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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1. 묵상글 (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가진 사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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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1.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가진 사람
세상 것에 눈이 밝으면 영적인 것을 놓칩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두면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왕이면 영적인 사람이 되어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영원히 귀한 것을 가슴에 담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는 중복장애인으로 살았던 헬렌겔러는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과 나의 일과 그리고 나의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육을 넘어 영혼의 맑은 눈과 귀를 가졌습니다. 우리도 영을 갈망하는 가운데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에둘러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고, 때로는 비유로 말하는 것이 편합니다.
상처받고 아파할 사람은 그만큼 관계의 형성이 덜 되었으니 비유가 편할 것이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이에게는 직접 얘기해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더 많은 사고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그리하면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 외에는 다른 이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이에게 비유로 말씀하시어 깨닫게 하시고 볼 수 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이에게는 바로 그것 때문에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보고 듣는 것이 현상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듣느냐? 말과 표상을 통해 제시되는 실재를 파악하느냐는 분명 다릅니다. 분명 믿는 이들은 속뜻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 입맛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원의를 알아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과 사실 안에 들어 있는 진실은 분명 다릅니다. 우리는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자로(子路)가 여쭙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 곧장 하다니?’ 염유(冉有)가 여쭙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들었으면 곧장 해야지.’ 이에 공서화(公西華)가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는 까닭을 묻자 공자 대답하시되, ‘염유는 물러서는 사람이라서 나가게 했고, 자로는 나서는 사람이라서 물러서게 하였다’(論語-先進)”. 비유를 통해서 진실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에 눈뜨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모릅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먹고 싶은 것만 먹음으로써 병을 만듭니다. 마음이 무디고 건성으로 보고 듣는 사람은 결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딘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비유는 넘치는 풍요로움을 담고 있습니다. 풍요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찾고자 하면 발견되는 것이고 찾을 의도가 없으면 감추어진 채로 있게 됩니다. 능력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대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말씀은 보고 들은 것을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서 결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느님과 그 사랑을 가진 자는 날이 갈수록 더 넉넉해지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것을 가진 이들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하느님에 대한 관심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함께야). 속뜻을 알았으면 뜻대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듣기 싫어, 그만해라!' 하는 완고함으로는 하늘나라 신비를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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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1.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자기에게 행하는 악행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악행이 남에게 하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는데
오늘 예레미야서는 자기에게 하는 악행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이스라엘이 하고 있는 짓이 자해행위, 자살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떤 짓이?
하나는 생수의 원천인 하느님을 저버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해 물이 고이지 않는 저수 동굴을 판 것입니다.
그런데 따져 보면 저수 동굴을 판 것이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기껏 저수 동굴을 파놓고는 생수의 원천을 저버린 것이 근본 문제이고
저수 동굴이라고 팠는데 그 동굴에 물이 고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저수 동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물을 받을 수 있고 저장할 수 있으며 그것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저수 동굴이 없는 것은 쪽박도 없이 음식을 달라는 것이고,
동냥은 주지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쪽박이 있어야 얻어먹을 수도 있는데 그 쪽박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이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근본적인 악은 생수의 원천인 하느님을 저버린 것이라고 예레미야는 얘기합니다.
물줄기가 끊기면 저수 동굴이 무슨 소용입니까?
이는 마치 물을 못 댄 논과 같습니다.
저는 지금도 물 댄 논을 보면 마음이 충만합니다.
어렸을 때 저희 논에 물대기 위해 새벽같이 물 대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처럼 수리 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던 때 자기 논에 물 대는 것은 전쟁이었고
그래서 아전인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기 논에 물 대는 건 중요한 문제였지요.
저희 집은 남자 어른이 없어서 항상 물 대는 순서에서 밀렸고,
제가 초저녁잠이 많아 한두 시에 일어나 논에 물을 대곤 했는데
그때 저희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면 행복이 들어오는 것 같았지요.
이렇듯이 물을 대는 것이 중요한데 물줄기를 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살 행위 또는 자해 행위지요.
그런데 저수 동굴을 만든 사람이 기껏 만들어 놓고 왜 물줄기를 끊겠습니까?
그럴 리 없고 물을 댄다고 댔는데 그것이 생수의 원천인 하느님이 아니라
원천이 아닌 그래서 곧 말라버릴 다른 물줄기서 물을 대려고 했던 거겠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의 주님은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 와서 마셔라.”
다른 곳이 아닌 당신에게 와서 마시라고 하시고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서의 주님도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고 당신께로 초대하시며
그러나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며 다른 데서 물을 찾는 사람을 나무라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생수의 원천인 하느님을 저버린 이스라엘의 악행을 말씀하신
주님께서 다른 악행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물이 새는 악행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물을 대지 않는 것도 악행이지만
기껏 댄 물을 간수하지 못하는 것도 악행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다시 물 댄 논 얘기를 하면 기껏 논에 물을 댔는데
웅어가 논두렁에 구멍을 내 물이 다 빠지게 내버려두는 것과 같습니다.
은총의 낭비랄까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내버려두는 악행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고마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지 않고,
자신을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진정 사랑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
그런 악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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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1.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고 가르치신 것이 “하늘나라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대한 것을 땅에서 가르치셨으니,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의 낯익은 사물이나 상황으로 예를 들어 쉽게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지 않고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마태 13,34)라고 할 정도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태 13,10)하고 여쭙자, 먼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3,11)
참 이상한 일입니다. 만약, 이 말씀대로라면 하느님께서는 군중들에게 하늘나라를 주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사실, 이 말씀은 “하늘나라”가 신비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주시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없는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나라의 신비”가 모두에게 가려져 있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곧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그 “신비”를 아는 일이 허락되어 있고, 반면에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그 은혜를 거역하기에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이는 마치 불공평한 처사처럼 여겨집니다. ‘가진 것을 나누어 아무도 난한 사람이 없었다.’(사도 4,34)는 초대교회의 모습에 견주어보아도 너무도 빗나간 처사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불공평한 처사를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똑같이 하늘나라를 가르쳐 주고 기적을 보여주시지만, 그들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자는 더 받아들여 넉넉하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탤런트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마태 25,28-29 참조),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에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통해 밝히십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4-15;이사 6,9-10)
위의 두 번째 문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어가 “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로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원하지 않고 거부한 완고함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완고한 마음을 주신 것(탈출 4,21)이 이집트인들에게 당신이 ‘하느님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셨듯이(탈출 14,4.18).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하느님 백성의 눈과 귀를 닫는 것은 ‘진정한 하느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제자들에게 선언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이는 이미 온 ‘하늘나라’를 믿음으로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을 듣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믿고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주님!
제가 보아도 보지 못함은 보여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이 가려 있기 때문입니다.
들어도 듣지 못함은 들려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귀가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보여 지고, 받아들여야 들려 지기 때문입니다.
주님, 믿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주시어
하늘나라의 신비를 제 눈이 볼 수 있고, 제 귀가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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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1.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통한다는 의미입니다. 과부 마음은 과부가 안다고 하고, 며느리 마음은 며느리가 안다고 합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린다는 의미입니다. 미국에서 두 가문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1740년대에 두 명이 아일랜드에서 미국 동부로 이민 왔습니다. 한 명은 뚜렷한 목표가 없이 살았습니다. 주어지는 환경에 따라 살았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습니다. 다른 한 명은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살았습니다. 환경을 개척하면서 살았습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면서 살았습니다. 260년이 지난 2000년도에 두 가문의 자녀들의 삶을 추적했다고 합니다. 목표가 없었던 가문의 자녀들은 사회의 공헌도가 낮았다고 합니다. 교도소에 가는 사람도 많았고, 도박과 알코올에 의존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뚜렷한 직업이 없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목표가 있었던 가문의 자녀들은 사회의 공헌도가 컸다고 합니다. 정치인, 법률가, 교수, 의사가 많았다고 합니다. 존경받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시작은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과는 달랐습니다. 삶의 태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서산대사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답설야중거 할 땐 불수호난행하라 금일아행적이 수작후인정 할 것이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신중하게 하라, 지금의 발걸음이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김구선생님도 이 말씀을 평생 삶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피의 순교로 사제들에게 좋은 이정표를 보여주었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땀의 순교로 사제들에게 좋은 이정표를 보여주었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뜨거운 신앙의 열정으로 박해를 견디어내며 순교함으로써 좋은 이정표를 보여주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를 통해서 박해받던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가 되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교회사를 기릴 뿐 아니라 민족의 현재를 변혁시키는 누룩이 되고,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빛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빛과 땅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1984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주례로 103위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103위 성인과 순교자들은 ‘이 땅의 빛’이 되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44차 세계 성체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성체대회가 열렸고, 변방의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의 일원이 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2022년입니다. 자랑스러운 선조들이 보여주었던 이정표를 우리가 충실히 따라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교회의 통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밀을 심었는데 우리는 어느새 가라지를 심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목숨을 걸고 미사참례를 했는데 지금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성당이 있음에도 주일 미사 참례자는 10%대로 떨어졌습니다. 90%의 신자는 주일 미사 참례를 안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가정에서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주일학교에서 교리를 배우면서 첫영성체를 하였습니다. 성당에서 준비한 여름 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신앙은 곧 삶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가정에서 기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펙을 쌓는 데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아이들의 첫영성체 교리에는 관심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학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은 장려하면서 아이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모른척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장애인, 고독한 이들이 성당의 문턱이 높다고 호소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따라올 수 있는 참된 신앙의 이정표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독서의 내용은 21 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해당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우리들 또한 주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이정표 삼아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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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1.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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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1.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유의 여정
-깨달음, 회개, 깨어있음, 훈련-
이런저런 단상斷想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요즘 한결같지 않은 잦은 비에 후덥지근한 날씨에 자칫 하면 ‘일상의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일상의 숲’을 살아가야 하는데 ‘일상의 늪’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 수 있습니다. 언젠가 ‘명상의 늪’이란 수도선배의 책을 읽으며 왜 하필 ‘명상의 숲’이 아니고 ‘명상의 늪’인가 하며 의아해 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어제는 어느 자매의 아름다운 수도원 경관 예찬과 사진에 문득 수도원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은 언제나 가도 엄마품 같은 곳입니다.” 언제나 가도 엄마품같은 사람이 되면 참 좋겠다 생각이 들며 수도원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 써놨던 “사랑은 이런 것”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있어 날아 오는 새들
모두 안아 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무려 25년전 나무의 덕을 사모思慕하여 쓴 시입니다. 나무의 품, 숲의 품, 일상의 품, 수도원의 품 모두 ‘주님의 품’을 상징합니다. 회심정回心亭이란 사방에 열려있는 수도원의 정자亭子가 사람이 오면 채워졌다가 떠나면 텅빈 충만으로 남아 있는 ‘무심無心한 사랑’의 회심정의 품도 좋아 때로 사진에 담기도 합니다.
어제는 혜성같이 등장한 결코 밉거나 싫지 않은 약간 정신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주 수도원을 찾은 순수한 청년靑年이 부적符籍을 써달라 했습니다. 말씀처방전을 부적이라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4장6절을 지목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예루살렘은 자유인이며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대하는 성서구절이 참 정답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하늘의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교회의 어머니요, 아름다운 수도원이요, 성모님이요, 예수님이요, 성인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유인이요 우리의 어머니같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 7월18일은 국제 넬슨 만델라의 날이었습니다. 정말 경이로운 현대의 성인입니다. 남아공화국의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국부로 추앙받으며 국제적으로 존경받았던 어른으로 산전수전 역경 속에서도 95세 장수를 누렸던 참 기적같은 성인입니다. 그래서 자서전을 주문했습니다.
교황님 홈페이지에 “용서는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넬슨 만델라의 가르침”이란 제목하의 글을 읽으며 주목되는 말마디는 단연 용서였습니다. 27년의 수인생활후 급기야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일체의 정치 보복을 하지 않았고 평화로운 공존과 평화로 마침내 노벨 평화상을 탔던 분으로, 세계 유수한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넬슨 만델라 였습니다. 그가 다음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일부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넬슨! 네가 감옥에 있는 동안 너는 자유로웠고, 지금도 자유롭다. 결코 그들의 수인(囚人;prisoner)이 되지 마라.” 즉시 만델라는 과거의 덫에 빠지지 않기를 결심했다. 그리고 ‘아픔을 떠나 보내는 것’(let the bitterness go)이었다. 그는 '용서는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 두려움을 떠나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이런 강력한 무기가 용서인 것이다.-
깨달음도, 회개도, 깨어 있음도, ,의식적 항구한 분투의 노력이자 훈련입니다. 이래야 영적감성도 무디어지지 않습니다. 일상의 늪에서 벗어납니다. 무지로부터 벗어나 지혜로운 현자요 자유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깨달음, 깨어 있음, 깨끗한 마음 모두 “깨”잘 돌림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과 관련되어 떠오른 단상들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오죽 답답했으면 예수님의 입을 빌어 하느님의 부정적 예정설로 비유를 해명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래서 ‘원판 불변의 법칙’을 말하나 봅니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져 빼앗길 것이다.”
영적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를 말합니다. 아, 이래서 부단한 회개요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영적감성을, 영성을 회복함이 긴요합니다. 그대로 마이동풍같은 백성의 현실에 직면하여 이사야의 부정적 예정설을 수용한, 그대로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결국은 하느님 탓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절실한 회개의 은총입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도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바알 숭배로 땅을 더럽히고 주님의 상속 재산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고 끊임없이 반역하는 배은망덕의 백성을 개탄합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반복되는 악순환의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너무들 후안무치하고 적반하장에 뻔뻔들합니다. 참 정의롭고 지혜롭고 용기있고 반듯한 사람, 큰 어른 만나기가 힘든 세상입니다. 새삼 넬슨 만델라 같은, 전임 김대중 토마스 모어 같은 정치지도자가 그리운 세상입니다. 대부분 하느님 꿈과 비전, 희망을 상실한 고만고만한 왜소해진 사람들뿐입니다. 김대중 대통령 세례명은 장면 부총리가 지어줬다 합니다.
“하늘아, 이를 두고 깜짝 놀라라. 소스라치고 몸서리쳐라. 주님의 말씀이다.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예레2,12-13)
생수의 원천이냐 갈라진 저수 동굴이냐 역시 선택과 훈련의 문제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회개와 깨달음을 통한 지혜로 생수의 원천인 주님을 선택하여 부단히 주님안에서 깨어 살아가는 영적훈련에 힘쓰자는 것입니다. 이래야 일상의 늪에서 벗어나 일상의 숲을, 물이 새는 고수 동굴이 아닌 생수의 원천인 주님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생수의 원천인 주님을 선택하여 참 삶을 살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복음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을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13,16-17)
그대로 참으로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우리의 영적 갈망을, 영적 목마름과 배고픔을 일거에 해결해 주는 주님과 하나되는 참행복한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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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1.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친구들과 등산을 갔던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처음 가는 등산이었기에 큰 기대가 있었지만, 산 정상까지의 등산은 그에게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힘들다는 생각이 계속되면서 정상에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입니다. 다리도 풀려서 더는 앞으로 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또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함께하는 친구에게 커다란 피해를 줄 것이 분명했습니다.
친구들에게 “먼저 가! 나는 틀렸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 떼어 놓고 가면 우리 마음이 좋겠니? 그리고 이 정도까지 왔으면 정상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어. 지금까지도 잘했잖아. 그러니 잠깐 쉬었다가 다시 힘내서 올라가자.”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준 친구들 덕분에 생애 첫 등산에 성공했습니다. 이런 친구와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일까요? 솔직히 긍정적으로 나를 끌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자기 삶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부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나를 주저앉게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자기의 모습을 되돌아보십시오. 나는 내 이웃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을까요?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포기하고 좌절하게 했던 것은 아닐까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 곁에는 역시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내 주위를 바꾸고, 결국 나를 변화시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늘 긍정적인 방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포기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늘 희망을 간직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몇몇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어렵고 복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어떤 이도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다녀온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더 알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면서 율법의 조항들을 더 복잡하게 만들면서, 하느님 나라에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일상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소재를 따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설명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일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깨달을 수 있는 단순하고 긍정적인 마음이 필요합니다. 일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 또 하느님 나라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절대로 어렵고 복잡한 곳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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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를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같이 살아라. 언젠가는 그날들 가운데 진짜 마지막 날이 있을 테니까(레오 부스칼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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