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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선(如來禪).조사선(祖師禪).염불선.남종선과 북종선
9. 여래선(如來禪)
부처님 말씀 의거해 수행하고 깨닫는 선
앙산이 처음으로 조사선과 여래선 구분
‘여래선(如來禪)’이란 ‘여래의 말씀’ 즉 ‘부처님께서 설한 경전에 의거, 수행하여 깨닫는 선’이라는 뜻이다. 또는 여래가 깨달은 경지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다른 말로는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 ‘최상승선(最上乘禪, 최고의 선)’이라고 한다.
규봉 종밀(780-841)은 ‘도서(都序)’에서 당시까지의 모든 수행법을 분류하면서, 여래선을 최상승선이라고 하여 가장 위대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는 학술적인 명칭일 뿐 문파(門派)적인 명칭은 아니다.
여래선은 자신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번뇌가 없으며, 중생은 누구나 최고의 지혜인 무루지성(無漏智性)을 갖추고 있고, 또 이 마음이 본래 부처(진리)와 다름없다는 이치를 믿고 깨닫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경지와 관점, 목표, 지향하는 바는 조사선, 간화선과 같다.
그러나 조사선과 그 후대에 성립한 간화선에서는 여래선을 일컬어 여래의 말씀 즉 경전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여 조사선보다 낮은 단계에 있는 선으로 폄칭했다. 또 여래선은 경전 탐구 즉 언어문자를 벗어나지 못했으며(불립문자), 학문적, 이치적으로 안 것에 불과하다고 하여 ‘의리선(義理禪)’이라고 폄칭했다. 실참(實) 없이 지식적으로 이해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시대적으로는 육조 혜능 이전까지를 여래선, 그 이후를 조사선이라고 한다.
여래선, 조사선에 대한 구분은 육조 혜능 때까지는 없었다. 혜능 계통의 마조 도일의 문하에서 종래의 선(禪) 특히 북종선과 차별화하기 위하여 조사선을 내세우면서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이것은 혜능의 남종선에서 자파(自派, 조사선)가 월등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처음으로 종래의 선을 여래선, 의리선이라고 격하하고 자파(自派)의 선(禪)인 조사선을 우월한 위치에 놓고서 차별화를 시도한 것은 위앙종을 개척한 앙산 혜적(仰山慧寂, 803∼887)이다. 그는 항상 열심히 교학(경전)을 탐구하고 있는 사제(師弟, 아우) 향엄 지한(香嚴智閑, ?~898)이 꼴사나웠는지 어느 날 그에게 물었다.
‘전등록’ 11권 「앙산」장(章)에 나온다.
“향엄, 근래 그대의 깨달은 바가 어떠한가.”
향엄이 말했다. “지난해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네. 금년의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네. 지난해에는 송곳을 꽂을 땅이 없었는데 금년에는 송곳마저 없구나.”
이 말은 번뇌 망상 등 분별심이 완전히 사라져서 설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향엄의 대답에 앙산은 “사제(아우)는 다만 여래선을 얻었을 뿐, 아직 조사선은 얻지를 못했네(師弟, 只得如來禪, 未得祖師禪).”라고 했는데, 이것이 조사선과 여래선을 비교, 구분한 최초의 근거이다.
여래선이란 달마의 문하에 전해오는 선을 가리킨다. 그러나 중당(中唐) 이후 선종에서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고 하여 언어문자보다는 방할(棒喝)로, 또 여래의 말씀(경전)보다는 조사의 말씀(조사어록)으로 납자들을 제접(提接, 이끌어 줌), 지도하게 되면서 경전에 의존하던 과거의 선은 여래선, 지금의 선은 조사선이라고 한 것이다.
한마디로 여래 즉 부처님 보다는 조사(祖師)를 더 중시한 것인데, 이는 당말까지 선종 사원에서 대웅전을 두지 않고 부처님도 모시지 않은 것과도 상통한다. 즉 그들은 부처님보다는 조사를 더 높이 받들었고, 경전보다는 조사의 말씀 즉 어록을 더 중시하여 수행했다.
여래선에 대하여 ‘능가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무엇을 여래선이라고 하는가? 부처님과 같은 경지(佛地)에 들어가서 스스로 성스러운 지혜를 깨달아서 삼종락(三種樂: 천상락, 선락(禪樂), 열반락)에 머물러 모든 중생을 위해 불가사의(不思議)한 많은 일을 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래선이라고 한다.”
10. 조사선(祖師禪)
보리달마와 그가 전한 선을 가리키는 말
북종선 외 중국 5가7종 모두 여기 속해
조사선이란 여래선(如來禪), 의리선(義理禪)의 상대적인 말로, 붓다가 설한 경전이나 언어문자에 의존하지 아니하고(不立文字) 곧바로 그 마음을 직시(直指人心)하여 깨닫게 하는 선법이다.
선문답에서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이냐(如何是 祖師西來意)’고 묻는 상투적인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사선은 보리달마와 그가 전한 선을 가리킨다. 시대적으로는 육조혜능(639~713)에서 대혜종고(1089∼1163) 이전 까지, 즉 간화선이 성립하는 1100년대 이전까지가 조사선 시대로, 북종선 외의 중국 5가7종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조사선을 확립시킨 사람은 혜능의 손제자인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이다. 그는 “네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是佛)”라고 하여 도(道)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님을 직시하게 했으며, 또 “평상심이 곧 진리(平常心是道)”라고 하여, 선은 항상 일상 속에서 구현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마조도일에 이어 백장회해(720~814)-황벽희운(?~850)-임제의현(?~867), 그리고 조주와 위산영우 등 기라성 같은 선승들이 연달아 출현하면서 조사선은 크게 확장, 발전했는데, 이 시대가 이른바 조사선의 황금기, 전성기이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임제할’로 납자들을 제접, 지도하던 임제의현 시대가 조사선의 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사선의 사상과 정신을 대표하는 말이 ‘이심전심’,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선(禪)의 이치는 오로지 조사와 조사 사이에서만 전해질 수 있는(祖祖相傳) 격외의 도리로 그 방법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며, 경전이나 언어문자 외에 별도로 전하는 것으로 곧바로 그 마음을 직시하게 하여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조사선에서는 여래 즉 부처님 보다는 조사(祖師)를 더 높이 존숭한다. 여래의 말씀보다는 조사의 말씀을 더 중시했고, 경전보다는 조사어록에 의거하여 수행했는데, 이는 당말 북송 초까지 선종사원(총림)에서 대웅전을 두지 않았으며, 불상을 모시지 않은 것과도 상통한다. 한마디로 선종의 조사는 현신불(現身佛)로 그의 말씀은 곧 불언(佛言)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으며, 수행과 깨달음의 지남(指南)이었다.
조사선이니 여래선이니 하는 말은 ‘조사선의 완성자’라고 일컬어지는 마조도일 때까지는 없었다. 마조-백장-위산, 위산의 제자 앙산혜적(807∼883. 위앙종)이 만든 말로, 경전탐구에 치중해 있는 향엄지엄을 가리켜 “여래선은 알았다고 할 수 있으나 아직 조사선을 깨닫지 못했다”고 한데서 비롯된 말이다.
남종선 즉 조사선의 선승들은 항상 조사선을 우위에 두고 종래의 선과 북종선을 평가했는데, 종래의 선은 여래선, 의리선(義理禪)으로 경전과 교리에 의존하고 있으며, 언어문자(義理, 義解)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선이라고 폄하했다. 이후 의리선이라는 말은 문자 선승들을 비판, 폄하하는 말로 정착 되었는데 사실 조사선과 여래선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다.
조사선과 간화선은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몇 가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당대(唐代) 조사선에서는 좌선을 중시하지 않았다. 좌선의 다소(多少)는 개인의 능력과 시간 여하에 맡겼고, 청규에서는 일체 규정하지 않았다. 하루 4번 6∼7시간 이상씩 좌선하기 시작한 것은 남송 시대 간화선 이후이다.
대신 방장의 법문과 독참(개인지도 및 점검), 청익(請益, 보충 질문)은 규정화했는데, 이로 본다면 조사선 시대에는 좌선보다는 설법과 법문을 통하여 지혜를 구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지혜가 곧 부처였기 때문이다. 또 조사선은 대화, 선문답을 통하여 깨달았다.
11. 염불선
선과 염불을 함께 수행하는 것을 이르는 말
청말 허운화상이 조고화두·염불시수 정착
‘염불선(念佛禪)’이란 선(禪)과 염불이 결합된 것, 즉 선과 염불을 함께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선과 염불을 적극적으로 결합, 실천시킨 이는 송초 법안종의 선승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이다. 그는 ‘만선동귀집’을 저술하여 칭명염불에 의한 ‘선정일치(禪淨一致, 선과 정토를 하나로 만듬)’, ‘선정겸수(禪淨兼修, 선과 정토를 겸수)’를 강조했으며 그와 동시에 영명사에 서방향엄전(西方香嚴殿)을 세우고 염불도량을 만들었다.
또 운문종의 천의의회(天衣義懷)와 제자 혜림종본, ‘선원청규’ 편찬자인 장로종색, 임제종의 사심오신(死心悟新), 묵조선의 진헐청료도 염불을 제창했고, 원대의 선승 고봉원묘, 중본명본(中本明本), 초석범기(楚石梵琦) 등도 염불선을 제창한 주요 선승이다. 그리고 명대의 선승 운서주굉과 감산덕청, 지욱(智旭)은 더욱더 염불선자, 염불선을 실천한 이들이다. 명청(明淸) 이후 오늘날까지 중국불교는 선과 정토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 불교도 사상적으로는 선과 화엄이지만, 외형적으로는 선과 염불이 합해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선과 염불을 결합시킨 것은 선승들이다. 영명연수 등 송대의 선승들은 본격적으로 좌선에 염불을 도입했다. 즉 좌선을 하면서 공안 대신 아미타불을 생각하거나 나지막한 소리로 아미타불을 부르는 칭명염불, 또는 고성염불 등을 말한다.
영명연수는 ‘만선동귀집’에서 “단 한번이라도 나무불(南無佛)을 염하면 진사겁(塵沙劫, 모래 같은 무수한 겁)의 죄가 소멸되고, 마침내 불도를 이루게 된다.”, “십념(十念)을 갖추면 몸이 정토에 태어난다.”, “업장이 녹고 원액(寃厄)이 소멸된다.”, “높은 소리로 염불을 하면 마군들이 모두 두려워 흩어진다.” 등 염불의 효력과 공덕을 강조했는데, 이는 전형적인 정토교이다.
그런데 고칙 공안 참구를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고, 지혜가 곧 부처이며, 깨달으면 곧장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말하고 있는 선종(禪宗)에서, 아미타불을 불러서 사후 정토에 태어나기를 기원하고 또 “단 한번이라도 나무불(南無佛)을 염하면 마침내 불도를 이루게 된다.”고 하는 것은 좀 의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송초에 이르러 왜 선승들이 염불을 겸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는 않지만, 선의 한계(오랜 기간 참선을 했지만 진전이 없고), 선과 깨달음에 대한 확신 부족 등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는 칭명염불을 겸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염불선은 중국 원(元)나라 때는 간화선에 버금갈 정도였고, 명(明), 청(淸) 때에는 ‘염불시수(念佛是誰,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화두가 성립되어 무자화두를 밀어내고 크게 발전했다.
명말의 유명한 선승인 운서주굉은 ‘선관책진’에서 “염불을 한번 혹은 3, 5, 7번 부르고 묵묵히 반문하라. 아미타불을 부르는 이 한 소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부처를 염(念)하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반문하라. 오로지 그렇게 의문하라. 만약 그렇게 반문했는데도 깨달음에 가까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정이 간절하지 못한 것이다. 다시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고 화두를 들라”고 지철선사(智徹禪師)의 정토현문(淨土玄門)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역시 염불선을 제창한 이다.
그리고 청말의 대표적인 고승 허운화상은 ‘조고화두(照顧話頭), 염불시수(念佛是誰)’를 정착시킨 선승이다. 지금 중국 선종사원에는 염불시수(念佛是誰)가 무자화두를 밀어내고 천하통일을 하였는데, 어디를 가든 선원 입구의 양쪽 기둥에는 조고화두(照顧話頭), 염불시수(念佛是誰)가 붙어 있다. 무자는 고물이 되어 시간 속으로 사라진지 백년도 넘는다.
12. 남종선과 북종선
혜능 법 이은 계통이 남종, 신수계통이 북종
돈오·점오는 신수와 차별화 노린 남종논리
선의 초조는 보리달마(?~ 528?)이다. 그 후 선은 2조(二祖) 혜가, 3조(祖)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弘忍, 602~675)으로 이어졌는데, 이때까지의 선은 달마가 전한 선(禪) 그 라인 하나였다.
그런데 당(唐) 초기 5조 홍인의 뛰어난 두 제자, 즉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과 대통신수(大通神秀, 606~706)에 의하여 선은 남종선과 북종선으로 갈라졌다. 혜능의 법을 이은 계통을 남종선이라 하고 신수의 계통을 이은 선을 북종선이라고 한다.
남종이나 북종의 명칭은 그들의 활동지역과 관련이 깊다. 혜능이 오밤중에 오조홍인으로부터 전법의 징표인 가사와 발우를 받아가지고 남쪽으로 줄행랑을 놓았다는 일화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혜능과 그 제자들은 주로 남쪽인 화남(華南)과 강서(江西) 등에서 선을 펼쳤기 때문에 남종선(南宗, 남쪽에 뿌리를 둠)이라고 한 것이다. 또 신수와 그 제자들은 북쪽에 위치한 낙양과 장안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북종선이라고 했다. 이것을 줄여서 ‘남능북수(南能北秀, 남은 혜능, 북은 신수)’라고 한다.
남종선과 북종선의 사상적 차이는 수증법(修證法, 닦아 깨닫는 방법), 즉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에 있다. 돈오란 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번에 최고의 경지까지 깨닫는다는 뜻이고, 점수는 점오(漸悟)와 같은 말로 하나하나 깨달아 올라감, 점진적·단계적으로 수행하여 깨닫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남돈북점(南頓北漸, 남종은 돈오, 북종은 점수)’이라고 한다.
이 돈오와 점오는 관점의 차이다. 깨닫는 순간을 놓고 보면 돈오지만, 부단히 수행한 결과 깨닫는다고 보면 점수이고 점오다. 또 돈오라는 것도 그 이전에 수행한 것이 바탕이 되어 돈오하게 되는 것이지 아무런 바탕도 없이 깨달을 수는 없다. 어쨌든 로또복권처럼 한 번에 깨닫는다(돈오)는 것은 매력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다.
돈오와 점오는 남종과 북종, 혜능과 신수를 차별화시키기 위한 남종선의 논리다. 북종의 신수는 당시 장안과 낙양, 즉 양경(兩京, 두 서울)의 법주(法主)로 대표적인 선승이었다. 매우 화려했는데, 이에 비하여 혜능은 거의 무명으로 남쪽 변방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불과했다. 혜능의 제자 하택신회(670∼762)는 스승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하여 서기 732년 하남성 활대(滑臺) 대운사(大雲寺)에서 수만 명이 모인 가운데 무차대회를 개최하고는 북종을 향하여 “신수는 방계이다. 조계 혜능이야말로 달마선의 정통 조사다”라고 포문을 열었다. 동시에 그는 돈오사상을 전개했는데, 이것을 ‘활대(滑臺)의 종론(宗論)’이라고 한다.
스승 혜능을 6조로 세우기 위한 하택의 모험적인 도전이었는데, 역사적인 이 사건으로 인하여 혜능은 입적한지 30년 만에 공식적으로 선종의 제6조가 된다. 돈황본 ‘단경’에는 그 사실을 “오조홍인이 밤 삼경이 되자 혜능을 불러서 ‘금강경’을 설해 주었는데, 혜능은 한번 듣고는 즉시에 깨달았다. 혜능은 그날 밤 법을 받았으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홍인으로부터 돈법(頓法)과 가사를 전해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육조혜능 계통의 남종선은 청원행사, 남악회양, 하택신회 등 천재적인 선승들이 배출되고, 대(代)를 이어 석두희천, 마조도일, 백장선사, 황벽, 임제 등 유명한 선승들이 속속 배출되면서 중국 선종은 남종선에서 휩쓸었다. 반면 대통신수의 북종선은 2∼3대를 지나 뛰어난 제자들이 배출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 가르침이 계승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중국 선을 총칭하는 5가7종(五家七宗)은 모두 남종선 계통이다.
사상이나 철학을 자기 당대에 성립하기란 쉽지 않다. 최소한 2대 이상 계승되어야만 성립할 수 있다. 계승자가 없으면 대부분 자기 대에서 끝난다.
[출처] 여래선(如來禪).조사선(祖師禪).염불선.남종선과 북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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