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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 목 |
요,순시대 9년 홍수 |
노아 홍수 |
홍수 발생 |
요임금61년(서기전2297), 곤이 치수를 맡았으나 실패함 (『죽서기년』,『서전』)
단군성조 50년(서기전2284), 단군조선에 홍수 발생. 풍백 팽우의 치수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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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2348년에 발생 (『구약』「창세기」) |
치수(治水) |
요임금 86년 (서기전 2272), 우가 치수 성공함(『죽서기년』)
단군성조 54년(서기전 2280), 치수를 마친 뒤 마리산 참성단에서 친히 천제올림(『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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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동안 홍수 계속됨. 땅이 물에 잠겨 377일만에 노아 가족이 방주에서 나옴 |
홍수 범위 |
요의 당나라와 단군의 고조선 전역(만주,한반도,중국본토)에 홍수가 범람함.
4천3백년전 당시의 9년 홍수 사건은 한,중고대사에서 너무도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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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족(8명)과 각 동물 한 쌍씩만 살아남고 전세계 인류가 전멸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발굴자료들에 의하면, 노아홍수 이전과 그 이후에도 고유문화를 가진 민족들이 지구촌 곳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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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 증거 |
최근에 하나라 수도 양성 일대의 중국 하남성 등봉현에서 홍수로 파괴된 흔적이 심한 4천여년 전의 하나라 성벽 유적이 발견됨. (중국 고고학 잡지 『문물』)
강화도의 마리산 참성단은 홍수가 일어난 다음해인 단군성조 51년에 운사 배달신에게 명해 장정 8천명을 동원하여 축조한 제천단 유적이다.
단군성조께서는 치수를 마친뒤 삼신상제께 천제를 올렸다.(서기2280년)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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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아라랏산은 터키 동북부의 아르메니아 지방에 있는 산이라고 한다.
창세기 원문에는 ‘아라랏산들’로 돼 있다. 히브리어에 아라랏은 ‘높은지방’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최근에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와 키쉬에서 대홍수로 생긴 점토층이 발견되었고, 화라,니느웨,월카 등 근동지역의 지층에서 충적된 점토층의 홍수유적을 발굴하였다. |
홍수 설화의원형 |
-치수 성공에 얽힌 역자적 배경 요,순이 9년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
단군성조께서는 재위 67년(서기전 2267)에 부루태자를 파견하여 도산회의에서 홍수를 다스리는 ‘오행치수법(금간옥첩)’을 전수해 마침내 우가 치수에 성공하였다.
『태백일사』와 중국의 『오월춘추』『역대신선통감』에서는 우가 금간옥첩을 전수받고 치수에 성공하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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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시 서사시의 홍수 설화- 신들(아누,엔릴 등)에 의해 홍수가 계획되고, 에아신이 우트나피쉬팀에게 미리 계시해주고,
홍수가 6일 주야로 계속되어 7층의 배를 건조하여 몇 가족과 짐승들을 태우고 니시르산에 상륙하여 비둘기,제비,까마귀를 내보내고,
홍수가 끝난뒤 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출토된 점토판 문서의 기록.)
창세기의 노아홍수 설화는 바빌론의 길가메시 서사시의 홍수 설화에서 영향받은 것이며, 바빌론의 홍수설화는 수메르의 홍수설화에서 나온 것임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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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론 |
노아 홍수와 요,순시대 9년 홍수는 거의 동시대에 발생한 전세계적인 홍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4천 3백년 전, 당시의 세계적인 대홍수는 고고학의 홍수층 발굴로도 입증되고 있다. 또 브룩스가 제시한 지난 8천년간 세계의 「우량변화표」에서는 서기전 2100~2000년을 전후해서 급격한 우량의 증가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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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임금이 단군왕검을 알현하는 구절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에는 9년 홍수 때 단군왕검이 순임금에게 치수治水법을 전한 이야기와 낭야성에 분조分朝를 두어 대륙 내의 구려九黎를 통치한 이야기가 나온다.
及九年洪水하야 害及萬民故로 檀君王儉이 遣太子扶婁하사 約與虞舜으로 招會于塗山하실새 舜이 遣司空禹하야 受我五行治水之法하고 而功乃成也라. 於是에 置監虞於琅耶城하야 以決九黎分政之議하니 卽書所云 東巡望秩肆覲東后者가 此也라. 辰國은 天帝子所治故로 五歲에 巡到琅耶者一也오 舜은 諸侯故로 朝覲辰韓者四也라.
9년 동안 홍수가 일어나 그 재앙이 만민에게 미치므로 단군왕검께서 태자 부루를 보내어 우나라 순임금과 약속하게 하시고, 도산회의를 소집하셨다.
순임금이 사공 우를 보내어 우리의 오행치수법을 받아 치수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때 감우소(監虞所: 우순의 정치를 감독하던 곳)를 낭야성琅耶城에 설치하여 구려九黎 분정에서 논의된 일을 결정하였다.
<서경>에 이른바 “순임금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멀리 산천을 바라보며 제사 지내고, 동방 천자를 알현하였다(東巡望秩 肆覲東后)” 라는 구절은 바로 이 내용을 말한 것이다. 진국辰國(단군조선)은 천제天帝의 아들이 다스리므로 5년에 한 번 낭야를 순행하였으나, 순은 제후이므로 진한에 조근朝覲한 것이 네 번이었다.
<서경>의 ‘동순망질 사근동후(東巡望秩 肆覲東后)’ 라는 구절은 [서경]<우서>의 ‘순전舜典’에 나온다. 東巡守至于垈宗, 柴, 望秩宇山川, 肆覲東后
(순임금이) 동쪽 지역을 순수하여 태산에 이르러 시柴 제사를 지내고 산천을 바라보며 차례대로 제사한 뒤 마침내 동방의 천자를 찾아뵈었다. 여기서 동후東后는 결코 제후가 아니다. 그런데 중국 사가들은 한결같이 동후를 ‘동방의 제후(東方之諸侯也)’ 라 해석하여 왔다. 또한 요즈음 나오는 <서경> 번역서들도 모두 중국 측 억지 해석을 그대로 추종하는 한심한 실정이다.
여기서 ‘후后’ 자는 <강희자전>에서 밝힌 것처럼 군주君主를 지칭하는 말이지 제후를 말한 것이 아니다. <강희자전>에서는 “后 : 君后. 我后. 夏后. 夏言后者. 白虎通云 : 以揖讓受于君, 故稱后, 告于皇天后土” 라고 하였다.
또 ‘근覲’ 자는 ‘하현상下見上’, 즉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문안 드린다는 말이다.
<강희자전>은 “천자가 즉위하면 제후들이 북면하여 천자께 알현하는 것을 일러 근覲이라 한다(天子當依而立, 諸侯北面, 而見天子曰覲)” 라고 하였으니, ‘제후인 순임금이 그 종주국의 천자인 단군왕검을 알현하였다’ 는 것이 <서경> ‘사근동후’ 의 본 뜻이다. 그러므로 “동방의 제후를 찾아뵙다” 라고 한 중국측의 해석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한 아전인수 격의 억지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서경>의 ‘동순망질 사근동후(東巡望秩 肆覲東后) 구절이야말로 고대 韓中 관계사를 사실 그대로 극명하게 밝힌 매우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여기서 <서경> 본래의 뜻을 살려 원문을 해석하면, “순임금이 요임금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뒤에 차례로 천신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동방의 천자이신 단군왕검을 찾아뵈었다(肆覲東后)” 가 된다.
‘진국辰國’과 관련하여
진국辰國에서 ‘辰’은 ‘신’ 으로도 발음하는데 ‘大, 上’의 뜻이다. 단군조선의 三韓을 합하여 말하면 진국이고 나누어 말하면 삼한이다. [삼국지]<한전韓傳>에는 “진한은 옛적의 진국이다(辰韓者, 古之辰國也)” 라고 하였다.
삼한의 한韓은 국명이자 관명官名으로, 한汗(王 = 韓)과 통한다. 삼한三韓 중 진한은 단군(天王 = 辰王)이 직접 통치하고, 마한과 번한은 부단군 격인 왕을 두어 다스렸다. 여기서 말하는 진국辰國은 ‘대국大國, 상국上國, 또는 종주국’ 이란 뜻이다.
番韓 初代王 蚩頭男
번한 초대왕 치두남
於是에 檀君王儉이 擇蚩尤後孫中에 有智謀勇力者하사 爲番韓하사 立府險瀆하니 今亦稱王儉城也라 蚩頭男은 蚩尤天王之後也라 以勇智로 著聞於世러니 檀君이 乃召見而奇之하사 卽拜爲番韓하시고 兼帶監虞之政하시니라.(太白逸史 三韓管境本紀 番韓世家 上)
이때 단군왕검께서 치우천황의 후손 중에서 지모와 용력이 뛰어난 자를 택하여 번한 왕으로 임명하고 험독險瀆에 수도를 세우시니, 지금은 왕검성이라 칭한다. 치두남蚩頭男은 치우천황의 후손이다. 용맹과 지혜로 세상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단군께서 불러 만나 보시고 기특하게 여겨 곧 번한 왕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우순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셨다.
요수 일대에 12성을 쌓았다.
庚子에 築遼中十二城하니 險瀆, 令支, 湯池, 桶道, 渠鄘, 汗城, 蓋平, 帶方, 百濟, 長嶺, 碣山, 黎城이 是也라. 頭男이 薨하니 子琅耶가 立하니라. 是歲庚寅三月에 改築可汗城하야 以備不虞하니라.
可汗城은 一名琅耶城이니 以番韓琅耶의 所築故로 得名也라.
경자(단기 33, BCE 2301)년에, 요수 주위에 12성을 쌓으니 험독險瀆, 영지令支, 탕지湯池, 용도桶道, 거용渠鄘,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 장령長嶺, 갈산碣山, 여성黎城이 그것이다.
치두남이 세상을 뜨자 아들 낭야(琅耶2세 왕)가 즉위하였다. 이 해 경인(단기 83, BCE 2251)년 3월에 가한성可汗城을 개축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야성琅耶城인데, 번한 왕 낭야가 쌓았으므로 낭야성琅耶城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甲戌(갑술)에 太子扶婁(태자부루)가 以命(이명)으로 왕使塗山(왕사도산)할새 路次琅邪(노차낭야)하야 留居半月(유거반월)하야 聽聞民情(청문민정)하니 虞舜(우순)이 亦率四岳(역솔사악)하야 報治水諸事(보치수제사)하니라 番韓(번한)이 以太子命(이태자명)으로 令境內(영경내)하야 大興경堂(대흥경당)하고 병祭三神于泰山(병제삼신우태산)하니 自是(자시)로 三神古俗(삼신고속)이 大行于淮泗之間也(대행우회사지간야)라.
갑술(단기 67, BCE 2267)년에, 부루태자가 명을 받고 특사로 도산에 갈 때 도중에 낭야에 들러 반 달 동안 머무르며 백성의 사정을 묻고 들었다. 이때 우순이 사악四岳을 거느리고 치수에 대한 모든 일을 보고하였다. 번한 왕이 태자의 명으로 경내境內에 경당을 크게 일으키고, 아울러 태산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이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지역 일대에서 크게 행하여졌다.
중화주의 사관으로 쓴 역사서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홍범구주(洪範九疇)편에는, 우禹가 치수를 맡으니 하늘(天)이 우禹에게 홍범구주등을 내리어 치수에 성공하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고 오월춘추 월왕 무여 외전에는, 우(禹)가 꿈에 붉게 수놓은 옷을 입은 남자를 보았는데, 그 남자가 "나는 현이의 창수사자이니라"하였으며, 이후 우는 3달동안 목욕재계를 한 후 산에 올라 금간옥서를 얻었으니 이 책은 치수법을 적은 요결이라 기록하고 있다.
사공 우禹가 금간옥첩을 받아간 것과 관련된 기록은 [오월춘추],[역대신선통감],[응제시주],[세종실록],[동국여지승람],[동사강목],[묵자] 등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중국이 중화주의 사관으로 쓴 오월춘추는 부루태자를 창수사자라 말하며 은인의 실체를 감추었고 또한 창수사자가 우의 꿈에 나타나 비법을 알려준 것으로 기록하여 우가 순전히 자신의 현몽으로 국난을 해결한 것으로 왜곡하였다.
조선시대의 [응제시주]와 [세종실록지리지]는 ‘우禹가 도산에서 제후들과 회동할 때 태자 부루태자를 보내 조회하게 하였다’라고 하여 단군조선이 오히려 중국의 속국이었던 것처럼 주객이 전도되게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