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 이후 거대한 신자유주의 흐름은 한국 사회를 재편했다. 공기업 매각을 통한 공공부문 사유화를 비롯해 금융세계화에 기인한 외국 자본의 잠식, 생산적 복지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등장한 빈곤의 양극화를 달리는 복지 제도까지. 한겨레는 그 누구보다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열심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지적은 적극적 활용론으로 둔갑하고, 오히려 신자유주의 경제노선을 채택한 나라들을 찬양하기에 이른다. 변할 수 없는 신자유주의 세상이라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취하라는 선동문구를 남발하는 한겨레는 좌충우돌 그 자체의 모습을 보인다. 김대중, 신중도 노선으로의 변경을 환영한다?
이미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한겨레의 돈독한 관계는 참세상의 '한겨레' 기획을 통해 수 차례 언급됐다. 지난 99년 4월 23일 한겨레는 “'신자유주의'에서 '신중도'”로 라는 김대중 정부의 정책노선에 관한 사설을 게재한다. 한겨레는 김대중 정부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강조하던 신자유주의 노선에서 탈피해 국민복지를 강조하는 ‘신중도’ 노선으로 바뀌고 있다"고 주장하며 "우리는 김 대통령이 신자유주의 노선에서 탈피해 서민들의 복지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신중도 노선을 걷는다면 이를 적극 환영하고 지지한다"고 응원하고 나선다. 또한 한겨레는 "보수와 개혁을 오락가락해서는 안 된다. 정면으로 돌파한다는 각오로 `개혁의 정도'를 걸어야 정책 전환의 참뜻이 살아난다"라는 의견도 덧붙인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복지 정책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보완하는 정책적 패키지였음에도 한겨레는 ‘신중도’ 라 포장하며 쌍수 들고 환영하고 나선 것이다.
최옥란 열사의 49제의 모습
그리고 이런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정책의 허구성은 최옥란 열사 투쟁 과정에서 여과 없이 폭로됐다. 수급권자 되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힘들만큼 까다로운 기준과 재산을 추정해 삭감시키는 등의 정책에 저항해‘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요구하며 투쟁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최옥란 열사는 공권력의 탄압으로 인해 노제조차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이런 투쟁에 대해 한겨레는 “최옥란, 그 이름을 기억해야”(2002.3.30)한다는 사설을 게재한다. 사설은 “가난과 장애, 여성이라는 3중고를 짊어지고 살았던 한 생활보호대상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보통 장애인이 아니었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세상을 향해 온몸으로 호소하고 저항한 투사였다”다며 열사의 투쟁을 평가한다. 그러나 이 사설은 “차가운 관료주의나 행정편의주의 대신 전국의 15만 극빈장애인 하나하나의 각기 다른 사정을 보살펴주는 손길만 있었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최옥란 이란 이름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고 주장한다. 최옥란 열사 투쟁의 본질은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복지 정책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겨레는 정책에 대한 언급 한 마디 없이 ‘행정적 편의주의와 국민의 무관심’속에 열사가 죽어갔다고 주장한다. 정책에 대한 언급 한마디도 없이 한겨레는 오히려 열사의 죽음을 호도하며 국민적 ‘관심’과 ‘박애’를 호소하는 전근대적 모습을 보였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기수, 이헌재
이헌재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은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중도 하차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금융감독위원장에 재정경제부 장관의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좋은 자리에 있었다는 것 자체를 넘어 금융감독위원장이던 시절 은행, 보험, 증권 등 금융산업에 대한 인위적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재정경제부 장관 재직 시절에도 개방 정책 노선을 비롯해 전 산업에 걸친 구조조정을 진두 지휘해 온 핵심 인물이다. 외국 자본에 맞게 국내 구조조정을 얼마나 잘했는지 ‘Mr. 구조조정’이라는 별칭과 더불어 홍콩에서 발행되는 월간 ‘아시아 머니' 지로부터 ‘올해의 구조조정기관장’(99.4.29)으로 선정됐고,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우드로 윌슨 센터가 수여하는 `우드로 윌슨상'의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Mr. 구조조정’이란 별칭이 말해 주듯 이헌재 전 장관의 공적자금 6조원을 날려 버린 제일은행과 미국계 투자펀드인 뉴브릿지캐피털 협상을 주도했고, 전례 없는 정부주도의 인위적인 은행 구조조정을 전개했다. 한 예로 1차 금융구조조정 당시 97년 말 총 2,102개 금융기관 중 23%에 해당한 480개의 금융기관이 2000년 7월까지 인가취소, M&A, 해산 등의 방식으로 정리됐다. 당시 정부는 50조의 공적자금을 구성해 부채삭감이나 채권지불연장등을 통해 자본의 리스크를 줄였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일방적 퇴출과 실직이 수반되는 피 말리는 고통의 과정이었다. 당시 금융감독위원회의 자료만 참고해도 금융노동자들만도 97년 말 31만 7,623명에서 01년 21만 8,726명으로 10만 명에 이르는 금융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생지옥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구조조정에 대해 한겨레는 “정부가 그 동안 시장 자율 원칙을 강조하며 은행합병 문제에 대해 조금 소극적 자세를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라고 주장한다. 또한 "은행간 자발적 합병이나 전략적 제휴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밝히기도 한다. 또한 금융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대해서도 "은행 파업은 사실 2단계 금융개혁의 긴 터널 초입에서 일어난 첫 힘 겨루기에 불과하다"며 "은행 파업 이후 2단계 금융구조조정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시스템'의 구축이 시급하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힘의 논리에 의존하면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시행착오를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한편 한겨레와 이헌재 전 장관의 돈독함이 드러나는 기사도 있다. 2000년 8월 8일 급작스럽게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이헌재 전 장관은 맹장수술로 인해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하고 관직을 정리하게 됐다며 시작되는 기사다.
“지난 97년 비상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장을 맡으면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눈에 든 그는, 98년 4월 초대 금감위원장을 맡아 외환위기를 부른 금융. 기업부실을 청소하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냈다. 금감위원장 시절 그는 은행. 기업퇴출과 재벌 부채비율 200% 축소 등 금융. 기업구조개혁을 흔들림 없이 추진했다. 해외에서도 이런 그의 능력을 평가해 '미스터 구조조정'이란 애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지난 1월 재경부 장관에 취임한 뒤에도 구조개혁은 그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2.8 대우채 환매, 현대 유동성 위기, 은행파업 등으로 이어지는 구조조정 작업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공적자금 조성과 은행합병 등 현안에 대한 정책혼선과 말 바꾸기 시비가 일면서 그의 화려한 경력에 흠집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이번 개각에서 능력이나 자질이 부족해 교체됐다는 평가는 많지 않다. 오히려 4.13 총선 같은 정치적 변수가 없었거나 김대중 대통령이 좀더 힘을 실어주었다면 그가 금융. 기업구조개혁을 보다 강도 높게 추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많은 편이다“
아쉽게 물러서는 구조조정 선봉장에게 보내는 한겨레 최고의 찬사였다. 'Mr.구조조정의' 본래적 역할은 신자유주의 시장 질서로 한국을 재편하는 역할이었다. 이 구조조정의 과정에 수십만의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박탈당한 채 거리로 내몰렸고, 임금·고용 유연화로 인해 수백만의 비정규직이 양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겨레는 찬사와 동의를 넘어 ‘힘만 실어 줬으면 더 강도 높게 추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표현했던 것이다.
또한 ‘참여정부’로 들어선 이후 한겨레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으로 인한 정치적 공백 과정에서 단적으로 "이헌재 '우뚝'"이란 기사를 통해 ‘경제수장’으로의 이헌재 전 장관의 공로를 높게 산다. 당시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경제 불안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재계·노동계·금융계 인사들과 시장 상인 등 경제주체들을 잇따라 만나는 등 발 빠르게 추적하며 특히 이런 행보에 대해 “이 부총리가 외환위기 당시 큰일을 해 본 경험이 있어, 일의 핵심을 짚어 차분하면서도 신속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이헌재 찬가를 재방송했다. 대통령의 공백에도 꿋꿋히 신자유주의 깃발을 들고 있는 이헌재 전 장관을 향한 한겨레의 예찬은 이후 곳곳에서 드러난다. 자유무역은 대세다
물론 한겨레는 "하나의 시장 이견 해소 힘들 듯"(2003.11.18), "미주자유무역지대와 미국의 후퇴"(2003.12.16) 등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종종 게재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런 기사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나아가 WTO, 자유무역협정(FTA)이 자본과 시장의 세계화의 기재임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추진을 호소하거나, ’브릭스 4국‘ ’상생의 기업경영‘ ’성장의 젓줄 중국‘ ’양극화를 넘어 동반으로‘ 등 연재 기획으로 다루며 세계적 대세론을 강조한다.
여주농민회, 한-칠레 협정 비준 저지를 위한 삭발식을 하고 있다.
전농
한-칠레 FTA협상은 공식협상 기간만 3년, 준비과정까지 포함하면 4여 년에 걸쳐 진행되, 2002년 10월 25일 타결됐다. 2003년 2월 15일 정식서명 절차를 마쳤으나 1년에 걸친 농민들의 저항 끝에 2004년 2월 16일 국회에서 통과 됐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상이 타결되자 한겨레는 발 빠르게 “철수하려던 대우 '한국가전 뜬다, 공격!'“(2002.12.31)이라는 기사를 내보낸다. 또한 ‘자유무역협정의 물꼬를 튼 칠레 르뽀’라고 보도하며 ”현대차의 칠레 수입대행사인 길데마이스터의 리카르도 레스먼 사장의 말을 빌어 한국의 주력수출품인 1500㏄급에서 아르헨티나산 지엠시보레의 코르사가 지난해 11월 한달동안 시장점유율이 3.54%포인트 뛴 반면 한국차는 1.50%포인트 떨어졌다"며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발효가 늦어질수록 칠레 시장에서 한국차의 점유율 회복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엄포도 잊지 않는다. 또한 협정 발효 이후를 기대하는 기업들의 현지시장에서의 노력을 소개하며 국회의 빠른 비준을 촉구한다.
박진형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간사(2004.2.2)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국회 통과 과정에서 농민투쟁 등과 관련한 한겨레 언론 보도 모니터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동안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한겨레’의 보도는 보수언론들과 달랐다. "한-칠레 협정 처리 좀더 유보를"(11일 사설) 주장하는가 하면, 통과된 이후에도 "유감을 금할 수 없다"며 "후속대책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17일 사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정도가 전부다. 전규찬 강원대 교수가 "한겨레 등 비판적 신문의 태도는 한마디로 한심스럽다"며 "다수에 공감하면 찬성 의사를 설득력 있게 밝히고 그렇지 않다면 소수자의 신념을 분명히 지켜야 할텐데, 애매하고 무력하기만 하다"(3일 미디어전망대)고 이미 지적했건만 한겨레의 모습은 여전히 이 수준에 머물렀다. "우리나라가 '통상미아'로 전락 … 대외신인도가 추락 … 전혀 그른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지금 상태에서 문제가 다 풀릴 것 같지 않다 … 시간을 두고 처리하는 게 좋다고 본다 … 17대 국회로 넘겨 매듭짓도록 하면 어떨까 싶다"(11일 사설)는 식으로 모호하게 넘어갔다”
관련 해 한겨레는 정부가 '통상개방 정책'을 부르짖으며 적극적으로 자유무역협정(FTA)를 추진하고 있는 실정에 맞춰 ‘올 FTA 15건 타결 전망’(2004.1.29), 'FTA 최대 50개국과 추진'(2005.3.31)이라는 기사처럼 각 나라의 자유무역협정 협상 소식을 전하며 자유무역협정이 ‘세계적인 대세’인 것처럼 보도한다. 또한 ‘연초부터 거센 통상파고'(2002.1.31) 기사에서는 "한국이 여러 나라로부터 각종 통상압력을 받고 있는 현실과 함께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지 못해 수출에 타격을 주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며 ’자유무역협정(FTA) 빠른 체결‘을 호소하기도 한다. 대세를 인정하고 발빠르게 대응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는 한국의 좌파운동 단위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FTA 민주적으로 딴죽 걸다’(2005.4.1)라는 한겨레 기사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발효 1주기에 정부의 개방형 통상정책에 '정통 좌파를 표방하는 진보평론’이 대세에 ‘딴죽’을 걸었다는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다.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투기자본의 문제 등을 소개하며 자유무역협정이 미국식 신자유주의 세계전략의 진정한 '하드코어'라고 맥락을 집는다. 그러나 결론은 “민주적 통제라는 큰 방향을 제외하면 구체적인 대안은 마땅치 않다. 자유무역협정은 한국 사회 좌파의 역량으로 감당하기엔 너무도 거대한 지진해일인 것일까”라고 반문한다. 거대한 지진해일이어서 동조하자는 것인지, 좌파단위는 실력을 인정하고 자중하라는 것인지 한겨레의 좌초한 입장은 좌파에 대한 넋두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모색! 한·중·일 협력시대’(2005.10.9)라는 기획기사에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새로운 협력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평가한다. “지리적 인접성, 한자 유교 등 문화의 근접성”등 을 들며 “특히 경제 분야에서 발 빠르게 진척되고 있다. 가장 난제라 할 수 있는 자유무역협정(FTA) 논의도 착착 정부 차원으로 옮아가고 있다”며 정부 추진하고 있는 공동연구가 “꽃망울”을 맺으려는 순간임을 강조한다. 이 기사의 경우는 아시아 지역의 자유무역지대 창설을 운운하며 3국 정부의 적극적 취지를 찬동한다. 나아가 ‘중국-브라질-인도 G3 경제축이 뜬다’의 기사처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자유무역협정(FTA)을 골고루 소개하며 ‘자유무역협정이 성장의 도움이 된다’는 내용을 역설하기도 한다. 이렇게 한겨레가 세계적인 대세의 자유무역협상을 인정하며, 추세에 발맞춰 국제 지형을 형성하고, 관계 맺음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주창하고 있다. 브릭스를 활용하자, 브릭스처럼 하자
미국의 증권회사인 골드먼삭스그룹 보고서에서 처음 등장한 브릭스는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의 영문 머리 글자를 딴 용어이다. 최근 위기의 시장경제 질서에서 독보적인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는 국가들이기도 하다. 한겨레가 본격적으로 브릭스 기획에 들어가기 전에도 ‘중국-브라질-인도 G3 경제축 뜬다’ 등 종종 이들을 간과하지 말자는 기사들을 볼 수 있다.
이런 그들의 경제 성장이 괄목할 만하다는 예고편을 뒤로 한겨레는 2005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이들 나라들에 대한 기획연재를 시작한다. “글로벌 시대에 대한 고민을 중점으로 다루며 한국 경제에 새로운 기회로 다가온 이들 나라의 경제 현황과 그들의 고민,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활약상과 과제, 비전 등 도출하는 것”이 ‘브릭스 4개국을 가다’의 연재 취지였다.
한겨레 브릭스 기획
한겨레
“인구 30%가 1달러도 안 되는 40루피(1,040원)으로 하루를 이어가고 거리엔 거지가 넘쳐나는 인도는 깨어나는 IT공룡"으로 "세계 소프트웨어의 공장"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 주요 소프트웨어 업체가 아웃소싱(외부 주문제작)하는 제품의 65%를 인도가 독식하고 있다. 2003년말 현재 미국 경제잡지 '포천'이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 가운데 인도에 소프트웨어를 주문한 회사가 절반에 이른다. 지난해 소프트웨어 수출로만 125억달러를 벌어들여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들의 경제 성공 비결은 영어이다. 최근 다국적 기업들이 인도에 고객서비스 콜센터를 잇따라 세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사람 채용할 돈으로 인도에서는 영어가 유창한 10~20명의 직원을 채용할 수 있고, 미국과 12시간의 시차를 보이기 때문에 싼 비용으로 밤 시간대까지 24시간 쉼 없이 고객을 상대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제 3계 국가로 아웃소싱이 만연화 되고, 저임금 인도 노동자들과 전 세계 산업 재편 속에서 서비스 산업의 하청기지로 전락한 인도는 한겨레의 시각에서는 ‘영어의 강점을 가진 깨어나고 있는 공룡’일 뿐이다.
이런 전개 방식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기적을 낳은 원동력은 개혁개방으로 1980년 8월 26일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 15차 회의에서 통과된 '광둥성 경제특구 조례'에 따라 광둥성 선전시와 주하이시가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되면서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선전은 스펀지처럼 외국자본을 빨아들이며 중국 전역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창구 구실을 했다. 아직도 '개방'의 활력이 살아 있는 이 도시는 중국이 어떻게 '세계의 공장'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암시해준다"고 강조한다. 한겨레는 이 브릭스 기획을 통해 시장을 열어라, 규제를 풀어라, 자유로운 자본이 날개를 다는 자유경쟁 체제에서 브릭스의 모습을 반추하면 살길을 모색할 수 있다고 주문을 외운다.
이 브릭스 국가들은 체제적인 특성을 극복하고 풍부한 자원과 저임금의 조건을 활용해 경제성장을 도모했다는 유사점이 있다. 그리고 이런 전제에는 세계 무역질서를 받아들이는 개방 정책과 저임금의 최악의 노동환경에서도 순순한 착한 노동자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 국가의 또 다른 특징은 무리한 산업, 개방화로 인해 환경 문제 뿐만 아니라 엄청난 빈부의 격차와 사회 양극화 현상 들은 성장과 함께 극대화된다는 현상에 있다. 이런 브릭스의 존재는 위기에 봉착한 세계경제의 틈세를 비집고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신자유주의 노선의 다른 강변에 지나지 않는다. 성장주의가 판치는 글로벌 시대, 이데올로기로 등장한 야심찬 한겨레의 브릭스 기획은 한겨레가 더 이상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모펀드 왜 지지 부진하냐?
한편 투기자본의 폐해가 급등하며 많은 논쟁들이 벌어졌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 진출한 다수의 자본들은 페이퍼 컴퍼니의 투기자본들이었고, 이들은 기간산업을 비롯해 국내 굴지의 은행까지 돈이 된다 싶은 업종은 마구 삼켰다. 이들이 챙겨 가는 배당금과 수익은 결국 국내 생산물의 결과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국부유출 논쟁도 같이 제기됐다.
그리고 이런 외국계 투기자본에 대한 대항적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며 사모투자전문회사(PEF)법이 법제화 됐다. ‘외국 투기자본에 맞설 우리 자본을 키우자는 취지(2005.4.27)’로. 한겨레는 그러나 이런 논의를 ‘외국인 천하 증시 위기 키운다’(2004.5.17)의 기획기사 (하)편의 대응책을 통해 적극적으로 제시한다. “‘외국인들의 국내 증시 장악으로 주가가 급등락하고 불안한 주가 움직임이 경제 전반에 걸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은 사실상 없다. 주식시장이 개방된 만큼 외국인들이 주식을 사고 파는데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치해 놓을 수만은 없으며, 지금이라도 증시 안정의 기초를 다져가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가장 먼저 제시되는 대응책이 외국 자본에 대한 대항마를 키우자는 것”라며 대항마를 키울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국내 자본으로 토종 펀드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외국자본들에 의해 초토화된 국내시장에 민족의 운명을 구해야 하는 국내 토종 펀드를 구성하겠다던 사모펀드법안은 통과는 됐지만 자본을 끌어 모으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토로한다. “국내 사모펀드들이 고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외국계 자본들이 휩쓸고 간 뒤여서 ‘쓸 만한’ 기업 매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매물이 없으니 투자자들을 끌어 모으기도 어렵다”며 “사모펀들이 수많은 난관을 뚫고 ‘실탄’이 충분한 외국자본에 맞설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2005.4.27)는 우려를 표명한다. 또한 ‘사모투자펀드 돈 안 모이네’(2004.11.27)는 기사는 “사모투자전문회사들이 국내 투자자 모집이 어렵자 앞 다퉈 외국계 자본에 손을 뻗치고 있어 이러다가 ‘무늬만 토종 펀드’가 탄생하는 것 아니냐”는 토종펀드의 오염을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우리증권 노동자들의 투쟁하는 모습. 당시 우리지주회사는 우리증권의 대주주로 지난 5년간 532억을 고액 배당을 챙겼고, 유상감자를 실시해 LG증권과의 인수, 합병을 시도했다.
외국 투기자본들이 하고 있는 단기투자와 고율 배당, 유상감자 등의 행태는 국내 자본으로 구성된 우리은행의 사례나 일반 기업들에서도 답습되고 있다. 학습효과가 빨라 쉽게 배운 게 아니라 ‘이익을 쫓는’ 자본의 본질적 속성 때문이다. 이런 자본의 속성은 국내냐, 국외냐 그 구성멤버들의 뿌리가 무엇이냐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닌 공통적 속성이다. 그럼에도 한겨레는 국부 유출론에 입각한 국내 토종 자본에 대한 육성을 찬동하고 나선 것이다.
한겨레는 자신의 주문에 도취돼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우려와 현상적 지적을 넘어서고 있다. 초기에는 ‘신자유주의는 국제적 흐름이니 어쩔 수 없고, 대신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자'는 식의 논조였지만 이런 흐름은 노동과 기업의 상생, 국내 자본의 육성, 자유무역의 확장을 통한 경제 성장주의에 매몰되며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에 적극 편승해 갔다. 향후 이런 흐름은 반노동적인 보도 행태로 업그레이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