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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중도, 연기 사상과 상통
1.들어가는 말
몽테스키외는 18세기 그의 조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친 정치사상가, 법률가, 역사가, 사회경제학자였다. 그는 1689년 1월 18일 프랑스 남부 보르도 인근의 드 라 브레드(De la Brede)성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1755년 2월 10일 파리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전체 이름 “Charles Louis Joseph de Secondat, Baren de la Brede et de Montesquieu”에서 잘 나타나듯이 귀족 출신인 그는 백부로부터 보르도의 고등법원장을 물려받아 10여 년간 법관의 직무를 수행하다가, 학문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고등법원장 직을 사퇴하고 파리로 떠났다.
몽테스키외는 그의 자서전에서 “학문 연구야말로 인간의 온갖 번뇌에 대한 나의 최선의 처방이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의 초기 논문 〈물체의 중력의 원인에 관한 논고〉(1719), 〈물체의 투명성의 원인에 관한 논고〉(1720) 등에서는 자연과학적 주제를 다루었으나, 1721년 암스테르담에서 발간된 서한체 풍자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로 문학적인 자질을 인정받게 되었다. 몽테스키외는 이 소설 형식을 통해 당시 정치체제와 가톨릭교회의 관행을 비판하고 프랑스 계몽사상의 싹을 은근히 내비쳤다. 익명으로 출간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8판까지 찍었으며, 명성이 알려져서 1726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가 파리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왕이 회원으로 비준하지 않아서, 그는 파리에 거주지를 옮긴 1728년 다시 한번 선출 과정을 거쳐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몽테스키외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된 후 그의 기념비적 역작 《법의 정신(l’Esprit des Lois)》을 준비하기 위해 유럽 전역을 여행하기로 결심하고 1728년부터 3년간 장기 여행을 떠났다. 비엔나, 헝가리를 거쳐 베니스, 플로렌스, 나폴리, 제네바 등지에 체류하면서 많은 지식인과 교류했다. 로마에서는 폴리니크 추기경과 교황 베네딕트 13세를 접견하기도 하였다. 1729년에는 체스터필드 경과 동행하여 영국으로 건너가서 월폴(Walpole) 수상과 스위프트(Swift), 포포(Popo) 등 철학자들과 교제하면서 체류 18개월 동안 영국의 정치제도와 사회 · 경제체제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1734년 암스테르담에서 《로마 성쇠 원인론》을 발간하여 1748년 제네바에서 출간한 《법의 정신》의 서막을 알렸다. 《로마 성쇠 원인론》에서는 로마의 건국부터 터키인들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에 이르기까지 로마제국이 누렸던 영광과 쇠락의 궤적을 추적하고 정치체제의 변천 과정을 자연사적으로 서술하였다.
2. 《법의 정신》의 시대적 배경과 핵심 사상
몽테스키외가 20여 년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1748년 세상에 내놓은 《법의 정신》은 출판 2년 만에 22판을 발행하는 등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당대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보급되어 계몽주의 사상의 교과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31편 604장으로 구성이 된 이 책에 대해, 1750년 소르본대학 신학부가 13개 조항을 발췌하여 검열을 요구했고, 1751년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금서로 지정되기도 하였으나 정치적 영향력은 점점 더 확대되어 갔다. 처음에는 익명으로 발간되었는데 곧바로 이 책의 위조판이 파리에서도 출간되면서 얀센파와 예수회의 공격을 받게 되자, 1750년 몽테스키외는 자신의 저서에 대한 《변호론(Defence de l’Esprit des Lois)》을 쓰게 되었다.
《법의 정신》은 18세기 프랑스의 특수한 정치, 경제, 법 체제에 대한 오랜 숙고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 저작물을 기념비적인 대작으로 칭송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사회학자들로 법학자가 아니었다. 몽테스키외가 3권분립의 원리를 제시하고 사법권의 독립과 인간의 평등사상을 설파한 것은 법학자들에게도 매력적인 담론이었지만, 논증 방식은 법적인 방법이 아닌 사회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였기 때문이었다. 법을 사회적 유기체적 결합체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사회학자들에게 많은 칭송을 받게 된 것이다. 즉, 몽테스키외는 법과 정부 형태를 그로티우스나 존 로크와 같은 자연법론자들의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접근방법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현실적이고 경험론적인 연구 방법을 통하여 법을 역사적 · 사회경제적 현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심지어 사회과학에서 실재를 인식하기 위하여 일정한 관점에 적합한 현상들을 모아 통일적인 모습으로 구성한 막스 베버( Max Weber)의 이념적 이상형(Idealtypus)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서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아무튼 몽테스키외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결과, 그 당시 영국의 정치체제와 경제발전의 모델을 보고 후진적인 프랑스의 법제와 정치체제의 개혁을 제시한 것이다. 몽테스키외는 당시 절대 왕정을 확립하여 군사적 팽창과 외교 정책의 실패를 겪고 있던 루이 14세의 폭정에 염증을 느끼고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 연합의 총독이었던 윌리엄 3세를 국왕으로 옹립한 영국인들에게 프랑스는 로마교황의 사주 아래 유럽의 평화와 종교의 자유를 위협하는 무자비한 독재자의 나라로 혐오의 대상이었다. 특히, 1685년 프랑스 내 종교 자유를 공인한 낭트 칙령(The Edict of Nantes)의 폐기를 기점으로 루이 14세는 프랑스 내 청교도들인 위그노들의 추방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몽테스키외는 프랑스의 군주정을 개혁적인 정치체제로 변화시키고 평화 공존과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새로운 정부 형태론을 고안해 내게 되었다.
그러면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에 나타난 핵심 사상은 무엇인가?
첫째, 법은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둔 사물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필연적인 사회생활 관계”라고 정의하였다. 법의 정신은 한나라의 자연, 풍토, 습속, 종교, 가치관, 경제 등 제반 관련성 속에서 형성되고 인간의 자유와 본성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법은 각 나라의 이런 모든 요소를 고려하여 법을 제정해야 하므로 구체적인 모습은 제각각이겠지만, 그 핵심인 법의 정신은 공통된다고 보았다.
둘째, 법의 정신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국민 개개인의 정치적 자유와 상대적 평등이라고 보았다. 정치적 자유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원하지 않는 것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권력으로부터 강요받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정치적 자유의 보장은 정치체제의 유형과 관계없이 삼권분립에 따라 얼마나 제한적인 국가의 성격을 가졌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았다. 결국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함은 국가권력의 절제가 되고, 개인의 상대적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이 입법 사법 행정으로 분리되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야 가능하다는 이론체계를 세웠다. 결국 삼권분립은 개인과 국가의 법의 정신을 보장하는 제도라는 것이다.
셋째, 정치체제를 공화정체, 군주정체, 전제정체로 분류하던 전통적 방식을 계승하면서도 각 정체의 성질과 행동 원리로 분석하여 새로운 유형론을 수립하였다. 또한 공화정은 다시 주권이 인민 모두에게 있으면 민주정, 소수인 귀족에게 있으면 귀족정으로 분류하였다. 민주정은 ‘평등’, 귀족정은 ‘덕성’, 군주정은 ‘명예’가 법의 정신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전제정은 법도, 중간 권력 집단도 없이 군주가 자의적으로 제어 불가능한 권력 행사로 백성을 억압하는 공포와 광란의 정치체제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그는 공화정이든 군주정이든 전제정으로 타락하는 것을 방지하려면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을 통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기 위한 법 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권력 분립의 이론은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방지하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기틀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는 물론 “자유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법이 허용하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하였다.
넷째,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 지리적 요인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기후와 지형에 관한 법의 정신은 인간사회의 다양성에 바탕을 둔 국민(민족)정신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몽테스키외도 헤겔처럼 역사란 다양한 민족정신의 역동적 총체 개념이라고 보았다.
3. 후세에 끼친 영향
《법의 정신》은 당시 정치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정치체제를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라는 과거 고전적 구분법을 버리고 자신의 고유한 분석틀에 따라 각 정부 형태의 활동 원리를 정의했다. 그는 공화정은 덕, 군주정은 명예, 독재정은 공포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국가권력을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으로 나누는 삼권분립론을 주장하여 오늘날 민주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의 저서는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 제정에 기초가 되었다. 제퍼슨, 해밀턴, 존 제이 등 미국 건국의 지도자들이 《법의 정신》을 애독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몽테스키외는 귀족주의의 능력을 믿었고 민주주의를 직접 옹호하지는 않았지만 대의제의 기본 원칙을 수립하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귀족 권력에 의존하여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는 보수주의적 한계가 있었지만, 공정성과 공감을 강조하면서 권력자가 자의적인 지배를 버려야 한다고 민주적 법의 정신을 일깨워주었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을 통해 프랑스의 급진적인 개혁을 이루려고 한 것이 아니라, 루이 14세의 독재적 통치의 폐해를 막기 위해 국왕의 절대적 권력 행사를 통제할 방안을 로마법과 관습법의 조화를 통해 프랑스 역사 속에서 찾고자 노력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을 통해 분출된 국민 주권 의식의 함양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4. 불교적 관점의 《법의 정신》 이해
그렇다면, 이 글의 핵심 논제인 불교 정신과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전에 우선 몽테스키외의 종교관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자로서 불교를 연구하거나 접해 보았다는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그는 자기가 믿는 기독교에 대한 불신이 상당히 많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교리에 관한 논쟁을 일삼고 있지만 도덕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도덕의 실천은 어렵지만 교리 논쟁은 매우 쉬우니까 말이다. 종교에 관하여 내가 나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믿을 때 나는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위험만을 무릅쓰고 있다. 하지만 타인이 내게 말한 것을 믿을 때 내가 감당해야 할 위험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즉, 나에게 말한 자가 틀릴 수 있는 위험과 나를 속일 수 있는 위험이다.
이러한 그의 발언은 사제들의 매개와 교리에 기초한 기독교를 배척하고 오직 도덕적 실천에 중심을 둔 종교관을 견지하는 것이다. 비록 그의 마음속에 신앙의 대상은 있었지만, 교리와 성직자로부터 해방된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종교관에 따라 법과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은 모든 사물과 주위 환경을 관찰하고 경험주의적 탐구를 통하여 《법의 정신》에서도 귀납적인 방법론을 적용하게 된 것을 보면 그의 작품 속에서 불교적 해석의 실마리가 풀리게 된다.
우선 《법의 정신》 전체에 흐르는 철학적 사유의 방법은 불교의 중도(中道)사상에 바탕을 두고 정치적 덕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데서 출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과학이나 연역적 사유 또는 독단론적 사고에 빠지지 않고, 역사적 · 경험적 사실들을 총체적으로 분석 · 정리하여 정치 · 경제 · 사회와 법의 관계를 귀납적 방법으로 파악하였다.
고타마 붓다가 출가하여 6년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후 함께 고행하던 다섯 비구에게 설법한 내용이 바로 중도이다. 고타마 붓다는 출가 전의 왕자로 누리던 쾌락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하며, 이것을 버리고 고락 양면을 떠난 심신의 조화를 얻은 중도에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설파한 것이다.
그 후 대승불교의 경전과 논장에서 중도는 연기론과 공 사상과 함께 가장 중심적인 불교 교리로 확립되었다. 대승불교는 공(空)을 관조하는 것이 곧 연기(緣起)의 법칙을 보는 것이며 진실한 세계인 중도의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불교적 중도사상이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저작에는 격렬한 투쟁의 모습이나 충동적 자기 자포, 또는 편향적인 감정의 표현 등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저작에 날카로운 비평이나 비난이 쏟아져도 절제된 예의범절과 품위를 지키면서 반론을 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책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근현대 민주주의의 기초가 된 정체 유형론과 삼권분립론은 불교의 민주주의 사상과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공화정체, 군주정체, 전제정체의 이념적 유형화와 제한적 정치결정론의 기초인 삼권분립론도 유럽 각지의 학술 여행을 통해 얻은 자료와 경험을 토대로 구체화한 것이며,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하여 정치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자유와 평등사상을 중심으로 한 불교적 민주주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불교의 민주주의 사상은 연기론적 세계관에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보통 민주주의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찾지만, 기원전 6세기 북인도에도 군주제 국가와 공화제 국가가 공존하고 있었다. 붓다의 모국은 샤카는 밧지, 말라 등과 같은 공화국이었고, 붓다의 아버지 슛도다나(정빈왕)는 선거로 선출된 왕이었다. 붓다는 당연히 공화정을 지지했고 향후 승가 공동체를 운영하는 원칙으로 갈마법에 의한 철저한 민주적 방식이 확립되었다.
몽테스키외는 당시 아테네, 로마, 영국 등지에서 연구하면서 얻은 공화정의 민주주의적 사상을 바탕으로 법의 정신을 완성했다고 보지만, 불교적 민주주의 사상의 기원과의 영향 관계를 깊이 따져보지 않아도 우선 그 유사성이 인정된다.
인간의 삶의 이치와 우주 만물의 이법을 설파한 연기법은 상윳따 니까야 등 초기경전을 비롯하여 《금강경》 《화엄경》 등 대승 경전에서 체계적으로 나와 있다. 이 연기론적 세계관에 의해 읽을 수 있는 내용은 《법의 정신》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본다.
인간 본성은 전제정치에 대해 끊임없이 반항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인류의 절대다수가 그들의 자유에 대한 사랑과 폭력에 대한 증오에도 불구하고 전제군주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 인류의 사정이 이러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온건한 정부를 형성하기 위해선 권력들을 결합하고, 법률로 규제하고 조절하여 행동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권력에 배의 바닥침 같은 실질적인 무게를 부여함으로써 여타 권력의 월권행위에 견뎌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탁월한 입법 작품으로서 생기는 것이지 우연의 소산일 수는 없다. 사려 깊은 입법의 결과로써 형성되는 온건 정부와는 대조적으로 전제 정부는 그 단순성에 의해 금방 눈에 띈다. 사실 전제정부는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전제 정부의 설립에는 정욕(야욕)뿐이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적합하기 때문이다.
공화정의 성질은 인민 전체 또는 몇몇 가문(귀족)이 주권을 갖고 있는 것이고, 군주정의 성질은 군주가 주권을 갖고 이를 확립한 법에 따라 행사하는 것이고, 전제(독재) 정부의 성질은 단 한 사람이 그의 의지와 기분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말 한 바 있다. 이 세 종류 정부의 성질이 명료해진 이상 그것들의 원리를 발견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더 이상 없다. 왜냐하면 후자는 전자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기 때문이다.
위 인용문에서 우리는 《법의 정신》의 기초가 연기법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몽테스키외는 이 책에서 자기 보존에 가장 적합한 자유주의적 체제로서 조국애와 자기희생, 검소, 인류애, 사랑 등 공민의 덕목이 대단히 중요함을 수시로 강조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불교의 대자대비, 공존공생의 가르침과 유사하다고 본다.
5. 나가는 말
몽테스키외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겨 준 권력분립 사상은 현대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모든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다. 법은 한 나라의 자연 · 풍토 · 습속 · 종교 · 가치관 · 경제와 함께 정체의 성질과 원리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관계의 총체가 바로 ‘법의 정신’을 형성하게 되며, 이런 법의 정신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고 사물의 본성과 조화와 통합을 이루어 내야 한다고 몽테스키외는 역설하였다.
나라마다 역사적 · 사회 환경적인 요인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이 분리되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면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여 년 전에 출간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오늘날 다시 소환하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 정치 현실은 이 고전에서 제기한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몽테스키외가 강조한 사법권의 독립은 만족할 만큼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법제도의 개혁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법조 윤리가 타락하는 현상을 목격하면서 국민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오늘날 법조인들이 사적인 이권에 개입하는 등 사법부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것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다. 게다가 이른바 ‘갑질’이 문제 되고 있는 시대적 환경을 바라볼 때, 권력자의 덕목인 공정함과 명예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몽테스키외의 역설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한다.
한편, 귀족 몽테스키외가 평민들에게도 선거권을 주어 대의제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오늘날 의회민주주의의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의회제도의 운영 실태를 살펴보면 많은 문제가 노출되고 있다. 다수당의 막무가내식 횡포를 막을 수 있는 방법도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많은 나라들에서 제기되고 있는 의회제도 및 사법제도의 개혁을 비롯하여 권력분립 체계의 새로운 개편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민주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몽테스키외의 영원한 고전 《법의 정신》을 꼼꼼히 읽고 재해석해 볼 여지가 많음을 밝힌다. ■
연기영
동국대학교, 동 대학원 졸업. 독일 하이델베르크와 괴팅겐에서 법학을 연구한 후 괴팅겐대학에서 법학박사(Dr.jur.)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및 법과대학장, 미국 워싱턴주립대와 독일 괴팅겐대 객원교수, 한국교수불자연합회 회장, 한국스포츠엔터테인먼트법학회 창립회장 등 역임. 민사법과 스포츠법 관련 논저 150여 편이 있다. 현재 동국대 법대 명예교수, 서울고등법원 조정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