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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베이브루스
1947년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웰의 한 니그로리그 팀에 베이브 루스 만큼 홈런을 잘 치는 타자가 있었다. 하지만 뉴욕 양키스에서 스카우트를 보낸 날, 그는 형편없는 모습을 보인다. 야구와 사랑에 빠진 외계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정체가 밝혀질 것이 두려워 일부러 그랬던 것이다. 61번째 홈런을 날려 신기록을 세운 날, 그는 자신들의 계획이 틀어질 것을 우려한 동료 외계인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는 TV시리즈 <엑스파일>의 한 에피소드인 '인간이 된 외계인'(Unnatural)의 내용이다. 1947년은 재키 로빈슨이 인종 장벽을 처음으로 허문 해이자, 일부 사람들이 외계인의 UFO가 로스웰에 떨어졌다고 믿고 있는 해이다.
'블렉 베이브 루스' 또는 '브라운 밤비노'로 불렸던 조시 깁슨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화면 속에서 그레이스(GRAYS) 유니폼을 입고 있는 흑인 선수가 그를 모델로 만들어진 것임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깁슨은 1930년대 후반 두 시즌 동안 타율이 4할, 장타율이 1.000를 넘기도 했으며, 1943년에 기록한 타율은 .521였다. 통산 962홈런, 통산 타율 .373, 한 시즌 84홈런이 깁슨이 세웠다고 믿어지고 있는 기록 등이다.
명예의 전당에 걸려 있는 동판에는 그가 '거의 800개'(almost 800)를 쳤다고 적혀 있다. 반면 역사가 존 코스타스는 깁슨의 홈런수를 통산 823개로 제시했다. 통산 타율 역시 최저 .354에서 최고 .384까지 제각각. 깁슨의 기록이 정확하게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가 니그로리그 선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가 뛴 독립리그(주로 해외 리그)와 세미 프로리그 경기까지 포함돼 있다.
깁슨의 니그로리그 공식기록은 510경기 타율 .359 115홈런 432타점, 장타율 .648에 불과하다. 하지만 당시 니그로리그는 유일하게 관중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따라서 모든 선수가 참가할 수 있는 일요일 경기만 공식경기로 인정했다(대신 일요일은 무조건 더블헤더였다). 깁슨에 대한 신화는 위와 같은 불확실한 숫자들보다는 당시 같이 뛴 선수들의 증언이나 목격담이 더 믿을 만하다.
블랙 베이브 루스
니그로리그 최고의 투수로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들을 쩔쩔매게 했던 세이첼 페이지는 자기가 경험한 최고의 선수로 깁슨을 꼽았다. 역시 니그로리그 스타였던 몬테 어빈은 '테드 윌리엄스의 눈과 베이브 루스의 파워를 가진 선수'로 평가했다. 니그로리그 연구가 로버트 피터슨은 "아마도 깁슨이 역대 최고의 파워히터일 것이다. 루스를 제외하지 않더라도"라고 말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게 아니겠냐고? 그렇다면 다음의 말을 들어보자. "그가 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 공을 1마일(1.6km)까지 날려보낼 수 있으며, 흔들의자에 앉아서도 공을 받아낼 수 있다. 송구는 총알과 같다. 최고의 포수는 깁슨이다". 그를 워싱턴 세너터스에서 뛰게 하기 위해 노력했던 월터 존슨의 말이다.
당시 메이저리그는 부수입을 위해 올스타 팀을 만들어 니그로리그 올스타와 자주 대결을 시켰다. 깁슨은 1934년에 30승을 거둔 디지 딘 [딘 레전드 스토리] 2경기 연속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자니 반 더 미어 같은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들을 상대한 61차례 타석에서 .426와 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신체조건(185cm 98kg)이 루스(188cm 98kg)와 거의 같았으며, 정식 지도를 전혀 받지 못했음에도 교과서적인 스윙 폼을 가지고 있었던 깁슨은 무시무시한 파워를 자랑했다. 트레이드 마크는 역시 초대형 홈런이었다. 그는 포브스필드의 139m 센터 필드를 처음으로 넘긴 타자였으며, 양키스타디움에서 날린 홈런은 훗날 177m로 추정됐다. 양키스타디움 86년 역사에서 나온 장외홈런 3개는 양키스 선수인 미키 맨틀이 날린 하나와 깁슨이 날린 2개다.
깁슨은 폴로 경기장을 개조해 만든 초대형 야구장인 폴로그라운드에서도 장외홈런을 때려냈다. 그가 타구를 날린 후 한참 만에 누가 찾아왔는데, 경기장 뒤 기차역에서 일하는 역무원이었다. 승강장에 공이 떨어진 것을 목격한 역무원이 도대체 누군가 싶어서 달려온 것이었다. 거리는 180m가 훨씬 넘었다.
어느날 깁슨이 피츠버그 포브스필드에서 날린 타구는 점이 되어 사라졌다. 다음날 깁슨은 워싱턴 그리피스스타디움에서 다시 큰 타구를 날렸는데 펜스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잡혔다. 그러자 주심이 말했다. "네가 어제 날린 타구는 아웃이야". 페이지는 돔구장 시대가 열린 소감을 "깁슨이 지금 태어났더라면 경기에 나서지 못했을 거야. 지붕이라는 지붕은 죄다 부셔놨을 테니까"라고 밝혔다.
깁슨이 주로 활동한 그레이스의 홈구장은 포브스필드와 그리피스스타디움이었다(그레이스는 빈 경기장을 찾아 번번히 피츠버그와 워싱턴을 옮겨다녔다). 포브스필드는 좌로부터 110-132-91m, 그리피스스타디움은 124-128m-98m으로, 우측 펜스보다 좌측 펜스가 훨씬 깊어 우타자인 깁슨에게는 크게 불리한 구장이었다. 이에 비해 루스가 뛴 양키스타디움의 우측 펜스는 90m에 불과했다.
니그로리그의 수퍼스타
깁슨은 1911년 조지아주 부에나비스타에서 한 소작농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인종 차별을 견디다 못한 아버지는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가족들을 남겨두고 먼저 북부로 떠났다. 아버지가 피츠버그의 철광소에 일자리를 구하면서 깁슨도 13살 때 피츠버그로 옮겨올 수 있었다. 이는 아버지가 그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남부에 있었다면 깁슨은 방망이 대신 농기구를 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 흑인이 그나마 차별을 덜 받을 수 있었던 스포츠는 복싱과 육상이었다. 깁슨도 육상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한 것은 야구였다. 깁슨은 전기 기술자가 되라는 아버지의 소박한 바람을 뒤로 하고 세미 프로 팀에서 뛰기 시작했다. 17살 때 깁슨은 한 살 연상의 헬렌 매슨과 결혼했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 아내가 쌍둥이를 낳고 세상을 떠났다. 아들의 이름을 조시 주니어, 딸의 이름을 헬렌으로 지은 깁슨은, 돈을 벌기 위해 부르는 곳이면 어디라도 달려갔다. 차비를 아끼기 위해 웬만한 거리는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다녔다.
1930년, 피츠버그에 기반을 둔 동부 최강 홈스테드 그레이스와 서부 최강 캔자스시티 모낙스 간의 니그로리그 빅 매치가 성사됐다. 모낙스가 가져온 임시 조명시설이 켜졌음에도 여전히 어두컴컴한 포브스필드는 3만명으로 가득찼다.
하지만 곧 일이 터졌다. 그레이스 포수 벅 유잉이 어두운 조명 아래서 강속구 투수 스모키 조 윌리엄스이 공을 받다 손가락이 부러진 것(유잉이 선수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거짓말을 했다는 설도 있다). 감독은 선수들을 불러놓고 자원자를 받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 때 선수들의 눈에 관중석에 앉아 있는 '세미 프로리그 스타' 깁슨이 눈에 띄었다. 선수들은 감독에게 깁슨을 추천했고 깁슨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정식으로 입단했다(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1932년 피츠버그 크로포드로 이적한 깁슨은 1933년 137경기에서 .467의 타율과 함께 55개의 홈런을 날렸고, 1934년에는 69홈런을 기록했다. 1937년에는 다시 그레이스로 돌아와 벅 레오나드와 함께 니그로리그 최강의 쌍포를 이뤘다.
1937년 깁슨은 페이지, 쿨 파파 벨 등의 니그로리그 스타들과 함께 도미니카 리그에 진출했다. 이듬해 그레이스로 돌아왔지만, 1940년 이번에는 베네수엘라 리그에 진출했다. 하지만 시즌 중 리그는 해체됐고 깁슨은 멕시코 리그 베라크루스에 입단했다. 깁슨이 다른 니그로리그 스타들과 마찬가지로 중남리 리그를 전전한 것은 니그로리그에서만 뛰어서는 생활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깁슨의 니그로리그 연봉은 4000달러였는데, 멕시코에서는 2000달러를 더 벌 수 있었다(한편 루스의 연봉은 이미 1921년에 5만2000달러를 넘어섰다).
1942년 그레이스는 깁슨을 데려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그를 계약 불이행으로 고소한 것. 결국 깁슨은 고소를 취하받는 조건으로 다시 그레이스 선수가 됐다. 1942년은 니그로리그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한 해였다. 25년 만에 열린 니그로리그 월드시리즈에서 깁슨의 그레이스는 모낙스를 상대로 4연승을 거뒀다. 하지만 깁슨의 몸에는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야구와 목숨을 바꾸다
1942년 말부터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 깁슨은 1943년 새해 벽두부터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뇌종양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그 순간 깁슨에게는 두 가지 갈림길이 있었다. 수술을 받고 야구를 관두느냐, 아니면 야구를 위해 남은 시간을 포기하느냐. 하지만 깁슨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목표가 하나 남아 있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최초의 흑인선수가 되는 것. 단 하루라도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것이 꿈이었던 깁슨은 야구를 택했다.
깁슨은 참을 수 없는 두통은 물론 종종 혼수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갈수록 나빠지는 건강에도 여전히 뛰어난 경기력을 보였다. 하지만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약물과 술에 의지했고, 그 강도는 갈수록 높아졌다. 그러던 1946년, 마침내 무릎까지 고장났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깁슨은 무너져 내렸다.
1947년 1월20일, 깁슨은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는 직감에 가족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그리고 즐겁게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평소에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푸에르토리코 리그 MVP 트로피를 품에 안고 잠자리에 든 깁슨은 다음날 눈을 뜨지 못했다(하지만 실제로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중 심장발작을 일으겼다는 것이 더 정설이다). 35번째 생일이 한 달 지난 후 일이었다.
깁슨이 세상을 떠나고 석 달 후, 깁슨이 자신의 손으로 부수고 싶었던 인종의 벽은 무너졌다. 주인공은 재키 로빈슨이었다. 이듬해 메이저리그에 첫번째 흑인 포수가 등장했다. 니그로리그 시절 깁슨이 각별히 아꼈던 로이 캄파넬라였다. 같은 해 '영감님' 페이지도 41세(실제로는 50세가 넘는) 나이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올랐다. 1,2년 만 더 살았더라면 깁슨도 마지막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니그로리그 동료들은 깁슨의 요절이 '메이저리그 울화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깁슨은 메이저리그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선수였고,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워싱턴 세너터스는 깁슨 영입을 시도했다 케네소 랜디스 커미셔너에게 저지를 당하기도 했다. 또한 브랜치 리키가 고른 최종 후보 명단에는 깁슨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1년에 200경기가 넘는 엄청난 경기수, 엄청난 이동거리는 깁슨의 몸을 갉아먹었다. 게다가 그는 포수였다.
1972년, 깁슨은 페이지에 이어 니그로리거 2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무덤에는 1975년까지 아무런 비석도 세워지지 않았다.
다시 <엑스파일>의 마지막 장면. 쓰러진 그는 비밀을 알고 있는 (백인) 인간 친구가 달려와 끌어안자 '우리의 피는 인간에게 독'이라면서 자기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친구의 손에 뭍어나온 것은 사람의 붉은 피였다. 야구를 사랑했던, 그래서 인간이 되고 싶었던 외계인은 비로소 미소와 함께 눈을 감았다. 깁슨이 그토록 원했던 것도 인간의 붉은 피였을 뿐이다.
어쩌면 야구팬들이 열광하는 베이브루스나 행크아론을 뛰어넘는
조용한 'King of power hitter' 일지도...
첫댓글 그냥 대단한 선수군요.. 흑인 차별만 아니였더라면.ㅡㅡ;; 이런 저런 기록보다 같이 뛰어본 선수들이 느끼고 하는 말이 확실하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근에 스테로이드 파문이 일고 있는데 저런 선수가 야구계에 있다면 야구계가 발전하지 않을까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