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이면 BC 605~ 536년까지 입니다. 다니엘이 약속한 그 시간이 이르러서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아예 하나님이 인간의 약을 빠짝 올립니다. 자기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는데, 철사 줄로 꽁꽁 묶여 끌려가면서 뒤돌아보고 뒤돌아보며 울면서 가는 것은 생각 안하고, 속 시원해 하십니다. 그게 에스겔에 나옵니다. ‘너희들 벌 받으니까 내가 속이 시원하다.’ 이런 구절이 예레미아 등 여러 곳에 나와요.
70년을 안식하게 해서 ‘아, 이제 내 땅이 조용하구나.’ 이렇게 하신단 말이지요. 그 하는 일에 동원된 훌륭한(착하지는 않습니다만) 자가 누구냐 하면, 그 잔인한 앗수르와 베벨론이 주님의 청소 용역회사 직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선지자들은 알아요. 이것을 아니까, 어떤 시점에게 이것을 아는 순간 그 사람의 시선은 갑자기 더 멀리 붕~ 뛰게 되지요. 사람이 자기 일에 몰두하다가 ‘하나님, 이것만은 반드시 이뤄주세요.’ 라고 철야기도를 했는데, 막상 그 시기에 이르러 모든 것이 깨어졌을 때 비로소 그동안 하나님이 주신 그 복이 나의 야망으로 인하여 가려졌다는, 허물이 벗겨지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지요.
로또복권 살 때마다 기도 안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복권을 사면서 ‘제가 욕심은 내지 않겠습니다. 1등 당첨되기를 바란다면 제가 나쁜 놈이죠. 그저 10억 정도만 당첨된다면, 교회 헌금으로 일부 내고 나머지는 아이 학비도 좀 내고 하겠습니다.’ 일종의 갈라먹기죠. ‘하나님이 좀 먹고, 나도 좀 먹고 이러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안 좋습니까.’
그렇게 기도했는데 로또가 꽝이 되면 그나마 다행인데, 1등에 당첨되었는데 로또회사가 망해서 한 푼도 못 받을 경우 정말 황당합니다. 하나님은 ‘아이고, 고소하다. 참기름보다 더 고소하다. 내가 왜 이렇게 속이 시원하지’
그러한 망가짐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라면 천만다행입니다. 자아 이미지의 노선을 계속 가다가 비로소 주님의 노선으로 합류하는 계기가 됩니다. 자아 이미지는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나의 것’인데, 주님의 노선에 합류하게 되면 ‘내 인생은 주님의 것’이 됩니다.
자아 이미지 노선으로 가게 되면 “인생은 미완성 ~”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의 노선은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인생은 미완성이 아니라 이미 완성 되었어요. 완성되고 새로운 창조가 주어져서 교체작업이 이뤄지고.
그 계기가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것에서, 성령이 임하면 ‘주신 주님의 것’으로 이전하게 되지요. 이전하면서 그동안 복음 전한 목사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을 많이 느끼게 되지요.
우리교회 나오시는 분들의 특징이 뭔가? 돈 잘 벌고 행세깨나 할 때는 다른 교회에서 다 퍼주고 하다가, 사업 망해 돈 잃고 빈 털털이가 된 후에 우리교회로 옵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원망했지만 그나마 오시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바로 그 심정이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왕도 없지요, 지도자도 없지요, 성전도 보수공사를 안 해서 엉망진창이고.
에스라 1장 1절에 보면,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응하게 하시려고’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볼 때 이것을 하나의 추임새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성경 중간 중간에 이런 말씀이 있으니까. 추임새 알지요? 가락이 흘러갈 때 ‘얼씨구나’ 하고 흥을 돋우는 것.
그러나 ‘응하게 하셨다.’는 말씀은 추임새가 아니고 ‘진짜로 말씀대로 이뤄지는구나. 야, 말씀이 장난이 아니네.’라는, 진짜로 말씀대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사람의 특징은 사람이 안 무서운 사람입니다.” 사람이 무섭다는 말은 자기 인생이 원하는 대로 안 될까 두렵다는 말이고,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전혀 안 무섭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자아 이미지가 망가졌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평소에 자아 이미지를 가지고 설쳤지요.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임에서 승자가 되었다고 으스대고 자랑하기 위한, 남을 위한 자아 이미지를 형성하다가 남에게 보여줄 것이 없게 되니까 얼마나 당황스럽겠어요.
이런 사람에게는 나와 너 뿐입니다. ‘당신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런 것은 묻지 마’ 이런 자에게, 이런 이방인에게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이 선포됩니다. 요엘 같은 경우여호와의 이름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되면, 여호와를 모르던 사람들이 여호와의 노선, 이 말씀의 노선에 합류되면서 이방인들이 여호와를 찾고, 이방인들이 예수를 구세주라고 외치는 그런 놀라운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이지요.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모습인데, 이 초대교회의 특징이 뭔가 하면 ‘예수님은 주시다.’ 라는 것을 예수님 살아 계실 때는 이야기 안 하다가 예수님이 보이지 않을 때 아주 열렬하게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구름타고 올라가셔서 보이지 않을 때, 그 때 ‘예수님은 주시다.’라고 비로소 외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눈에 보이면 교회는 없어요. 교회 와서 사람만 보이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저 인간들이 미쳤구나.’ ‘왜 미쳤지.’ ‘주님의 사랑에 미쳤네.’ 이렇게 될 때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보이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보이는 것을 매개로 사용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냥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희생하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듣고 오해를 해요. 앞의 부분 ‘모든 법적인 것은 다 치워라.’ 이 말은 굉장히 좋아하는데, 진짜 제가 강조하는 부분은 귀마개를 하고 안 들으려 해요. ‘자진해서 희생하고, 자진해서 헌금하고, 자진해서 봉사하세요.’ 이 부분은 못 들은 척합니다.
초대교회는 환란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이런 것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구약 선지자들의 말씀이 응한다는 그 맥락이 이방인까지 다 포섭해서 온 이스라엘이 함께 구원 받는, 로마서 11장 21절에 나오는 그 말씀을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보면 구약의 말씀이 많이 인용되어 있어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그런데 그 선지자의 말씀 가운데 뭐냐? ‘이스라엘 너희들은 나가 놀아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니라. 여호와를 모르는 자들에게 내가 손을 내 밀었고 --’ 이렇게 나옵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사는 곧 시간의 연결이다.’ 시간의 연결이 역사라고 아는 사람은 잘못된 거지요. 시간은 면적이 없습니다. 그냥 선으로만 있습니다. 이렇게 A지점, B지점, C지점이 있다면, A에서 B지점으로 가면 A는 없어지고 B는 A가 되고, C는 B가 됩니다. 이렇게 항상 선으로만 언급되는 것이 역사인데, 이것을 면적으로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이것을 면적화 시켜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이 전체가 언약 구조가 되면서 거의 대부분은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섯 시간 강의를 했는데 그 내용이 뭔가 하면, 다윗과 솔로몬 이야기는 거의 안 했고 앞에 있는 것과 뒷부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여기(하나님 쪽)에서 나오는 것이 어떻게 여기(이 땅)에 파급되어서 부정적으로 역사했는가?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역대기 11장부터는 뭔가 하면, 바로 이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들어간다는 말은 역사에서 떠나서, 역사는 흐름이고 흐름은 항상 미완료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솔로몬 언약 속으로 들어와 버리면 미완료가 완료로 바뀝니다. 여기서는 흐름이 아니라 정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안식입니다.
정지(stop)가 되면 세월이 지나고 흘러도 여전히 동일한 과거 완료로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이 시간이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 언약에 의해서 규정되었어요. 아무리 2010년, 2020년이 되어도 그것은 언약에 의해서 고정화되어 버렸습니다.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가는 겁니다.
다윗을 보기 전에 먼저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모든 시간과 공간을 정지화 시키는 작업을 어떤 식으로 배치했고 만들어 내는가?’ 그것을 눈여겨보시면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전쟁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제가 야베스의 기도를 설명하면서 말씀 드렸지요. 땅을 주시는데 그 땅을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전쟁을 통해서 땅을 차지하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면, 전쟁을 통해서 이 묵시적 땅, 완성의 땅은 지상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전쟁 개념으로서는 이무도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기존의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되면 기존의 전쟁과는 판이하게 다른, 아무 무기도 없고 전략도 없는데 승리가 연속되는, 하늘에서 동원된 무기로써 아래 있는 사람을 건져 올리는 전쟁을 하는데, 건짐 받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다윗 혼자뿐이란 말입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시절에 그런 경험을 했어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 싸우는. 소년이면 소년답게 집에서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놀면 되는데 어른들 전쟁하는데 나가서 어른들도 이기지 못하는 적장 골리앗을 물맷돌로 이겼습니다. 소년이 골리앗을 이긴다는 것은 모든 기성세대들이 하는 전쟁 방식은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이름이 개입된 극히 이방적인, 비 언약적인 방법이란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백성들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완전히 열배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상황에서 다윗은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쓸쓸한 사울의 입장을 한 번 감안해 보세요. 예를 들어, ‘이근호는 100인데 이장우는 10이다.’ 듣는 이장우 목사님은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는데, 실제로 성경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면 오늘 밤에 이근호 목 졸라 죽일 겁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여야 가인 값을 하거든요. 스데반이 돌이 맞아 죽듯이.
그래서 사울은 다윗에게 킬러들을 보내서 죽이려 했습니다. 그 때 다윗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런 고백이 있어야 성도입니다. ‘내가 이렇게 수모를 당하는 것은 다 하나님 당신 때문입니다. 내가 언제 골리앗을 이기고 싶었습니까? 그냥 놀러 갔다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물리쳤는데, 다른 사람들이 환영할 줄 알았는데 모두가 나를 피하고, 정말 억울합니다.’
다윗이 당하는 그 억울함이 그대로 ‘대속물’이라는 개념으로 예수님의 인생에 덮어 씌워집니다. 그래서 민중들이 원하는 엘리트, 스타 메시아와는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살수록 점점 주위의 적들을 더 많이 양산하는, 원수들을 더 많이 배출하는 그런 셈이 되어서 결국은 그들에게 죽임 당하지요.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죽잖아요.
그렇다면 성도가 말씀의 노선에 합류하려면 그 길이 무슨 길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 말씀처럼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너의 노선에서 말씀 노선으로 옮기려면 중간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데, 이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인가 하면, 나쁜 짓해서 벌 받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의롭기 짝이 없는, 하나님 때문에 사는데 그것마저 이 세상에서 서러움 당하는, 정말 하소연 할 데가 없는, 하나님 외에는 위로할 자가 없는 시편에 나오는 그런 경험을 하면서 합류될 때 그 사람은 자기가 만든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낸 인생입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이 ‘내가 또 한 생명 건졌다.’고 하십니다.
목사가 서러울 때가 어떤 경우인가 하면, 자기가 생각해도 설교가 엉망진창이라 힘이 쭉 빠져있는데, 교인들이 몰려와서 ‘목사님, 오늘 설교말씀 너무 은혜로웠습니다.’ 라고 할 때, 정말 미안하지요. 그런데 그것은 서럽지는 않고 고마워요. 그런데 정말 설교를 잘해서 흐뭇한 마음을 가지고 목사로서 자부심도 느끼는데 그 설교 듣고 여러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을 때 도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설교 준비 하지 말까? 어쩌란 말인가?’
이렇게 ‘어쩌란 말인가?’ 하는 순간에 자기의 무능함을 느끼죠. 그 무능함을 느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영이, 성령이 머리 위에 있는 순간입니다.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을 때, 나는 할 도리를 했는데 그것마저 벽에 부딪칠 때, 출입구가 보이지 않을 때, 물이 없는 반석 앞에 나를 세우셨는데, 그런데 반석에서 물이 나와서 그 물을 뒤집어썼고, 물을 마셨고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일할 때는 꼭 예상치 못한 일을 하세요.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하고는 미리 예상하지 못할 일을 뽑아 봐요. 그 뽑아놓은 것 하나도 안 일어납니다. 이것 외에 다른 식으로 또 일하세요. 반드시 그렇습니다. TV가 고장이 나서 아무리 고쳐도 나오지 않았는데, 이제 새것을 구입하려고 생각했는데, 어린 조카가 집에 놀러 와서 장난치다가 TV를 건드려서 TV가 나왔는데, 다음날 또 안 나와서 조카를 불러서 장난쳐서 TV 켜보려고 하다가 TV가 다 망가졌을 때.
분명히 이 감기는 병원에 가야 돼. 라고 생각해서 병원에 가다가 급하게 심방할 일이 생겨서 병원을 못 갔는데 병이 나았을 때 감사하지요. 그다음부터 앞으로 감기 걸려도 병원에 안 가야지. 했는데 병이 더 심하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병원에 안 가도 열심히 심방하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그 예상을 하나님이 피해 버리죠. 이렇게 되면 환장합니다.
성도의 생활을 바이브레이션(vibration)입니다. 그 재미가 스릴이 있어요. 사람이 뭔가를 예상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계시입니다. 이 자기 계시와 선지자의 말씀 계시가 자꾸 충돌이 일어나니까 한쪽은 깨집니다. 자기 계시 때문에 참된 주님의 계시가 가려지니까 참된 계시를 알려주기 위해서 나의 계시는 깨어지게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성도들을 보면, 방주 만들 때 노아가 미리 알았던 것도 아니에요. 노아가 방주 만들 때 동네 사람들은 다 비웃었습니다. 배를 만드는데 이상하게 지붕이 있고 통통하게 너구리처럼 이상하잖아요. 주님이 시키는 일은 항상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절대로 우리의 현란한 솜씨, 종교적인 테크닉, 노하우, 신학 지식 이런 것들이 일체 섞이지 않는 방법으로 우리를 사용하셔서 남들에게 복음 전하는 방식을 주님께서 고수합니다.
이렇게 주님은 일체 우리의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한 후, 공부 안하고 설교 했더니만 그것도 사용 안 합니다. 이미 자기 예상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이 말은 항상 미완료를 내다보고 있어요.
역대상 11장 10절을 봅시다. “다윗에게 있는 용사의 두목은 이러하니라. 이 사람들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다윗의 힘을 도와 나라를 얻게 하고 세워 왕을 삼았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신 말씀대로 함이었더라.”
이 대목에서 장신대에 있는 강00이라는 사람의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논문을 보면, 여호와 전쟁의 변천사를 썼는데 이 사람이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어요. 그것이 뭔가 하면, 옛날에는 여호와 전쟁을 이렇게 했고, 이렇게 했고, 등을 기술했는데, 지금 사람들이 궁금한 것이 뭐냐 하면 옛날 홍해 갈라질 때 사람들이 그냥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지요.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물을 첨벙 때린 게 아니에요. 그냥 지팡이를 뻗었더니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전쟁의 방식이라면 왜 그 다음에는 똑같은 방식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가를 성경적으로 설명을 해야 됩니다. 출애굽기 14장 14절에서 모세가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했어요. 이 말씀대로 가만히 있으면 얼마나 편합니까? 그러면 그 뒤에도 가만히 있어야 돼요.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다윗이 군대를 조직해요. 이게 어떻게 가만히 있는 겁니까? 이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논문을 쓰는 학자라면 이전에 말씀하신 ‘가만히 있음’ 그 안에 어떤 핵심적인 내용이 있어서 그 다음에 아무리 군대를 조직하고 열심을 내고 하더라도 그것도 같이 ‘가만히 있음’에 해당되는, 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논리를 펴야 돼요.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 성경에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정말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그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는 것을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설명할 때 뭘 반드시 밝혀야 하는가?
‘행함이라는 행함’과 ‘믿음이라는 행함’과의 차이를, 같은 행함 속에서 어떤 차이가 나는가를 설명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행함이 비록 행함이 보이더라도 이것은 구약의 ‘가만히 있을지어다.’와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설명을 해야 됩니다.
그 설명은 간단합니다. ‘믿음이란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니죠. 그렇다면 구약의 다윗이 군대를 조직하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행함은 움직이는 것이 행함이다.’ 이것도 아니죠.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선물로 받은 것인데, 이 선물의 출처가 중요합니다. 이미 완성된 십자가의 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신 분이 누구입니까? 결국은 예수님에게서 나온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행함은 뭐냐? 어떤 것이 믿음의 행함이냐 하면 “예수님이 하셨습니다.”가 고백되는 행위는 열심히 해도 믿음에서 나온 행함이고, “내가 열심히 했습니다.” 라는 것은 전도를 하고 구제를 하고 성경을 읽고 뭘 해도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행함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설명할 때 반드시 이 양쪽을 다 설명해야 돼요. 그냥 “십자가를 믿으세요.” 라고 하면, 사람들이 뭘 생각하는가 하면, 십자가를 믿어야겠다는 자신의 행함을 총동원해서 십자가를 붙들려고 한단 말이죠. 이렇게 붙들려고 하다보니까 어떤 의문점이 생기는가 하면 “목사님, 아침에는 십자가를 믿었는데 저녁때는 안 믿어져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아침에도 안 믿은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완성된 것에서 나오는 믿음 같으면 내 속에서 없어지지 않는데, 이것이 나의 행함에서 나오면, 스스로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야 해.’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이것도 안 되면 군중심리로 통성기도를 하고 할렐루야를 외치고 이런 것은, 컨디션 좋으면 믿어지고 나이 늙고 치매가 오면 “정육점 문 열었습니까?” 이런 엉뚱한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선물로 온 믿음 같으면 오후 2시도 믿습니다. 오후 3시도 믿습니다. 늘 이래야 되겠네요?’ 이렇게 되면 연속성이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니고, 십자가에서 나온 선물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행함과 행함으로 점철되는 것이 아니고 행함과 행함을 깨면서 거기에서 튀어나오는 고백으로 나타납니다.
어렵습니까? 다시 해 볼게요. 오후 2시에 “나는 십자가를 믿습니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오후 3시에 “나는 역시 십자가의 복음을 믿습니다.” 라고 했다면, 이것은 뒤에 ‘믿습니다.’ 는 앞의 ‘믿습니다.’를 의식하기 때문에 복음적인 선물이 아니고 자기의 행함을 의식해서 나온 행함이기에 둘 다 행함에 속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오후 3시쯤에 “아이고, 나 이제 십자가 안 믿을래.”라고 했는데, ‘아, 내가 십자가 안 믿어도 말씀은 이뤄지잖아.’ 라는 생각이 들고 내 행함을 포기할 때, 그 무렵에 나의 의지가 아닌 뭔가 톡 튀어나오는 것이 있어야 돼요. ‘주여, 내가 죄인이군요. 나는 내 믿음도 간수 못하는 죄인이군요.’ 라는 이런 자신만이 아는,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이런 것이 튀어나올 때,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미리 예상치 못한 것이 톡 튀어나왔단 말이죠. ‘나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마음대로 믿었다, 말았다 하는데 그런 나를 가만 두지 않고 주께서 지금도 말씀으로 쿡쿡 쑤시고 있구나. 나는 죄인이다.’ 여기서 하나 더 붙이면 “주여 나를 떠나소서.”
이런 말 한다고 해서 떠날 분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지옥에 간다 할지라도 너희들이 구원 받는다면 나는 지옥에라도 가겠다.’고 했는데, 그런 말 했다고 해서 바울이 지옥에 간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자신만만하면 그런 말을 했겠어요? 주께서 나를 말씀으로 쿡쿡 쑤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리 신자고 선물을 받아도 표면으로 나오는 것은 자아 이미지를, 자기가 과거에 했던 것을 수집하고 기억을 모아서 항상 지금의 자아 이미지를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나의 내면에 있는 성령이 하시는 일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죽을 때까지 “벌벌 떨면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뭐가 성도냐 하면, 내가 예상도 못하고 의도하지 않은 고백이 정말 온 몸으로 전율을 일으키면서 튀어나올 때 ‘야, 이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구나.’ 라고 하게 됩니다. 이것이 0.5초, 또는 2초 정도 간다고 했습니다. 왜? 곧 사라지기 때문에. ‘야, 나는 신자 맞구나.’ 라고 기뻐하다가 그 이후 그것을 자아 이미지로 굳히려고 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선물이 아니라 행함이 또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주님이 또 쿡쿡 쑤시니까. 그런데 그 쑤시는 무기를 우리는 모릅니다. 말씀에서 나온다는 것은 알지만 그 방법은 몰라요.
어쨌든 다윗이 군대를 조직합니다.
역대상 11장을 보면 여러 사람이 모여듭니다. 다윗이 군대를 모집을 해도 이것은 주께서 불러 모아 주신 사람입니다. 목사님들이 늘 생각할 것은 누가 왔던 간에 주께서 오게 하셔서 오늘 교회에 나왔고, 그 사람을 붙잡는다고 해서 다음 주일에 또 온다는 보장은 없어요. 예배에 여러 사람이 빠졌다는 것은 섭섭한 것이 아니라 오늘도 2명이 나왔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2명 나온 것도 예배에 빠질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서 그나마 2명이라도 붙여주신 거예요. 복음 전하라고. 어쨌든 이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붙여주시는 겁니다.
이제 11장, 12장 막 넘어갑니다. 알아서 넘기는 것이 아니고 넘겨도 괜찮을 것 같아서 넘어갑니다. 12장 18절을 보겠습니다. “때에 성신이 38인의 두목 아마새에게 감동하시니” 보세요. 다윗은 한 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들이 감동하고 다윗을 따라 나섭니다.
이 역대상, 역대하에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하는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완료에 관한 부분, 다윗의 개인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역대기는 다윗의 자리에서, 다윗언약을 어떻게 완성시키는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군대를 붙여 주시지요. 하나님에 의해 모인 군대가 바로 모세가 들었던 지팡이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드니까 여러분은 지팡이만 보이십니까? 그 안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붙여주실 수많은 군대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 때 아말렉 군대가 물러갔잖아요. 그 지팡이를 국립수사연구소에서 조사해 보세요. 그 지팡이 안에 엄청나가 많은 천사가 들어 있는지. 엘리사가 있는 지경을 아람 군대가 완전 포위했어요. 그러니까 사환(종)이 놀라서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왕하6:15)” 라고 했습니다. 이 때 엘리사가 기도했지요.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라고. 그랬더니만 아람의 군대보다 더 많은 여호와의 군대가 엘리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이렇습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된 그 사환이 얼마나 우쭐거리겠습니까?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또 나올 것 아닙니까. 그래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고 합니다. 보지 않고도 말씀 그 자체가 믿어지는 것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입니다.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기를 원하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고 그것을 흉내 내면 물에 빠집니다. 기적을 체험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이것은 반칙입니다.
모세의 지팡이 안에 이미 하나님의 군대가 들어 있어요. 이것은 바로 마하나임(창32:2). 야곱이 얍복강으로 갈 때 천사가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면서 야곱을 지켰습니다. 야곱은 홀몸이 아닙니다. 천사가 몰려다니며 지킵니다. 중심점이 야곱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중심점이 되니까 사람들이 감동해서 다윗에게로 와르르 (군대가)모입니다. 이게 바로 그냥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겁니다.
우리 십자가마을 목사님들은 가만히 있어서 교인 수가 5명쯤 되고, 다윗은 수만 명이 된다는 그 차이점뿐이지 질은 같은 질입니다. 다섯 명이냐 수만 명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동일하게 붙여주신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교인 5명이어도 구원받는데 전혀 지장 없습니다. 단, 생활에는 지장이 있어요. 하하하 ~
역대상 12장 22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이것을 보고 ‘다윗님, 어떻게 해서 이 많은 군대를 모았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잘못입니다. 다윗이 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이셨죠. 그러나 다윗도 나중에는 이런 잘못에 빠져 매 맞습니다. 그래서 이 역대상 21장에 뭐가 있습니까?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다 7만 명이 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네가 대신 백성들을 위해서 제사 드려라. 너의 할 일은, 백성들이 너의 부하직원이 아니라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네가 대신 대속물로 제사 드려야 할 죄인의 입장에서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교인 수가 많은 것도 귀찮아요. 아무리 많아도 내 교인 아니거든요. 주님의 교인인데, 자기 아이 돌이라고 불러내고, 입원해서 가봐야 하고 등등 일이 생기면 설교 준비를 할 시간이 있습니까? 교인이 한 두 명이면 대충 설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녹음기로 녹음하고 카메라로 찍고 하니까 대충 설교를 할 수가 있습니까? 심지어는 외국에서도 본다는데.
그 다음 12장 23절에, “싸움을 예비한 군대 장관들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로 나아와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울의 나라를 저에게 돌리고자 하였으니 그 수효가 이러하였더라.” 라고 나오거든요. 진도 잘 나가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붙어주셨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붙여준 것이 많다고 해서 그만큼 다윗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그렇게 많을 때가 있었지만 홀로 있을 때도 있었는데 그 때도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많을 때도 함께 있었어요. 이 점이 중요합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했는데, 이것이 언제의 신앙고백입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을 때입니까? 아무도 자기편이 없을 때 이런 고백이 나왔습니다. ‘아무도 없어도 여호와가 목자로 계시면 저는 얼마든지 감사하겠나이다.’ 이런 신앙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편 23편을 보면서, 우리 주위에 여러 사람이 있더라도 혼자 있다고 생각하고, 외롭다고 생각하고 목자만 바라봐야지요. 그래서 시편 23편 액자를 이사 갈 때만 선물하지 말고 교도소 갈 때, 교회 불났을 때, 교인들 아무도 없이 다 떠나갔을 때 갔다 줘야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구절은 헌금 한 푼도 안 들어올 때 이런 구절이 적합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제 넘어갑시다. 진도 잘 나갑니다. 13장 봅시다.
다윗이 자기 군대를 모았는데 그 군대는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나는 이만큼 훌륭한 장군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궤를 옮겨야 되는데 여호와의 궤는 왜 옮기는가? 여호와의 궤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있어요. 그래서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데 왜 그동안 여호와의 궤가 기럇여아림에서 올라와서 오벳에돔의 집에 머물러 있었느냐 하면, 궤를 옮기는 사람이 특수 지파에 해당되는 사람이 옮겨야 돼요. 그 지파가 어느 지파입니까? 레위 지파입니다. 이 궤를 다른 사람이 들다가 죽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레위지파를 상대한단 말이지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멀리서 보면 가까운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약간 떨어져 있어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는 것 같지만 인간에게 직접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라고 지시한 법궤에 오고, 사람들이 그 법궤에 다가가려 하면 접근 금지. 여기에 누가 막습니까? 레위지파가 둘러싸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웃시야라는 왕이 있었는데 좀 잘나가니까 건방지게 행하다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왜요? 청결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성전에 자기가 함부로 들어갔습니다. 제사장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다윗언약이 살아 있는 법궤는 레위지파가 듭니다. 멀리서 보면 레위지파가 안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윗이 바로 이런 배려를 해서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하나님의 모세 언약에 의해서만 연결이 가능하다. 그래서 성전에서 기도하면 주께서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왜? 여기에서 피가 흐르니까 하나님의 피가 있는 곳에는 피를 내는 작업을 해야 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의 피 내는 작업으로 우리가 가진 땅과 모든 것을 가질 수가 있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이뤄질 때 그 효과로서 이런 완성된 나라가 이루어 졌습니다. 하는 것이 다윗언약에서의 법궤가 있는 취지가 된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