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주 간단한 단어 하나가 생각나지 않아 곤욕을 치를 때가 있다.
분명히 아는 단어다.
평소에도 몇 번씩 사용했던 말이다.
그런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고 하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그거 있잖아. 그거…….”
옆에 사람이 있다면 손짓까지 해가며 설명할 수 있다.
“아, 그거 있잖아. 나이 많은 사람하고 젊은 사람이…… 아니, 나이에 관계없이 친구가 되는 것…….”
상대방이 눈치채고 말해 주면 그제야 무릎을 탁 친다.
“맞아! 그거야. 그 말이 왜 생각이 안 났지?”
그 순간에는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없다.
하기야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웬만한 것은 기억할 필요도 없어졌다.
전화번호가 대표적이다.
예전에는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수첩에 빼곡하게 적어 놓고도 몇 개쯤은 외우고 다녔다.
지금은 내 전화번호와 집사람 전화번호 정도만 기억하면 된다.
친구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으면 스마트폰을 열어 이름만 찾으면 된다.
자동차 번호도 그렇다.
가끔 내 차 번호가 순간적으로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다.
‘내 차 번호가 뭐였더라?’
잠깐 생각하다가 스마트폰을 열어 확인한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기억력이 조금 떨어져도 스마트폰이 대신 기억해 준다.
그런데 문제는 스마트폰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갑자기 어떤 단어 하나가 생각나지 않을 때다.
그때부터 골치가 아프다.
눈을 감으면 더 생각날 것 같아 눈을 감고,
그래도 생각나지 않으면 다시 눈을 뜬다.
‘분명히 아는 말인데…….’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지만 단어는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 불을 켠다.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검색한다.
“아! 이거였구나.”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최근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망년지우(忘年之友)’라는 말이 있다.
나이에 거리끼지 않고 허물없이 사귀는 벗이라는 뜻이다.
내가 쓴 세 번째 수필집에도 이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말을 떠올리려 하니 ‘망년’이라는 두 글자가 생각나지 않았다.
"○○지우"인데 자꾸 엉뚱한 단어만 집어넣는다.
뜻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망년’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참 이상한 일이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라 그런 모양이다.
두서너 번 같은 일을 겪고 나서는 아예 한자를 써가며 연습도 했다.
‘망할 망(忘), 해 년(年). 망년지우!’
이렇게 몇 번씩 외웠다.
이 정도면 이제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골 농막에서 잠을 청하는데 또 그 단어가 떠올랐다.
‘망년지우…….’
그런데 또 ‘망년’이 생각나지 않았다.
기가 막혔다.
‘아니, 내가 이걸 외우려고 얼마나 연습했는데…….’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불을 켜고 스마트폰으로 확인했다.
“망년지우! 맞아, 망년지우.”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그제야 불을 끄고 다시 누웠다.
참 묘한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을 담당하는 뇌 기능이 조금씩 약해진 탓일까.
아니면 흔히 말하는 건망증일까.
혹시 치매의 전조는 아닐까.
괜히 별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기억해야 할 것이 너무 많으면 인생도 피곤하다.
살면서 겪었던 수많은 일들, 좋았던 일과 속상했던 일, 성공과 실패, 사람에게 받은 상처까지 모두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잊어버리는 것도 어쩌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혜인지 모른다.
젊을 때는 기억력이 좋다고 자랑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잊어버리는 일이 많아진다.
그렇다고 너무 겁먹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물론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기억력이 떨어진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끔 단어 하나가 생각나지 않는 정도라면 조금 웃어넘겨도 좋겠다.
나는 이제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억지로 붙잡고 씨름하지 않으려고 한다.
생각나면 좋고, 생각나지 않으면 스마트폰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래도 안 되면 다음 날 생각날 수도 있다.
어쩌면 뇌도 나와 함께 늙어가면서
“이것쯤은 좀 잊어도 되지 않겠느냐”라고 항의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가끔 중얼거린다.
“망년지우…… 망년지우…….”
이제는 잊지 않으려고 애써 외운다.
그런데 혹시 내일 또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웃으면서 스마트폰을 켜면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확인할 것이다.
“아하! 망년지우였지.”
이렇게 하나씩 잊어가면서도
아직 웃을 수 있다면,
아직은 괜찮은 것 아닐까.
첫댓글
추석을 맞이했습니다.
때아닌 비가 내립니다. 보름달은 구경하기가 어렵겠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풍족합니다.
요즘 기억력이 조금 떨어지는 게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초중고교 시절, 암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을 정도로 실력을 발휘했었는데...
나이탓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