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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입학시험은 1924년 3월18일에서 21일까지 예정대로 치러졌고, 일주일 후 합격자가 발표됐다. 문과 80명 이과 80명, 총 160명을 뽑을 예정이었지만, 되도록 많은 지원자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과별로 10명씩 증원하여 최종합격자는 180명이었다. 합격자를 발표하면서 당국자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지 않았다고 거듭 다짐했다.
입시결과는 예상대로 조선인 학생의 참패였다. 241명의 조선인 지원자 중 합격자는 법학부 9명, 문학부 19명, 의학부 16명 합계 고작 44명이었다. 그러나 ‘차별하지 않는 차별’을 고려하면 그 정도의 합격자 숫자도 경이적인 수치였다.
이상한 시험 결과
조선인 학생은 합격자 숫자로는 참패를 당했지만, 합격자의 질로는 대승을 거뒀다. 일본의 제국대학은 입학시험 석차대로 입학식 자리를 배정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 때문에 입학생은 모두 자신의 입학시험 석차를 알 수 있었다. 일본인 학생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그 시험의 수석 합격자는 의외로 19세 조선인 유진오였다.
수석 입학자 유진오는 제국대학 관례에 따라 입학식에서 학생대표로 사사를 했다. 2등에서 10등까지 모조리 조선인 학생이 석권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인 합격자는 모두 전체석차 3분의 1 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에 대해 ‘신분시험’을 주관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오다 예과과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이상한 결과는 그후 입시 때마다 되풀이됐다. 조선인 학생은 어지간히 높은 성적을 받지 않고서는 합격할 수 없었지만, 일본인 학생은 성적을 웬만큼만 받아도 합격할 수 있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걸러진 조선인 학생들은 대학 재학 중에도 일본인 학생보다 학업성취도가 훨씬 높았다. 입학생 가운데 조선인, 조선 거주 일본인, 일본 거주 일본인의 비율은 해마다 대략 1대 1대 1의 비율로 엇비슷하게 맞아떨어졌다. 분명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었다. 민족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당국자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조선제대는 애초 4월1일 개교할 예정이었지만 4월 중순이 되도록 대학에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신입생들은 그 어려운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제복과 모자까지 맞춰놓고도 거의 두 달간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아야 했다. 조선제국대학이 제국대학령에 의한 대학이 되느냐 조선교육령에 의한 대학이 되느냐 하는 문제로 관제안(官制案)이 법제국에 걸려 표류했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결정이 나건 학생 처지에서는 하등 차이가 없었다. 단지 대학을 총독부가 관할할 것인지 일본 내각이 관할할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자기들끼리의 신경전이었다. 학교 건물도 완성됐고, 교수·학생·직원도 있는데, 정작 대학이 없어 건물도 놀고, 교수도 놀고, 학생도 놀고, 직원도 노는 형국이었다. 팽팽하게 대립하던 두 세력은 제국대학령에 의거해 대학을 세우되 조선총독이 관할하기로 타협했다.
조선 ‘제국대학’ vs ‘조선제국’ 대학
대학 명칭도 논란거리였다. 일본의 5개 제국대학 중 도쿄와 교토제대는 도시 명칭을 가져다 썼지만 규슈, 도호쿠, 홋카이도제대는 지역명칭을 썼다. 일본은 조선을 한낱 지방으로 인식했으므로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조선제국대학’이라 이름붙였다.
그 이름으로 학생모집까지 끝낸 후 뒤늦게 치명적인 문제가 발견되었다. 읽기에 따라 조선 ‘제국대학’이 아니라 ‘조선제국’ 대학 곧 ‘조선제국의 대학’으로 보일 수 있었다. 대학의 관제가 일본 정부에서 표류하는 동안, 조선제국대학이라는 명칭은 슬그머니 경성제국대학이라는 명칭으로 개정됐다. 따라서 학생들은 조선제국대학 예과 입학시험에 합격하고도 공부는 정작 경성제국대학 예과에서 하게 됐다. 이들은 1924년 5월12일 천신만고 끝에 첫 수업을 받았다.
경성제국대학은 지난 12일 오전 9시부터 개학하였다. 입학생을 일본까지 가서 끌어오느니 조선인 입학생을 형사가 뒷조사를 하였느니 세상의 물의를 일으켰던 그 학교는 세인의 감시 하에 첫날 수업을 시작하였다. 뒤로 송림이 울창하고 앞으로 수양버들 늘어진 청량리 한편에 자리잡은 그 학교는 세상의 비평도 못 듣는 듯 평화로워 보였다. 새로 지어 깨끗한 강당에서는 강사의 강설이 새어 나오고 교실 안에는 흰 두루마기 입은 조선인 학생과 얼룩옷 입은 일본인 학생이 섞여 앉아서 정숙히 공부하는 것은 이 학교에서만 보는 특별한 현상이라 할는지! (‘동아일보’ 1924년 5월13일자)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대학에 입학한 조선인 학생들은 예과 2년, 본과 3년 도합 5년간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 학교 재학 중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이 없었다. 심지어 조선인, 일본인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시되어 ‘국어(일본어)를 상용하지 않는 사람’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는 사람’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교문을 나서는 순간 그들은 엄청난 현실의 벽에 직면해야 했다. 제국대학 출신이면 어지간한 일본인도 무시 못할 엘리트였다. 그렇지만 제국대학을 졸업했다고 조선인이라는 굴레마저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일본인의 교묘한 차별을 뚫고 경성제대에 수석 입학하여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킨 19세 소년 유진오는 사회주의 사상과 문학에 심취해 대학생활을 보내다 5년 후 경성제대를 수석 졸업하여 또 한번 조선인의 우수성을 과시했다. 그러나 교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져들었다. 제국대학 출신 엘리트 관료로 살아가자면 민족을 배반하는 것이 되고, 소시민으로 살아가기엔 배운 것이 너무 많았고,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은 그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 됐다.
그는 총독부 관리생활이 싫어 고등문관시험을 치지 않았고 사상 문제로 검거되기도 했지만, 태평양전쟁 때는 일본의 전승을 위해 헌신하는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광복 후 그는 대한민국헌법을 기초했고 야당총재 생활도 했다. 유진오는 자신의 모순된 운명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대학시대에 문화비판회라는 학생단체의 한 멤버이었던 일, 졸업하자 그때까지 속으로 멸시하고 있던 N교수를 찾아 취직을 부탁하던 일, N교수로부터 경성 어떤 관청의 H과장의 소개장을 받던 일, 서울서는 H과장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도 일변으로는 신문 잡지 같은 데에 독일 좌익문학운동의 소개나 평론 같은 것을 쓰던 일, H과장의 소개로 작년 가을 처음으로 이 S전문학교 교장을 찾아갔던 일 이 모든 것은 하나도 모순의 감정 없이는 한꺼번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도대체 모순 그것이 아닌가 하고 그는 생각해보았다. 그 중에도 지식계급이라는 것은 이 사회에서는 이중 삼중 사중 아니 칠중 팔중 구중의 중첩된 인격을 갖도록 강제되고 있는 것이다. 그 많은 중에서 어떤 것이 정말 자기의 인격인가는 남모르게 저 혼자만 알고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실 똑똑하게 이것을 의식하고 경우를 따라 인격을 변한다. 그러나 어떤 자는 자기 자신의 그 수많은 인격에 황홀해 끝끝내는 어떤 것이 정말 자기의 인격인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유진오, ‘김강사와 T교수’, ‘신동아’ 1935년 1월호)
“인생이란 모순 그것이 아닌가” 하고 매순간 탄식해야 하는 삶. 그것이 유진오의 운명이었다. 일본의 여섯 번째 제국대학을 졸업한 810명 조선인 졸업생의 운명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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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흥미롭고도 씁쓸한 글이네ㅇㅇ
유진오 선생님 ㄷㄷㄷ 우리나라 최고의 법학자에서 저분 이름이 없다는건 말도 안됨
유진오 하면 생각나는게 '김강사와 T교수'...
이 분, 보성전문 법학과 교수도 하셨었구나
_- 고대 총장이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