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모리슨 – 빌러비드
사랑받지 못한 자들을 사랑받은 이들이라 부르리
“<빌러비드>는 토니 모리슨의 다섯 번째 소설이며, 또 한 번의 빛나는 개가이다. 진정 모리슨 여사의 다재다능함과 기교적․정서적 측면을 아우르는 반경은 끝을 모르는 듯하다. 현대 미국에서 동세대들 사이에, 아니 세대를 초월해 출중한 소설가로서 그녀의 위상에 대해 일말의 회의라도 있었다면, <빌러비드>는 그런 의심을 잠재우고도 남는다. 딱 네 마디로 이 작품을 표현한다면,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걸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상은 <시녀 이야기>의 작가 마가렛 애트우드가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서평에서 <빌러비드>에 대해 바친 지고의 찬사이다. 그리고 <빌러비드>는 걸작을 만난 흥분감이 고스란히 배어나는 동료의 이 열렬한 칭찬 한마디 한마디가 결코 무색하지 않은 수작이다. 그만큼 토니 모리슨의 소설 세계에서 <빌러비드>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과연 수려한 문체와 풍요로운 은유, 물오른 마술적 리얼리즘의 비전, 모리슨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여타의 특징들이 절정의 기교를 자랑하며 물 흐르듯 매끄럽게 풀어내는 장인다운 걸쭉한 이야기 솜씨로 이음새 하나 없이 짜여, 읽어나가다 보면 머리는 차갑다 못해 시리게 식어 정신이 번쩍 들고, 한편으로는 심장은 뜨겁게 달아오르다 못해 욱신욱신 아파온다. 냉철하고 비판적인 현실 인식이며 인간과 역사를 해부하는 현인다운 통찰이 얼핏 차가울 정도라면, 그 정서는 삶을 추동하는 힘이 뜨겁고 붉게 맥동하는 심장임을 잊지 말라는 듯, 끈적끈적하도록 진한 살 냄새로 지독하게 독자를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소설이 끝날 때쯤이면 독자는 녹초가 될 지경이 된다. 물론, 보람찬 피로감이긴 하지만 말이다. 머리와 심장을 한꺼번에 움직이는 소설이라니, 이것만으로도 20세기 후반에 흔치 않은 성과가 아닌가. 그리고 이것이 바로 토니 모리슨 문학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사회와 역사를 생각하되 사람을 결코 잊지 않고, 한없는 애정으로 사람을 보되 감상에 휘말리지 않으며, 주장하고 외치되 시詩를 결코 버리지 않는 것. 화합할 수 없는 것들을 화합시키고 다층의 결로 아름답게 공존하게 만드는 꿈. 개인의 인생사와 역사가 뿌리 끝까지 유장하게 얽혀들고, 사람과 사람들의 운명이 넝쿨처럼 얽혀들고, 이승과 저승마저 끝을 알 수 없이 어우러지는 이 소설은 마치 한판의 어지러운 살풀이 굿 같다.
이러한 특징들은 토니 모리슨 소설 세계 전반에 걸쳐 드러나고 있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이 소설을 ‘살풀이 굿’이라 비유하는 건 여러 차원에서 의미를 지닌다. 일단 이 소설은 말 그대로 죽은 자의 원혼을 달래어 저 세상으로 돌려보내고 산 자들이 삶다운 삶을 회복하는 골조를 지니고 있다. 정말로 산 자에 붙어 괴롭히는 귀신의 이야기이고, 나중에 촛불과 십자가를 든 여인네들이 모여들어 정말로 한판 굿을 벌여 귀신을 저세상으로 쫓아버리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귀신의 아픔을 달래고 보듬어서 저승으로 돌려보내는 ‘살풀이’인 셈이다. 그리고 이 아기 귀신의 한은 곧바로 미국 흑인들의 악몽 같은 종족의 한으로 이어진다. 비교적 현대의 문제들을 천착하던 전작들과 달리 <빌러비드>는 남북전쟁 직후로 돌아가 노예제와 노예제가 남긴 시뻘건 상처들의 뿌리를 캐고 끔찍했던 과거의 악몽에 직면함으로써 미국 흑인 종족사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빌러비드>가 자리하고 있는 종전 직후, 소위 ‘재건시대’라 불리던 이 시기는 인간이 아닌 사유재산으로 살아가다가 처음으로 삶을 찾고 정체성을 찾아야 했던 미국 흑인들에게는 결정적인 시기였다. 어느 날 문득, 베이비 석스처럼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심장 박동 소리를 실감하고, 폴 디처럼 살기 위해 담배 깡통으로 대신했던 ‘빨간 심장’을 원하든 원치 않든 되찾게 된 흑인들에게 찾아온 건, ‘어느 집이든 서까래까지 꽉꽉 들어찬’ 과거의 원혼들과 시커먼 무덤처럼 입을 벌린 시뻘건 상처의 기억이었으니. 따라서 과거의 아픔을 끊임없이 ‘재기억’하고 치유하는 일은 어쩌면 미래를 바라보기 위한 절명의 과제였을 터이다.
이 소설에서 회상과 반추가 서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재기억(rememory)’이란 낯선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건 아마 그런 이유일 터이다. ‘기억(memory)’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집요하고, 훨씬 더 끈질긴 과거.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결코 돌아가서는 안 될 과거의 뼈아픈 기억들을 다시 반추하고, 또 반추함으로써 근원까지 치유하리라는 결연한 의지. 그것이 바로 ‘재기억’의 의미인 것이다. 아름다운 플라타너스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젊은 청년들의 시체, 어느날 물속에서 건져 올린 머리카락과 살점이 아직 붙어 있는 흑인 소녀의 빨간 리본, 등짝에 벚나무처럼 가지를 뻗은 피 묻은 채찍의 흔적, 헛간에 갇혀 백인 부자에게 날마다 강간을 당하던 악몽, 쇠재갈을 입에 물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던 수탉의 비웃는 듯 한 시선, 불에 바삭바삭 타오르면서도 탈출한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미친 듯이 승리의 웃음을 웃어대던 친구의 새카맣다 못해 푸르른 얼굴, 세상 누구보다 다정하던 아름다운 남자가 미쳐 제 얼굴에 엉긴 버터를 처바르던 모습. 조지아나 주 앨프리드 수용소의 참담한 기억.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기억하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집단 박해의 증거들을 하나하나 맞닥뜨리며 종족의 한을 풀고 보듬는 치유의 작업.
이렇게 볼 때 서사의 중추가 되는 충격적인 영아 살해 사건이 허구가 아니라 실화라는 점은 더더욱 의미심장하다. 바로 1856년 마가렛 가아너라는 흑인 여자 노예가 탈출한 지 하루 만에 노예 사냥꾼들에게 쫓겨 붙들릴 위기에 처하자, 가장 사랑하던 막내딸의 목을 단칼에 베 죽이고 나머지 아이들까지 살해하고 자살하려다가 붙들린 사건이다. 이는 당시 ‘노예제도의 비인간성’을 가장 널리 알린 유명한 사건이었는데, 이때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백인 인권운동가 리바이 코핀Levi Coffin이 바로 보드윈의 실제 모델이었다. 게다가 시이드와 마가렛 가아너의 연관성은 여러 모로 시사된다. 시이드의 성이 직접 드러나는 대목은 없지만 적어도 폴 디의 성은 가아너이기 때문이다. 가아너는 시이드와 폴 디를 소유하고 있던 스위트 홈 농장주의 이름인데, 당시 노예들은 농장주의 이름을 따서 성을 얻게 되었음을 생각해보면 시이드 역시 성이 가아너임을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다. 게다가 마가렛 가아너에게는 시이드와 마찬가지로 두 딸과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했듯, 충격적인 이 소재를 다루는 토니 모리슨의 성숙한 시각은 센세이셔널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시이드의 참혹한 행위를 미화하려는 시도도 전혀 하지 않고, 사건의 감상적 측면을 부풀리려는 시도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사건을 짊어지고 삶을 살아내야 하는 시이드의 인생을 끝끝내 지켜보고, 끔직한 죄과를 치르게 만들고, 또 그런 일을 왜 저질렀는지 시이드로 하여금 변명할 기회를 주고, 그런 과거를 지니고도 미치거나 죽어 버리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그녀의 강인함에 찬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고, 독자들이 결국 그녀를 경외하면서도 사랑하게 만듦으로써 단순한 도덕적 판단이나 감상적 연민을 훌쩍 뛰어넘어버리는 비범한 통찰을 획득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기를 죽인 시이드는 결코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며, 어찌 보면 자신을 소유했던 노예주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 셈이다. 아기를 자신과 독립된 생명체로 보지 않고, 이유야 어찌되었건 그 삶의 기회를 무참히 박탈한 셈이니까. 빌러비드가 훗날 시이드의 자아를 무참히 잠식하며 괴롭히는 건 이러한 시이드의 잔인하고 오만한 측면에 대한 응징으로 볼 수 있는데, 그에 대한 엘라가 ‘공평하다고 다 옳은 일은 아냐’라고 말하며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태도는 토니 모리슨의 균형 잡힌 시각을 잘 보여준다. 역시 충격적인 실화를 골조로 했던 <재즈>에서도 그러했듯, 짤막한 뉴스 클리핑의 풍요로운 행간을 읽어내 관련인물들의 지난했을 인생의 서러움과 고통, 그리고 담담한 인고와 화해로 채워 넣는 모리슨의 다채로운 상상력은 언제나 섬뜩한 비극을 냉철하게 바라보면서도 결국은 상처를 보듬고 마음의 위안을 주는 휴머니즘으로 귀결되곤 하니까.
이렇게 보면 <빌러비드Beloved>라는 제목이 지닌 겹겹의 의미결을 조금쯤 이해할 것도 같다. ‘사랑받은 사람’이라는 제목에 토니 모리슨이 꿈꾸는 세상에 대한 단초가 들이 있기 때문이다. Beloved는 일차적으로 시이드가 제 손으로 죽인 딸의 무덤에 석공에게 몸을 팔아 새겨주는 ‘사랑했던 내 아기(Beloved)’라는 일곱 글자다. 제 손으로 죽인 아이의 묘석에 ‘사랑했었다’라고 새기고 싶은 시이드의 마음. 그 앞에 ‘한없이(Dearly)’라는 글자를 더 새기지 못해 항상 아쉬워하는 어미의 마음, 그 사랑이 그 아이의 목을 따고 언니의 시뻘건 선혈과 젖을 섞어 동생에게 먹이게 만든 잔혹한 결의로 어그러지게 한 건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에서 노예제는 바로 자연스러운 ‘사랑’, 바로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벽이기 때문이다.
사고나 죽음이 아니라, 그냥 일상적인 법적 절차를 통해 가족들은 찢어지고, 사랑하는 이들은 죽음을 맞는다. 가아너 부부는 소위 ‘인도적’인 노예주였지만, 그래도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자 당연하다는 듯 폴 에프부터 팔아치워 형제들과 생이별을 시킨다. 할리에게 베이비 석스의 자유를 사줄 수 있겠지만, 정작 베이비 석스는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자식과 헤어져야 했다. 분명 이는 개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사회가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체제의 문제다. 그래서 엘라는 갓난아이에게 매달리는 시이드를 보고 죽을지도 모르니까 ‘절대 아무 데도 사랑을 주지 말라’고 한다. 폴 디 역시 시이드에게 제 아이에게 저렇게 위험스럽게 집착하다니, 그래서야 사랑했던 이가 시체 포대에 들어가고 허리가 꺾이고 나면 다음 사람에게 줄 애정이 남아 있겠나 걱정한다. 폴 디 자신 가슴에 심장 대신 담배 깡통을 파묻고, 그 사실을 곁에 있는 여자에게 들키지 않을까 걱정하고, 베이비 석스의 펌프처럼 사랑을 길어 올리던 심장마저 끝내 지쳐 움직임을 멈추고 무해한 색채에만 탐닉하게 되어버린다. 식소가 30마일을 걸어 다니며 사랑하는 여자와 만나고 합일하는 것은, 거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보일 지경이다.
흑인들에게 공동체적 애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노예제는 결국 흑인의 인간다움 자체를 부정한다. 이 때문에 시이드의 무자비한 잔혹 행위는 역설적으로, 흑인의 야만성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성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애정에 대한 집착에 기인한다. 하지만 결국 구원의 가능성 또한 ‘사랑’에서 온다. 베이비 석스의 사랑을 잊지 않은 흑인 공동체의 구원의 손길 그리고 ‘네 발 달린 짐승’이나 하는 짓이라며 시이드를 비난하고 떠났던 폴 디가 다시 돌아와 시이드 자신이야말로 소중하다고 말해주는 것. 이로 인해 ‘사랑받은 아기’라는 Beloved는 ‘사랑받은 사람들’이라는 복수 명사로 확장되고, 모리슨이 제사題辭로 쓰고 있는 로마서의 말씀, ‘사랑받지 못한 자들을 사랑받은 이들이라 부르리라’의 종족사적 맥락을 포괄하게 된다.
그래서 <빌러비드>는 근본적으로 러브스토리다. 할리와 시이드의 사랑, 빌러비드와 시이드의 사랑, 시이드와 폴 디의 사랑, 시이드와 베이비 석스의 사랑, 할리와 베이비 석스의 사랑, 식소와 30마일 여인의 사랑, 베이비 석스와 남편의 사랑, 베이비 석스가 지녔던 손주들에 대한 사랑, 나아가 덴버와 넬슨 로드의 사랑……. 그저 소박하게, 사람들이 한없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세상의 모든 장벽들을 뛰어넘어 사랑받지 못한 자들을 사랑받은 이들이라 부르는 것, 하지만 결코 말처럼 쉽지 않은 꿈, 그것이 바로 <빌러비드>의 비전이다.
<옮긴이 김선형>
첫댓글 빌러비드를 잘 설명한 글이네요. 정의윤 선생님이 이 글을 짧게 요약하여 모임 때 말씀을 해 주시면 안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