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 싸움
이번에는 명당싸움으로 200년을 지속한 집안 이야기입니다.
청송 심씨와 파평 윤씨의 명당 싸움은 200년간 계속 진행되고 있다가, 1969년에 드디어 화해를 합니다.
이처럼 명당에 대한 후손들의 집념은 대단합니다.
심지어는 대통령이 되고자 묏자리를 옮겼더니 당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 數 채우려고 태어나면 안 됩니다.
늘 겸허한 자세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1969년 7월.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대표가 만난 자리에 파주 군수와 파주경찰서장 등이 입회한 가운데 다음과 같은 화해증서가 작성됩니다.
“파주군 광탄면 분수리에 소재한 파평 윤씨의 선조 문숙공 분묘에 청송 심씨의 선조 만사 상공 분묘가 압뇌(壓腦)돼 있어 윤·심 두 성 사이의 송사가 수백 년에 걸쳐 계속돼왔는데, 두 성 사이의 세혐(두 집안 사이에 대대로 내려오는 미움과 원한)으로 인한 분쟁을 종식하기 위해 양가의 대표가 이 증서를 작성, 각각 보관하기로 한다.”
문숙공과 만사는 누구인가?
문숙공은 저 유명한 고려의 명장 윤관(1040~1111년)으로 문하시중을 지냈고,
만사는 심지원(1593∼1662)으로 효종 임금 당시 영의정을 지낸 청송 심씨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입니다.
두 사람의 생존 연대가 500년 넘게 차이 나는데 후손들 사이에서 분쟁이 생긴 까닭은 무엇일까요?
직접적인 계기는 윤관 장군과 영의정 심지원의 무덤이 같은 산줄기에 몇 m 사이에 두고 있게 된 데 있답니다.
1111년 윤관 장군이 죽자 ‘파평현 분수원 북간원(北艮原)’에 안장되어 조선 초기까지는 묘지가 잘 관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중기에 들어서 금산(禁山)제도가 도성 100리 까지 확대되면서 일반인들이 이곳을 출입할 수 있는 길이 막히고,
그 후 거듭된 전란(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정묘호란)으로 윤관 장군의 묘가 실전(失傳)돼버린 것입니다.
(壬辰倭亂은 1592년 3월15일에서 1596년 9월2일 휴전협정. 丁酉再亂은 1597년 1월13일 재침략, 1598년 11월18일 종결, 이순신 전사, 시마스 도주, 고니시 도주. 종결과 함께 이순신장군도 사라집니다.丁卯胡亂은 1627<인조5년>1월 중순에서 3월초, 2개월 전쟁, 속전속결, 후금이 쳐 내려와 형제 국으로 정함. 丙子胡亂은 1636년12월에서 1697년1월로 역시나 청나라의 조선에 對한 2차 침입으로 2달 만에 조선의 굴복으로 끝난 조선 역사상 가장 큰 폐전중의 하나입니다.)
(失傳; 묘지, 고적 등 전해 내려오던 것이 중도에서 없어져 알 수 없게 됨)
윤관은 여진족을 소탕하고 국경을 확장한 명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풍수에서도 당대 최고였답니다.
그의 대표적 업적은 바로 현재의 경복궁 터를 도읍지가 될 만한 땅으로 소점한 것입니다. 1101년 9월 남경을 설치할 터를 물색하라는 고려 숙종의 명을 받은 윤관은 한양 일대를 살핀 뒤 다음과 같은 계를 올립니다.
“양주군 노원역과 해촌, 용산 등 여러 곳에 나가 산세를 살폈으나 도성으로 적당하지 아니하고, 삼각산 면악(북악) 남쪽을 보니 산 모양과 수세가 옛 문헌과 부합됩니다.
주산 줄기에 중심을 정하고 큰 맥에 임좌병향(壬坐丙向·남향)이 되도록 지형에 따라 도성을 건설할 것을 주청 드립니다.”
숙종은 윤관 장군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로 하여금 5년에 걸친 도성 축조를 지휘하게 합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기 300년 전의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서울의 밑그림과 기초는 윤관 장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풍수의 대가인 윤관이 자신의 무덤 터로 정한 곳이라면 당연히 풍수적으로 좋은 자리라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는 법입니다.
아쉬운 점은 전쟁이 일어나 자기묘가 실전되리고는 꿈에도 몰랐으니 먼 미래까지 보기에는 무린가 봅니다.
윤관 장군 묘 바로 몇 m 위에 있는 영의정 심지원의 무덤 자리는 또 어떨까요.
심지원은 조선 효종 임금 때 영의정에 올랐을 뿐 아니라, 그의 아들 심익현이 효종의 딸 숙명 공주와 결혼해 효종과는 사돈관계였습니다.
효종이 죽자 심지원이 총호사의 직책으로 국상을 주관하면서, 효종의 능 자리 선정에 고산 윤선도를 추천할 정도로 풍수에 탁월한 식견을 가졌습니다.
고산 윤선도는 훗날 정조 임금에게서 신안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라는 칭찬을 받은 최고의 풍수 고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심지원이 자기 조부모와 자신의 무덤 자리를 윤관 장군 무덤 바로 위에 잡은 것입니다.
윤관과 심지원 모두 이 땅이 명당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고수가 고수를 아는 법입니다.
그리고 예전의 학자들은 사주, 명리, 풍수에 조예가 매우 깊었습니다.
심지원이 이곳에 안장된 지 90년쯤 후, 윤관 장군의 후손이 실전된 조상의 무덤을 찾아다니던 끝에 드디어 그 자리를 찾아냅니다.
그때부터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문중은 서로 기득권을 주장하며 다투기 시작했답니다.
영조 임금이 분쟁 조정에 나섰지만 실패했답니다.
일제강점기까지 두 집안의 분쟁은 계속되었으며, 두 문중 간의 감정의 골 역시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그러니 상대 문중과 결혼을 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969년에야, 분쟁은 윤관 장군과 영의정 심지원의 무덤 사이에 곡장(曲墻)을 두르고 화해증서를 쓰는 것으로 종식이 됩니다. 그야말로 200년 만의 화해였습니다.
족보를 보다 보면 유난히 사돈관계가 빈번한 성씨가 있는가 하면 전혀 상종도하지 않는 성씨들이 보입니다.
그것이 알게 모르게 꺼리는 집안들끼리의 혼사이기도 합니다.
원수랑 결혼이 쉽지 않은 법입니다.
요즘 같은 핵가족시절에는 색시라고 데리고 왔는데 가까운 친척 딸일 수도 있습니다.
서로의 왕래가 끊기다 보니 종종 발생하는 울고 싶은 일들입니다.
명절에는 해외여행이다, 밖으로만 돌지 말고 고향, 친척, 친구들도 좀 찾아 볼일입니다.
그래야 근친결혼을 막을 수 있답니다.
아무렴 사자보다는 현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메리 추석.^^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아~ 역시~~~ 파평윤씨~~ ㅋㅋㅋ
예전에 어느프로에서.. 박사마을이라고 소개된 마을이 있었드랬는데...풍수지리가님이 아주 좋은 명당이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정말 명당이 있기는 있구나..했었어요..
정말 육촌이상이면 얼굴도 잘모르는경우가 허다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