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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믿음으로 열매 맺는 달☜
☞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1서 3:18)
창20:1-9절) 신앙인의 강박증(强迫症)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complex)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이야기에서 만든 용어(用語)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Oedipus)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를 미워하고, 어머니를 좋아하는 성향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실 아버지가 권위적(權威的)일 때, 아버지에 대한 분노(忿怒) 때문에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권위(權威)에 대하여 도전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자녀가 청소년이 되었을 때, 부모와 엄청나게 갈등을 하게 되는데, 자녀 중에서는 가출(家出)을 한 후, 죽을 때까지 아버지나 어머니를 만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암에 걸리든지 해서 아들이나 딸을 보려고 해도 서로 용기가 없어서 만나지 못하다가 죽기 전에 결국 정(情) 때문에 만나서 화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보면,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분노와 콤플렉스로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요즘 상담학이 많이 발달하면서‘어른 아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이것은 자녀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인 경우 자녀가 성인이 된 후에도 정서적으로 유치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하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모르기는 몰라도 이런 어른 아이의 상태를 경험한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이런 마음의 상처나 열등감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도 이런 콤플렉스는 다 가지고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정리해보면 같은 형제나 부모 자식 사이이지만 신앙이 달라서 서로 원수처럼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야곱 콤플레스’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지만, 서로 신앙이 달라서 원수처럼 미워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야곱과 에서는 20년이 지난 후에 화해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 중에 장점이 많지만, 한 가지 약점이 있어서 늘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을‘사라 콤플렉스’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사라는 여성으로는 누구나 부러워 할 젊음과 미모(美貌)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단점(短點)때문에 늘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크리스천 형제나 자매 중에서 많은 것을 잘하지만, 한 가지가 되지 않아서 열등감에 빠지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그 한 가지도 해결해주셔서 진정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에게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도 잘 하는데, 다른 곳으로 옮겨가든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큰 시련(試鍊)이 오게 되면, 분노하고, 절망하는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이것을‘아브라함 콤플렉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의 마음에는 강박증이라는 것이 있어서 정상적이지 않은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전에는 집에서 빨래를 불에 올려놓고, 삶을 때가 많았는데, 시장에 가거나 혹은 외출한 후에 가스 불 위에 빨래를 그냥 두고 온 것 같아서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가 보면, 빨래를 불에서 잘 내려놓은 것을 보고, 안심할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자기와 상관이 없는 일에 어떤 암시(暗示)를 받고, 그것을 믿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차를 운전하다가‘속도 제한 30’이라는 팻말을 보고는 자기가 30일에 죽을 것이라는 암시(暗示)를 받고,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는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도 이런 충동이나 강박증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너무나 심하게 되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보통 사람의 마음속에는 감정(感情)이 있어서 평소에 이상한 공상(空想)이나, 충동(衝動)이 생겨도 그것을 막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나 오래 긴장 상태에 있거나, 분노를 하게 되면, 이런 감정이 다 없어져서 평소의 공상(空想)이나, 충동(衝動)이 사실로 믿어지게 됩니다.
이때 이 사람은 사실 아닌 공상(空想)이나, 충동(衝動)이 자기에게는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로 마음에 와 닿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잘 믿었기 때문에 콤플렉스나 강박증 같은 것은 전혀 없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기만 하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사라의 아름다음을 보고, 사라를 빼앗기 위해서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강박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들을 너무나도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 부인(婦人)사라를 부인(婦人)이라고 하지 못하고,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꼭 부인(婦人)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게 되는 큰 곤욕을 치르곤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랄 지방에 갔을 때, 이것이 또 나타나 게 되었습니다.
Ⅰ.아브라함의 심리적 두려움
20:1-2절)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옳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그의 아내 시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아브라함은 목축업자 였기 때문에 한 지방에 오래 있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야만 했습니다. 즉 팔레스타인은 우기(雨期)나 건기(乾期)가 있어서 건기(乾期) 때에는 풀을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없기 때문에 풀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아브라함이 가데스와 술 사이에 있는 그랄 땅에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도 아브라함은 자기 부인(婦人) 사라를 부인(婦人)이라 하지 않고,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부인(婦人)을 누이라고 거짓말한 것은 흉년(凶年)이 들어서 애굽 땅으로 내려갈 때부터 였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그곳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을 부인(婦人)이라고 하면, 나를 죽이고, 당신을 차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자기 부인(婦人) 사라를 누이라고 했다가 애굽의 바로가 사라를 후처(後妻)로 데려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라 때문에 바로 왕궁에 병(病)을 주셔서 결국 바로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사라를 데리고 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런 엄청난 일을 겪은 후에도 다른 곳에 가기만 하면, 사라는 자기 부인(婦人)이 아니고, 누이라고 거짓말을 자꾸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번에 그랄 땅에 왔을 때에도 사라가 부인(婦人)이 아니고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그랄 왕(王)이 사라를 자기 부인(婦人)으로 데려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타지(他地)에서 온 사람들에 대하여 아주 적대적(敵對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새로운 곳에 옮겨가기만 하면, 그 지방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사라를 빼앗아갈 것 같은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불안입니다. 원래 아브라함은 하란 땅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온 후에도 아브라함의 생활은 계속 불안의 연속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늘 함께 하셔서 아브라함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고, 또 시시때때로 복(福)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마음 한구석에는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지 않으면 나는 망(亡)할 수밖에 없다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불안이 결국 아브라함에게는 하나의 강박증이 되어서 새로운 곳으로 가게 되면, 누군가가 자기 부인(婦人) 사라의 아름다움을 보고, 사라를 차지하기 위하여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졌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무리 신앙이 좋은 아브라함이라 하더라도 결코 완전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렸을 때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지만, 평상시에는 현실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해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부인(婦人)에 대해서 거짓말을 해야 하는 약(弱)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언제나 이 두 가지 양면성(兩面性)이 있습니다. ①성령 충만하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을 때에는 빈틈없는 능력의 사람이지만, ②혼자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공격할 것을 위해서 인간적인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사람인 것입니다.
결국 이 두 가지를 잘 조화(調和)시킬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름다운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만, 내 신앙에 대하여 모르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 가면, 갑자기 위축되어서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주눅이 들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자신은 힘이 없는데,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굉장히 불안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새로운 직장으로 옮겨가거나,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하게 되었을 때, 적응하지 못하고, 직장에서는 쫓겨나고, 굶어죽을 것 같은 최악(最惡)의 경우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 와서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을 때, 정말 최악(最惡)의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아브라함이 자기 부인(婦人)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해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서 그냥 넘어가게 하셨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일이 터지려고 하니까 그런지 몰라도 하필이면, 그랄 왕(王) 아비멜렉이 사라를 좋아하게 되고, 그만 덜컥 시라를 자기 부인(婦人)으로 데리고 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위기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찾아가서 사실을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늦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전쟁을 해서 사라를 도로 찾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이중적(二重的)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할 때에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이길 수 없는 능력의 사람이 되지만, 잠시라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면,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겁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Ⅱ.하나님이 하신 일
아브라함은 애굽에서도 사라를 누이라고 해서 바로에게 빼앗겼었는데 그랄 땅에서도 사라를 누이라고 했다가 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사정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와, 사라가 예쁘긴 예뻣던 모양이다. 사라는 어떻게 두 번씩이나 왕에게 스카우트 될 정도로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부부(夫婦)에게는 그야말로 죽고 싶을 정도로 절망스러운 일이 또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인(婦人)을 뺏기고 난 후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아브라함은 자신의 무기력(無氣力)과 한심한 모습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하나님은 아브라함 편에 서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랄 왕(王)의 왕궁(王宮)에 여자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고, 그랄 왕(王)도 사라를 가까이 하지 못하는 일이 계속 일어났던 것입니다.
20:3-4절)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이 당시 아무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민족이라도 신(神)의 존재는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왕(王)이라 하더라도 남편이 있는 부인(婦人)을 관계하면 죽는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차마 아비멜렉을 찾아가서 사라가 자기 부인(婦人)이고, 자기가 거짓말 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왕(王)에게 거짓말을 하면, 그 즉시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냥 두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지키기 위해서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서 여러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사라가 아비멜렉의 왕궁(王宮)에 들어가면서 그 왕궁(王宮)의 모든 여자들의 태(胎)가 닫혀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라가 아비멜렉의 왕궁(王宮)에 들어가 있었던 기간은 적어도 몇 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라가 아비벨렉의 왕궁(王宮)에 들어간 후부터는 아비멜렉 왕궁(王宮)의 여자들에게는 일체 임신(妊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상하게도 아비멜렉은 전혀 사라를 가까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안 밤마다 계속 무슨 일이 생기면서 아비멜렉은 사라를 가까이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최후통첩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결국 네가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인 꿈을 통해서 그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즉‘너는 이제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네가 데리고 있는 여자는 남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그때 비로소 아비벨렉은 하나님 앞에서 적어도 한 가지는 큰 소리 칠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는 이 여자를 결코 건드리지 않은 의인(義人)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비멜렉은 꿈에 하나님 앞에서 엄청나게 자기 자신을 변명(辨明)했습니다. 즉 그 사람이 이 여자를 자기 누이라고 했고, 이 여자도 그 남자를 자기 오빠라고 했기 때문에 자기는 정말 그런 줄 알고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아마 아비멜렉이 꿈에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많이 변명(辨明)해 본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서야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네가 모르고 이렇게 한 줄 알고 내가 너를 막아서 범죄하지 못하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방 왕(王)앞에서 아브라함의 정체성(正體性)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0:7절)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 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아마도 모든 그랄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자기 왕(王)에게까지 거짓말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면, 모두 아브라함은 거짓말쟁이라고 손가락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선지자(先知者)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대변인(代辯人)이요, 하나님의 사자(使者)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 자신이 잃어버렸던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주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처럼 생각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름대로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인정받으려고, 엄청 잔 머리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전혀 어처구니없는 엉터리 같은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말씀을 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福)의 사자(使者)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 자신은 세상적인 기준(基準)만 가지고‘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든지, 혹은 ‘나는 지금 계속 놀고 있다’ 라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사자(使者)인 것을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세상을 위해서 기도를 해 줄 때, 세상은 비로소 복(福)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 통해서 기도를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그 여자와 아브라함에게 속한 것을 다 돌려보내고, 기도를 받지 않으면, 너와 네 집안 사람들이나 네 부하(部下)들은 전부 다 죽을 줄 알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Ⅲ.아브라함의 실상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에 대하여 너무나도 완전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아예 가까이 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종을 가까이 하면, 자기 죄(罪)가 다 드러나게 된다고 해서 더 멀리하거나 조심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가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하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하면서 겁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연약한 본성(本性)을 가진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렇게 연약(軟弱)한 인간을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참으로 연약(軟弱)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잠에서 깨어난 후, 즉시 모든 신하(臣下)들을 불러서 회의(會議)를 합니다.
20:8절)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아마도 그랄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자기 부인(婦人)을 누이라고 속여서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걸려들게 한 후, 그 약점(弱點)을 잡아서 나라를 저주하고 빼앗으려고 하는 아주 무시무시한 무당(巫堂)이나 점(占)쟁이 같이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랄 사람이 아브라함에 대하여 가지는 엄청난 오해(誤解)였습니다. 그래서 그랄 왕(王)은 날이 밝자 말자 아브라함을 불러서 심문(審問)을 했습니다.
20:9절)아비엘랙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은 아주 말이 많고, 변명(辨明)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꿈에 하나님 앞에서도 열심히 자기변명(辨明)을 하더니, 이제 아브라함을 불러 놓고서도 열심히 따졌습니다. 즉 도대체 내가 네게 무슨 원한(怨恨)을 졌기에 네가 우리나라를 망(亡)하게 하려고 부인(婦人)을 속여서 나로 하여금 장가들게 했느냐? 는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솔직하고 너무나도 순진한 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랄 땅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미워해서 죽일 줄 알았다고 하면서, 그랄 땅에 와서 자기가 너무 겁을 집어 먹었기 때문에 감히 부인(婦人)을 부인(婦人)이라고 하지 못했고, 그 바람에 사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해와 실수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시인(是認)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서 어처구니없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은 너무나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하나님 이야기를 해 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에 자기는 아예 하나님의 선지자(先知者)의 자아(自我)상을 내어놓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불안이었습니다. 즉 하란 땅을 떠나서 방황(彷徨)하는 동안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늘 불안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나타나지 않아서 몰랐는데,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어려움이 생기게 되면,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불안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시험(試驗)이 오면, 갑자기 믿음이 굳어져 버리면서 신앙이 없는 사람들보다 훨씬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좋은 사람들이 가진 강박증인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돈 문제나 다른 어려움들이 생기면, 잘 감당하게 되는데, 그것을 넘어서는 큰 문제가 터지면, 그만 믿음이 멈추어 서거나, 타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는데, 자기들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풍랑(風浪)이 덮치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당황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두려움에 빠졌던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가끔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 같은 어려움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 자신의 아름다운 자아(自我)상이나 축복은 다 잃어버리고, 신앙적으로 부도(不渡)가 난 사람들처럼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도 여전히 우리의 자아(自我)상은 하나님의 선지자(先知者)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할 일은 우리도 얼마든지 약(弱)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도 그랄 왕(王)에게 우리가 이렇게 한 것은 너무나도 믿음이 없고, 불안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때 아비멜렉이 놀랐던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先知者)도 이렇게 약(弱)한 면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이나 그랄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설명을 듣고서 아브라함에 대한 오해(誤解)나 두려움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종들도 얼마든지 약(弱)할 수 있고, 또 자기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전혀 자신들에게 해(解)를 끼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그랄 안에 어디든지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사라가 아무 수치(羞恥)가 없다는 것을 은(銀) 천개로 증거를 삼아 공포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아내와 여종들을 치료(治療)하셔서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비멜렉을 축복하게 하시고, 아브라함이 축복했을 때, 아비멜렉이나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재앙(災殃)으로부터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복(福)을 받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과연 하나님을 모르는 그랄 사람 가운데 제대로 살 수 있을까?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높이셔서 그 사람들에게 복(福)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기도했을 때, 그의 몸의 병든 부분이 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의 왕궁(王宮)에 있는 여성들의 불임(不姙)의 병(病)도 치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경험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쉽게 우리 자신의 존귀(尊貴)함을 잊고 오직 세상만 바라보면서 살려고 애를 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방법을 써보기도 하고, 편법(編法)을 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들은 결국 실패하게 되고, 더욱 더 어려운 코너(corner)로 몰리게 됩니다.
결국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축복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의 아름다운 정체성(正體性)을 세상에서 포기하면, 너무나도 못난 자아(自我)상을 가지게 되고, 결코 세상 사람들에게도 복(福)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가 세상에서 복(福)이 되리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고질적인 병(病)덩어리를 한번은 터트려야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학벌(學閥)이든 언제나 나를 비참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불신(不信)하게 만드는 그 쓴 뿌리를 캐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어느 곳에 가든지,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과연 우리의 어떤 모습을 사랑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자주 우리의 못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모습을 이해하시고, 우리를 어려움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많은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軟弱)하고 부족한 모습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너무 수치스럽게 생각하거나 감추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결점(缺點)이 많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사람으로 생각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열등감(劣等感)을 갖지 마시고, 마음껏 사람들을 축복(祝福)하시기 바랍니다.아-멘
찬송가 503장 *세상 모두 사랑 없어*
오늘의 묵상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7-8)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 예배 10월 16일(주일)
주일 예배와 헌금 봉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천국시민된 특권과 은혜헌신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절)
◈순서 :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성경 : 본문 읽기와 생명의 양식 공유, ☆찬송 : 삽입된 찬송, ☆헌금 : 헌금과 봉헌기도, ☆교갱원 설립을 위한 합심기도와 주기도문으로 끝내십시요.
◈후원금 외 헌금은 전체의 10/1을 교갱원 설립비로 ▽입금하고▽ 나머지는 성도간 교제비, 애경사, 새신자 환영, 전도비 등으로 사용하십시요.
▽교갱원 설립할 온라인 특별 헌금▽
농협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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