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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 취소 마무리(....)로 끝난 고려 - 거란 전쟁 드라마가 종영된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네요.
초반에 양규장군의 묘사 등 정말 흥미있게 봤습니다만 중-후반 내용은 정말이지 처참하다고 밖에 할 수 없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ㅜㅜ
특히 실망한 부분은 2차 여요전쟁과 3차 여요전쟁 사이의 소규모 전투에 대한 묘사가 너무 처참했다는 겁니다. 당시 강동 6주 지역에서는 중-소규모의 전투가 매번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건 거의 한 컷으로 넘어갔으니까요.
특히 의주지역에 거란의 보주성 축성은 무조건 언급했어야 함에도 언급조차 되지 않았죠.
현종6년(1015) 1월
거란이 압록강에 교량을 가설한 후 다리의 좌우에 동서로 성을 쌓으므로, 아군이 장수를 시켜 쳐부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계묘일. 거란군이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자 장군 고적여(高積餘)와 조익(趙弋) 등이 공격해 물리쳤다.
갑진일. 거란군이 다시 통주(通州)로 침공해 왔다.
계해일. 흥화진대장군(興化鎭大將軍) 정신용(鄭神勇), 별장 주연(周演), 산원(散員) 임억(任憶), 교위 양춘(楊春), 태의승(太醫丞) 손간(孫簡), 태사승(太史丞) 강승영(康承穎) 등이 군사를 이끌고 거란군의 후미를 기습해 7백여 명을 죽였으나, 정신용 등 여섯 명도 전사하였다.
정묘일. 거란이 영주성(寧州城 : 지금의 평안북도 안주)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경오일. 대장군 고적여(高積餘), 장군 소충현(蘇忠玄)과 고연적(高延迪), 산원(山員) 김극(金克), 별장 광참(光參) 등이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거란군은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좌(王佐)와 녹사(錄事) 노현좌(盧玄佐)를 포로로 잡아갔다.
현종7년
정월 경술일. 거란의 야율세량(耶律世良)과 소굴열(蕭屈烈)이 곽주(郭州 : 지금의 평안북도 곽산군)를 침공하자, 아군이 맞붙어 싸웠으나 수만 명의 전사자가 났으며 적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여 돌아갔다.
거란이 압록강 이남에 보주성을 쌓은 뒤로, 거란의 중-소규모 병력 투사가 끈질기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전역은 강동 6주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고려로서 이와 같은 인적 물적 출혈을 감내한다는 것은 매우 큰 부담이었을 겁니다.
다행히(?) 거란의 대규모 한타 공격은 영웅적인 귀주대첩으로 고려의 승리로 귀결될 수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저 보주성은 견고했습니다. 심지어 거란 내부에 반란이 일어나자 고려에서는 보주성 공략을 시도해보지만 실패로 귀결됩니다.
20년(1029)....
"압록강(鴨綠江) 동쪽을 지금까지 거란이 성을 수축해 차지하고 있는데, 이제 기회를 엿보아 그것을 빼앗아야 합니다.”라고 건의했으나, 최사위(崔士威)·서눌(徐訥)·김맹(金猛) 등은 모두 글을 올려 안된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곽원이 우겨서 군사를 보내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울화가 치민 나머지 등창이 나서 죽었다.
고려사 열전 곽원
열전에서는 곽원의 일탈행위로 그려지는데, 저런 공략이 중앙의 의지가 없이 일어났다고 보기는 힘들죠. 더구나 "참 타이밍이 좋게도 곽원은 알아서 세상을 떠나줬으니", 거란 측에서 딴지를 걸면 곽원의 일탈행위 였고 이미 죽었으니 우리 알 바 아님이라고 할 수도 있었죠.
어쨌든 거란에서 반란이 일어난 상태에서 조차 공략에 실패한 곳이니 만큼 고려는 어쩔 수 없이 보주 지역에 대한 공략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란은 필요할 때마다 보주성을 통해서 고려에 적절히 "압박"을 가할 수 있었고요.
이런 상황에서 송나라와의 공식적인 교섭은 한동안 이루어질 수 없게됩니다. 보주성 공략시도가 1029년이었고 송나라에대한 공식적인 사신 파견은 1030년 이후 한동안 이루어지지 못하게됩니다.
그 후로는 사신이 끊어져 중국과 통하지 못한 지 43년간이 된다
- 송사 고려전-
물론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란이 보주성을 가지고 적절히 "압박"하는 상황에서는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문종8년(1054) 7월
이 달에 거란(契丹)이 비로소 포주성(抱州城) 동쪽 들판에 궁구문란(弓口門欄)을 설치하였다.
문종 12년(1058) 8
왕이 탐라(耽羅) 및 영암(靈巖)에서 재목(材木)을 베어 큰 배를 만들어 장차 송(宋)과 통하려고 하니,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에서 아뢰기를, "... 중국(中國)에 대하여서는 실로 도움 받을 것이 없습니다. 만일 거란과 영원히 국교를 끊지 않으려면 송과 사신을 통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
나중에 송과 다시 국교를 회복하기는 합니다만 그때에도 거란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어서 원래 통교루트인 개성 - 산동루트에서 전라 - 절강 루트로 바꾸기 까지 합니다.
과거에 高麗 사신들이 오갈 적에는 모두 登州를 경유하였는데, [熙寧] 7년(A.D.1074; 高麗 文宗 28)에 그의 신하 金良鑑을 보내와 아뢰기를, “契丹을 멀리하고 싶으니 길을 바꾸어 明州를 경유하여 대궐에 이르겠습니다.”하니,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송사 고려전
어쨌든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보주는 고려에게 그만큼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과의 관계에서 참고 참았으며 거란이 멸망하기 직전에 금나라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보주성에 대한 직접적인 공략은 하지 않고, 오히려 식량을 원조하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예종 11년(1116)년 3월
요(遼)의 내원성(來遠城)·파주성(把州城, 보주성) 2성이 여진(女眞)의 공격을 받아 성 안에 식량이 바닥났다는 보고를 듣고,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 소억(邵億)을 보내 쌀 1,000석(石)을 보냈지만 내원성의 통군(統軍)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고려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결코 모험을 하지 않은 것이죠. 물론 군사를 배치하고서 만일의 사태는 대비를 했겠지만 말이죠. 그리고 요나라가 정말 망할 것 같으니 그 지역 거란 군사에게 고려로 투항하라 요구합니다.
예종 11년(1116)년 8월
금나라의 장군 살갈(撒喝)이 요나라의 내원성(來遠城 : 지금의 압록강 검동도)과 포주성(抱州成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지역)을 공격해 거진 함락시키자 요나라 통군(統軍) 야율영(耶律寧)이 부대를 이끌고 도망하려 했다. 왕이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한교여(韓曒如)를 보내어 귀부할 것을 설득했으나, 야율영은 왕의 공식 문서가 없다며 거절했다. 한교여가 급히 사정을 보고하자, 왕은 추밀원(樞密院)으로 하여금 공문을 갖추어 보내게 하려 했다. 그러나 재신과 간관들은, 그가 왕의 공식문서를 요구하지만 그 속뜻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설득을 중지하라고 건의했다.
다만 이렇게까지 했어도 고려는 보주가 고려에 귀속되어야 하는 땅이었음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금나라에게 우리땅이라는 것을 못 박죠.
예종 11년(1116)년 8월
이에 왕이 사신을 금나라에 보내, 포주(抱州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는 본래 우리의 옛 땅이니 돌려받기를 바란다고 요청했다. 그러자 금나라 임금은 사신더러 본국이 스스로 취하라고 말했다.
이듬해 거란은 더이상 버틸수 없게 되자 포주를 버리고 떠나게 됩니다.
예종 12(1117)년 3월
"고을 백성들과 관할 지역을 인계하고 가니 이를 인수한 뒤에는 우리 황제의 조칙에 따라 시행하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내원성과 포주성을 우리에게 반환한 후 배를 타고 도망가 버리자 우리 군대가 두 성에 들어가 많은 양의 무기 및 화폐와 보물을 압수했다.
사실 압록강에 검동도에 있는 내원성은 금나라가 계속 공격해서 함락시킨 상태였습니다. 금나라는 당연히 보주성도 세트로 자신의 손에 떨어질 거라 여겼지만 말이죠.
撒喝·阿實賚 등이 保州를 공격하자 遼나라 守將이 달아났는데, 高麗 병사들이 벌써 城 안에 있었다. 얼마후에 高麗國王이 蒲馬를 시켜 保州를 달라고 하니, 高麗王에게 詔書를 내려 曉諭하기를 “保州는 그대의 변경에 가깝기에 그대가 직접 탈취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지금은 우리의 군사들을 고생시켜 적을 쳐부수어 城이 함락되었소. 그리고 蒲馬는 다만 입으로만 말하였을 뿐이므로 表를 올려 요청한다면 그 때 가서 달리 의논하겠소.” 하였다.
금사 고려전
일이야 어쨌든 먼저 선점한 사람이 유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나중에 정강의 변으로 금이 강국이 된 뒤 보주를 토해내라 마라 등의 외교적 분쟁은 있지만 결국 "의주"라는 이름으로 고치고 고려 고유의 땅이 됩니다.
왕이 기뻐하여 의주방어사(義州防禦使)로 고치고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추쇄(推刷)하여 민호를 채웠다. 이에 다시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고 관방(關防)을 두었다. 인종 4년(1126)에 금나라에서도 또한 의주를 우리에게 귀속시켰다.
고려사 지 의주
1015년 부터 1117년 까지 약 100여년이란 시간이 걸렸네요. 보주를 점령할때 고려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은 아마 필설로 형용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한 감정은 당시 하례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종12년(1117) 3월
압록강의 옛 터와 계림(鷄林)의 옛 땅은 선조 때부터 본래 국경을 방어하는 요충지였습니다. 그것이 중도에 요나라의 침탈을 당했으니 온 백성이 분노했을 뿐 만 아니라 신령마저도 수치로 여겨 왔습니다.....전해 온 기쁜 소식을 처음 접하게 되니, 그 공적을 돌에 새겨 길이 전해야 하나 미처 무어라 칭송할 말을 찾지 못하겠나이다. 술잔을 받들어 만수무강을 빌면서 용약환희하는 저희들의 마음을 표시하려 합니다.
"군자보구 십년불만"이라는 말이 있죠. 개인의 복수가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 한데, 하물며 국가 혹은 민족의 수치를 씻는 일에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이 당연하겠죠. 어쨌든 고려가 장시간의 "생존"끝에 성공했던 사례는(그리고 이건 나중에 여-원 관계에서 쌍성총관부회복으로 재현 될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전근대 국가들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첫댓글 재밌는 글을 잘 읽었습니다. 고려인들이 살아온 길을 생각하니 울컥하게 되는군요.
뭐 고려도 거란과 협상해서 여진인들 땅을 빼앗은 전적이 있기 때문에(강동 6주.....) 여진 입장에서는 나쁜애들이었을 겁니다 ^^;;
곽원의 저 공격은...
요동성에서 대연림의 흥료국 발해부흥운동 때인거죠?
여-요 모두 상태가 안좋았을텐데도 걍 졌다 가 떠버렸을 정도라면, 보주성 방어력이 어느 정도였길래...ㄷㄷㄷ
보주성 방어체계를 설명한 글을 봤는데 후방 압록강 중간에 수군기지를 두고 바로 대륙 측 압록강변에도 방어기지를 구축해서 수군이 없으면 공략이 거의 불가능한 다중방어체계더군요 그분이 보주성 방어체계를 설명하면서 중국 양양성의 번성과 한수를 이용한 방어체계나 영화 반지의제왕의 곤도르왕국이 구축한 수도권방어선을 예로 드시며 설명하셨는데 이해가 되더라고요
@환상 아아...양양-번성 말씀하시니 바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당시 방어책임자도 현지인들 동원에 유리한 발해인이었던것 같고, 정말 공략이 힘들었겠군요.
@무장간첩 결정적으로 당시 고려는 육군에 몰빵하고 수군은 거의 없다시피해서......당시 압록강에 배치된 요나라 수군을 상대할 전력이 없는 이상 그냥 무력으로는 못 먹는다고 봐야 합니다.
@환상 환상님께서 잘 설명해주셨는데 첨언하자면 거란은 압록강 하구인 보주성에 140척의 선박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북방민족 왕조인 주제에 말이죠. 괜히 고려가 송과 국교재개하면서 남쪽으로 돌아간게 아닙니다.(압록강 하구와 산동이 무슨 관계냐고 하실수도 있는데 그 발해가 무왕시절 압록강 하구에서 배 띄워서 등주 쳤습니다.)
@배달의 민족 네, 더더욱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제가 딱 한명 기억하는 그 방어책임자가 하씨였나? 고구려&발해계로 추측된다고 본 것 같은데, 그게 맞다면 방어상의 특징 때문이라도 그래야만 했겠네요.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