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올라와 연희와 연애하며 예순 날을 보내고 나서야 내가 어디 와 있는지 알겠다.
<나는 영혼이 없는 사람/오늘은 또 어떤 허깨비를 만나 수작을 할까?> 온종일 궁리하며 <갈 데나 안 갈 데나 푼수같이 휘젓고>(이상 정희성의 시 수작 인용) 쏘다니다가 예순 날 천 사백사십 통점의 시간을 길거리에 다 허비하고 말았다.
이제사 비로소 내 있는 곳 주변을 찬찬히 돌아본다. 내 있는 곳 동명은 ‘들림’(4동)이다. 연희는 ‘끌림’과 ‘홀림’, ‘울림’, ‘들림’이라는 네개의 문학동과 문학 미디어랩 한개 동으로 구성돼 있다.
지나가다 용무가 급하면 들릴 수 있는 공용화장실 동이 하나 더 있는데 이 건물 이름은 풀림이다.
내 있는 곳은 산사의 조용한 선방을 닮았다. 창가에 남천나무 열매가 수줍게 얼굴 붉히는 끌림동을 지나 우거진 소나무숲 사이 계단을 올라오면 연희문학창작촌 맨 꼭대기에 숨어 있는 방이 내 집필실이다.
경내를 산책하다가 보면 궁동산 정상이 바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궁동산 정상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창작촌이 정면으로 마주 보인다.
네개 동 사이 길에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우거져 어디 멀리 수목원 쯤에 휴양 와 있는 기분이 든다. 고즈넉한 이곳에서 글 쓰고 사색하고 산책도 하며 마음 속 서정의 살을 잔뜩 찌우고 있다.
여기저기 붙어있는 문구들은 어디선가, 어느 시나 어디 소설에서나 본 듯한 명문장들이 독특한 건물 인테리어에 잘 어울려 스며들어 있다. 산책하다 잠깐 쉬어가고 싶으면 쉼표를 디자인한 의자에 걸터앉으면 된다.
홀림동 입구는 책꽂이 형태로 디자인 된 출입문 위에 뒤집어진 책 한 권이 올려진 모습이 시선을 홀린다.
서울 시내 한복판이지만 서울의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성역과 같은 곳이다. 그런데 반가운 사실은 단지 문인들만을 위한 전용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산책만 하고 돌아가기에 아쉬운 분들을 위해 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문학 미디어랩은 도서관과 책다방 연희로 구성된 장소다. 계단을 내려가면 ‘시가 자라는 나무’ 한 그루 입구를 지키고 섰다. 나무에 열린 책들은 신간시집이다. 입주작가 외에도 누구나 들어와 앉아서 책 읽을 공간이 넉넉하다.
도서대여도 가능하고, 북콘서트나 문학 학술 세미나 등 작은 행사나 회의공간으로 쓸 수 있는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책방 한쪽에 자리한 책다방은 1천원에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 등 원두커피를 즉석에서 뽑아 마실 수 있다.
연희문학창작촌은 서울시에서 조성하고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문학전문 레지던스다. 작가들의 창작공간 답게 출입문부터 남다르다.
철대문은 작가들의 아름다운 글귀를 엮어 만들었다. 출입구 벽면에는 ‘그들의 손 안에 우주가 있다’는 문구 아래 한국문학을 빛낸 100인의 손을 프린팅 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박범신 작가와 은희경 작가의 핸드프린팅도 있다.
원고지 위에 문학이 태어나는 최초의 장소 문학인들의 손을 예찬하는 다음과 같은 글귀도 새겨놓았다.
창작하는 손
두 손 뜨겁게 우주를 받아 적다
작가의 손 안에 사실, 기억, 상상력의 눈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손은 살아있는 영혼이며, 우주이고, 불멸이다 이에 문학이 태어나는 최초의 신비한 장소인
작가의 손을 실물 그대로 본떠 누구든지 그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이 벽에 영원히 보존하고자 한다.
연희문학창작촌 촌장 박범신
맞은편 게시판에는 장석남 시인이 ‘연희문학창작촌’에 대해 쓴 시가 게시되어 눈길을 붙잡는다.
연희문학창작촌
장석남
내가 든 방에는 두어 뼘 北窓이 있어서
겨울 바라보기가 수월하겠구나 하였다
늙은 소나무들 열 짓지 않고 들쑥날쑥 섰는데
모든 푸른 빛을 나누어 나의 큰 앞창문 물들여 주었다
젊은 작가 하나와 비탈에서 마주쳐
버들잎 같은 웃음 보아 좋았는데
들어와 거울 앞에 서 보니
옷을 뒤집어 입었군
김치 깎두기에 밥통 밥을 다 퍼먹고
지난 달력을 뜯어내어 뒷면에 시를 적는다
돌부리에 부딪혀 까맣게 죽은
왼쪽 엄지 발가락에 대하여, 또
그 발톱 속에 뛰노는 은빛 물고기떼에 대하여
시를 적는다
목련은 보고 나가시려나?
한 시인은 이런 말을 했었다
一說에 의하면 여기 목련은
一千 乃至 二千 年에 한 번씩 솟는다지
北窓 아래 앉았으나 바뀐 주소에 의하면
千겹 목련 메아리의 쉰 번째 골짜기
새로 난 발톱을 떼깍떼깍 깎고 앉아
묵은 시를 읊으리
*
문학촌 입구에서 연희를 불철주야 지키는 파수꾼 강아지 달님과도 정이 듬뿍 들었다. 연희와 연애할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어느덧 두 달이 번갯불처럼 지나가고 한 달 남았다.
연희와 연애하다
박상봉
연희의 봄은 마당 가득 글 익는 시간
조그만 젖망울 나날이 티밥처럼 부풀더니
목련꽃 막 벙글기 시작할 즈음
연희와 나눈 짧은 인연 돌아보는데
돌계단과 나무벤치와 소나무 오솔길 가운데
오목하니 내려앉은 샛노란 느낌표
연희는 내 불면증의 밤들이라고
담벼락에 손자국 남겨놓고 간
먼 집으로 혼자 떠난 시인 생각에
함박눈 내리는 저물무렵
잠시 창틀에 턱을 괴고 바이올린 자세로 앉아 있을 때
바람이 오른손 집게 손가락 세우고
지그시 활을 그어 대며 울음 우는
목련꽃잎 눈물 떨구는 소리 들었는지요?
단 하루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말
남기지 않고는 연희를 떠날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