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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애굽기 15장
출애굽기 15:1-21
홍해의 갈라짐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베푸신 특별한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왜 그들만이 이런 혜택을 받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어린 양에서 출발한 유일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해에서 애굽과 이스라엘을 철저히 구별하여 취급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홍해의 갈라짐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과 그 구원의 능력을 반복해서 되새기고 말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이후로부터 홍해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는 표현법이 된다(시 74:13; 77:19-20; 78:13; 사 51:10).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족하되 내 안에서는 나의 십자가로 늘 반복되어지고 계속적으로 증거되어져야 한다. 그것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이다(고전 1:18). 그 구원의 능력을 아는 자가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애굽과 같이 바다의 죽음 속에 던져졌으나 살아난 경험을 가진 그 때에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교회들에서는 ‘누가 찬양할 수 있는가?’ 라고 물으면 당연히 ‘음악성이 있는 자’, ‘노래를 잘하는 자’로 대답 되어진다. 찬양을 할 수 있는 기능성이 고유의 특권을 가진 것으로 성가대가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교인들의 앞에서 노래 잘함을 뽐내고 있다. 음악성에 의해 음악적 법칙에 완벽하게 맞추어진 것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양으로 취급되고 있다. 실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은 구원받은 자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되어지는 것이다(엡 5:19-21; 골 3:16-17).
이제 이스라엘은 이 노래를 통해 자신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가야 할 목적지는 분명히 설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일은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임을 신앙고백으로 찬양에 담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는 용사”라고 부르게 된다(3절). 하나님은 친히 용사가 되셔서 이스라엘을 구하였는데 그 구원은 바다 속에 함께 있던 애굽과 이스라엘 가운데서 어린 양의 피로 불러냄을 받은 새로운 민족을 구별하시고 살리시는 구원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쟁이다. 여호와의 전쟁이란 여호와의 싸움이지 인간의 싸움이 아니다. 다만 그 싸움터의 언저리에 이스라엘을 세워 놓으실 뿐이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부르시는 이유는 여호와의 승리를 곧 이스라엘의 승리로 주시기 때문이다.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원수”란 누구를 말하는가? 7절에서 밝혀주고 있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을 대항하는 자가 아니라 여호와를 거스리는 자가 원수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언약 실현을 막아서고 방해하고 도전하는 것들은 모두가 여호와의 원수인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오직 자기 이름을 위해 싸우시기 때문이다(3절; 시 106:8).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한 바닷가에서 만큼은 애굽이 여호와의 원수인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찬양하고 있는 그들이 여호와의 원수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광야생활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광야로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실 것이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13절).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내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가나안 땅일지는 모르나 실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표는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결한 처소(13절),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17절)가 되게 하시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애굽적 심성을 철저히 공개하시고 폭로하실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애굽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하나님의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애굽과 똑같은 원수였으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비를 누릴 수 있었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순전히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때문에 되어진 것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광야란, 하나님의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하심에 따르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여호와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는지 낱낱이 보게 되는 삶의 현장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나라고 하는 인간이란, 점점 더 거룩해져가고, 고상한 경건을 쌓아감으로 하나님 앞에서 잘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하면 할수록, 성경을 보면 볼수록 내가 그리스도를 대적한 자임을 깨닫게 되어 십자가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게 된다.
우리를 주님께서 자신의 처소(성전)로 삼으신 은혜(고전 3:16; 고후 6:16)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다스림을 구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18절)? 나는 내가 주님의 처소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자인가 아니면 주께서 나를 처소로 삼으신다는 것을 믿는 자인가?
출애굽기 15:22-27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흘길이나 물을 얻지 못하는 길로 인도하셨다. 마침 물이 있는 곳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그 곳의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곳의 이름을 “마라”라고 했다(23절). 그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그렇게 순순히 여호와만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를 존재가 아니었다. 승리의 찬양이 있고난 후 며칠이 못되어서 그들은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다는 이유로 모세를 원망한다. 이 모습이 바로 여호와의 원수된 모습임을 하나님은 보이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시험하셨다고 한다(25절). 여기서 시험했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증명하신다는 뜻이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쓴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한 나무를 지시하시면서 그것을 물에 던지라고 명하신다. 그러니 물이 달아져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나무가 무슨 약의 효험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달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로 나타내셨다(26절).
많은 설교자들은 이 말씀을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왜곡된 해석이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죄악 가운데서 회복시키는 것을 치료하시는 것으로 표현한 곳이 많이 있다(참고 말 4:2; 호 7:1; 사 58:8; 렘 30:17 등). 성경 어디에도 우리의 질병을 무조건적으로 치료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곳은 없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의로움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 때문이었다. 그 피 때문에 그들에게 내려질 재앙이 유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규례를 지켜 순종하면 그들을 치료하시겠다고 하신다. 여기서 계명과 규례는 유월절 규례이다. 즉 유월절에 희생된 어린 양의 피만이 쓴물이 단물이 된 것처럼 이스라엘을 유보된 재앙과 저주 가운데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인간들에게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애굽적인 사고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적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며, 어린 양의 피를 무시하는 사고방식이다.
홍해에서 애굽의 군사들과 같이 전멸될 뻔했으나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이스라엘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회의를 품지 않는 마음이 계속적으로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가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것에 회의를 품지 않는 마음이어야 한다. 참된 주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의 고귀함을 드러내는 교회이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옥련지침이
출애굽기 15장 모세의 노래
출애굽기 15:1-21
홍해의 갈라짐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베푸신 특별한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왜 그들만이 이런 혜택을 받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어린 양에서 출발한 유일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해에서 애굽과 이스라엘을 철저히 구별하여 취급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홍해의 갈라짐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과 그 구원의 능력을 반복해서 되새기고 말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이후로부터 홍해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는 표현법이 된다(시 74:13; 77:19-20; 78:13; 사 51:10).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족하되 내 안에서는 나의 십자가로 늘 반복되어지고 계속적으로 증거되어져야 한다. 그것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이다(고전 1:18). 그 구원의 능력을 아는 자가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애굽과 같이 바다의 죽음 속에 던져졌으나 살아난 경험을 가진 그 때에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교회들에서는 ‘누가 찬양할 수 있는가?’ 라고 물으면 당연히 ‘음악성이 있는 자’, ‘노래를 잘하는 자’로 대답 되어진다. 찬양을 할 수 있는 기능성이 고유의 특권을 가진 것으로 성가대가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교인들의 앞에서 노래 잘함을 뽐내고 있다. 음악성에 의해 음악적 법칙에 완벽하게 맞추어진 것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양으로 취급되고 있다. 실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은 구원받은 자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되어지는 것이다(엡 5:19-21; 골 3:16-17).
이제 이스라엘은 이 노래를 통해 자신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가야 할 목적지는 분명히 설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일은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임을 신앙고백으로 찬양에 담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는 용사”라고 부르게 된다(3절). 하나님은 친히 용사가 되셔서 이스라엘을 구하였는데 그 구원은 바다 속에 함께 있던 애굽과 이스라엘 가운데서 어린 양의 피로 불러냄을 받은 새로운 민족을 구별하시고 살리시는 구원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쟁이다. 여호와의 전쟁이란 여호와의 싸움이지 인간의 싸움이 아니다. 다만 그 싸움터의 언저리에 이스라엘을 세워 놓으실 뿐이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부르시는 이유는 여호와의 승리를 곧 이스라엘의 승리로 주시기 때문이다.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원수”란 누구를 말하는가? 7절에서 밝혀주고 있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을 대항하는 자가 아니라 여호와를 거스리는 자가 원수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언약 실현을 막아서고 방해하고 도전하는 것들은 모두가 여호와의 원수인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오직 자기 이름을 위해 싸우시기 때문이다(3절; 시 106:8).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한 바닷가에서 만큼은 애굽이 여호와의 원수인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찬양하고 있는 그들이 여호와의 원수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광야생활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광야로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실 것이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13절).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내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가나안 땅일지는 모르나 실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표는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결한 처소(13절),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17절)가 되게 하시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애굽적 심성을 철저히 공개하시고 폭로하실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애굽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하나님의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애굽과 똑같은 원수였으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비를 누릴 수 있었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순전히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때문에 되어진 것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광야란, 하나님의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하심에 따르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여호와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는지 낱낱이 보게 되는 삶의 현장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나라고 하는 인간이란, 점점 더 거룩해져가고, 고상한 경건을 쌓아감으로 하나님 앞에서 잘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하면 할수록, 성경을 보면 볼수록 내가 그리스도를 대적한 자임을 깨닫게 되어 십자가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게 된다.
우리를 주님께서 자신의 처소(성전)로 삼으신 은혜(고전 3:16; 고후 6:16)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다스림을 구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18절)? 나는 내가 주님의 처소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자인가 아니면 주께서 나를 처소로 삼으신다는 것을 믿는 자인가?
출애굽기 15:22-27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흘길이나 물을 얻지 못하는 길로 인도하셨다. 마침 물이 있는 곳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그 곳의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곳의 이름을 “마라”라고 했다(23절). 그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그렇게 순순히 여호와만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를 존재가 아니었다. 승리의 찬양이 있고난 후 며칠이 못되어서 그들은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다는 이유로 모세를 원망한다. 이 모습이 바로 여호와의 원수된 모습임을 하나님은 보이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시험하셨다고 한다(25절). 여기서 시험했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증명하신다는 뜻이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쓴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한 나무를 지시하시면서 그것을 물에 던지라고 명하신다. 그러니 물이 달아져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나무가 무슨 약의 효험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달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로 나타내셨다(26절).
많은 설교자들은 이 말씀을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왜곡된 해석이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죄악 가운데서 회복시키는 것을 치료하시는 것으로 표현한 곳이 많이 있다(참고 말 4:2; 호 7:1; 사 58:8; 렘 30:17 등). 성경 어디에도 우리의 질병을 무조건적으로 치료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곳은 없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의로움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 때문이었다. 그 피 때문에 그들에게 내려질 재앙이 유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규례를 지켜 순종하면 그들을 치료하시겠다고 하신다. 여기서 계명과 규례는 유월절 규례이다. 즉 유월절에 희생된 어린 양의 피만이 쓴물이 단물이 된 것처럼 이스라엘을 유보된 재앙과 저주 가운데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인간들에게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애굽적인 사고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적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며, 어린 양의 피를 무시하는 사고방식이다.
홍해에서 애굽의 군사들과 같이 전멸될 뻔했으나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이스라엘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회의를 품지 않는 마음이 계속적으로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가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것에 회의를 품지 않는 마음이어야 한다. 참된 주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의 고귀함을 드러내는 교회이다.
출처: 천성을 향하여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 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