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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야 할 부활의 주님
사도행전 9:1-19
제가 머리를 파마했습니다.
기분전환을 위해 파마를 했는데 여러분들 보기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집사람은 파마가 다 그렇다며 별로 이상하지 않다고 하는데 저는 처음해보는 파마라 그런지 볼수록 이상합니다.
여러분, 외모도 이상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신앙이 이상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칫 이상한 모습으로 신앙이 잘못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의 내용이 이상할 때도 있고 신앙의 방향이 이상할 때도 있습니다.
본문에 자기는 잘한다고 하는데 신앙적으로 가장 이상했던 사람이 나옵니다. 사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240킬로미터라고 합니다.
그 먼 거리를 예수 믿는 제자들을 잡아오기 위해 걸어가는 사울의 모습에는 한 마디로 자기 의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기는 율법을 온전하게 지킨다고 생각하였고 예수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전혀 알지 못하고 예수 믿는 자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이단의 괴수이며 그를 따르는 자들을 멸절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자기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원정박해를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을 찌를 듯 한 자기 교만에 빠져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 도상을 걸어가고 있는 사울의 모습에서 이상한 신앙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지 못하고 자기 의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 생각, 자기 뜻, 자기감정에 의해 자기 마음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겸손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교만에 빠져 남을 무시하는 것이 이상한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다메섹 도상을 걸어가고 있는 사울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울을 구원하고 돌이키기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가신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고 슬퍼하며 울고 있는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기쁨을 주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평안을 주셨습니다.
부활의 사실을 믿지 못하는 의심 많은 도마를 찾아오셔서 확신을 주셨습니다.
고기잡이하는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실수를 용서하시고 사명을 주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만의 특별한 내용입니다.
다른 종교는 구원을 얻기 위해 평화를 얻기 위해 문제해결을 얻기 위해 사람이 신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사람이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모세를 찾아오셔서 사명을 주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하셨습니다.
시몬이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베드로를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말씀하셨습니다. (요15:16)
저는 이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하였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을 버리고 떠나갈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의지도 약하고 변덕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택하였다고 하면 주님은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끝까지 믿음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택하시고 붙들어주시고 인도하시는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시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시는 그 사람의 면면을 볼 때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찾아간다고 하면 우리는 믿을만하고 능력 있고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은 그 반대의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자신을 배반하고 가장 필요할 때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했던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특별히 어린 계집 종 앞에서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찾아올만한 자격이 없고 가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보다 더한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교를 박해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했던 원수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 열심히 얼마나 특심했는지 외국까지 가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오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7집사 가운데 한 명인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울을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 심지어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조차도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작용했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줄 압니다.
사울은 나중에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표현했는데 이 말은 괴수와 같은 나도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괴수도 용서받고 구원을 받았다면 다른 사람이야 더 쉽게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사랑의 주님을 우리는 나의 주님으로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믿고 영접할 때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울이 이렇게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미워하고 그들에게 분노가 가득했을까요?
사울은 스스로 고백했듯이 이스라엘 백성이요 베냐민 지파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에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율법에 철저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 자기에게 자신의 신앙과 생각을 무너트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그들이 바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예수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구세주이며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고 그 후 승천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지금까지 믿고 있었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사울의 신앙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자신이 믿는 신앙을 뒤흔드는 그들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던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박멸할 생각으로 이렇게 심하게 핍박을 가하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사울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을 때 그는 잘못된 길을 돌이키고 새로운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권세와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누구도 정복하지 못했던 죽음의 권세를 우리 주님은 이기시고 정복하셨습니다.
그 주님에게 정복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으며 어떤 문제들도 다 정복되고 해결될 줄 믿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믿으시고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음을 믿으시고 그 주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사람만은 예수를 안 믿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시고 능력을 베푸시면 그 앞에 고꾸라지고 예수님을 믿게 될 줄 믿습니다.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시면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새로운 길을 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얼마든지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은혜를 위해서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힘써야 할 줄 믿습니다.
사울을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은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고 물으십니다.
여기에서 사울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먼저 자기 이름을 부른 것에 놀랐을 것이고, 생생하게 들려오는 거역할 수 없는 거룩한 힘에 압도당하여 놀랐을 것입니다.
사울이 깜짝 놀라서 ‘주여 누구십니까?’ 묻습니다.
그때 주님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에서 사울은 예수라는 사람이 이미 죽은 지 십여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 계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오늘 사건을 근거로 나중에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증인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넣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을 찾아오신 부활하신 주님은 찾아오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를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아나니아 제자를 보내서 사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사명을 주시고 성령을 받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아나니아를 찾아 사울을 찾아가라고 했을 때 사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알았던 그는 깜짝 놀랍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그가 여기에 온 것도 우리를 잡아 가두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를 향하여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심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줄 믿습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도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에는 사명이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요즘 백세인생이라는 노래가 유행하고 어디를 가나 이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그만큼 모두가 장수에 관심이 있고 백세까지 살고 싶다는 바람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와서 ‘선생님, 저는 100살까지는 꼭 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100살까지 살 수 있을까요?’ 상담을 하였습니다.
의사가 담배를 피우느냐? 술을 좋아하시냐? 음식을 어떻게 드시느냐? 묻습니다.
이 사람은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음식도 적당하게 먹고 잠도 일찍 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의사는 그러면 100세까지 살 것 같다고 이야기하면서 한 가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래 살고 싶어 하십니까?’
여러분, 우리도 왜 오래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까?
물론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살아야 하는 목적, 삶의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장수의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100세까지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우리가 100세 인생을 산다고 해도 별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우리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는,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16절에서 주님은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받을 고난도 각오해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듯이 고난 없이 열매도 없고 고난 없이 사명을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두 번째는, 주님의 살아계심을 경험으로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아나니아를 보내서 사울의 눈먼 것을 뜨게 하였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이 머무는 집에 들어가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신다.” 하며 안수했을 때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이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이제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나니아를 통하여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부활의 주님이 이제는 자신을 통해 많은 역사를 이루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도 이런 능력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주님의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안수하며 눈을 뜨게 했을 뿐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하며 성령의 충만을 명했습니다.
사울은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었고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울은 그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다메섹 도상의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울을 찾아오신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 여러분들을 찾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생각, 내 뜻, 내 고집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의 거룩한 뜻과 사명을 저버리고 내길 만을 고집하며 주님을 아프게 하는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그런 우리를 찾아오셔서 주님은 우리의 삶을 바르게 하고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야 할 사람들입니다.
잘못된 것에 열심을 내는 모습에서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에 열심을 내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다메섹 도상의 주님을 만나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울을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이 오늘 우리들을 찾아오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