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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차분한 20대들의 알흠다운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처돌이얼마나맛있게요
출처 : 여성시대 처돌이얼마나맛있게요
로또
2, 6, 11, 16, 25, 31
해수는 아래의 숫자를 다시 한번 보았다.
2, 6, 11, 16, 25, 31
같았다.
제가 가지고 있는 종이에 인쇄된 숫자와 인터넷상의 숫자가 같았다.
목숨보다 소중한 종이가 떨리는 손에 조금 구겨졌다.
해수가 황급히 다시 종이를 빳빳하게 폈다.
당첨됐다. 로또에.
심심풀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간절했다.
매주 돈을 아껴 사는 천원짜리 로또가 그녀에게는 가장 강력한 희망이었다.
다시 한번 아래를 내려다보자 이번엔 제 손이 보였다.
하루 네 시간도 채 쉬질 못했던 손은 습진으로 부르터 있었고 손등엔 핏줄이 성성했다.
맥박이 팔딱팔딱 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수전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손이 마구 떨렸다.
로또 1등 최소 당첨금이 얼마일까.
적어도 사채 빚 육천만원보다는 많겠지.
저를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가난과 이제 안녕인 거다.
해수는 전화기를 들었다.
뚜르르, 뚜르르르....
수화음만 들릴 뿐,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해수는 통화를 포기하고 다급히 자리를 나섰다. 품속에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종이와 함께였다.
* * *
실수령액 12억.
해수는 농협 통장에 찍힌 금액을 보고 또 보았다.
숫자를 읽는 게 전혀 질리질 않았다.
이런 숫자를 본 적이 처음이라 그럴까.
이례적으로 당첨자가 많아 금액이 적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해수는 충분히 만족했다.
더 욕심을 부리면 벌을 받을 것 같았다.
당첨금으로 해수는 제일 먼저 빚을 갚았다.
사채업자들은 어리둥절한 듯 보였지만 이내 그 돈을 받아들였다.
종국에는 헤죽헤죽 웃으며 또 돈이 필요하면 찾아달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 말을 들은 해수가 코웃음을 쳤다.
처음부터 제가 빌린 돈도 아니었다.
도망친 아빠의 빚을 대신 갚고 있었을 뿐이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를 갚는데 제 20대가 전부 갔다.
그러고도 평생 원금은 갚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원금을 한 번에 갚았을 때의 쾌감이란, 직접 겪어본 자만 알 일이었다.
그 다음 해수는 치과에 갔다.
“아프면 손 들어 주세요.”
그 즉시 해수는 손을 번쩍 들었다.
마취를 했는데도 아파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의사는 못본 척 치료를 계속 해나갔다.
해수가 의아해하며 뭉개지는 발음으로 의사를 표시했다.
“아하여....”
“네.”
그러나 의사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조팔놈....’
해수는 억울함으로 가득 찬 상태로 치료를 끝마쳤다.
충치가 너무 깊어 신경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와야 한다는 말에 해수가 기운 없이 수납했다.
터덜터덜 치과를 나오는데 같은 건물 1층에 떡볶이 가게가 있었다.
아침도 아직이었어서 해수는 사람 하나 없는 떡볶이 가게에 들어섰다.
“떡볶이랑 순대, 튀김 주세요. 내장은 간 빼고 많이 주세요.”
“예-.”
금새 먹음직스러운 한상이 차려졌다. 해수는 마취가 풀리지 않아 얼얼한 입에 떡볶이를 우겨넣었다.
“아가씨 천천히 먹어! 누가 쫓아와?”
“아, 하하. 네...”
한낮의 손님이라곤 해수뿐이라 그녀만 보고 있던 아주머니가 기가 차다는 듯 해수에게 오뎅국물을 건네주었다.
항상 쫓기듯이 식사해와서 그런지 다음 일정이 없는데도 자꾸만 빠르게 먹게 됐다.
해수가 머쓱하게 웃으며 오뎅국물을 호호 불어 들이켰다.
그리고 조금 느긋하게 젓가락을 놀렸다.
이후로도 해수는 치과에 들러 치료를 받았다.
건강검진도 함께 받았다.
건강검진 결과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역류성 식도염이 있긴 했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을 꼭꼭 씹어 먹으면 서서히 나아질 거라고 했다.
그리고 집을 샀다.
서울에 있는 작은 아파트를 자가로 구매했다.
돈이 훅 나가버렸지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평생 공장 기숙사나 고시원이나 전전할 줄 알았는데 서울에 집이 생긴 것이다.
텅 빈 집에 살림살이를 채워 넣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해수는 가끔 햇살이 드는 침대 위에서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낮잠을 잤다.
행복이 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생각보다 사람들에게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연락이 올 만큼의 인연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 *
계절이 지나 치료를 마친 해수는 그날로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녀의 오랜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해수는 비즈니스석을 타고 필리핀에 도착했다.
마닐라의 따스한 햇살이 해수를 반겨주었다.
호텔 수영장에 간 해수는 선배드에 누워 셀카를 찍었다.
제가 생각해도 잘 나와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했다.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니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국외통화라 비용이 많이 나올 줄 알면서도 기다리던 전화인지라 해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너 뭐냐?”
오랜만의 통화임에도 상대방은 그리움보다는 의문을 가득 품고 있었다.
“뭐가.”
“너 그 해외 간 거지? 물주라도 문 거야?”
남자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들어서 있었다.
더 많은 돈을 얻을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욕심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아니.”
“그럼 네가 어떻게 거기 있냔 말이야!”
남자는 단답으로 대답하는 해수에게 짜증이 난 듯 재차 되물었다. 해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로또 당첨됐어.”
“....”
수화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해수가 한 말이 정말인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 진짜냐?”
“아니면 내가 어떻게 여기 있겠어. 필리핀 마닐라인데, 햇살이 따뜻해. 사람들도 친절하고. 아빠도 올래?”
누가 봐도 아빠를 생각하는 살가운 딸의 모습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는 보기 드물게 흥분해 있었다.
“그래! 내 당장 가마!”
“표 보내줄게. 공항에 오면 연락해. 나도 효도 한 번 해봐야지.”
“하하하! 네가 드디어 정신을....”
뚝.
해수는 대답도 듣지 않고 통화를 끊었다.
비행기표는 이튿날 거였다.
아빠와의 관광을 위해 해수는 가이드를 찾았다.
가이드는 20대 초반의 젊은 여자였다.
키가 멀쑥하고 머리가 짧아 언뜻 뒤에서 보면 남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햇살에 그을린 피부는 다른 필리피노보다 조금 희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영락없는 필리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한국말이 분명했다.
해수가 말없이 감탄하자 가이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일곱 살까지 아빠랑 같이 살았거든요.”
“아빠가 한국분이셨나 봐요.”
“네. 한국 남자였어요.”
그거면 됐다. 해수는 더 묻지 않았다.
가이드도 더 묻지 않았다.
가이드는 해수를 사무실로 안내해 관광할 곳의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정글 같은 숲과 바다, 하나같이 눈물이 나올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들이었다.
해수는 바다를 택했다.
“함께 관광하기에는 여기가 좋겠어요.”
“멋진 장소죠. 기록해 둘게요.”
“내일 함께 관광하면 얼마나 들까요?”
“그렇게 많이 들진 않아요. 한국 사람은 특가로 들어가고 있거든요.”
“잘됐네요.”
가이드는 이따금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해수는 가이드의 저녁을 사주고 호텔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야무지게 조식을 챙겨 먹은 해수가 편한 복장을 한 채 로비로 내려갔다.
가이드는 벌써 로비 소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내가 늦었나요?”
“아뇨. 저도 금방 왔어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가이드의 모습에 정이 들 것 같았다.
해수는 사양하는 가이드에게 굳이 아침을 사주고 공항으로 향했다.
덕분에 아빠를 마중하는 게 조금 늦게 되었다.
“망할 년. 왜 이렇게 사람을 기다리게 해!”
30분 남짓한 시간 공항에서 홀로 해수를 기다렸던 아빠는 고래고래 성을 내었다.
“미안, 길이 밀려서.”
“나 참. 저 사람은 누구고?”
“내 가이드.”
“남자야 여자야....무슨 키가 저렇게 커?”
아빠는 저보다 키가 큰 가이드를 보며 약간 주눅 든 듯 보였다.
그녀의 목부터 팔까지 전부 문신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흠, 흠.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우린 밥 먹었어.”
“늦은 주제에 밥까지 먹고 왔다고?”
아빠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게 변했다.
씩씩거리는 게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기세였다.
해수는 공항에 딸린 편의점 쪽을 눈짓하며 말했다.
“편의점에서 뭐라도 사 먹던가. 관광 일정 있어서 지금 식사는 못해. 그리고 기내식 먹었을 거 아냐?”
“그게 밥이냐? 짜고 달고. 하여튼 자극적이라서, 너는 로또도 당첨됐으면서 퍼스트클래스는 못 태워줄망정 이코노미가 뭐냐? 쯧쯧....”
아빠는 계속해서 해수를 타박했다.
해수의 눈동자에 짜증이 어렸다.
가이드가 그런 둘을 조마조마하게 보고 있었다.
“싫으면 바로 이동하고.”
“누가 싫대?”
아침도 못 얻어먹을까 봐 남자는 성큼성큼 편의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잔뜩 욕심을 부려 바구니 가득 음식을 채운 남자가 해수에게 눈짓했다.
계산하라는 표시였다.
해수가 말없이 카드를 꺼내 결제했다.
다시 집어넣으려는데 남자가 해수의 카드를 중간에서 낚아챘다.
“넌 카드 많지? 아빠 하나 주라.”
“그래.”
카드라곤 사실 두 개 뿐이었지만 해수는 별말 하지 않았다.
남자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이젠 돈도 많은 게 옷이라도 좋은 거로 챙겨입지 외국까지 와서 그게 뭐냐? 하여간 구질구질하게.”
해수는 평소에 입던 옷을 입고 있었다.
그에비해 남자는 관광객의 표본 같은 차림새를 입고 있었다.
하와이안 셔츠와 반바지, 샌들, 카메라. 카메라?
“카메라는 웬 거야?”
“첫 해외여행인데 필요할 것 같아서 좀 땡겼지.”
“사채로?”
해수가 기가 차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적반하장이었다.
“그럼 네가 돈 좀 든든하게 부쳐 주던가! 딸랑 비행기표만 왔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 그렇다고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 신용도 아니고.”
남자가 투덜거렸다. 해수는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럴까봐 비행기 예약을 빠듯하게 한 건데, 그새 사고를 쳤다.
“출발하죠.”
남자는 물끄러미 가이드를 보다가 인상을 쓰며 뒤통수를 후려쳤다.
머리가 꺾일 정도로 강한 충격에 가이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뭐 하는 짓이야.”
“우리 딸한테 돈 받아먹는 가이드 주제에 내가 짐들고 있는데 받을 생각도 안 하고 아주 빠져가지고!”
편의점에서 산 봉지와 백팩을 가지고 그렇게 말한 모양이었다.
해수가 나서려는데 가이드가 눈짓으로 막았다.
“죄송합니다. 짐 저 주세요.”
“그래, 그래야지.”
고분고분하게 나오는 가이드를 보며 흡족한 듯 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해수가 짙은 혐오감을 가지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 남자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하나도.
차안에서 남자는 거하게 식사를 했다.
벤에 온갖 음식물 쓰레기들이 굴러다녔다.
가이드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가이드는 신경쓰지 말라는 듯 룸미러 사이로 해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식사를 마친 남자는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발을 올리고 불평을 해댔다.
“너무 좁아. 리무진 같은 거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 돈도 많은 게. 에어컨은 왜 또 이렇게 시원찮아?”
에어컨 온도는 적절한 편이었지만 남자는 끊임없이 불평했다.
마치 불평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대우해 줄 줄 알고 왔는데 식사도 못 얻어먹자 골이 난 듯 했다.
해수와 가이드는 묵묵히 남자의 불만을 무시했다.
남자는 자신의 말을 누구도 들어주지 않자 만만한 가이드로 표적을 잡았다.
“야, 깜둥아. 넌 어디서 한국말을 배웠냐?”
“내 가이드 모욕하지 마.”
참다 못한 해수가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남자가 움찔했다가 자신이 위협감을 느꼈다는 사실에 화가 난 듯 해수에게 막말을 퍼부었다.
“되바라진 년...아빠한테 하는 말뽄새하고는. 돈 좀 가졌다고 이제 애비는 애비로도 안 보인다 이거지? 저년을 임신했을 때 아주 떼버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그랬어.”
“이게 진짜!”
술만 마시면 지겹게 들어온 말들이었다.
해수의 괴로움을 알아차렸는지 가이드가 그의 말을 받았다.
“아버지가 한국분이셨어요.”
건수를 잡았다는 듯 남자가 호기심을 보였다.
“한국 사람? 그래, 한국 남자가 너희 같은 애들한텐 그렇게 인기가 많다던데.”
“그런 편이죠.”
“아주 돈만 있으면 가랑이 벌릴 년들 천지지 여기는.”
불만스럽다는 듯 남자가 중얼거렸다.
“여자들이 말이야. 몸을 소중히 여겨야지. 그렇게 아무한테나 주고 막 그러면 안 돼. 우리 딸도 내가 입이 닳도록 가르쳤지. 하여간 순진한 한국 남자들 벗겨 먹는 건 만국 공통이라니까.”
사창가 앞까지 끌고 갔던 게 엊그제 같은데 뚫린 입이라고 잘도 떠들어대는구나. 해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 아버지는 여기에서 8년을 살았어요. 두 분은 결혼식도 올렸고요. 어머니 배에 둘째가 들어섰을 때 잠시 한국 출장을 다녀온다고 하고 그대로 연락이 끊겼어요. 나중에 알아보니 본국에 아내와 두 아이가 있더라고요.”
가이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해수는 물론 남자까지 조용해졌다. 남자가 과자 가루가 묻은 입을 털며 말했다.
“그..음. 그 사람도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닐 거야. 사정이 있었겠지. 의심 한 번 안 해본 네 어머니도 좀 그렇다. 순진하셨네. 여자가 순진하기만 해서는 남자를 휘어잡는 매력이 없지. 그래도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하진 않지?”
“하면 안되나요?”
“당연히 안되지. 아버지는 네 핏줄이야. 네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넌 태어나지도 못했어! 그리고 아버지가 한국말을 가르쳐준 덕분에 여기서 이렇게 가이드도 하면서 밥 벌어먹고 살고 있는 거 아니야. 그리고 낳으라고 말해준 그 마음이 정말 고마운 거다. 그걸 잊어선 안되는 거다. 암.”
해수는 준비한 와인병으로 남자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가이드는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남자는 두 여자가 제 상대를 해주지 않자 결국은 코를 골며 잠들었다.
“미안해요.”
“뭐가요?”
“무례하게 굴었잖아요. 제가 대신 사과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사과할게요.”
“괜찮아요. 그런 분 많아요.”
괜찮다는 듯 가이드가 씩 미소 지었다.
차는 몇 번의 주유소와 휴게소를 거쳐 목적지에 다다랐다.
벤은 힘겹게 산비탈을 오르더니 이내 산장 앞에 멈추어 섰다.
“다 왔습니다.”
빽빽하게 쌓인 풀과 나무들에 오두막으로 지어진 산장 하나.
그 아랜 깎아지를 듯한 절벽과 검푸른 바다.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이런 걸 상상한 게 아니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여긴 어디야 또.”
“여긴 일반 가이드들도 잘 모르는 명소예요. 저도 어쩌다 알게 된 곳이죠. 프라이빗한 곳이라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어요.”
“흐음....”
남자는 영 마뜩잖은 눈빛을 하다 이내 해수의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뭐, 좋아. 밥이라도 먹자고. 배고파 죽겠으니까.”
산장에 들어선 가이드는 재빨리 식사를 차렸다.
빵과 햄, 치즈를 곁들인 간단한 식사였다.
남자는 얘기를 꺼내며 시도때도 없이 불평을 뱉어내다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비싼 와인을 죽죽 마셔댔다.
남자의 얼굴이 와인색으로 물들었을 무렵 가이드가 제안했다.
“저쪽 언덕에서 밤바다라도 구경하시겠어요? 여긴 달이 크게 떠서 보기 좋으실 거예요.”
“난 됐어. 배불러서 꼼짝도 하기 싫다.”
남자는 식탁에 늘어져 말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낸 뒤 발로 닫으며 해수가 말했다.
“잠깐 얘기하게 나와.”
“얘기? 무슨 얘기.”
“우리 앞으로의 어떻게 살 건지 얘기 해봐야지.”
“뭐...그래.”
돈냄새를 맡은 남자는 무거운 엉덩이를 떼었다.
남자는 코를 후비며 어기적어기적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이드의 말대로 얼마 가지 않아 언덕이 보였다.
사실 언덕이라기보단 절벽에 가까웠다.
그들이 올라온 완만한 비탈과는 달리 언덕이 끊기는 곳에는 절벽이 가파르게 드리워져 있었다.
앞에 펼쳐진 풍경은 장관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푸른 보름달이 수평선을 가득 메운 검은 바다에 달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물결이 찰랑댈 때마다 산란하는 달빛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에잉, 와인에 비해 영 맛이 없네.”
남자는 맥주를 마시며 여전히 툴툴댔다. 해수는 그런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참, 넌 그럼 요즘 어디 사냐?”
“그냥 서울에 집 한 채 얻어서 살고 있어.”
“꺼어어억. 이 계집애가 그럼 말을 했어야지.”
“전화 했는데 안 받더라고.”
“계속 했어야지!”
“열 통 넘게 했어.”
“그럼 그런가 보다 하지 뭘 자꾸 묻고 따져! 재수없게.”
평소처럼 머리를 때리려던 남자는 해수의 차가운 시선에 이내 손을 거두었다.
“크흠....어쨌든 주소좀 불러봐라.”
“왜?”
“아빠가 사귀는 사람이 있거든. 청안댁이라고. 그 사람 애도 있는데 지금 반지하 살아서, 불쌍한 사람이야. 너 어차피 외국에 있으니까 거기서 좀 머물러도 되잖냐.”
뻔뻔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도 남자는 해수에게 집을 돌려주지 않을 게 뻔했다.
돈도 많은 게 왜 그렇게 욕심이 많냐고 하겠지.
기어코 거기 눌러 살며 또 왕처럼 살 생각일 테다.
해수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제가 묻고픈 걸 물었다.
“카메라 말고 사채는 또 얼마나 썼어?”
“뭐...거의 안 썼지.”
“솔직히 말하면 딱 이번만 갚아줄게.”
해수의 말에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남자는 취해서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셈하더니 말했다.
“팔백. 오백은 청안댁 주고 카메라 사고 핸드폰 하나 사고 했지. 딸이 로또 1등인데 이 정도면 검소한 거 아닌가?”
남자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
“어디다 빌렸는데.”
“전에 빌렸던 거기에다 빌렸지. 네가 돈 한 번에 갚아 가지고 한결 쉽게 빌려주더라.”
“진짜 쓰레기네.”
해수가 먼 허공을 노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얼마나 받았냐?”
“뭐가.”
“로또 당첨금 말이야.”
“얼마 안 돼.”
“에이, 빼지 말고.”
남자가 살갑게 팔꿈치로 해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해수가 못 말린다는 듯 솔직하게 말했다.
“12억. 빚 갚고 집 사고 해서 남은 돈은 거의 없어.”
12억이라는 말에 남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금액이라 놀란 듯했다.
그러더니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해수를 살살 구슬린다.
“아빠 반 줄 거지?”
“내가 왜?”
“이 욕심 많은 계집애 봐라. 먹여주고 키워줬는데 아빠 힘들게 사는 거 뻔히 알면서 그래? 이 은혜도 모르는 것 진짜 그러면 안 된다.”
“아빠가 날 언제 키웠어? 날 낳은 건 엄마고 날 키운 건 외할머닌데.”
“이게 그래도! 어디서 따박따박 말대꾸야!”
결국 남자는 해수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머리털이 뽑히는 고통에 해수가 악, 비명을 내질렀다.
“애비가 다 달라는 것도 아니고 반만 달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고까워서는! 심보를 그렇게 쓰면 온 복도 달아나지!”
“이거 놔, 안 놔!?”
“오냐, 놔주마. 놔주고 말고.”
남자는 해수를 질질 끌고 절벽으로 나아갔다.
절벽에서 떨어뜨릴 속셈인 듯했다.
정신 차리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남자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해수가 악을 쓰고 발버둥 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남자는 술에 취해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술에 취한 남자의 힘은 너무 셌다.
질질 끌려가는 곳마다 발밑으로 풀이 눌린 자국이 났다.
상체가 절벽 쪽으로 기울기 직전이었다.
머리채를 쥐었던 남자의 힘이 사라지고 누군가 저를 거세게 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생리적으로 고였던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눈꺼풀을 몇 차례 감았다 뜨자 저를 안고 있는 가이드가 보였다.
남자는 아무데도 없었다.
가이드는 쪼그려 앉아 해수를 걱정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이며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보였다.
“괜찮아요?”
“괘, 괜찮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저기 있어요.”
가이드가 절벽 밑을 가리켰다.
해수가 새파랗게 질려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꽤애액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이드가 달려와 해수를 감싸며 남자를 절벽으로 밀친 모양이었다.
“사, 살려줘-!”
해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안도하는 해수를 보며 가이드가 미소지었다.
“혹시나 칼에 찔린 건 아닌가 싶어서 놀랐어요.”
“손님이 원하지 않으면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무, 무슨 소리야! 나 좀 잡아달라고!”
급박한 상황 속에 두 여자는 여유만만이었다.
남자의 안색이 점점 파리하게 질려갔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
해수가 물었다. 남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정말로 죽이려는 건 아니었다. 정말이야. 내 핏줄을 내가 어떻게 죽여! 그냥 겁만 조금 줄 생각이었지!”
“난 죽이려는 생각으로 데려온 건데.”
해수의 말에 남자의 낯빛이 거멓게 죽었다.
“그, 그게 무슨....”
“죽이려고 여기 데려온 거라고. 당신.”
“나를, 왜. 네가. 어떻게....”
“왜라는 소리가 나와?”
기가 차다는 듯 해수가 헛숨을 내뱉었다. 남자의 손에 쥐인 흙의 일부가 바사삭 무너져내렸다.
“당신이 내 인생 망친 건 진작에 알았지. 그런데 이제 로또 덕분에 좀 덜 망하게 됐거든. 그런데 내가 로또 당첨된 거 알면 이제 그 돈도 당연히 다 가지려 들겠지? 그래서 죽이자고 결심했어.”
“도, 돈 때문에 부모도 버린다는 거야!”
“돈 때문이라니. 말은 바로 해. 너 때문이잖아. 봐, 고작 하루 줬는데 그새 사채 쓴 거.”
해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해수가 저를 살릴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닫자 남자는 가이드를 향해 애절하게 소리쳤다.
“거, 거기! 나 좀 살려줘! 이건 범죄야, 범죄라고!”
가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여, 여기 이 미친년 말고 너밖에 더 있어?! 얼른 끌어올리라니까!”
“저는 원래 살인청부업자인데요.”
“....”
가이드의 말에 남자의 말문이 막혔다.
“이번엔 실족사로 위장이라 직접 죽이진 않게 됐지만요.”
“하, 하늘이 무섭지도 않냐-! 이 씨발년들아!”
남자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노성을 지르자 한쪽 손이 그대로 미끄러졌다.
남자는 기겁해서 다시 팔을 뻗으려 했지만 근육이 거의 붙지 않은 하얀 팔에는 그만한 근력이 없었다.
가이드와 해수가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도 벌 안 받고 잘 살던데요. 그래서 저는 직접 벌을 줬지만요.”
가이드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났다.
“두 분이서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가이드가 떠나가고 해수와 남자 둘만 남게 되었다.
남자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치솟았다.
끅끅거리는 소리가 서러웠다.
철썩철썩 파도 치는 사이로 뾰족뾰족한 기암괴석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분명히 죽을 테였다. 남자의 손바닥에 자꾸만 땀이 배어들었다.
“해, 해수야.”
“로또에 당첨되고 나서 생각해봤어. 당신을 죽일 건데,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나에게 도움 되는 방향으로 죽일 수 있을까.”
“제발, 제발 살려다오.”
“그래서 생각했지. 여행자보험을 들자. 사망 시 1억! 물론 수령인은 나야. 기쁘지 당신? 드디어 나한테 도움이 되는 거라고. 그래서 아깐 솔직히 칼에 찔린 줄 알고 무서웠어. 요즘 보험 받는 거 까다롭잖아.”
해수가 검지를 쭉 피고 입 모양으로 일억을 만들어 보였다.
“너 이...아아악!”
남자의 손을 감싼 흙이 무너졌다.
남자의 손가락 두 개가 허름하게 박힌 돌부리 하나에 겨우 걸쳐졌다.
“로또, 네가 로또만 당첨 안 됐어도....”
남자는 후회하는 눈치였다. 해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낸 빚 갚으면서도 살인청부 적금은 꼬박꼬박 붓고 있었어. 그 시기가 좀 당겨졌을 뿐이지.”
“너, 너 이 개같은 년 넌 꼭 지옥에 떨어질 거다! 애미애비도 없는 망할 년아!”
“엥, 나 원래 아빠 없는데. 어쨌든 고마워요. 돈은 잘 쓸게요. 김창남 씨.”
“이 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퍽, 수박이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사지가 바위에 눌러붙었다.
철썩, 바다가 즉사한 남자의 몸을 쓸었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해수는 한참이나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밤이 끝나고 해가 뜰 때까지.
그 모습은 자신이 이뤄낸 성과를 보는 세일즈맨 같기도 했고,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썩은니를 보는 사람의 시선 같기도 했다.
가이드가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다 그녀에게 담요를 둘러주었다.
해수가 슬쩍 뒤를 돌자 가이드가 부드럽게 웃었다.
가이드는 자지 않은 기색이었다.
밤이 온통 지났는데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새삼 가이드에게 고마워졌다.
“고생하셨어요.”
“고생은요. 아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당신 가이드잖아요.”
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시체가 바닷물에 떠내려가면 어떡하죠?”
“아, 그래서 여길 고른 거예요. 조수 때문에 시체가 저쪽의 동굴로 빠지거든요. 좀 가파르긴 해도 걸어서 내려갈 수 있어요.”
“다행이네요.”
“설사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필리핀 경찰은 없던 시체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거든요.”
가이드는 필리핀 경찰의 비리에 대해 거의 맹신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해수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어떻게, 관광은 재미있으셨나요?”
가이드는 해수에게 그다운 질문을 던졌다. 해수는 만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뒤로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새날의 햇빛을 받으며 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의 관광이었어요.”
* * *
다시금 공항. 그러나 이번엔 혼자가 아닌 둘이었다.
팁을 듬뿍 줬기 때문일까, 가이드는 마지막까지 해수를 친절하게 배웅해주었다.
비행기에서 먹으라며 먹을 것까지 싸주었다.
가이드의 호의에 해수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떠날 시간, 해수는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한국 들어올 생각 없어요?”
“네?”
가이드는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아차 싶었지만, 오히려 꺼내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일자리 알아봐 줄게요. 표도 끊어주고.”
“제가 어떤 일 하는지 알잖아요. 무섭지도 않아요?”
가이드가 씩 웃으며 해수에게 물었다.
“전 당신한테 일 맡긴 사람인데요.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요. 그리고 한국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여기가 좋아요. 그리고 한국 가면, 지나가는 남자들마다 죽이고 다닐 것 같아서요.”
가이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해수는 가이드를 설득하지 못할 걸 깨달았다.
뭐,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해수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가이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또 올게요.”
가이드가 해수의 손을 맞잡았다. 고생만 하고 살아온 두 거친 손이 단단하게 마주 잡혔다. 둘은 하얀 이와 분홍색 잇몸이 보일 만큼 환하게 웃었다.
“두 번째 부터는 할인폭 큰 거 아시죠?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첫댓글 갓제네럴띵작이야진짜
아... 감동스토리 명작이다 명작
정독하게 만드는 감동실화
이거 진짜 명작이야...
가슴이 따땃해지는 글이네요...
킹갓띵작이네요..
가슴이 따뜻해진다...띵작..잘보고갑니다 ^^
갓띵작
아 눈물날뻔.. 내생에 최고의 작품
명작
매번 볼때마다 정독함 ㄹㅇ 띵작 ㅠㅠ
띵작이라 올라올때마다 정독함ㅋㅋㅋ
아니 농협검색하다가 들어옴ㅋㅋㅋㅋ 근데 개존잼에 띵작이네 결말까지 갓벽하다 캬
맛있다 역시 명작
역류성 식도염으로 찾아 왔네... 진짜 명작이다ㅠㅠㅠ
로또 검색했다가 후루룩 읽어내렸다
잔잔한 울림을 주는 명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