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의 간략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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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간략한 역사!
2세기 동안 지속된 길고 피비린내 나는 종교 전쟁만큼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은 없다.
예루살렘의 신성한 도시를 통제하려는
가톨릭 교회의 열망에 의해 발생한
십자군 전쟁은 수많은 생명의 손실, 수많은 왕국의 흥망성쇠,
유럽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의 종말, 비밀 사회의 시작,
유라시아 대륙의 지정학적 변화를 야기했다.
교황, 왕, 상인, 농민은 모두 이 전쟁에 참여했고,
십자군 전쟁을 이해하는 것은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궁금한가? 사진을 통해 십자군 전쟁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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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교황
중세 유럽에서 교황의 왕좌는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위치였다.
모든 왕들과 지역 지도자들은 교황에게 대답했고,
종교적인 힘은 정치적인 힘과 동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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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확장
서유럽과 동유럽 세력 간의 일부 내분이
가톨릭 교회의 전체적인 영향력을 약화시켰지만,
11세기 초에 파벌 간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고,
교회가 다시 한번 확장을 위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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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차지한 이슬람 제국
이 무렵,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예루살렘은
거의 500년 동안 무슬림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슬람 제국은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중동의 많은 부분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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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
1081년부터 1118년까지 재위한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는
셀주크-튀르크인들의 끊임없는 공격에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고,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그는 가톨릭 교회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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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우르바노 2세
당시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인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알렉시오스의 요청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는 동부 비잔티움 국경에 군대를 보내는 것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서유럽 사람들에게 동쪽으로 무장한 행진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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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십자군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외침이 대륙 전역에서 들렸고,
군대는 형태를 갖추고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귀족들과 봉건 영주들의 지휘를 따르는 조직화된 군대들 중 일부는
형성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서민들로 구성된 다른 집단들은
거의 즉각적으로 구체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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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십자군
비잔티움 제국에 도착한 첫 번째 집단은
현재 민중 십자군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농민 집단이었다.
은자 피에르(사진)라고 알려진 프랑스 신부가 이들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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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십자군의 첫번째 전투
피에르와 그의 군대는 더 자격 있고 더 나은 장비를 갖춘 다른 군대들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기독교와 이슬람의 국경인 보스포루스 해협에 도착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로운 감정에 용기를 내어 해협을 건너
셀주크 제국으로 정면으로 돌진했다.
그들을 기다리는 적군은 농민군을 죽이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고,
민중 십자군은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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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군대가 아나톨리아로 진격
생질의 레이몽, 부용의 고드프리, 베르망두아의 위그, 타란토의 보에몽이 이끄는
제1차 십자군의 4대 기독교 군대는 셀주크 영토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두었고,
1097년 6월에 그들은 셀주크 수도 니카이아를 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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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함락
십자군은 아나톨리아의 나머지 지역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성스러운 도시를 한 달 동안 포위한 후, 예루살렘은
1099년 7월 십자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제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시민들의 끔찍하고 피비린내 나는 학살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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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국가의 형성
예루살렘이 정복되자, 십자군 군대의 네 명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에데사, 안티오키아, 그리고 트리폴리 왕국을 포함하여
십자군 국가로 알려지게 된 네 개의 통제 구역을 형성했다.
이 국가들이 세워지면서 군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 지역을 떠나 그들의 고향 서유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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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십자군의 시작
기독교 세력은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에서 거의 반세기 동안 권력을 누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슬림-튀르크인들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정복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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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데사를 잃다.
1144년, 셀주크 장군 잔기의 지휘 아래, 무슬림-튀르크 군대는 공식적으로
십자군 국가들의 영토를 침범하면서, 에데사 왕국을 점령했다.
이 패배의 소식이 서방에 전해졌을 때 기독교 지도부 사이에
공황이 일어났고, 1147년에 두 번째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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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십자군의 지도자들
프랑스의 루이 7세(사진)와 독일의 콘라트 3세,
두 왕이 2차 십자군을 이끌었다.
그들은 이슬람교도들의 성지 탈환을 빨리 끝내기 위해
군대를 동쪽으로 빠르게 이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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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릴라이움 전투
두 번째 중동 정복이 첫 번째 만큼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 두 유럽 왕은
심각하게 준비가 부족했고, 그들의 군대는 도릴라이움 시에서
셀주크 군대와 처음으로 충돌하는 동안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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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에서 패배
도릴라이움에서 패배한 후, 왕의 군대는
후퇴하고 예루살렘에 다시 모였고,
이번에는 오늘날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향해
50,000명의 군인들과 함께 다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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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에서 패배
불행하게도, 왕들의 군대는 1149년에 다마스쿠스에서도 심하게 패배했다.
무슬림-튀르크 군대는 마지막 십자군을 소탕했고,
제2차 십자군은 유럽인들이 원했던 성지에서 권력 이동의 징후 없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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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중요한 승리
제2차 십자군 기간 동안 유럽이 얻은 유일한 이득은 무슬림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의 일부를 장악했던 남서쪽의 작은 전선이었다.
1147년 4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영국과 포르투갈 군대는 나중에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가 될 리스본 시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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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십자군 준비
제2차 십자군 기간과 그 후 수십 년 동안 기독교 십자군은
나머지 세 개의 십자군 국가를 통제할 수 있었고,
이집트를 정복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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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군대가 예루살렘을 탈환
이집트의 지도자인 술탄 살라딘은
1187년 십자군 군대를 뚫고 예루살렘까지 갔고,
그곳에서 그는 기독교 지도부를 축출하고
신성한 도시를 다시 무슬림의 지배하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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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십자군 전쟁
이 대규모 손실은 제3차 십자군을 촉발시켰는데, 이 십자군은
프랑스의 필립 2세, 영국의 리처드 1세(사진),
그리고 동쪽으로의 원정에서 살아남지 못한
늙은 독일 황제 프레데리히 바르바로사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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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왕의 승리
리처드 1세의 군대는 아르수프 전투에서 살라딘의 군대를 물리쳤고,
비록 그가 도시 자체를 점령할 군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예루살렘을 둘러싼 지역의 많은 부분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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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파 조약
1192년, 리처드와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복구하는 자파 조약을 체결하고,
도시 자체를 살라딘의 통제하에 두었으며,
종교 순례를 위해 도시를 드나드는 기독교 민간인들에게
안전한 통행을 허용함으로써 제3차 십자군을 종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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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십자군
예측할 수 있듯이, 자파 조약은 교회가
오랫동안 받아들일 수 있는 타협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1202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제4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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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의 변경
제4차 십자군은 종교적, 신앙적 동기보다는
세속적, 경제적 목적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였다.
알렉시오스의 삼촌 알렉시우스 3세의 통치를 끝내면,
알렉시오스가 황제로 나서도록 허락하는 것을 규정한
알렉시오스 앙겔로스 왕자와 거래를 한 후
비잔티움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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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 포위
1203년에 일어난 콘스탄티노플의 포위와 약탈은
그 당시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세련된 대도시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비잔티움 제국 종말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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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알렉시오스가 황제의 자리에서 그의 삼촌을 대신한 후,
그는 비잔티움의 나머지 지배 계급과 하층 계급들로부터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십자군은 도시를 약탈하고 도시의 많은 부분에 불을 지르고 건물을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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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후퇴
1203년에 십자군의 원래 목적은 권력에 대한 일반적인 탐욕과 욕망으로 대체되었다.
최초의 4개 십자군의 정의로운 정당성이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열망은 잊혀졌고,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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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십자군
기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다른 작은 캠페인들은 교회가
외교적인 수단을 통해 잠시 예루살렘의 지배권을 되찾은
무혈의 제6차 십자군을 포함하여 13세기의 나머지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하지만, 제4차 십자군은 십자군의 실질적인 종말을 의미했고,
끝이 없어 보이는 문화와 왕국의 싸움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다.
출처: (History) (History Today) (Britann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