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9-10
글. 사진_김용범 / 시인, 문학박사
갱갱이. 강경을 그곳 사람들은 갱갱이라고 부른다. 강경으로 흘러드는 금강 줄기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여각, 객주, 상선을 갖춘 거상들로 번성하던 곳이다. 강경은 원산항과 함께 2대 포구(浦口)였고 평양, 대구와 함께 조선말 전국 3대 시장으로 손꼽히던 곳이다.
봄과 여름이 바뀌는 성어기(成魚期)인 3~6월의 4개월 동안은 하루에 100여 척의 배가 드나들었고 서해에서 나오는 조기, 갈치는 전국 물량이 모두 여기로 입하되었다고 한다. 민어, 홍어, 새우 등 서해의 각종 해산물이 이 곳에서 전국 각지로 공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농산물, 포목시장도 호남 제일의 규모를 자랑했다.
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에서도 강경은 육로와 수로의 장삿길이 이어지는 번성한 곳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지금은 옛날의 번영은 사라지고 만 곳이다. 가을이면 젓갈열차가 강경 역에 도착하고 곳곳에 들어선 젓갈 상점들이 그 이전 번성했던 강경 갱갱이의 영화를 말해 줄 뿐이다. 강경 포구는 유난히 석양이 아름답다. 금강의 끝자락 민물과 바닷물이 들락이는 나들목 강경포구에서 문득 눈물이 많았던 박용래 선생이 생각났다.
깊은 밤 풀벌레 소리와 나 뿐이로다.
시냇물은 흘러서 바다로 간다.
어두움을 저어 시냇물처럼 저렇게 떨며
흐느끼는 풀벌레 소리......
쓸쓸한 마음을 몰고 간다.
빗방울처럼 이었는 슬픔의 나라
후원(後園)을 돌아가며 잦아지게 운다.
오로지 하나의 길위
뉘가 밤을 절망(絶望)이라 하였나
말긋 말긋 푸른 별들의 눈짓
풀잎에 바람 살아 있기에
밤이 오고
동이 트고
하루가 오가는 다시 가을 밤
외로운 그림자는 서성거린다.
찬 이슬 밭엔 찬 이슬에 젖고
언덕에 오르면 언덕 허전한 수풀 그늘에 앉는다.
그리고 등불을 죽이고 침실(寢室)에 누워
호젓한 꿈 태양(太陽)처럼 지닌다.
-가을의 노래 - 박용래
충남 논산 강경에서 태어나 1943년 강경상업학교 전교수석 졸업. 55년 [현대문학]에 시 <가을의 노래>가 추천돼 문단에 데뷔했다.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에 있는 그의 시비는 사실 이곳 강경 포구에 있는 것이 옳은지 모른다. 강경포구에 들린 시간은 대낮이라 길벗 이영균 선배가 말하는 포구의 눈물인 슬픈 저녁노을을 만날 수는 없었지만 철늦게 우어회를 맛볼 수 있다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이곳에서 말하는 우어는 웅어이다.
웅어는 멸칫과의 물고기이다. 민물과 짠물이 섞이는 나들목에 살며, 길이는 30㎝ 정도이고 뾰족한 칼 모양을 한 은백색 고기로 비늘이 잘다. 봄에 보리가 필 무렵 강을 거슬러 올라와 산란하는 귀한 물고기가 그것이다.
웅어는 이곳말로 우어라고 하지만 한문으로는 위어라고도 한다. 강경포구도 잡히고 낙동강에서도 한강에서도 잡히는 고기이다. 웅어에 따라다니는 말은 임금님 진상품이었다는 것인데, 육전조례라는 책에 고양에 사옹원에서 위어소(葦魚所)를 두어 바로 강을 타고 올라오는 웅어를 잡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在高陽 <所管各邑直關> 五邑漁夫戶一百六十 六典司饔院 二戶 <金浦三十六交河三十三通津六十一高陽二十陽川十二>) 바로 다섯읍에 어부 백육십 호를 두어 위어 즉 웅어를 잡아 궁에 올렸는데 김포, 교하, 통진, 고양, 양천에 전문적으로 이를 잡아 올리는 임무를 띤 어부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귀한 생선임에 분명하다. 궁중식 조리법은 웅어를 풀잎같이 저며 종이 위에 놓아 물과 기름을 뺀 후 회를 쳐 윤집(초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고추장을 넣고 감정(찌개)을 만들어 임금님께 올렸다.
모든 멸치과 생선들이 마찬가지지만 이 역시 성질이 급해서 그물에 닿기가 무섭게 죽어, 잡히는 즉시 머리와 내장을 떼어 내고 얼음에 재운다. 작은 것은 완전 은빛이고 조금 씨알이 굵어 20cm정도가 되면 옅은 황금빛이 감돈다. 지금 강경에서 먹을 수 있는 우어회는 지난 5월에 잡아 냉동해 둔 것이다 이 생선은 회로 먹거나 소금에 절여 젓을 담그지만 굽거나 매운탕으로는 먹지 않는다. 웅어는 익으면 살맛이 퍽퍽하기 때문이다 회로 먹는 것도 5월이 넘어서면 못 먹는데 이미 가시가 억세지고 산란을 한 뒤라 기름과 살이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강경뿐 아니라 한강에서 웅어 맛을 보려면 봄철 날을 잘 잡아 올림픽대로를 타고가다 김포, 강화 제방도로 방면 78번 도로로 우회전해 전류리까지 직진하면 ‘전류리포구’가 나오는데 이곳에 식당은 없지만 포구에서 웅어를 사서 초장에 찍어 먹는 새로운 맛도 있다.)
우리가 들린 곳은 개업한 지 80년이 된다는 노포 황산옥이었다. 옛날 포구 옆 쓰러져가던 선술집의 운치는 없어지고 위풍당당한 현대식건물이지만 입구에 옛집을 기억하고 있는 오랜 단골들의 향수를 달래기위해선지 커다란 사진으로 오히려 풋풋하고 운치 있던 옛집사진이 걸려 있어 다소 서먹서먹함을 달랠 수 있었다.
웅어회부터 한 접시 시키고, 웅어하고 함께 올라온다는 황복을 찾았지만 때를 놓친 것이었다. 여하튼 참복 찜과 웅어회가 올랐다. 이곳 웅어회는 웅어를 뼈째 썰어 미나리, 양파, 당근 등 야채와 고추장을 버무려 나왔다. 보리가 필 때 잡아 냉동했던 웅어였다지만 말 그대로 고소했다. 특이하게도 날 김을 내놓아 쌈을 하는데 날 김에 웅어회를 싸 풋고추와 마늘을 곁들이면 비린내가 없어진다고 한다. 뼈가 아작아작 씹히는 고소함이 낮술을 불러들이기 충분했다. 굽지 않은 날 김의 향긋한 냄새가 일품이었다.
문득 상위에 한 접시 담겨 나온 정체불명의 젓갈에 궁금증이 발동하여 물었더니 바로 웅어 젓갈이라 한다. 강경은 젓갈의 고장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웅어 젓이 오른 것이다. 맨밥위에 한 숟갈 젓갈을 넣어 비벼 보니 이것만으로도 밥 한 그릇은 수월하게 비울 듯했다. 복찜을 시켰으니 웅장하게 차려나온 복어에 손을 아니 댈 수 있겠는가! 제대로 시간을 맞춰와 키로에 10만원을 호가하지만 황복을 상위에 올렸다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다. 여하튼 이영균 선배 덕에 나와 동행한 소리꾼 오현숙과 대전문예회관의 유필조군이 흐뭇한 점심을 즐길 수 있었다. 그냥 갈 수 없다며 굳이 추가한 복탕은 놀랄 만큼 행복한 것이었다. 복어 한 마리를 통째로 담아 부추와 된장을 살짝 풀고 얼큰하게 끓여낸 강경식 갱갱이 복탕은 조각조각 잘라진 몸체에 콩나물뿐인 복탕만 먹어오던 내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영균 선배의 통 큰 주문 때문에 이곳 음식을 골고루 먹을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가을 강경젓갈축제에 다시 들러 올해 김장할 새우젓도 살 겸, 올 봄에 웅어를 비교적 넉넉하게 물량을 확보했다고 하니 일품으로 웅어 회만 달랑 시켜서 날 김에 싸먹다가 큰 그릇에 웅어 회를 밥에 비벼 먹고 공기밥을 추가로 시켜 번들로 따라 나오는 웅어 젓에 맛나게 비벼 한 그릇을 더 비워야겠다. 그리고 난 뒤 갈대가 무성한 강경포구를 산책하며 슬픈 노을을 배경 삼아 박용래 선생의 시를 나지막하게 읊어보리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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