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장례식
안 영 신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과정을 이렇게 가까이서 생생히 지켜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동안 사고로 죽은 사람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모습을 조금 떨어져 서서 쳐다본 일은 더러 있었지만, 장시간에 걸쳐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척에서 바라본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남이 아니라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병으로 고통받다가 임종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실로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경험이었다.
그날 아침 6시, 나는 남동생(자정부터 그때까지 병상을 지켜온)과 교대해서 집중치료실로 들어갔다. 전날 새벽부터 거의 10분 간격으로 물을 청하시던 아버지가 6시 30분에 몇 모금 물을 마시고 나서는 다시 달라는 말씀이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나는 너무 이상하다 싶어서, 물병에 빨대를 꽂아 입에 물려 드렸다. 아버지는 서너 번 물을 빨아 마시고 시원하다는 듯, “휴 ― ”,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한 시간이 지나도록 산소호흡기 안에서 숨만 가쁘게 내쉴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20~30분 간격으로 돌아 눕혀 달라, 허리를 펴고 앉게 해 달라는 주문 따위도 전혀 없었다. 한쪽 눈은 감겨 진 채 뜨지 못했고, 나머지 한쪽 눈도 초점을 잃고 퀭해졌다. 병상 위에 달린 모니터의 심장 박동과 산소 포화도와 호흡 수치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임종이 가까워졌으니 빨리 가족들을 부르라고 재촉했다.
사십여 분 후, 어머니와 여동생과 아내와 조카가 헐레벌떡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병상에 똑바로 눕혀진 아버지는 한동안 호흡을 멈췄다가 가까스로 숨을 한 번 들이마셨고, 또 그렇게 한참 후에 내쉬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혀가 조금씩 입천장 위로 말려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맥박과 호흡 등 모니터의 모든 그래프가 그 움직임을 멈췄다. 그것은 영화나 TV 드라마 같은 데서 가끔 보았던 낯익은 장면이었지만, 갑자기 기기가 고장 나서 정지된 화면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고, 너무 낯설고 생소해서 한순간 꿈인지 현실인지 언뜻 분간하기 어렵기도 했다. 응급실에 실려 온 후 9일 동안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아버지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이마와 손은 이미 차가워졌는데, 가슴을 만져 보니 아직도 체온이 미지근하게 남아 있었다.
사람의 숨이 끊어져도 마지막 순간까지 귀는 열려 있어서 말을 들을 수 있다고 간호사가 귀띔해 주었다. 그러나, 좀처럼 식구들은 물론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던 나도 “아버지, … 흑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이제 다시는 아프지 않게 편히 가세요!” 하고, 한마디 말을 겨우 마쳤을 뿐이었다. 평소 하루에도 몇 번씩 대놓고 아버지를 원망하고 비난하던 어머니도, “남들한텐 나쁘게 안 하고 잘해 줬으니, 좋은 데로 가소!”하고 흐느꼈다.
장례식장 담당자를 만나러 계단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럽고 눈앞이 아뜩해졌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 때문이었을까. 장례에 대한 제반 내용을 상담하고 계약서에 집 주소와 생년월일 등 간단한 내용을 기입하는 데도 글씨와 숫자가 거듭해서 틀렸다. 아버지의 죽음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충격이 너무 컸다. 예전부터 여러 번 들어왔거니와, 아무리 늙고 힘없는 아버지라도 살아 계신 것과 돌아가신 것은 천양지차라는 말이 실감 났다. 졸지에 아버지를 잃고 이제 내가 우리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는 부담감이 이토록 크게 느껴질 줄 몰랐다. 8일 동안 매일 7~8시간씩 아버지를 병간호해 왔던 터라, 거기에 피로가 겹쳐서 더욱더 그랬으리라. 집안의 대들보가 무너져 내린 듯한 상실감과 함께,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하는 부담감이 무서운 해일이 되어 내게 덮쳐오는 것만 같았다.
장례식장엔 곧 빈소가 차려졌다. 끝 모르게 이어지는 코로나 팬데믹에다 추석 연휴까지 겹쳐서 가까운 친척들과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해온 사람들에게만 부고를 띄우고 조용히 빈소를 지켰다. 사촌 형제들은 첫날 모두 조문을 하고 돌아갔다. 그동안 두 분의 큰아버지 내외와 작은아버지는 물론 사촌 형님 장례식 때도 첫날부터 장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형제들이 모두 내 일처럼 함께 일을 치르곤 했지만, 아버지 세대의 종말과 함께 그것도 이제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장지가 선산이 아니라 국립대전현충원이라는 사실을 사촌 형제들이 알았을 때, 긴 세월 동안 나와 사촌들 간에 쌓아 올렸던 돈독한 형제애가 흔적도 없이 허물어져 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선산으로 가야 하겠다.” 십여 년 전부터 국립묘지로 가신다고 누차 말씀하셨던 아버지가 지난봄 느닷없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올해 초부터 건강이 급속히 악화하고 가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부모 형제가 그리워지신 것일까. “안 돼요. 대전현충원으로 가셔야 해요. 선산 돈 문제로 형제들 간에 수십 년 동안 그렇게 물고 뜯고 싸우면서 그 돈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더니, 이젠 선산 돈 누가 가졌는지 행방조차도 몰라요. 선산은 벌써 제대로 관리도 안 되고 있는데, 친척들하고 돈 관계 하나도 얽힌 데 없는 아버지가 뭣 하러 거기 가신단 말이에요?” 하고, 내가 정색을 했더니, 아버지는 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빈소에서 이틀을 보내고, 사흘째 되던 날 오전 8시 30분에 발인을 했다. 아들이 영정 사진을 들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경건한 진혼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안치소 앞 벽면에는 태극기가 환한 조명을 받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관이 이상 없음을 확인해 주자, 제복을 입은 보훈처 담당자와 동생과 조카들이 운구를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사촌 형제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내가 적극적으로 선산 돈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주리라 기대했던 사촌들의 실망은 컸으리라. 그렇게 사사로운 이해관계 때문에 가족 친지 간의 우애도 하루아침에 저버리는 세태를 나는 기정사실로 담담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태극기 밑에는 ‘국가를 위한 희생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흰색 조명 위에 검은색 명조체로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내 안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울컥하고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라왔다. 내 젊은 시절 내내 부끄러움과 원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가 이렇게 자랑스럽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사실 아버지가 6·25 때 해군으로 참전해서 공을 세우고 두 번이나 무공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막연히 문서상으로만 추상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부터 어머니에게 가계를 도맡기다시피 했던 아버지가 노년의 어머니에겐 늘 미움의 대상이었다. “젊은 시절 허구한 날 술 먹고 바람피면서 내 속을 썩였던 웬수”라고 어머니는 우리 식솔들 앞에서 시도 때도 없이 비난을 퍼부어댔다. 치매에 걸렸음에도 지난 일은 어쩌면 그렇게 수치 하나 틀림없이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아내와 아들과 딸과 조카들의 뇌리에 아버지란 존재는, 지난 30년 내내 별로 하는 일 없이 집 안에만 머물러 계셨고, 또 최근 10년 동안 늘 침상에 누워서만 지냈던 무기력한 노인으로 각인돼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장례식이 그들에게 아버지의 젊은 시절 공적을 자연스럽게 환기해 주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무엇보다도 눈물겹게 기뻤다.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을 마친 다음, 버스를 타고 1시간 20분 정도 고속도로를 달려 대전현충원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이 영구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장자인 내가 아버지의 영현을 모시고 묘비 건립 신청 서류를 작성하는 사무실을 향해 혼자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유골함에선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 손에 전해지는 온기는 아버지의 체온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옛날 갓난아기였던 나를 아버지가 두 손으로 안았을 때도 내 몸에서 이렇게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으리라.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이 두 눈에서 자꾸만 흘러내렸다.
첫댓글 이제 좋은데 가셔서 편히 쉬시리라 생각되네요.
다시 한번 아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새로 조성된 묘역으로 풍수가 아주 좋아 보였습니다.
묘비가 완성되면 다시 찾아 뵐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이 이제 전쟁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지금도 어머니 임종 모습이 문득 문득 다가와 식은 땀을 흘리곤 한답니다.
그만큼 임종 모습은 정말 누구에게나 큰 충격으로 작용하는가 봅니다.
거듭 명복을 빕니다.
자식이 왜 부모님 임종을 지켜야 하는지 잘 알게 됐습니다.
내가 병실에 들어간 후 임종을 지키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장지로 인한 혈육간의 갈등이 가끔 있더군요.
30년+10년의 영욕이 '국립 대전 현충원'에 모두 씻기었네요.
자랑스러운 대한의 남아이셨던 호국영령님~부디 명복을 빕니다.
군대도 안 갔거나 편하게 군생활 한 손자들이 전쟁터에서 젊음을 불태운 부친의 공적을 깨닫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정사 보다도 국가을 위해 헌신한 일이 더 크다고 느끼길 바랬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군요. 제 소견은 국립현충원이 가족사의 앙금을 피하기에 좋은 것 같습니다. 저도 해결 못한 선산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쪼록 늦게나마 명복을 빕니다. 건강도 챙기시길...
사적인 이해타산이 혈육들간의 도리나 우애보다 앞서는 세태가 안타깝지만,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국립현충원으로 장지를 선택한 것은 지금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장례 과정이 또한 인생이란 생각입니다ㆍ
전에 이청준 작가의 '축제'라는 소설과 영화을 본 기억이 납니다.
장례식장에서 가족 친지들간 엮어내는 애환이 한편의 드라마 소재로 충분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소설을 쓸 줄 안다면 한 번 써 보고 싶을 정도로.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아버님을 무척 사랑하는 작가님께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아버지라는 자리. 떠나보면 안다고 하는 자리.
글을 읽고 저도 제 아버지를 떠 올려 봅니다.
지나보면 잠깐인 것을, 힘들다고 간병인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병간호하길 잘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크게 후회할 뻔 했습니다.
장손이 되다 보니까 동생과 조카를 다독이며 함께 할 수 밖에 없었지요.
아! 아~
가슴이 아련하게 젖습니다.
아버지, 이제 영면을 취하시겠지요.
아버지를 따라 인생길을 걷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부모 앞에선 어린 자식이 될 수 밖에 없지요.
부모님 살아계실 때 정성 다해 모시지 않으면 큰 후회가 남는다는 말 다시금 뼈져리게 되새겨 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한마당 때 만나서 소주 한잔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마지막 순간을 잊지 못하시겠네요.
그래도 곁에서 지켜봐 주셨으니 후회는 없을 거 같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그 시간에 병간호 담당으로 병실에 들어간 것도 다 운명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직장 일 때문에 밤시간에 간병해준 조카와 동생에 이어 아침에 내가 하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네요.
그래도 여러가지 후회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야 슬프고도 아름다운 글을 읽었네요. 아무쪼록 안작가의 아버님 영면하시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아버지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한 적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글로 쓰게 되었네요.
가슴에 맺힌 것이 많으니 자연스럽게 그걸 표현하게 되나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