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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일 ‘하느님 말씀의 주일’로 제정
교황, 자의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발표… 신자들에게 매일 성경 읽기 · 말씀 생활화 당부
프란치스코 교황이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 말씀의 주일’로 제정했다.
교황은 9월 30일 발표한 자의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Aperuit Illis)」에서 “구원과 신앙, 일치와 자비는 성경과 그리스도를 알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면서 “교회가 사랑과 신앙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돕기 위해 연중시기 세 번째 주일을 하느님 말씀에 봉헌한다”고 설명했다.
교황은 자의교서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는 성경 구절을 가장 먼저 언급하면서 “하느님 말씀을 기억하고 공부하며 전파하는 경험은 교회를 새롭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부활하신 주님과 신앙 공동체, 성경은 그리스도인 정체성의 핵심”이라며 성경이 어느 한 단체의 유산이나 유물이 아니라 복음을 따르도록 요청받는 모든 이들을 위한 하느님 말씀이라는 점을 크게 강조했다.
교황은 “성경은 하느님 백성의 책”이라면서 성경을 읽는 이들은 하느님 말씀을 이해하고 이를 다른 이들과 나눠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임을 강조하며 “주님 없이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성경 없이 교회의 사명을 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교황은 특별히 사제들에게 강론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기를 촉구했다. “강론은 결코 낭비돼서는 안 될 사목적 기회”라면서 “강론을 할 때마다 마음을 다해 말씀을 전하라”고 말했다. 이어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기 쉽게 받아들이도록 도와줘야 한다”며 “신자들이 강론을 통해 하느님 말씀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말씀대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느님 말씀의 주일 제정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경을 자주 읽지 않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교황청 새복음화 촉진평의회 의장 리노 피지켈라 대주교는 “대다수 신자가 미사에 참여할 때만 하느님 말씀을 접한다”면서 “성경은 가장 많이 팔린 책이지만 한편으론 가장 많이 먼지가 쌓인 책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피지켈라 대주교는 “교황의 자의교서는 하느님 말씀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며 “교황은 신자들이 매일 성경을 읽고 말씀에 따라 살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전례 영성 – 성무일도] 성무일도, 시간에 맞춰 거행하는 파스카 신비
기도하는 교회
성령 강림으로 탄생한 교회는 하느님 백성 전체가 참여하는 ‘기도 공동체’였다. 성령 강림으로 세워지기 전부터도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이후 탄생한 첫 신자 공동체의 삶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 또한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이 말씀을 현대식으로 바꾸면,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여 형제적 사랑을 나누며
(친교를 이루며), 성찬례를 거행하고(빵을 떼어 나누고), 성무일도를 바쳤다(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정도가 되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은 교회 공동체의 이와 같은 활동이 파스카 신비의 거행이라고 말한다(6항 참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신자들의 모임, 곧 파스카 신비를 삶과 기도를 통해, 특히 성찬례로 거행하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교회라는 뜻이다.
끊임없는 기도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던 초대 교회 신자들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끊임없는 기도는 “교회의 본질 자체에 속하는 하나의 요소”(성무일도에 관한 총지침, 9항)이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주님과 사도들의 모범과 명을 따라, 초대 교회 신자들은 함께 모여 기도했다. 나아가 예수님의 파스카 사건과 연관된 하루의 특정 시간에, 예컨대 아침, 저녁, 제3시(오전 9시), 제6시(낮 12시), 제9시(오후 3시), 한밤중에 기도하기 시작했다.
시간경이라는 성무일도는 이처럼 끊임없이 기도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원의에서 출발하였다. 시대를 거치며 성무일도는 점점 발전하여 지역 교회의 기도, 곧 전례가 되었다. 바오로 6세 교황이 성무일도에 관한 교황령 「찬미의 노래」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모든 경신례의 절정인 미사 성제의 부요함을 인간 생활의 모든 시간으로 흘려보내고 퍼져 나가게 하는 필수적인 보조 수단”이 되었다.
수도원 성무일도
성무일도의 역사는 크게 ‘주교좌 성무일도’와 ‘수도원 성무일도’로 구별된다. 신자들이 성당에 모여 사제의 주도 아래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함께 바쳤던 것이 주교좌 성무일도이고, 기도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으로 하루에 되도록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했던 것이 수도원 성무일도이다.
수도자였던 베네딕토 성인은 성무일도를 ‘하느님의 일’(Opus Dei)이라고 불렀다. 수도 생활의 최우선 가치를 성무일도 거행에 두면서 “아무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마라.”(「성 베네딕토 규칙서」 43,3)고 권고했다.
실제로 수도자들은 하느님의 일을 밤낮으로 열심히 했다.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외에도 밤 기도, 삼시경, 육시경, 구시경, 끝기도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하루에도 일곱 번 당신을 찬양하나이다.”(시편 119,164)라는 성경 말씀대로였다. 이 두 종류의 성무일도는 서로 영향을 주며 발전하다가 수도원 성무일도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거룩한 의무
성무일도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독서와 찬미가, 청원 기도 등 여러 요소의 첨가를 통해 풍요로워지고 더욱 중요해졌다. 그렇지만 성무일도(聖務日禱, Officium Divinum)라는 말에서도 드러나지만, 이 ‘거룩한’(Divinum) 기도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의무’(Officium)였다. 교회가 규정한 방식대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기도의 분량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성무일도를 ‘법정 시간경’(法定 時間經, hora canonica)이라고도 불렀다.
그래서인지 좋아서 하든 의무로 하든 성무일도를 바칠 때 기도의 양을 채우려는 강박이 존재하기도 했다. 중세기 클뤼니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성당에서 성무일도를 바치며 보낼 정도였다.
우스갯소리지만, 옛날에 한 본당 신부는 성무일도를 아침 기도부터 저녁 기도, 끝기도까지 아침에 한꺼번에 싹 다 해 버리고 낮 동안 편안하게(?) 사목 활동에 집중했다고도 하니, 지난날 성무일도가 얼마나 ‘거룩한 부담’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대는 … 하느님 백성과 함께 온 세상을 위하여 시간 전례를 충실히 바치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제 서품 예식 때의 이 서약으로 성직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무일도를 바칠 의무를 지닌다. 수도자들은 이런 약속을 굳이 안 해도 되는데, 왜냐하면 수도 생활의 소명 자체에 이미 “끊임없이 기도”(루카 18,1)하는, 곧 성무일도를 바치는 의무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평신도는 이에 대한 의무가 없지만, 주일이나 축일에 교회에 모여 가능하면 저녁 기도를 함께 바치기를 간곡히 권유받는다(비오 12세 교황, 회칙 「하느님의 중개자」, 150항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1971년 발간된 새 성무일도서 「시간 전례」(Liturgia Horarum)는 성무일도 개정의 첫 번째 기준으로, 성무일도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가 함께 기도하는 ‘전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였다.
두 번째로, 하루 전체의 성화라는 성무일도의 본디 목적을 달성하고자 시간경들의 양도 줄이고 순서도 재조정하였다. 현대 인간 생활의 여건에 맞도록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에 최대의 중요성이 부여되었다.
시간 전례
성무일도는 무엇보다 전례다. 시간을 성화하려고 시간에 맞춰 날마다 거행하는 ‘시간 전례’다. 성무일도를 ‘시간 전례’라고 부르는 더 큰 이유는, “주님을 끊임없이 찬미하며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간청”하는 사제 직무가 “성찬례의 거행만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도 특히 성무일도를 바침으로써”(전례 헌장, 83항) 수행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무일도를 제 시간에 맞게 바칠 때마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는 그때마다 새롭게 거행된다. 그리고 “전례 거행 때마다 유일한 신비를 실현하시는 성령께서 임하신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104항).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의 자연스런 시간에 따라 시간 전례를 거행하는 이들은 “신비로운 사도적 풍요성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성장케 한다”(성무일도에 관한 총지침, 18항). 왜냐하면 “이렇게 생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비와 참교회의 본질’을 표출하고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18항) 보이기 때문이다.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이름에 ‘십자가’를 품은 식물들
4세기 초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탄압의 대상이던 그리스도교를 공인했다. 그리고 이 황제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는 만년에 황후의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궁궐을 나와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했고, 한동안 성지에서 기도하며 지냈다. 교회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때 성녀 헬레나가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던 십자가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를 기려서 가톨릭교회는 9월14일에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낸다. 그리고 십자가의 의미와 중요성을 잘 알고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몇몇 식물들에 특별히 십자가와 관련된 이름을 붙여 주었다.
크로스바인, ‘십자가덩굴’
미국 남동부 일대에는 큰 나무든 작은 덤불이든 또는 담장이든 줄기를 붙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라붙어서 감아 오르며 15미터 이상 자라는 덩굴식물이 널리 분포한다. 크로스바인(Cross Vine)이라는 덩굴식물이다. 이 식물은 생장하는 동안에는 잎이 밝은 녹색을 띠다가 겨울에는 붉은 빛이 도는 자주색을 띠는데, 그렇다고 낙엽이 지지는 않아서 상록성 식물로 분류된다.
그리고 봄 중반부터 여름의 끝 무렵까지 잎겨드랑이에서 2~5송이씩 나팔 모양의 통꽃을 피운다. 안쪽은 대체로 노란색이고 바깥쪽은 주황에서 적갈색에 이르기까지 색깔이 다양한 꽃에서는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데, 카레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한다.
이 식물은 능소화과로 분류된다. 능소화과 식물임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이 식물의 꽃이 요즘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능소화를 빼어 닮았다. 최근에는 능소화 꽃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눈에 띄지만, 본래 능소화는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는 식물이었다. 그래서 이름마저도 ‘양반꽃’이라 불리던 때가 있었다. 능소화가 이렇듯 소위 ‘지체 높은’ 식물이었다면, 그에 못지않게 크로스바인은 이름만으로도 교회에서 지체 높은 식물에 속한다고 하겠다. 크로스바인을 우리말로 새기자면 ‘십자가덩굴’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 크로스바인의 횡단면.
이 식물의 특징들 중 한 가지는 줄기를 자르면 그 횡단면에 십자가 모양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점 때문에 이 식물은 크로스바인이라는 과분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런 이름을 붙이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지역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테지만,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표현이 마뜩하지 않아서였는지 달리는 학명[Bignonia capreolata]에 근거해서 비그노니아라는 이름으로도 흔히 불린다.
그런데 얄궂게도 비그노니아라는 이름 또한 한 사제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점에서 교회와 무관하지는 않다. 조제프 피통(Joseph Pitton de Tournefort)이라는 프랑스의 식물학자가 이 식물의 이름을 지을 때 자기 친구인 장-폴 비뇽(Jean-Paul Bignon) 신부를 기리는 마음으로 비그노니아라고 정했다고 한다.
플록스, ‘그리스도의 십자가 꽃’
플록스(Summer Phlox)는 북아메리카 원산인 여러해살이풀이다. 우리말로는 풀협죽도라고 불리는데, ‘협죽도 같은 꽃이 달리는 풀’이라는 뜻으로 생긴 이름이다. 한때 세계적으로 관상용 원예식물로 널리 사랑받던 플록스는 내한성이 강하고, 무더기로 싹이 나서 크게 포기를 이루며 높이 60∼120cm 정도로 자란다. 잎이 마주나는 종류도 있고 3개씩 돌려나는 종류도 있다. 대개는 여름에 지름 2,5cm 크기의 홍자색, 분홍, 흰색 꽃을 피우는데, 그밖에 여러 가지 다른 색의 꽃을 피우는 변이종들도 많이 개발되어 있다.
플록스 꽃의 아랫부분은 통 모양으로 길쭉하고, 윗부분은 꽃잎이 5갈래로 갈라지며 수평으로 퍼진다. 그러나 꽃잎들이 각기 떨어져 있지는 않으며 마치 지붕의 기와들이 겹쳐지며 맞물리는 것처럼 조금씩 겹쳐져 있다. 그리고 꽃이 한꺼번에 활짝 피었다가 한꺼번에 지고 마는 여느 꽃들과는 다르게 번갈아가며 피고 지는 가운데 개화 기간이 제법 길다.
플록스는 그리스어로 ‘불꽃, 빛’을 뜻한다. 아마도 이 식물의 꽃이며 잎의 생김새가 그리고 꽃의 색깔이 불[火]이 지닌 몇몇 요소들을 생생하게 연상시켰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듯하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이 식물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꽃(Christ’s-Cross Flower)’이라고 불렀다.
스위트알리섬, ‘성모님의 작은 십자가’ 또는 ‘십자가의 꽃’
지중해 원산으로 스위트알리섬 또는 향기알리섬(Sweet Alyssum)라고 불리는 우리말로는 생김새가 냉이와 비슷하다 해서 돌냉이, 애기냉이, 해변냉이라고도 불리는 식물이 있다. 이 식물은 10∼20cm 정도 높이로 땅 위를 기어가듯이 퍼진다. 잎은 폭이 좁고, 회색을 띤 녹색이며, 대개는 은색의 털이 나 있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흰색, 자주색, 보라색, 분홍색 등 크기가 작은 송이들이 무리를 지어서 피는데, 각 송이마다 4개의 꽃잎이 십자 형태를 이룬다. 그리고 은은한 향기를 풍긴다. 이 식물은 영하에 가까운 낮은 온도에도 무난하게 견디기 때문에 겨울에도 비교적 쉽게 기를 수 있는데다 꽃이 3월부터 가을까지 오래 피는 까닭에 꽃을 보기 위해서 화단이나 화분에 많이 재배된다.
스위트알리섬은 원산지 지중해에서는 여러해살이풀이지만 한국에서는 가을에 파종하는 한해살이풀로 취급된다. 스위트알리섬의 학명은 로불라리아 마르티마(Lobularia Maritima)인데, 여기서 로불라리아는 그리스어로 ‘작은 꼬투리’라는 뜻이다. 아마도 씨앗을 담는 깍지를 보고서 지은 이름인 듯하다.
일찍이 사람들은 스위트알리섬을 ‘빼어난 미모, 뛰어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꽃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식물을 ‘당신이 손수 축복하신 성모님의 작은 십자가(Blessed by Mary, Mary’s Little Cross)’ 또는 ’십자가의 꽃(Flower of the Cross)‘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전례, 그 능동적 참여] 보십시오!(ECCE!)
예수님의 탄생 예고는 대천사 가브리엘과 나자렛 고을 처녀 마리아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천사의 “보라,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라는 탄생 예고 선언과 그에 대한 처녀 마리아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대답에는 공통된 문장이 존재한다.
그것은 보라! 보십시오!라는 ECCE! 라는 단어가 두 문장의 서두를 장식하며 공통되게 상용되어 수미쌍관을 이룬다. 자칫 이 단어 ‘보라’와 ‘보십시오’가 감탄사일 뿐 문어체의 허사라고 인식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엄청난 신앙고백의 대화임을 가늠하는 중요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구원의 역사적 장면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에서 쓰인 신앙고백문을 나타내는 중심단어이며 미사경문에도 도입된 단어이다.
성경에서 ‘보라! 보십시오!’라는 단어는 우리가 미사 영성체 전에 사제가 성체를 들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단어이다.
독특하게 이 단어는 ‘보다’의 명령어 형식을 취하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무엇을 꼭 잡아라. 둘째는 집중해라. 셋째는 동참하라!라는 뜻이다.
예수님 잉태 전 성모님과 천사 가브리엘의 만남에서 대화를 살펴보면 엄청난 감동이 일어난다. 루카복음 1장을 살펴보면 우선 성모님은 처녀의 임신이라는 통보를 듣고 몹시 놀라워했다고 한다. 큰 충격이었음이 분명하다. 마치 태풍이 닥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태풍을 잠잠하게 만든다.
‘곰곰히 생각함’으로써 그녀는 그 엄청난 천사의 아룀에 의한 충격을 완화하고 듣는다!
마리아는 자기에게 닥친 태풍의 경로를 바꾸거나 감소하는 인간적 궁리나 책임회피가 아닌 정면승부를 한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도록 어떻게 안 될까? 그런 생각 말이다.
그 정면승부란 이해되지 않지만 듣고 간직하기! 이어 천사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말한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선포한다. 흥미 있게도 보통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선포를 한 다음 이를 통해 마리아를 진정시키고 나서 그리고 구세주 탄생 예고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하느님은 한 처녀에게 닥칠 엄청난 사건을 먼저 통보하게 하고 그녀의 대응을 보셨다. 그녀는 겸손과 신중함이라는 신앙의 위대한 그릇으로 그것을 담아낸다. 뜨거운 음식을 담는 그릇은 확실히 다르다. 그녀는 과연 엄청난 뜨거움을 담아내는 큰 그릇이었다. 그녀는 천사의 아룀에 대해 보다 밀도 있고 전향적이며 주도적인 대답을 한다.
“보십시오!”
이 말속에는 엄청난 자기 투신과 신앙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처녀 마리아가 이어 말한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는 마치 교회전례 화답송의 계와 응과 같다. 혹은 치고받는 신들린 사물놀이의 가락과 같다. 결코 시골처녀의 소곤거리는 수줍음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무서울 정도로 당당함이 있다.
오히려 대천사를 상대하며 “보십시오!”라는 자신감을 표현한다.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상대한 다윗의 이야기보다 대단하다. 그녀는 용기 있는 신앙의 순명의지를 통해 천사의 말처럼 이미 하느님의 능력 즉 성령의 역사하심을 입은 것이다.
신앙의 결단과 실천으로 하느님 바라보는 눈 갖게 돼
주저 없는 응답! 즉시 응답함으로써 믿음을 잃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소유한 사람이 되며 그 말씀에 집중한다.
그녀가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그는 보게 되고 만나게 되며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어느 시인은 “보려는 자만이 보인다!”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예수 탄생 예고에는 천사와의 짧은 대화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요소들이 들어있다. 처음엔 주눅들 수밖에 없는 천사의 아룀에 어느새 대천사가 주눅 들 정도의 응답이 나왔다.
“보십시오!”
성서 안에서 보라! 혹은 보았다! 보시오! 라는 말은 정말 중요한 단어이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이루어지고 깨닫게 된 순간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교감, 나아가 통감의 순간에서야 나오는 동사이자 감탄사이다.
‘보다!’라는 동사는 신앙의 눈이 뜨였을 때 터진 복주머니이다. 안드레아를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와서 보시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체험한 안드레아의 증언인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았소!”
로마병사는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깨닫는 순간! “보라! 이 사람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은 정보의 호수이지만 또한 가짜 정보의 오염도 심각하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우리 삶의 나침반임을 깨닫고 성모님처럼 “보십시오!”라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보십시오!”는 수동적 신앙이 아닌 능동적 신앙의 고백행위인 것이다.
묵주기도를 관상기도라고 하고, 레지오의 상훈에서 단원들은 마리아께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섬기듯이 봉사할 것을 명하고 있다. 즉 그냥 하는 기도가 아닌 보고 기도하는 관상기도! 그냥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섬기듯이 할 것!
이렇듯 신앙의 결단과 실천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된다. 마르타의 봉사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간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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