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고대 그리스의 형성과정
그리스에서의 폴리스
그리스의 문명은 기원전 1200∼800년에 걸쳐 있었던 인도- 유럽어족의 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시대에 관한 사료는 거의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밖에 없으므로 이 때를 '호메로스 시대’혹은 '암흑 시대(Dark Ages)’라고 부르고 있다. 초기의 이동은 그리스인의 일파 이오니아족에 의한 것이며, 이 밖에 아케아족은 더 남쪽으로 이동하여 미케네와 트로이를 정복하고, 마침내 크레타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도리아족은 그 일부가 그리스 반도의 중앙에 자리잡았으나, 대부분은 펠로폰네소스의 동쪽을 정복하면서 지중해로 진출하여 에게해의 섬들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1000년경에는 드디어 크레타의 미노스 문명의 중심인 크노소스를 점령하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그리스 문명에서의 폴리스는 매우 큰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나. 폴리스 출현 이전의 그리스 사회 : 미케네시대와 암흑시대
가 때의 그리스는 후기 청동기 문명이 미케네라는 한 성채에 있는 미케네 사회였다. 그렇다고 그 문명 전체가 미케네에 의해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미케네와 같이 성채를 중심으로 하는 다수의 소왕국들이 분립하고 있던 시기였다. 새로운 침입자들에 의해 도입된 일정한 개성에도 불구하고, 미케네 문명의 문물은 선행한 청동기시대처럼 여전히 오리엔트의 강한 영향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시기의 사회구조는 피라미드 구조였다. 저변을 이루는 것은 농경과 가축사육에 종사하는 인민의 촌락이었다. 이 촌민들은 그들을 대표하는 공동체의 업무를 대행하는 촌장에게 촌락토지의 일부를 할당해 주었고, 촌장을 가리키는 바실레우스라는 말도 있었다. 한편 그 피라미드의 정점에는 서판에서 와나카(wanaka)라 불리는 왕국 전체의 지배자이자, 왕궁의 주인인 왕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 중앙에서 임명된 관리들을 파견하거나 촌장과 같은 현지 유력자 등을 등용하여 촌락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멸망은 불가피하게 다가오는데, 이유를 말하자면 이렇다. 1200년경 왕궁과 주거지들을 화재와 파괴로 폐허화시킨 동란에 의해서였다. 두 번째는 발칸반도를 남하하기 시작한 그리스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러한 붕괴의 원인들로 인해 문명과 사회조직의 소멸과 이주, 전쟁을 당연시했다. 암흑시대를 벗어날 무렵, 대략 8세기 후반에 형성되기 시작한 호머의 서사시가 암흑기 후반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사회는 한개 혹은 몇 개의 촌락에 기반을 둔 바실레우스들이 느슨하게 결합한 맹아적 귀족사회였다. 원정은 그들의 공동활동의 주된 형태였으며, 그들이 서로 자랑하고 또 우의의 표시로 주고받던 창고의 보물들은 그 원정의 전리품들이었다. 또 그들의 우의의 원천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그들의가계(家計); 살림살이, 경제 가계(oikos)였다. 암흑기말 그리스사회를 특징짓는 것의 하나인 토지의 공동체적 소유와 사적 소유의 결합은 당시의 사회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다. 폴리스의 발달과 특성
고대 작은 촌락 공동체들은 산맥과 바다에 따른 자연적, 지리적 구분과 애초에 있던 종족적·종교적 구분에 따라 더 큰 정치적 단위로 바뀌어 갔다. 고대 그리스인이 정착한 그리스 반도는 대체로 오늘날의 스위스보다 약간 큰 지역이다
(57,000㎢). 이 일대에는 산악이 많고 해안선은 매우 변화가 심해서, 포르투갈보다 작은 이 나라가 스페인만큼의 해안선을 갖고 있으므로 자연적으로 좋은 항구를 많이개발할 수 있었다. 그리스의 지형은 대체로 일반 곡물의 재배에 적당하지 않고, 기후는 매우 온화한 편이며, 목재, 금속, 납도 풍부하지 않으나, 대신 다양한 석재와 질그릇을 만드는 데 쓰이는 흙은 풍부했다. 아테네인들은 이런 악조건을 극복하고 생존권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으로 상공업을 발전 시켰으며, 재주와 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상품을 팔고 곡물을 사오기 위한 교역을 증대시켰다. 반면, 아테네에 비해 스파르타가 위치한 펠로폰네소스는 상대적으로 농토가 풍부하여, 펠로폰네소스 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농토가 풍부한 농산물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 땅은 스파르타인들이 오기 전에 메세니아인들이 선점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으므로, 스파르타 인들이 이러한 많은 수를 지닌 메세니아인들을 지배하고 그들의 폴리스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군대조직과 가혹한 훈련으로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스파르타는 군국주의 내지는 사회주의적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몇몇 배경을 전제로 폴리스는 발달했던 것이다.
그리스인은 대체로 기원전 1000년경까지 씨족공동체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사회적 단위는 씨족 - 문족 - 부족 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집단적 단위는 공동의 종교적·사법적·생산적 기증을 하였다. 생산은 공동으로 하고 토지경작에서 나온 생산물은 균등 분배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이러한 자급자족의 경제형태에 변화가 와 토지는 추첨에 의해 분배되고, 세습적인 사유지로 되었다. 토지가 사유화되면서 종래의 혈연사회가 지연 사회로 바뀌어 기원전 9∼8세기에는 폴리스가 성립하였다. 왕은 동방적 전제군주와 다르며 비록 사법·군사·종교를 관장하고 있었으나, 왕 아래에는 선거에 의한 각 촌락조직마다 있는 장로회의의 결정이 큰 영향을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그리스인의 정치·경제·사회생활의 기본적인 요소이며 배타적인 단위였다. 폴리스는 한복판의 산언덕 위에 긴급시의피난처로서 아크로폴리스를 마련하고, 동시에 신전을 건축해 놓았다. 성벽 안에는 시민들이살고 성벽밖에 외국인의 거주가 허용되었다. 폴리스는 그리스 본토에 100여 개가 있었으며, 식민지까지 합쳐서 폴리스의 총수는 1000을 넘었을 것이다. 그 규모는 다양하였으며, 예컨대 인구는 수천으로부터 20∼30만명에 이르렀는데 평균인구는 5천명이었다. 폴리스들은 상호간에 정치적 지배관계가 전혀 없는 자주독립의 사회였으며, 상호간에 전체적인 정치적 통일성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동일한 언어·종교·생활습속을 갖고 있었으며, 자기들과 언어가 다른 민족을 바르바로이(barbaroi)라고 지칭하여 이민족을 차별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주지를 헬라스(Hellas)라 부르고, 스스로를 헬렌(Helen)신의 후예인 헬레네인(Hellenes) 이라 믿는 강한 유대의식을 갖고 있었다. 또한, 폴리스 구성원들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의 제전 때에는 올림픽경기를 개최하여 공동의식을 공고히 하였다. 이 경기에서 우승자는 폴리스를 초월한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을 받았다.가 무렵 세력이 가장 강했던 두 도시국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초기 역사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아테네는 정치적 자유와 지성을 존중했고 스파르타는 검소한 군사 중심 상태로 뒷걸음질치는 폴리스였다.이제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전형적인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대해, 특히 아테네의 민주정치화 스파르타의 군국주의를 중심으로 그 특징들을 자세히 알아보자.
라. 민주주의의 형성과정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틀이 정해져 있는게 아니라 시대가 지나면서 변하고 살이 붙고 고쳐지는 것이다. 간단하게 그리스는 처음에는 왕정 -> 귀족정 -> 민주정으로 변한다 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기원전 6세기 초, 솔론은 재산의 소유정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참정권을 부여하여 금권정 치 대립을 조정하려 하였다. 즉, 귀족 뿐만 아니라 평민에게도 참정권을 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귀족과 평민의 불만을 사서 실패하고 만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때, 가진자는 가지지 못한자가 자신과 같은 권리를 갖는게 싫었고, 가지지 못한자는 소유정도에 따른 ‘평등속의 또 다른 차별’이 싫어서 라고 할수 있다.
솔론의 뒤를 이어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이어진다. 그는 민주정과 는 거리가 먼 참주정치를 펼쳤다. 즉, 독재를 말한다. 전기시대의 참주는 대개 귀족 출신
으로 귀족 상호간에 다툼이 벌어지는 가운데 정치적으로 미숙한 민중의 지지자가 권력을
획득하여 비합법적으로 독재적 지위에 오르는 것이 대부분 이었다. 이들 참주 중에는 다른폴리스의 참주나 용병의 힘을 이용한 자도 많았다. 따라서 참주정 전제정치, 국가의 주권이 한 개인이나 특정계급에 좌우되어, 그들만의 의사로 정치가 행하여 지는 일
은 폭정이 되기 쉬운 경향이 다분히 있었으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선정을 베푼 참주들도 많았다.
아테네의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치 시대는 황금시대라 칭송받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독재정치이기 때문에 제외시키도록 한다.
[참고] 기원전 6세기 말 클레이스테네스는 참주정치를 무너뜨리고 민주정치의 기반을 닦는다. 그의 민주정치론을 잠깐 살펴보면,
1. 부족의 개편 및 500인 회의
->귀족정의 기반인 혈연 부족을고대 아테네에서 최소단위의 행정구획의 명칭으로 사용
데모스(구)를 근간으로 하는 지연 부족으로 개편함으로써 민주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2. 도편 추방제(오스트라시즘)
-> 한사람의 독재를 막기 위해 시행된 것으로, 도편 조각에 참주를 꿈꾸는 야심가를 적어 투표하여 6000표 이상을 얻으면 10년간 국외로 추방시킨 제도였었다. 참주의 재현을막는 데에는 공헌하였으나 후에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도 하는 불상사가 일어남.
끝으로 아테네의 민주정치의 전성기를 맞이한 사람은 그 유명한 페리클레스이다. 하지 만 그의 민주정치는 제한된 민주정치라는 한계가 있다. 내용을 보도록 하자.
-> 1. 직접민주정치를 실시한다. 모든 시민이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를 하는 것을 말한다.하지만 여기서 시민의 개념은 그리스에 거주하는 남자 성인을 말하는 것으로, 즉 여자, 노예, 외국인은 제외된다.
2. 최고 의결 기관으로 민회라는 것을 두고 있다.
3. 특수직을 제외하고는 관직을 추첨하는 식으로 관리를 뽑는다 그리고 수당제를 실시한다.
그리스 시대의 민주정치는 시민모두가 참여하는 직접 민주정치였다. 하지만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정치가 아니라 그리스에 거주하는 성인남자로 한정 되어 있는 제한된 민주 정치였다는 것이 포인트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