윤 선생 식의 어떤 신념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거의 논리적인 이해나 납득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상육 선생은 그 논리 이전의 자기 믿음과 청교도적인 엄격성, 그리고 털끝만큼한 회의도 용납지 않는 투철한 자신감으로 그의 오늘을 이룩해내고 있었다.
지욱은 차츰 선생의 그런 신념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지욱의 이해와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떤 무거운 압박감이 그를 못 견디게 짓눌러왔다. 믿음이 논리를 초월할 수도 있다고는 했지만 그러나 논리적인 이해가 불가능한 신념은 맹목적인 '아집에 그칠 위험성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감이 넘치고 있는 선생의 신념은 털끝만큼한 자기 회의마저 용납을 하지 않고 있었다. 회의가 없는 신념은 맹목적인 자기 독단에 흐를 위험 또한 큰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지욱이 그에게 소망해온 어떤 감동적인 자서전적 인물상으로는 치명적인 결함일 수 있었다. 회의가 없는 자서전이야말로 영락없이 한 거인의 동상에 불과할 뿐이었다. 지욱이 최상윤의 신념을 두려워한 것은 그 자신 최상윤 선생에게서와 같은 어떤 의식의 경화현상을 싫어해온 성격 이외에도, 그와 같은 위험성을 어슴푸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보다도 지욱이 더더욱 그 선생의 신념을 두려워한 것은 그의 너무나도 일사불란한 언동이나 생활방식에서 오히려 어떤 씻을 수 없는 가식의 냄새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도대체 이럴 수가 있을까. 한 인간의 생애에서 이처럼이나 말끔하게 후회나 의구가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이 깐깐하고 결백스런 노인에게서라도 어찌 따뜻한 아랫목과 좋은 음식에 대한 바람이 전혀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엄격한 극기의 세월이었던들 그것이 어찌 감히 사람의 가장 사람다운 욕망까지를 송두리째 근멸시켜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노인은 어찌하여 그것을 끝끝내 시인하려 들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진실로 그의 부끄러움이 될 수는 없단말인가 ―
하지만 최상윤 선생은 지욱이 그의 지난 생활에 대한 어떤 아쉬움이나 후회 같은 걸 지녀본 일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리고 그가 청년들에게 버릇 들인 정치적 무관심의 결과가 그들이 몸담고 살아가야 할 사회의 질서에 어떤 마비제와 같은 해독 요소로 작용될 수로 있지 않느냐는 우려에 대해서도, 심지어는 그의 교육 불신론과 전통 종교의 해석 방법이 그들의 삶을 어떤 치명적인 편견 속으로 함몰시켜버릴 위험성에 대한 고려는 필요하지 않으냐는 권유에 대해서도 아무 주저하는 빛이 없이 단언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삶을 자기 육신으로 직접 살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만 이야깃거리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일일 뿐일 게요. 나를 찾아와 내 방법을 따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애초부터 학력이 없고 정치에 대한 관심도 없으며, 그리스도 이외엔 다른 신앙이라는 걸 접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하오. 학력의 필요성은 공부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면 그만일 터이요, 정치의 능률은 제일차로 우선 정치하는 사람들의 몫과 책임이 되어야 하는 것일 게오다. 석가모니나 유교에 대한 편견은 그 신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창조적인 생활 교리로 더 넓게 교정되어질 수가 있을 터이구요. 나와 나를 찾아온 사람들은 다만 일이 일차적인 몫이요, 그 일을 위해 그리스도 신앙이 도움을 주고 있으면 그걸로 그만인 게요.”
선생을 가까이 접해가면 갈수록 지욱은 그의 압도적인 신념 앞에 점점 더 깊은 두려움과 가식의 냄새 같은 것을 지워버릴 수가 없게 되어갔다.
왜 그럴까. 무엇 때문에 선생의 신념이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가식의 인상이 더해가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두려워지고 있는가. 지욱은 갈수록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지욱이 원래 그런 신념 같은 데서 보이는 의식의 경화 현상을 싫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거나 선생의 의식 속에 은밀히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찬란한 거인의 동상에 대한 의구심 때문만도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두려움이나 의구심은 오히려 그것 이상으로 깊고 절실했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자신의 이유를 깨달았다. 그러나 그 지욱의 깨달음은 그가 마지막으로 최상윤 선생에게 걸어온 간절하고 슬픈 소망에 대한 치명적인 상처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한마디로 선생의 신념이라는 것은 자서전류의 회고록용 신념이 아니었다. 선생을 거울삼을 다음 사람들의 미래가 아니라 바로 최상윤 선생 자신의 것이었다. 그의 신념 또한 과거의 시제를 빌려 쓴 미래의 이야기가 될 것임에 틀림없었으나 그 미래는 선생의 신념 자체를 허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최상윤 선생의 신념은 그가 거기 의탁해 살아온 자기 생애의 결산을 만인 앞에 바쳐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회고록을 씀으로 하여 이제부터 그것을 더욱더 힘차게 펴나가려는 자기 지향의 미래에 속하는 것이었다. 지욱으로선 이미 수없이 되풀이해온 생각이지만 자서전이란 원래가 주장이기보다는 고백이요, 헌상이어야 했다. 나름대로의 뜻을 지니고 살아오면서 이룩해온 것들을 이제는 이미 그의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삶의 결과로서 만인의 것으로 그 만인에게 바쳐지고, 그리하여 그 자신은 오히려 그 개인의 유한한 생애에서 해방되어 만인에 의한 만인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생애의 모든 것을 바치고도 마지막 남은 그의 뇌수마저 그의 사후에 인간의 지능 장치를 규명케 하고자 연구실, 수술실로 보내게 한 절세의 박애주의자 아인슈타인의 유언―또는 그런 철인의 말 없는 뇌수와도 같은 것이어야 했다.
자서전은 아직도 개인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자기주장일 수는 없었다. 자서전 속의 신념이라는 것이 그 자서전으로 하여 만인 속에서 자기의 뜻을 펴 실현하고 완성해내려는 주장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참다운 자서전이 될 수 없었다.
최상윤 선생의 신념은 물론 아인슈타인의 뇌수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의 자서전으로 만인 앞에 그의 일생을 바치려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그의 신념을 실현해나가는 자서전 사업의 주도자로 남아 있기를 원하고 있었다.
최상윤 선생 개인의 미래가 개입되고 있는 그의 신념은 참다운 자서전용 신념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최상윤 선생의 신념에 대한 지욱의 두려움은 지욱으로 하여금 선생의 회고록 대필 일을 무척이나 망설이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을 계속하다보니 그는 아직 선생을 다시 농장으로 찾아오게 될 것인지 어떨지에 대해서도 쉬 작정이 서오질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최상윤 선생이 마침내,
“자, 그럼 이제 마음을 어느 정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는지 내게 말을 해줄 수가 있겠소?”
하고 어딘지 지욱이 다시 농장을 찾아와 그의 회고록 일을 맡아주기를 바라는 듯한 어조로 물어왔을 때도 다만 그의 그런 안타까운 심경을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글쎄요, 송구스럽기 그지없는 말씀입니다만, 전 아직 확실한 작정을 말씀드릴 수가 없는 형편인 것 같습니다. 제게 좀더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 하지만 저 역시 선생님을 다시 찾아뵙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제 자신의 정직한 삶은 물론, 남의 회고록이나 자서전들을 수없이 맡아 써오면서도 그분들의 삶이나마 한 번도 제 삶을 대신해 살아볼 수가 없었던 저올습니다. 바라옵기는, 이번만은 선생님의 과거를 한번 저의 것으로 몸을 던져 살아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가슴으로 세상을 느끼고 선생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선생님의 머리로 세상일을 생각할 수 있도록 선생님의 모든 것을 제 자신의 것으로 살아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남의 생애만을 대필해온 자서전 청부업자로서의 마지막 소망이었으니 까요. 하지만 제가 감히 그렇게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저 자신 좀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슴푸레 불안해하는 빛이 떠오르기 시작한 최상윤 선생을 남겨두고 지욱이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은 이날 저녁 7시가 좀 지난 다음이었다. 차중에서도 곰곰 생각을 거듭해보았지만 지욱은 이날 저녁 그의 낡은 하숙집 대문을 들어설 때까지도 역시 아직 그의 생각을 결정짓지 못한 채였다. 뭐가 뭔지 아무래도 생각이 한 가닥으로 모아지지를 않았다. 결국 일을 하고 안하고는 오로지 그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만이 위안이라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그런데 그런 어수선한 상념을 안고 지욱이 그의 하숙집 대문을 들어섰을 때였다.
일은 거기서부터가 훨씬 난처하게 꼬여갔다. 최상윤 선생의 일에 대해선 이미 선택이고 뭐고 더 이상 생각할 여지도 없을 만큼 엉뚱스런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지욱이 무심히 대문을 들어서 보니, 주인도 없는 그의 하숙방에 웬 일로 불이 환히 밝혀져 있고 방마루 아래 댓돌 위엔 웬 사내들 겨울신발이 두 켤레씩 이나 함부로 나뒹굴고 있었다.
피문오씨였다.
피문오씨가 그의 동료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지욱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욱이 방문을 들어서자 무례스럽게 그의 앉은뱅 이책상 위에 엉덩이를 털썩 주저앉히고 있던 피문오씨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지욱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곧 언제나의 버릇처럼 질끈 벗어 쥐고만 다니던 손장갑을 다시 한쪽 손으로 모아 잡으며, 다른 한 손으론 민첩하게 그의 가죽점퍼 안주머니를 뒤져 댔다.
“선생, 이거 정말로 내게 써 보낸 편지가 틀림없소?”
주인 없는 방에 들어와 있는 데 대한 양해조차 구함이 없이 지욱이 아침에 부치고 떠난 속달편지부터 불쑥 코앞으로 내밀었다. 틀림없이 지욱 자신이 피문오씨에게 써 보낸 편지였다.
지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피문오씨가 불시에 그를 찾아와 있을 때부터 벌써 심상찮은 기미를 느끼고 있었지만, 무엇인가 잔뜩 벼르고 왔음직한 피문오씨의 그 압도적인 태도로 보아 사태는 예상 외로 훨씬 심각해져버린 느낌 이었다.
지욱은 잠시 추궁하듯 그를 건너다보고 있는 피문오씨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그 통성명조차 건네오지않은 채 두 사람의 일에 짐짓 관심을 외면하고 앉아 있는 또 한 사람의 점퍼 사내 쪽을 건너다보았다. 말없이 딴전스런 얼굴만 하고 앉아있는 사내가 공연히 마음에 짚여왔기 때문이다.
지욱은 이상스럽게 자꾸 사지가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끝끝내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습니다. 죄송스런 말씀입니다만, 그 글월 속에서도 이미 고백을 드렸듯이 전 선생님의 대필 작업을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제 처사에 마음을 상하기라도 하셨다면 다시 한번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지욱은 침착성을 잃지 않으려 애쓰면서 정중하고도 분명 한 어조로 말했다. 불안을 느낄수록 그 불안에 대비하는 방법은 이쪽의 동요를 엿보이게 하지 않는 일과, 그럴수록 더욱 언동을 정중하게 갖는 길뿐이라는 것을 지욱은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의 상대에겐 지욱의 그런 체험과 지혜마저 깡그리 다 무시를 당하고 말 형세였다.
“아, 그러하시나이까. 죄송스럽소이다. 그러신 걸 전 설마하니 선생께서 이런 글로 저를 화나게 하실 리는 없으리라고 혼자 미련스런 생각만 하고 있었사오이다그려. 행여 선생께서 무슨 엉뚱한 착오라도 생겨서 이런 글을 잘못 써 보내시지나 않았나 하고 말씀이오다.”
피문오씨는 마치 무대 위의 연기처럼 굽실대며 과장스레 겸손을 떨어댔다.
지욱은 짐짓 정색을 한 얼굴로 육박해 들고 있는 피문오씨의 그 엉뚱스런 익살의 뜻을 알고 있었다. 피문오씨의 겸손은 태풍 전야의 정적처럼 지욱을 위협해왔다.
“유감스럽습니다만 착오는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은 그저 제가 불민했던* 탓으로 이런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지욱은 스스로 얼굴이 붉어져오는 수치심과 피문오씨에 대한 어떤 불안스런 긴장 속에서, 그러나 자꾸만 초라하게 움츠러드는 자신을 붙잡아 버텨보려는 듯 의연스런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피문오씨의 그 교활스런 공갈은 갈수록 무도하고 방만스런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 그야 물론 그러시겠습죠. 하오나 어이해서? 어이해서 선생께옵선 갑자기 그렇게 생각이 달라지게 되셨사옵는지? 아, 거기에 대해서도 고매하신 선생께선 이미 자상한 설명 말씀이 계셨는 줄 알고 있사옵니다마는 그 말씀을 알아듣기엔 소생이 워낙 배운 게 부족하고 머리 돌아가는 것이 둔해서……어떻게 알아듣기 쉽게 여기서 한번 가르침을 주실 수가 없으시온지?”
의연한 체 버티어보아도 이 무자비하고 철면피한 희극배우의 돌진에는 얼굴색이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욱은 아직도 참을 수밖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똥을 누가 무서워한다던가. 이 무지하고 위험천만한 속물을 상대해서 거래를 시작했던 것부터가 애초의 실수였다. 작자에겐 이미 이해를. 구할 양식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런 인간들에게 당한 봉변이 봉변이랄 수는 없었다. 작자에게 더 이상의 심한 행패나 부리지 않도록 해야 했다. 작자가 제풀에 맥이 풀려 돌아서도록 참고 견디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바라신다면 다시 한 번 제 충청을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욱은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피문오씨의 주문을 조심스럽게 응대 해나가기 시 작했다.
“하지만 미리 말씀드려두고 싶은 것은 제 글에서도 누누이 말씀을 드렸다시피 이번 저의 결정의 동기는 결코 선생님 쪽에 허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저 자신의 어떤 각성과 양심상의 문제였음을 이해해주셔야 할 점입니다. 따라서……”
바로 그때였다. 지욱은 거기서 그만 갑자기 말을 가로막히고 말았다.
“아니 이거 왜 이래!”
담배알을 뽑아 물고 불을 붙이려던 피문오씨가 마침내 태도를 돌변하여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거 아무리 맘에 없는 웃음을 팔아먹고 사는 무식쟁이라고 누구한테 지금 설교를 하려는 거야 뭐야, 건방지게. 그래 내가 지금 당신 같은 위인의 신세 하소연이나 듣자고 이런 델 찾아온 줄 알아? 그렇게 내가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느냐 말야. 왜 내 일을 안하겠다는 건 지 그걸 말해보라는 거야. 이유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갑자기 반말투로 윽박질러오는 피문오씨의 어조에 지욱은 새삼 가슴이 내려앉는 표정이었으나, 이미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피문오씨의 행패는 걷잡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게 아니라니? 아니 이거 당신 정말 이런 식으로 날 바보 취급하고 나설 테야? 당신 눈엔 정말로 내가 그렇게 얼렁뚱땅 되잖은 소리로도 그냥 넘어가질 것 같아 보인 모양이지? 그래, 뭐가 어째? 내 일을 하지 않게 된 게 내 탓이 아니구 당신의 그 알량한 양심 때문이라구? 내가 그래 그 알량한 당신의 양심에 들러리라도 서야 한다는 거야 뭐야. 엎어치나 메치나 그게 그놈 아들놈 같은 소릴 가지고, 정 내게 말재간을 한번 부려보고 싶어서 이래? 당신 눈엔 이 피문오가 그래 그만 말귀도 못 알아들을 바보 멍청이르만 보이느냔 말야? 내 아까부터 참자 참자 하다보니 이 친구 아주 형편없이 맹랑한 데가 있는 작자로구만그래 .”
피문오씨는 이제 스스로도 분을 참을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벌건 얼굴에 튀어나올 듯 두 눈알을 부라려대면서 장갑을 몰아 쥔 한쪽 손을 피스톤처럼 마구 지욱의 턱 앞으로 내질러대고 있었다.
지욱은 그만 기가 콱 질리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할래도 목이 말라 소리가 되어 나오질 않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려오는 두 다리를 간신히 버티고 선 채 절망적인 눈초리로 피문오씨의 폭풍우 같은 수모를 고스란히 견디고 있었다.
불현듯 최상윤 선생의 일이 이 처참스런 곤욕을 견뎌낼 수 있는 어떤 서광처럼 머릿속으로 떠올라왔다. 최상윤 선생과의 약속이 그의 참을성에는 상당한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이런 자의 자서전 따윌 대필하려 했다니! 최상윤 선생과 같은 분에게조차 내 주관을 굽힐 수 없었던 이 지욱이 아닌가. 이런 자의 책을 쓰면서 그의 밑구멍을 핥느니 차라리 선생의 발밑에라도 나가 엎드려 선생의 신념을 찬미함이 낫지 않으냐. 참자! 작자의 일을 피하자면 이쯤 굴욕은 즐거이 참아 넘기자. 참아서 넘겨야 한다―
하지만 피문오씨는 그 정도로는 물론 분통이 풀릴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디 선생! 말씀을 좀 해보시라구. 아니 글에서는 그처럼 잘난 체 말이 많더니, 제 잘난 소리나 시부렁거릴 줄 알았지 선생도 남의 말을 알아듣는 덴 귀가 꽉 멀어버리셨나. 왜 통 대답이 없으셔? 그렇담 내가 좀더 수고를 해주실까? 어째서 내 일을 하지 않게 되었느냐, 내 일을 하기가 싫어졌느냐…… 그 이율 좀더 솔직하게 말해달라 이거야. 이 무식한 놈도 좀 분명하게 알아듣고 납득이 가게끔 말씀이야. 알아들어? 그래도 못 알아들으시겠다면 내 좀더 똑똑히 말을 해줄까?”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지욱을 마음 내키는 대로 매도해대다 말고 피문오씨는 무슨 생각을 해냈는지 갑자기 목을 잔뜩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청승맞도록 능청스런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외쳐대기 시작했다.
“고장 난 시계나 라디오들 고칩시다아― 채권 삽니다아― 부서진 우산이나 빈병 삽니다아ㅡ 자서전이나 회고록들 쓰십시다아―’
고저 단속(高低斷續)을 적당히 조화시켜가며 길게 외쳐대고 난 피문오씨가 이젠 좀 알아듣겠느냐는 듯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지욱을 이윽히 건너다보았다.
“어때? 당신이 내 자서전 일을 맡아간 것도 그런 식 아니야? 고물 라디오나 시계 고치는 사람들처럼 골목골목 외고 다니지만 않았다 뿐이지, 먹고살겠노라 애걸애걸 일을 맡아간 건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말야. 당신 애초엔 맘에도 없뒨 내게 와서 얼마나 교활하고 부황한 소리들을 주워댔어? 그래 인생이 가엾다 싶어 일거릴 줘 보냈더니 이제 와선 제 편에서 일을 못하겠다? 글쎄, 정 내일을 못 맡겠다면 까짓거 일을 안해도 좋다 이거야. 하지만 어째서 일을 못하겠다는 건지 나도 분명한 이유만은 알아야겠다 이 말씀야.”
지욱으로선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계속 최상윤 선생만을 생각하며 입을 꾹 다물고 참고 있었다.
하지만 피문오씨는 이제 지욱의 그런 침묵마저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지욱이 끝내 반응이 없으니까 피문오씨는 좀더 효과적인 공격과 모욕의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흥, 인제 아주 입을 다물어버리시는 걸 보니 이 피문오하곤 더불어 얘기조차 나누실 수가 없으시다, 이 말씀인가. 더불어 말을 나눌 상대조차 못될 위인이니 덮어놓고 참아 넘기는 게 상책이라 이런 뜻이렷다? 그저 미친개한테 물린 셈이라도 쳐버리자? 좋아, 그러실 만도 하시겠지. 선생은 지성인이시니까. 충분히 그러실 만해. 지성인이라는 게 뭐야. 피문오 너 때문이다, 보기 싫어 이 일 못 맡겠다는 소리 한마디 못한 당신처럼, 이 무식한 녀석아 하고 시원스런 욕 한마디 못하고, 이야기가 당신 이해력 밖이니 어쩌니 하고 어물대놓고 저혼자 좋아하는 당신처럼 하고 싶은 말을 요리조리 둘러대고, 그나마 또 상대방에게 본심을 들켜 화라도 낼까 싶어 점잖은 척 교활한 겸손을 떨어 보이고……그래 놓곤 상대방이야 말뜻을 알아들었거나 말았거나 저 할 짓은 다 했노라 저 혼자 속이 후련해하며 거들먹대는 인간들, 나 같은 놈한테까지 이런 봉변을 당하고도 말 한마디 못하고 침묵이 무슨 미덕이나 되는 척 치사스럽고 비열한 자기 합리화나 일삼는 알량한 인간들이 그 지성인이라는 인간들 아닌가 말야. 무식한 놈이 이런 소리 지껄이니까 아니꼬우시지? 하지만 내가 이럴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선생이 그런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요 존경받는 지성인이라는 걸 믿는 덕분이라구. 난 워낙 학식도 인격도 없는 미친 개뼉다귀가 되어서 내 속에서 폭발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는 성미거든. 참을 필요도 없는 거구 말씀이야. 하지만 혹 선생한테 내 이런 성미가 맘에 들지 않으셨다면 내 선생의 충고를 한번 들어볼 아량은 있지. 아마 선생한테도 참기 싫은 말이 있을 테니 염사가 있으시면 이 무식쟁이처럼 속 툭 터놓고 한번 말씀을 해보시라구…….”
“……”
“흥, 역시 말씀이 없으시군. 말씀을 안하실 테지. 아니 말씀을 못하실 게야.”
순전한 반말지거리와 삿대질 일변도에서 피문오씨의 입에서는 이제 그 선생 소리가 다시 뒤섞여 나올 만큼 말씨나 거동이 조금씩 누그러드는 낌새였다. 하지만 피문오씨의 공박은 누그러든 말씨나 거동만큼 더욱더 차분하고 교활스런 여유를 담고 있었다. 그는 맘 내키는 대로 지욱을 희롱하고 매도해대고 그리고 협박했다. 이제 더구나 지욱의 침묵을 추궁해오는 피문오씨의 공박 속엔 지욱으로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 나롬의 어떤 투박스런 논리가 동원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의 말엔 늘 이해력 밖에서나 맴돌고 있을 이 무식쟁이한테도 혹은 쓸 만한 말이 한마디쯤 있을 수 없다고 누가 감히 장담을 해? 아니 당신같이 말 좋아하는 위인들한텐 외려 더 들어둬야 할 일이 많을지도 모를 일일걸. 내 한 가지만 지금 얘길 해줄까. 뭔고 하니 말씀이야. 아니 이건 아마 잊어버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이건 실제로 경험이 더 많을 게야. 당신 뭐라고 했더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과거에 대해선 터무니없이 아름답게 미화하려 하거나 과장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했던가. 자기 이야기의 공정성이나 절제력을 잃기 쉬운 것이 자서전 집필의 통폐라고 한 게 당신이 한 말 맞지? 게다가 또 자신이 직집 체험하고 살아보지 못한 남의 과거를 거짓말로 대신 꾸며 쓰게 하는 건 더욱 큰 위선이라고 한 것도 역시 당신 말이었을 테구. 옳은 말을 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이걸 잊고 있었어. 자서전이라는 거 그거 모두 다 자기 손으로만 써야 한다면 당신 말대로 대체 어느 놈이 제 손으로 제 얘길 쓰는 데 거짓말 안 꾸며대고 배길 놈이 있느냔 말야. 저 혼자 가만둬도 자꾸 부황한 소리들만 늘어놓고 싶어하는 판에 장차 남한테 읽으라고 내보낼 책 속에다 지저분한 제 밑구멍 다 내보일 멍텅구리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 말이야. 공정성이고 절제력이고 따져볼 여지가 없는 거지. 거기 비하면 그런 얘기들을 자기 손으로 쓰지 않고 당신한테 당신 마음대로 대신 지어 쓰게 하는 것이 얼마나 공평하고 양심적인 처사인 게야. 당신은 바로 그 점을 모르고 있었던 거야. 하나만 알았지 둘은 몰랐던 거란 말야.”
“……”
“그야 물론 선생한테는 남의 이야기를 대신 꾸며 쓴다는 것이 혹 가책도 되고 허무한 느낌이 들 수도 있기야 하셨겠지. 하지만 남의 자서전 대신 쓰면서 생긴 기분은 선생의 일이지, 일을 맡긴 사람의 책임은 아니지 않소? 그리고 애초에 이 일을 시작한 게 선생 쪽이 틀림없다면, 그때는 그럴 줄을 선생이 모르고 있었단 말요? 알고 있으면서 시작한 일이 아니었나 말요…….”
피문오씨의 어조엔 제법 경어투가 다시 살아나며 갈수록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이젠 지욱의 입장이나 기분에 대해서 사뭇 이해를 보이고 싶어하는 투였다. 본심이야 어느 쪽이든 일단은 지욱에게 그의 일을 다시 맡게 해놓을 심사임이 분명했다.
지욱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으니까 답답해 죽겠다는 듯 그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아니 그래 당신이란 사람은 도대체가 어떻게 되어먹은 인간이오? 원하지도 않은 일을 자기 손으로 떠맡아가고 나선 이제 와서 네 책은 맘에 안 들어 일을 못하겠다니 이거 그래 당신은 가만 앉아 있는 사람을 나무에 올려놓고 흔들어대는 격이 아니오? 거기서도 또 한술을 더 떠서 뭐랬더라? 제 과거를 사랑할 수 없고 더러운 밑구멍을 내보일 용기가 없거든 아예 이런 책 가져볼 생각조차 말라? 도대체가 그 과거에서의 해방이라는 건 뭐고 도배질이란 건 또 뭐라는 거요? 그래 선생은 목구멍 때워대기도 바빴던 내게 그 알량한 해방이나 도배질을 해댈 과거라는 거나 있었는 줄 알았소? 선생은 내게 그럴 만한 과거가 없다는 걸 모르고 시작한 일이었나 말요. 아니 설사 내게 그런 비슷한 게 있었다 치더라도 왜 내가 그런 걸 남 앞에 내밀어? 당신 말대로 그럴수록 더 두꺼운 도배질로 싸발라 숨겨 야지. 그러고 보니 선생은 참 여러 가지 오해가 많으셨어. 나 이런 책으로 내 얘기 써내놓으려는 거 누구 남 좋으라고 하는 거 아니외다? 사람들한테 내 밑구멍 구경시켜서 히히덕거리게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선생 속 편한 밥벌잇감이나 마련해주자고 시작학 일도 아니었단 말씀야. 나 살자고 하는 일이야. 구질구짙하고 음산스런 옛날 기억들일랑은 당신 말마따나 두꺼운 도배질로 싹 가려 덮어버리고 나도 이젠 그 책 덕분에 남들처럼 목에 힘도 좀 주고 내 나름대로 뜻도 좀 펴가면서 세상을 살아보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다니깐. 그게 내 동상이면 어떻고 기념탑이라면 어떻다는 거여? 그 동상 덕분에 남들처럼 좀 편히 밥 벌어먹고 싶다는데 선생이 왜 배가 아펴? 누가 남의 동상 밑을 서성거리래서 애꿎은 사람을 치게 한다는 게여? 설령 또 그런 일이 생긴다 치더라도 사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데까지 잔신경을 쓰다가 어떻게 다 나이를 먹어가라구. 왜 그 남의 책을 십여 권씩 써줬다는 사람이 그것도 아직 도가 통하질 못하셨을꼬? 도대체가 이런 식으로 자기 책을 쓰겠다는 사람이 이 피문오 한 사람뿐이었더 란 말씀이셔?”
“……”
“자, 그러니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선생께서도 아마 이 일엔 응분의 책임을 느낀다고 말씀하신 결로 아는데, 그래 책임을 느끼신다면 선생은 어떻게 내게 그 책임을 져주실 참이오? 여기서 지금 그 말씀을 좀 들어봅시다.”
피문오씨는 끈질기게 지욱을 다그쳐들고 있었다. 역시 지욱으로 하여금 제풀에 그의 일을 다시 맡게 하려는 수작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욱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피문오씨의 공박은 지욱으로 하여금 갈수록 그 일을 맡아서는 안된다는 역설적인 확신만을 더해주고 있었다. 아니 지욱은 이미 그 피문오씨의 일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지욱은 오히려 그 피문오씨의 장광설을 듣고 있는 동안 엉뚱하게도 줄곧 최상윤 선생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피문오씨의 그 투박하고 저돌적인 자서전론은 차라리 최상윤 선생에 대한 지욱의 조심스런 신뢰감마저 무참스레 무너뜨려버린 것이다. 피문오씨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지욱은 그 최상윤 선생에 대한 꺼림칙한 의구심이 갑자기 더 분명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선생의 일사불란한 신념의 일생이 그를 떠나올 때보다도 더욱 위험스럽고 두려워졌다. 선생에게선 도대체 갈등이라는 걸 느낄 수가 없었다. 선생의 일생은 참으로 신념의 일생이었다. 하지만 갈등이 없는 곳에선 진정한 자기 성찰이나 고발에의 용기가 보일 수 없었고, 그 참담스런 애정과 용기를 통한 과거로부터의 자기 해방이라는 것도 필요 없는 생애였다. 그것은 오직 만인의 찬양을 받으며 그 만인의 삶을 지배할 수 있는 거인의 동상이 될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동상이 최선생 자신의 삶으로부터도 인연을 끊어버린 만인에의 제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욱 그의 뜻을 넓게 펴고자 하는 미래에의 주장으로 군림하고 싶어할 때, 그것은 차라리 만인에 대한 어떤 제도의 회초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위험스런 인간 정신의 굴레가 될 수 있었다. 일말의 자기 회의도 찾아볼 수 없었던 최상윤 선생의 그 신념의 일생은 그의 회고록을 가짐으로 하여 만인에게 바쳐지고 만인에 의해 기꺼이 해체되는 해방감을 얻기는커녕 보다 더 가열한 자기 정신의 구속과 신명의 주장이 퍼져나갈 판이었다. 지욱은 마침내 욕심에 들뜬 한 노인의 완고하고도 지칠 줄 모르는 자기 탐욕의 눈빛을 똑똑히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눈빛에 몸서리가 쳐지기 시작했다.
지욱은 이제 그 최상윤 선생에 대한 생각도 거의 분명해졌다. 피문오씨거나 최상윤 선생이거나 자서전류의 책을 갖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는 한 귀로 피문오씨의 공박을 흘리면서 말없이 자기 결심을 다져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어서 빨리 이 어처구니없는 시련이 끝나주기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피문오씨가 마침내는 제풀에 지쳐 그만 눈앞에서 꺼져 없어져주기만을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정은 물론 지욱의 소망대로는 간단히 해결 날 수가 없었다. 간지*와 음흉성을 총동원하여 그를 괴롭혀대고 있는 피문오씨의 위협 앞에서 지욱은 지금 자신의 고집을 섣불리 내세울 수가 없었다. 최상윤 선생의 경우는 차치하고 피문오씨의 일마저도 부러지게 분명한 거절의 말을 하고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거절할 용기는커녕 자칫하다간 이 무지막지한 위인의 공박에 견디다 못해 끝내는 어물어물 작자의 일을 다시 떠맡아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꺼림칙스런 기우*마저 떨쳐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저것 보라지. 역시 대답을 못하시는군. 그야 달리는 어떻게 책임을 질 방법이 있을라구……”
지욱이 끝내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 피문오씨가 다시 추궁을 계속해왔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좀더 은근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은근스러워지는 만큼 작자의 위협 또한 음흉스런 간지를 더해 갔다.
“그러니까 이보라구 선생·…… 당신이 뿌린 씨앗 당신이 거두자면 어차피 한 가지 방법밖엔 다른 길이 없겠어. 내 그것까지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그렇다고 선생 스스로 태도를 바꾸기도 쑥스러운 모양이니 내가 그냥 말을 하지. 선생도 이미 생각이 미쳐 있으시겠지만, 뭐 이번 일은 그냥 없었던 걸로 치고 일을 다시 계속해가는 거요. 어떻소?”
예상대로였다. 피문오씨는 이제 노골적으로 그의 일을 강요해오고 있었다. 정말로 꼭 자기 책을 가지고 싶은 마음에선지 혹은 그냥 지욱을 그런 식으로 골려주고 싶은 생각에선진 확실치가 않았다. 하지만 지욱은 이제 그것이 피문오씨의 본심이거나 아니거나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본심에서가 아니라면 더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창백해져 있던 지욱의 얼굴이 새삼스레 다시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뒤늦게나마 다시 한 번 각오를 분명히 해두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피문오씨가 기회를 주지 않았다. 지욱의 눈치를 알아차린 피문오씨가 틈을 주지 않고 재빨리 말머리를 가로막고 나섰다.
“아, 그야 물론 선생께선 아니꼬우시기도 할 테지요. 선생처럼 아는 것만 많았지 돈도 없이 외롭게만 지내다보면 자연 쓸데없는 말이나 생각이 늘게 마련이니까 말요. 그런 게 원래 선생 같은 지성인이라는 사람들 버릇 아니오? 나 선생의 그런 심정 알 만해요.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소? 그리고 선생도 벌써 내 책을 안 쓰고 버틸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소? 선생이 시작한 일이니 결국은 선생한테 마무리를 짓게 하고 말 내 성미도 짐작을 했을 법한 일이구 말이오. 선생도 그랬지요. 선생이 내 일을 해주지 않으면 이 일은 다른 사람한테도 부탁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이오. 맞아요. 절대로 그럴 리는 없지요. 나도 실상 이 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선생한테 선생의 손으로 끝을 내게 할 참이니까. 그리고 막바로 터놓고 말해서 그게 뭐 그리 아니꼽게만 생각하실 일도 아닐 게요. 나 피문오요, 이래 봬도 제법 남 앞에서 으시댈 만큼 으시대면서 살아온 놈이오. 시시한 배우 나부랭이 일이라고 갑자기 입맛이 떨어지신 모양이지만 그래도 당신을 부릴 수 있을 만큼한 능력은 존경을 해도 좋을 거요. 내 책을 맡아 쓰시게 된 걸 조금은 영광으로 생각해도 손해 볼 거 없을 거라 이 말요. 지금이야 어쨌든 선생도 첨엔 내 돈, 내 명성 보고 스스로 머릴 숙여온 사람 아니오? 그랬으면 그만한 존경쯤 바칠 줄 아는 예의가 있으셔 야지.”
등까지 툭툭 두들겨대면서 사뭇 회유조로 달겨붙고 있었다. 소용이 되든 말든 자존심을 상한 값으로라도 지욱에게 기어코 자기 책을 쓰게 하고 말겠다는 식이었다. 적어도 지욱의 입에서 굴욕적인 승낙의 말이라도 얻어내고 싶은 심사임 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젠 지욱으로서도 더 이상 참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노골적인 작자의 모욕에 대해 변변한 대꾸 한마디 못하고 당하고만 있는 자신이 견딜 수가 없었다. 참을성 좋은 무관심으로 계속 그의 신경 한끝을 휘어잡고 있는 방구석 쪽 사내만 아니라면 지욱은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피문오씨를 정면으로 맞상대하고 나서고 싶었다. 차라리 육탄전이라도 한차례 벌이고 나서는 것이 떳떳하고 기분도 후련해질 것 같았다.
―결국은 피문오씨의 일을 거절할 수가 없게 되겠구만그래. 그 참 뭐랬더라? 내 일은 아직도 더 두고 생각을 해보겠다고? 생각할 건 뭐가 있나? 피문오 같은 위인한테 머리를 숙이고 말 주제에 내 밑구멍이라면 감격을 해서 덤벼들어야지……
일을 미뤄두고 온 최상윤 선생까지 그의 소심성을 은밀히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안되겠소. 분명히 말하지만 난 못하겠소.”
지욱은 마침내 정신없이 씨불여 뱉고 말았다. 눈앞에서 그를 윽박질러대는 피문오씨에 대해서보다도, 마음속에서 그를 비웃고 있는 최상윤 선생에 대한 수모감이 더 이상 그를 참을 수 없게 하였다. 그는 차라리 그 최상윤씨를 향해 자신의 단호한 결단을 토해버리는 기분이었다.
“이 자리에서 지금 때려죽인대도 난 절대 당신의 일을 떠맡을 생각이 없으니 그리 알아주십시오. 아무도 이젠 내 결심을 바꾸게 할 수는 없단 말요.”
등골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말을 하다보니 지욱의 앉은뱅이책상 위에 두 다리를 걸치고 앉아서 느물느물 기분 나쁜 여유를 보이고 있던 피문오씨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싹 달라졌다.
말을 다 끝내고 나자, 그 험상스런 피문오씨의 얼굴이 책상 위에서 천천히 그의 앞으로 일어서 다가드는 것을 보거 않으려는 듯, 이번에는 지욱이 두 눈을 감은 채 그 앉은뱅이책상 위로 몸을 풀썩 주저앉혀버렸다.
“뭐 라고? 못하겠다고? 이치*가 정말 머리가 홱 돌아버린 모양이구만. 그래 네 눈엔 그렇게도 보이는 게 없어? 이 피문오가 어떤 놈인 줄 알고 함부로 이래! 아무래도 좀 따끔한 맛을 보고 나야 정신이 들 모양인가 정녕?”
마침내 부아가 폭발해버린 피문오씨가 마치 성난 고릴라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는 한주먹에 당장 지욱을 때려눕힐 듯 기세등등 허공을 주먹으로 후려치면서 욕설을 퍼부어됐다. 그러다가 그는 아무래도 그런 욕설만 가지고는 분이 다 풀릴 수 없었던지, 별안간 책상 위에 늘어져 앉아 있는 지욱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덜미를 두 손으로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지욱의 경량급 몸뚱이가 바람개비처럼 가볍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피문오씨는 그 뻗어 올린 자기 팔 끝에 매달려 버둥대는 지욱을 어떻게 짓뭉개놓아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오히려 안타까운 눈빛을 하며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이걸 그저, 이그 그저 이걸 어쩌지? 이런 걸 치고 그래 내가 사람 팼다는 소릴 듣게 됐어? 그래 이 미역값 물어주기도 아까운 시시한 인간아! 개값을 물고 말재도 내 손이 창피해서 못할 인간아!”
지욱은 그러나 이젠 차라리 마음이 훨씬 편해진 기분이었다. 작자가 목을 너무 세게 졸라대지만 않는다면, 그래서 숨을 좀 편히 쉴 수만 있게 된다면, 이제 그는 작자의 일을 맡지 않아도 좋게 된 것은 무엇보다 확실했다. 어차피 일은 화기애애한 의논조 속에 끝날 수 없는 판국이었고, 이쯤 난장판을 벌여가면서까지 화풀이를 치르고 나면 피문오로서도 더 이상 일을 맡길 생각은 단념하고 있을 터였다. 지욱은 오직 그 한 가지 확신만으로 그의 육신의 수모를 차라리 맘 편히 건뎌내고 있었다. 적어도 그는 그의 육신에 관한 한은 그 이상의 학대와 수고마저도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던 셈이었다. 하지만 일은 그쯤에서도 아직 끝장이 나주지 않았다.
피문오씨가 지욱의 몸뚱이를 팔 끝에 매단 채 이젠 그 자신도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다음 행동을 쩔쩔매듯 하고 있을 때였다.
“이제 그쯤 해두라고.”
두 사람의 수작에는 나 몰라라는 듯 관심을 짐짓 외면하고 앉아 있던 사내가 모처럼 만에 한마디 피문오씨를 만류하고 나섰다. 방구석 쪽에서 묵묵히 담배만 피우고 앉아 있던 사내가 이제 비로소 자기 차례가 왔다 싶어진 듯 서서히 담뱃불을 비벼 끄고 일어서서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피문오씨의 팔을 쳐서 바람개비처럼 바동거리고 있는 지욱의 몸뚱이를 방바닥으로 떨어뜨려놓은 다음, 침착하게 덧붙여오는 것이었다.
“이제 그쯤 해뒀으면 충분할 테니까 그만 가자구.”
지욱으로서는 또 한 사람의 거북살스런 협박자가 아닐 수 없었다. 피문오씨처럼 주먹을 휘두르며 분통을 맘껏 터뜨리는 것보다도 더욱 더 위협적인 협박술의 소유자였다.
“아이구 머리야!”
벌겋게 혈압이 오른 피문오씨가 자기 목덜미를 툭툭 치면서 마지 못해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러서자 사내가 이번에는 빨랫감처럼 방바닥에 구겨져 앉아 있는 지욱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여전히 침착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능청을 떨어 댔다.
“이거 일이 참 엉뚱하게 되었구려. 저 친구 원래 좀 혈압이 높은 편이라서 쯧쯧…… 내 이 친구를 대신해서 사과드리리다.”
그것은 물론 작자의 진심에서 나온 사과의 말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과연 관록 붙은 협박꾼답게 진심으로 지욱을 타이르듯이 나무람까지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거 보시라구요, 형씨. 보아하니 형씨도 그런 식으로는 영 안되겠어? 아 그야 나도 얘길 다 듣고 있었으니까 형씨 사정은 알만해요. 형씨 입장이나 생각이라는 것도 이핼 하겠구요. 이핼 하고말구…… 하지만 형씨도 그만큼 세상을 살아봤으면 만사가 다 자기 생각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건 알 만하지 않소? 이 친구 말대로 누가 형씨 얼굴이 이뻐서 편한 밥벌이나 시켜주려고 그 일을 맡기지 않은 담에야, 이제 와서 형씨가 쓰고 싶다고 해서 쓰고 쓰기 싫다고 해서 맘대로 안 쓸 수는 없는 경우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러느냐 말요. 자, 그러니 쓸데없는 똥고집 부리지 말고 우리 힘 좀 빌립시다그려. 좋은 게 다 좋은 거 아니오. 그 뭐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이 친구 책 원고 써주는 거 이젠 형씨가 쓰고 안 쓰고 결정을 내릴 건덕지도 없는 일 아니오!”
알아들었을 줄 믿는다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제 그는 소동을 끝내고 그만 문을 나가고 싶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지욱을 그렇게 얼러대고 난 사내가 다시 한 번 오금을 박듯 아직도 그 손등으로 자기 목덜미를 툭툭 두들겨대고 있는 피문오씨를 향해 여유 있게 단정을 내렸다.
“자, 이젠 가자니까. 이쯤 해두고 물러가도 자네 책은 어차피 이 형씨가 잘 알아서 써주실 거니까 안심하구……”
마침 내 피문오씨는 돌아갔다.
그러나 피문오씨와 사내가 돌아가고 나서도 지욱은 한동안 자신의 흐트러진 생각을 가다듬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멍청하니 그대로 허공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그가 살아온 30년의 세월이, 그 30년 동안 몸담고 숨쉬어온 세상 전체가 온통 한꺼번에 무너져나가버린 듯한 허허한 낭패감이 가슴 가득히 괴어올랐다. 하지만 그 낭패감은 지욱 자신에 대한 비참스러움이나 원망 같은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런 것조차 스스로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지욱의 육신과 의식 전체를 어떤 철저한 무력감과 무감각 상태로 마비시켜가고 있는 식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가 피문오씨의 일에서 손을 빼려 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가 오만 세상일에다 그처럼 새삼스럽고 거추장스런 의미들을 꾸며 붙이려 했었는지 도대체 자신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젠 아예 그런저런 생각 자체를 되뇌고 있는 자신부터가 견딜 수 없었다. 역겨웠다.
그는 생각하고 따지기가 싫었다. 생각을 할 수도 따질 수도 없었다. 무엇이나 하게 되면 하고 안하게 되면 안하게 되는 식으로 지금으로선 그 피문오씨의 자서전 일에 대해서마저 그렇고 그렇게 되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욱은 그런 식으로 텅 빈 무감각 상태에서, 그러나 다만 골목 바깥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그의 귀를 울려오는 듯한 가련스런 자기 환청에 언제까지나 넋을 빼앗기고 앉아 있었다.
―자서전들 쓰십시다아, 자서전이요, 자서전, 자서전드을 써요…….
『문학과지성』 24호(1976. 여름): 「자서전들 쓰십시다」 (열림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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