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김용일
1
어떤 발굽 소리. 어떤 짐승인지는 알 수 없으나, 떼지어, 처음에는 작게, 그러다가 사정없이 커지는 듯하다가는 다시 작게, 진군, 진군해 온다. 반복. 반복되는 소리를 받아내는 것은 달팽이관이 아니다. 피 철철, 넘치는 염통. 염통은 짐승의 발굽 소리에 맞추어 박동한다. 통증을 느낄 정도로 아주 극렬히. 이어 사람의 새끼들 소리. 분명 사람의 새끼들 소리. 왁자지껄, 까륵까륵, 마구 떠들고, 숨도 넘어가고, 다급히 부르기도 하고, 후다닥…… 소요는 대단한데, 피칠갑한 염통은 실체를 알아버린 까닭이다. 그만 부드럽고 규칙적인 움직임으로 잦아든다. 짐승의 발굽 소리도 사람의 새끼들 소리였나, 인식하게 되면 더이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는 게 짜증을 부른다.
커튼이 젖혀져 있었으므로 햇살은 창틀 크기만큼 간단없이 베어져 방바닥에 퍼덕거렸다. 시린 순정의 햇살 아래 표백되듯 한낮에 깨어나는 잠은 나른함으로 포장된 절망감을 쏟아냈다. 그는 반쯤 눈을 뜨고 누운 채 달디단 절망 한줌을 아끼듯 핥았다. 사위는 낯설 만치 적막했다. 시끌벅적하던 사람의 새끼들 소리는 다 어디로 갔나. 귀 기울여보면 소음이야 꽤 잡다했지만 잠을 깨운 예의 소요는 찾을 수 없었다. 피를 끓이던 그것은 필시 꿈이었던가. 시각적 효과 없이 음향만 제공되는 꿈. 그런 게 정말 있는지는 모르겠다. 목과 어깨 근육이 소금에 절여진 듯 아팠다. 그는 통증을 털어 내려고 잠시 상체를 비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보이는 것들은 젖빛 필름에 덮인 느낌이었고 눈꺼풀의 무게에 눌려 온전한 형색을 갖지 못했다. 그는 손을 휘휘 저어 텔레비전 리모콘부터 더듬어 잡았다. 텔레비전을 향해 리모콘 일발을 발사시키자 텔레비전 브라운관도 맞대응해 왔다. 수많은 주사선을 그를 향해 대고 일제히. 그는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봤다. 그가 보려는 시간표시 자막은 없었다. 텔레비전 화면은 심해처럼 푸른 빛만 가득할 뿐이었다. 아침이면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나는 시간을 보며 출근 준비하는 그는 언제나 그 눈높이의 편안함에 길들여져 있었다. 물론 벽엔 흔한 뻐꾸기 시계 하나쯤 걸려 있긴 했다. 텔레비전의 오전방송은 대개 12시까지, 그러니까 지금 시각은 그 이상. 그는 뻐꾸기 집을 보는 대신 리모콘의 시간 버튼을 눌렀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날짜와 함께 AM 12: 24라는 형광빛으로 반짝였다. 한 네 시간 이상 잠을 잔 셈이었다. 첫차를 기다려 병원으로 달려왔다며 연신 혀를 차던 어머니와 아침 7시에 교대하고 집에 들어와서였다. 그는 아내의 부재에 치를 떨면서 한자락 겨우 깔고 누웠던 이불을 개어 장롱 속에 넣었다. 훅, 끼치는 살 냄새가 역겹게 느껴졌다.
2
할 건지 말 건지 그는 잠시 망설였다. 서툴 뿐더러, 그래서 더욱 화가 치밀었다. 청소니 빨래 따위 여자가 하는 일을 해 본 기억이 그에겐 별반 없었다. 더군다나 집안은 온갖것들로 난장판이었다. 어질러진 품이 한눈에도 고의성이 드러나 보였다. 영산홍 화분 하나가 깨져 거실 바닥을 황토흙으로 개칠해 놓은 것도 가관인데, 걸을 때마다 잉크젯으로 프린트된 A4 용지들이 채여 스륵스륵 자지러졌다. A4 용지는 거실에서 아내의 작업실로 이어져 있었다. 그는 아내의 작업실 문을 밀었다. 부서진 행거와 옷가지들이 묵지룩하게 걸려들었다. 컴퓨터 책상 위에는 편집디자인에 관한 책들과 함께 여러 장의 디스켓들이 흩어져 있었다. 모두가 그날의 상황을 짐작하고도 남을 현장이었다. 깨끗이 치운다 하여도 마음 한켠에 얼룩질 흔적이 벌써부터 전신을 뒤흔들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놔 둘 수는 없었다. 집과 병원을 오가며 고생하실 어머니 몫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합격해 서울에 왔을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함께 따라 상경한 어머니의 뒷바라지를 받지 않았던가. 결혼이 준 또하나의 의미는 그런 것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보살핌을 더이상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내가 하루종일 키보드 자판을 두들겨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렀다. 그는 어질러진 방바닥 위에, 거실바닥 위에 절반쯤 그 악마성이 드러난 결혼의 위기를 서툰 집안일로부터 체감하기 시작했다. 우선 창이란 창, 문이란 문을 모두 열었다. 뽀얗게 날릴 먼지에 대비해서였다. 봇물처럼 터져 온 햇살이 피어오르는 먼지를 보란 듯이 조명했다. 행거 파이프들은 의외로 쉽게 조립되었다. 부서진 게 아니었다. 부딪쳐 뒤틀리면서 연결 부분이 빠진 모양이었다. 아내의 옷가지들은 입다가 그냥 행거에 걸쳐둔 것이 대부분이었다. 게을러서라기보단 아내는 일에 빠지면 그만큼 집안 사정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하물며 자기 것에 대한 깔끔한 정리와 관리는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아내의 옷은 언제 다시 입게 될 지 알 수 없었다. 한번 빨아 옷장에 넣어두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옷가지를 모두 들어다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책이니 기타 물건들은 기억나는 대로 제자리를 찾아 놓았다. 고질은 거실바닥에 쏟아진 영산홍 화분과 A4 용지들이었다. 흙과 화분 조각, A4 용지들을 비로 쓸어 모아놓고 담을 쓰레기봉투를 찾으니 눈에 잘 뜨이지 않았다. 아내가 어디 잘 넣어두었을 것이 분명한데, 싱크대 서랍이고 주방 구석이고 암만 찾아봐도 없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신문지 몇 장을 펼쳐 놓고 흙 등속을 쓸어 담았다. 나중에 쓰레기봉투를 사다가 처리할 요량이었다. 신혼초기의 일이었다. 누가 쓰레기를 내다버릴 것인가 하는 문제로 아내와 그는 한동안 대결했었다. 아내의 주장은 쓰레기 정도는 의당 남편이 치워줄 일이라는 것이었고, 그는 그건 어디까지나 살림하는 여자 일 중의 하나이므로 아내가 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다른 남잔 잘도 해주드라.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에서 무거운 거 들고 계단 내려가기 쉬운 줄 알어? 힘들긴 뭐가 힘들어서 그래. 그리고 너 다른 남자랑 살아봤어? 자기 출근할 때 다른 남자들 쓰레기 들고 내려가 거 못 봤어?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야. 음식찌꺼기 제대로 담지 않으면 손에서 냄새나고 양복에 묻는 건 어떻게 할 거야? 음식물쓰레기봉투는 안 맡겨. 아무튼. 결과는 그가 졌었다. 아내는 현관에다 신문뭉치며 빈 병, 캔 따위를 수북히 쌓아놓고 시위를 벌였다. 그는 처음 비웃었지만 허리까지 차 오르는 쓰레기에 입구가 점차 봉쇄되고 보니, 치우는 일 자체가 여자로써 감당할 한계를 넘고 있었다. 그는 선의의 패전을 인정했다. 그리고 쓰레기를 치우며 몇 가지 조건을 달았다. 쓰레기 치우는 일은 일요일만으로 제한, 음식물쓰레기는 사절. 그는 주위 동료들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신혼 때야 아내 일을 더러 돕기도 하지만 해가 갈수록 주방에 있는 아내를 불러 발끝에 놓인 재떨이를 가져오라는 식으로까지도 변하게 된다는 걸. 남자란 집안에 있으면 모든 일을 아내에게 맡기고 청하는 버릇이 생긴다는 것.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실제 지방출장과 아파트분양 관계로 휴일 출근이 잦아지면서 아내와 약속했던 일은 자연스럽게 흐지부지 깨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내와의 대결은 이후 다른 방식으로 이어졌다.
3
거실 바닥을 걸레로 박박 문질러서야 집안은 각질을 벗고 화창한 봄볕에 어울릴 만한 깨끗함이 돌아왔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아냈다. 3월의 날씨는 오락가락했다. 풀리는가 싶더니 그저께는 대관령에 눈이 내릴 만큼 추워지고 오늘은 꽤 따뜻하고 눈부셨다. 봄이라고 특별히 의미를 두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3월이 싫었다. 새까매진 걸레는 다른 빨래들 위에 얹혀져 매우 이물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빨래더미 위에 가루비누를 쏟아부었다. 상자에 인쇄된 사용량을 읽어 보았으나 물 1리터가 어느 정도인지, 가루비누 1미리리터가 어느 정도인지는 계량할 수 없었다. 가루비누는 이물스러운 걸레를 눈 덮인 야산처럼 하얗게 덮었다. 그제서야 계량컵이 가루비누 상자 안에서 툭 튀어나왔다. 그는 계량컵을 탁탁 털어 가루비누 상자에 넣었다. 세탁기를 어떻게 돌려야 할지 처음 해보는 그에게는 몹시 까다로웠다. 세탁, 탈수 등 십여 개나 되는 버튼 중 일단 동작 버튼을 눌렀다. 세탁기는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잠시 좀 난감함. 집안을 뒤져 메뉴얼을 찾아볼까 하면서 이것저것 순서 없이 누른 버튼에 우연히도 세탁기의 동요가 시작됐다. 세탁기 안으로 쏴아 하고 물줄기가 쏟아지는 것을 보며 다시 시작하라면 못하겠지 싶었다. 아내는 지금 전세 들어 살고 있는 18평 연립에 처음부터 불만이 많았다. 낡고 엘리베이터도 없어 불편한 데다가 시장도 멀다는 이유에서였다. 생활력 강한 아내에게 주거환경이 나쁜 전세집은 신혼의 단꿈을 꾸는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하루 속히 돈 모아 떠나야 할 공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당시 그는 아내의 소원을 이루는 데 그닥 큰 희망을 줄 수 없었다. 다니고 있었던 건물 외장공사 하청업체는 경영상태도 부실하고 봉급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적금과 주택청약예금을 들어놓고 나름대로 내집마련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지만 빠른 시일 내에 꿈을 이루기란 현실상 가능성이 매우 약했다. 그때 아내가 들고 나온 대책이 자기도 직장에 다니겠다는 것이었다. 나 자신 있어. 맞벌이 많이들 하는 거잖아. 아내는 결사항전하겠다는 태세로 동의를 구했다. 야, 관둬라, 관둬! 니가 직장을 다닌다고 얼마를 벌 거 같니? 넌 전업주부라는 직업이 있어. 내가 바라는 건 니가 살림 잘 하고 아기 낳아 잘 기르는 것뿐이라구. 집장만은 아기 낳아 기르면서 해도 늦지 않아. 그는 아내의 직장생활을 강하게 반대했다. 지금이야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땐 자존심이 상했고 가장으로서의 존재도 불안했다.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내집마련이나 하자고 결혼한 게 아니었다. 그건 그의 무능을 좀더 객관적으로 확정짓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돈을 적게 벌고 많이 벌고는, 집을 빠른 시일 내에 사고 못 사고는 그가 다 할일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대학시절 사내가 찬밥 먹으며 객지 고생할 순 없다고 어머니를 동거시키시던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역정내실 일이기도 했다. 얼어 죽는대도 체면만은 불타는 집안이었다. 가난해도 자손에 대해서만은 욕심이 과했다. 똑바른 며느리 노릇은 오직 내조 잘 하고 떡두껍 같은 손주 낳아 잘 키워주기였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결혼해서 아기가 빨리 생기지 않는다면 남자에게는 수치요 집안에게도 열등감을 심게 된다고 그는 아내를 설득했다. 아내가 직장을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디스 드릴까요? 단지 앞 행복슈퍼 주인은 늘 담배 외엔 아무 것도 사지 않는 그에게 인사하고는 선반 위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아뇨. 저어 쓰레기봉투를 좀 사려고 하는데요. 그는 계면쩍은 표정으로 슈퍼 안을 둘러보았다. 그가 나동 403호 남편이라는 걸 주인이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저께 일어난 사건이 이미 단지 내 쫙 소문났을 테니까. 슈퍼 안은 형형색색을 한 갖가지 물품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럼 제가 갖다드리죠. 어떤 걸 드릴까요? 그는 잠시 망설였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주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5리터, 10리터, 20리터, 50리터, 100리터, 다섯 가지가 있는데요. 그가 머뭇거리자 주인은 10리터와 50리터 짜리 봉투 20장씩을 가져와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일단 이렇게 사 가시면 욕먹진 않을 겁니다. 다행히 주인은 이쪽의 사정을 직장에서 쫓겨나 마누라 심부름이나 하는 실직자 정도로 아는 듯했다. 한낮에 남자가 쓰레기봉투나 사러 다니다니, 직장에서 짤렸군, 한심하다는 듯이 말이다. 물론 그건 아니었다. 며칠 전 회사에서 청약 접수한 아파트는 파격적인 가격과 선착순 접수라는 전략 덕분에 수많은 청약자들이 몰려들었다. 현재 회사의 입장은 부동산 경기의 회복과 더불어 내달 있을 2차 분양 전에 신입사원을 모집할 계획까지 있었다. 인턴 마지막 달에 접어든 나는 인사평가 후 정식발령날 것을 확신했다. 장사꾼인데 그런 눈치쯤은 있단 거겠지. 그는 서둘러 계산을 치르고는 슈퍼에서 나왔다.
집에 들어서자 욕실에선 세탁을 끝낸 신호음이 삑삑 하고 들려왔다. 그는 세탁기 뚜껑을 열고 탈수된 옷가지들을 천천히 꺼내 바구니에 담았다. 대부분 빨래들은 바구니에 담겨졌으나 걸레만은 때가 덜 빠진 채 걸레통으로 던져졌다. 서툴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는 베란다로 나갔다. 빨래걸이를 펴고 바구니에서 옷가지를 하나씩 꺼내 걸었다. 맑고 따사로운 햇살이 깨끗한 비누향을 금방 피워 올렸다. 어디선가 아이가 칭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높이에 대해 느끼는 공포는 11미터쯤에서 가장 크다던가. 딱 이만한 높이. 그는 난간을 짚고 밑을 내려다봤다. 잠시 현기증이 일었다. 하늘이, 건너편 교회건물이, 주차장 승용차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주욱 흘러내렸다. 연립 앞 화단엔 아내가 찢어놓은 나뭇가지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길게 바닥까지 늘여져 있었다. 까닭 없이 오금이 저려왔다. 문득 자신도 모르게 뛰어내릴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가장 크게 공포를 느끼는 높이란 그 높이의 거리감이 모호해 착란을 일으키는 높이가 아닐까. 사람이 그 높이에 설 때 위험을 느끼는 것은 학습을 통해서일 뿐이다. 즉 11미터의 높이에서 추락하면 그쯤부터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는 경계심 말이다. 애초에 그런 경계심이 없다면 딛고 선 곳과 아래와의 높이에 대한 분별을 잃어 공포란 없을지 모른다. 가장 큰 공포의 높이는 어쩌면 평지와도 같은 가장 편안한 높이가 아닐까 싶었다. 병원에 누워 있는 아내는 그날 융단처럼 펼쳐지는 착란 앞에서 두려움 없는 자유를 얻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연립 사이로 생선트럭이 지나는지 '아주 맛좋은 참조기가 한 보따리에 5,000 직접 올라온 알배기 참조기를 엄청나게 싸게 팝니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대 피워 문 담배연기에 속이 쓰렸다. 무언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을 잠 안 자고 네 시간 가량을 잤으니, 이틀을 굶고는 얼마를 먹어야 하나. 하지만 식욕은 나지 않았다. 주방으로 가 전기밥솥을 열어보니 쉰내와 함께 누렇게 변색된 밥알들이 말라가고 있었다. 앞으로 혼자 밥해 먹을 일이 벌써부터 막막했다. 이젠 대학시절처럼 어머니의 뒷바라지를 받을 수도 없는 문제였다. 시골에 계신 아버지의 연세도 깊으시고 어머니를 대신하던 여동생들도 모두 출가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밥통의 코드를 뽑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윙, 하고 냉장고 모터가 돌더니 찬 바람이 하체에 감겨왔다. 냉장고 안에는 반찬이 담긴 그릇과 야채가 아직 아내의 손길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는 쏘세지 하나를 꺼내 껍질을 벗기고 한입 베어 물었다. 싱크대엔 아직 설거지하지 않은 그릇 두 개와 컵, 수저 한 벌이 물에 잠겨 있었다. 그제께 아침 그가 비운 그릇으로 짐작됐다. 늘 그렇듯 아내는 아침을 안 먹었을 것이다. 중풍으로 누운 장모와 처남을 부양하느라 번잡한 아침을 처녀시절 내내 겪다보니 버릇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아침을 잘 먹어야 일도 잘 한다는 아버지 말씀 때문에 아침식사를 거른 적이 없었던 나와는 대조적이었다. 그와 결혼하고, 처남이 장모의 수발을 들면서 번잡한 아침은 없어졌지만, 아내는 여전히 아침을 굶었다. 그게 속이 편하다고 했다. 그는 수세미에 세제를 조금 떨어뜨려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이나 물에 불어 있었기 때문에 그릇은 아주 잘 닦였다. 하지만 밥알이 말라붙은 밥통은 잘 닦이지 않았다. 물을 담아 불려둔 뒤 닦으면 쉬우리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그는 완력을 택했다. 수세미에 세제를 좀더 떨구고 힘주어 문질렀다. 싱크대 위 타일 이음새를 따라 무언가 고물고물거렸다. 개미였다. 작고 붉은 빛깔의 녀석들은 어딘가에 떨어진 음식물을 발견한 듯 기계처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도시에 사는 녀석들은 계절과 상관없이 종종 출현해 불쾌감을 주거나 어느 땐 사람을 물기도 했다. 하긴 먹이활동만 할 수 있다면 생물들에게 겨울잠 따윈 필요 없는 것일 테니까. 그는 개미들의 대열을 막고 젖은 손가락으로 쓱 한번 문질렀다. 개미 몇 마리는 떨어지고 몇 마리는 즉사해 그의 손가락에 묻어났다. 전율이 머리칼을 세웠다. 개미를 박멸하다 아내가 넉다운된 적이 있었다. 주방이고 다용도실이고 심지어는 가구 전부를 조금씩 드러내 구석구석 약을 뿌리고는 코피를 흘렸다. 일요일 내내 보충해야 할 잠을 빼앗기고 사우나에 갔다온 그는 너무 크게 벌어진 공사에 기가 막혔다. 대대적인 방역과 청소였기 때문이었다. 아주 일을 냈군, 일을 냈어. 이럴 거면 나한테 나가지 말라고 하지 그랬어. 말해 봤자 자기 약냄새 싫어한다고 도와주지도 않을 걸 뭐. 난 이제 이런 걸 자기가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게 우스워졌어. 집들이를 앞두고 다소의 집단장이 필요하긴 했었다. 결혼한 지가 언젠데 밥 한끼 없냐는 직장 동료들의 집단항의를 더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아내와 상의 없이 날짜를 정해 통보했을 때 아내는 약간 불평을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결국 몸살이 난 아내는 음식을 출장요리로 대신했다. 이 일을 두고 나는 아내를 종종 비난했다. 곰탱아, 넌 너무 과장되는 경향이 있어. 그러는 자긴 뭘 했지? 집안을 다시 쭉 둘러보고 남은 일을 찾았으나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보일러 온도를 높이고 욕실에 들어가 옷을 벗었다. 샤워기 레버를 올리자 아직 데워지지 않은 물줄기가 차갑게 쏟아졌다. 그럼, 집에서 일하는 걸로 할께.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되니? 니가 집에서 일해 벌면 얼마나 번다구 그래? 아내가 직장갖기를 포기하고 대신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했을 때 그것까지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살림에도 별 지장을 주지 않을 것 같았고, 그의 체면도 손상 받지 않을 듯해서였다. 아내가 시작한 일은 단행본 원고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표지도 디자인하는 편집일이었다. 그 일을 위해 아내는 방 하나를 작업실로 꾸미고 적금 두 개를 깨 장비 일체를 구입하는 모험까지 했다. 중고 맥킨토시 컴퓨터와 외장 하드, 잉크젯 프린터, 스캐너 등등. 그리고 결혼 전에 다녔던 출판사와 그 출판사에서 소개한 다른 출판사에 명함을 돌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이 신통하게 잘 풀릴 리는 없었다. 출판사들은 아내가 주부라는 이유로, 상대하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별반 일감을 주지 않았다. 내가 주부인 게 왜? 뭐가 상대하기 불편하다는 건지 모르겠어. 출판사에 너댓 번 찾아가야 겨우 한 번쯤 가져오는 일감으로는 투자한 자본도 못 건질 형편이었다. 아내의 고민은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했다. 컴퓨터에 모뎀을 설치하고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었으며 출판사와 대학, 연구기관의 홈페이지를 기웃거리며 이메일을 통한 영업을 개시했다. 결과는 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나의 비난을 무너뜨린 대만족이었다. 신기함으로 가득찬 사이버의 세계에서는 아내가 주부인 걸, 상대하기 불편하다는 걸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많은 일감들이 주눅들었던 아내의 신명을 살려냈다. 최장 18시간 일한 적도 있었고 월수입이 그의 월급의 최고치를 훨씬 상회했다.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쉴 틈 없는 아내의 손목엔 늘 파스가 감겨 있었다. 야, 이게 도대체 뭐야? 밥을 먹으라고 하는 거야, 토하라고 하는 거야? 아르바이트고 뭐구 다 때려 치워! 밤낮 없이 일에 몰두하는 아내에게서 살림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대충 끝내고 마는 집안청소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때 드라이해 놓지 않는 양복에는 짜증이 났다. 아침밥을 입 안에 떠 넣자 숨통을 막는 파스냄새가 드디어 폭발지점이 되었다. 아내는 새벽에 일어나 일하던 도중에 쌀을 씻어 앉힌 모양이었다. 그는 수저를 힘주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며칠 전 아버지에게 불려가 후사의 소식을 호되게 추궁들은 뒤 계속 심기가 불편하던 터였다. 한 달 결산을 보며 득의양양해 하던 아내의 속물성에 공연한 열패감도 들었다. 뭐어? 괜찮은데. 그러나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밥 한 수저를 입안에 넣고 씹었다. 그 천연덕스러움이 그의 기를 눌렀다. 물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는데, 샤워를 하는 동안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그는 얼굴에 스킨부터 바르고 전화기 앞으로 가 섰다. 자동응답 전화기는 2번 버튼을 깜박이고 있었다. 그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첫 번째 메시지는 잠깐 들러달라는 경찰서에서 온 전화였다. 툭툭, 부러지는 목소리는 듣기에도 매우 건조했다. 두 번째는 김 대리로부터 온 전화였다. 그와는 대학 동기인 김 대리는 졸업하자마자 입사시험에 합격해 벌써 대리라는 직함을 얻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부서의 상사였다. 내용은 짐작한 대로 전화 한 통화 없이 이틀간 결근한 것에 대해, 아내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걱정해주는 전화였다. 그는 메시지를 모두 삭제하고 전화기 코드를 뽑았다.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다시 올지도 모르는 경찰서나 회사의 전화가 저녁에 집에 와 주무실 어머니에게 공연히 근심을 더할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따사롭던 햇살이 조금씩 이울고 있었다.
창문과 커튼을 모두 닫았다. 그러자 집안엔 괴괴함마저 느껴지는 그늘과 정적이 들어찼다. 그것은 내게 달라붙어서 쓰레기봉투를 들고 집을 나올 때, 현관문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릴 때 심호흡 한번씩을 끌어냈다. 그는 잠시 현관문에 머리를 기댔다. 한때 <드라마 애인 신드롬>과 함께 이 땅의 남편들을 무시무시한 공포로 몰고 간 <겁 없는 남편 시리즈>라는 유머가 유행했었다. 10시 이후에 귀가해 밥 달라는 남편이 그렇다느니, 아내가 드라마 보는데 프로야구 보겠다고 채널 돌리는 남편이 그렇다느니, 심지어 아내가 잠 들기 전에 먼저 코 고는 남편이 그렇다느니…… 달라진 여성의 지위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남성의 어리석음을 풍자한 그것은 사회집단내의 성적 갈등이 가정에서부터 비롯됨을 냉소적으로 예시한 것이었다. 유머를 즐기며 여성들은 즐거웠을지 모르지만, 상대적으로 남성들은 남성의 권위주의에 대한 여성의 도전에 상당한 위협을 느껴야 했다. 그때 그 역시 <겁 없는 남편 시리즈>가 미구에 닥칠 내 처지인 듯 싶어, 들을 때마다 쓴웃음에 이은 식은땀으로 등골을 적시곤 했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었다. 아내를 경쟁상대로 의식하고 견제하게 된 것이. 분명한 것은 월말이면 어김없이 아내가 적처럼 인식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월급 명세서를 건네 받으며 아내 역시 한 달 수입을 결산하곤 했는데, 한 달 동안 아내의 예금통장에 입금된 금액은 그의 월급의 특별수당과 보너스의 기쁨까지도 무색케 하기 일쑤였다. 팔푼에 건달이면 모르겠으되 아내의 수입이 그같이 많다는 사실에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 남편이 어디 있겠는가. 모멸감은 수입의 사용 용도를 놓고 그의 월급은 생활비로, 아내 수입은 주택자금 마련으로 간단하게 구분짓는 데서 극에 달했다. 생활비는 줄일수록, 주택자금 마련은 늘릴수록 좋은 것일진대…… 물론 아내의 뜻이 그럴 리는 없었겠지만 위축될 대로 위축된 그의 생각은 가속적으로 비약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이야? 내 월급은 줄어들어도 상관없다는 거야? 아내의 교만에 발끈했지만, 그는 이미 불합리한 권력에 힘없이 따라야 하는 시민과도 같았다. 그러지 말고 자기 직장 그만 두고 공부하면 어떨까? 공무원이나 공인중개사 시험 있잖아. 그 동안 생활비 걱정 같은 건 안해도 되고. 그 역시 빼앗긴 경제 주권을 되찾고 당당한 시민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대기업 시험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내가 눈치 못 채게, 직장 동료들 술추렴을 피해 틈틈이 독서실에서 하루를 접는 날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내의 입에서 나온 공무원의 안정이니, 공인중개사의 고수익이니 하는 소리는 또하나의 모멸일 뿐이었다. 더욱이 당장 다니고 있던 하청업체를 그만 두고 아내의 수입에 의존해 공부한다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다. 온달 노릇까지 해야 된다면 내 삶의 가치는 끝없는 낭하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난 오히려 니가 일 그만 두고 살림만 했으면 좋겠어. 우렁각시처럼 말이야. 그는 아내의 소임을 다시 한번 주지시켰다. 마지막 남편의 위세를 부렸다. 사소한 일상의 트집만이 무기인 나는 아직 <겁 없는 남편>인 셈이었다. 일군의 꼬마녀석들이 주위 경계도 없이 도로를 건너뛰었다. 지나는 차량이 없어 다행이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녀석들은 자기들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웃고 떠들어댔다. 연립주택 맞은 편 교회로부터 건너온 듯했다. 그곳은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단지 아이들의 사철 유일한 놀이터였다. 단지 앞에 이른 꼬마녀석들은 저물어 가는 봄햇살 아래 원족에서 돌아오는 색색의 병아리 같은 모습을 하고 제집을 찾아들고 있었다. 그는 쓰레기분리함 앞에서 한참동안 넋을 놓고 꼬마녀석들을 바라다봤다.
4
저녁을 따라 바람이 불어왔다. 푸른 공기 속에 아직은 옷섶이 넓었다. 어머니를 집으로 들여보내고 그는 잠시 외과병동 앞 계단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경찰서에 다녀온 후 흥분된 가슴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경찰이 밝혀낸 사건 경위는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매우 충격적일 수 있었다. 도대체 아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진실은 경찰이 밝혀낸 그것이 전부일까. 최악의 경우를 단 한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내를 의심할 수도 없었지만 사건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폐부 깊숙이 혼란 한 덩이가 밀려들었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이 조바심을 쳐 세운 무릎이 떨렸다. 그는 불도 끄지 않은 담배꽁초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일어섰다. 불꽃이 튀었지만 그 과격함도 그닥 통쾌하진 않았다. 그는 별 위안도 되지 않았던 담배꽁초를 주워들었다. 그는 외과병동 1층 현관과 로비를 지났다. 엘리베이터를 통해 2층을 지나고 3층과 4층을 차례로 지났다. 5층 로비를 지나고 아내가 입원해 있는 병실문을 지났다. 그 내내 사람들을 지났다. 환자와 병간원, 면회객, 의료원들이 커피자판기 앞이며 TV수상기, 구내매점, 공중전화, 화장실 등을 오가고 있었다. 저녁식사 뒤의 병동은 몹시 술렁였다. 포르말린과 음식냄새가 뒤섞여 역겨움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부딪치고 귓속이 웅웅거렸다. 짜증이 났다. 재생의 기운 역시 환희가 아니라 짜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상처의 고통보다 상처로 인한 불편부당에서 벗어나려는 힘일 것 같았다. 병실문을 닫고 나서야 다소 소음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숨이 턱에 차 올랐다. 그는 이마의 현기증을 훔쳤다. 병실은 4인실이었다. 두 개의 침상은 아직 환자가 없었고 다른 하나의 주인도 잠시 자리를 비워 아내 혼자뿐이었다. 아내는 오른쪽 다리에 깁스를 한 채 잠들어 있었다. 아내는 사건 직후 의식을 잃었다가 이틀이 지난 오늘 아침 잠시 깨어났었다. 그리곤 곧 다시 잠이 들었다. 링거병에서 노란 액체가 한 방울씩 호수를 타고 아내의 손등으로 흘러들었다. 그저께 낮 아내는 연립주택 4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다행히 나무 위에 떨어져 허벅지만 골절된 채 목숨은 잃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에게 일어난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경찰은 아내가 자살을 기도했으리라 추측했다. 하지만 아내의 추락 직후 집에서 나오는 한 남자를 봤다는 목격자가 나타남으로 아내의 추락에 의문을 제기하고 수사를 넓혀나갔다. 그가 오늘 병원에 오기 전 잠시 경찰서에 들른 것도 그 남자와 관련이 돼 있는 것이었다. 경찰이 밝혀낸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아내는 경제위기로 출판물이 줄어들자 전단이나 팜플렛 같은 일반광고를 한 듯했다. 대학생광고디자인 공모를 준비하고 있던 학생들과는 필름 출력실의 소개로 알게 됐는데, 그들이 기획한 광고의 그래픽 작업에 자문과 협력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일 때문에 댁을 자주 드나들었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학생이 부인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지요. 재미있는 일 아니냐는 듯 높아진 경찰의 억양이 재차 귀에 거슬렸다. 그는 잠든 아내 곁으로 다가갔다. 아내의 얼굴은 고통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보였다. 턱에 차던 숨이 막혀 점차 답답해졌다. 경찰의 음성은 큰 북소리가 되어 들려왔다. 아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건이 있던 날은 평소 다같이 오던 것과는 달리 그 학생 혼자 댁을 찾았습니다. 부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려고 그랬던 거죠.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혹 사건에서 언급되는 치정이 일방적인 게 아니라면…… 양방향성을 갖고 있었다면…… 배반과 증오의 들짐승떼가 먹구름을 끌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머리 속이 짓밟혀 웅웅거리고 얼굴이 불에 데인 듯 달아올랐다. 들숨이, 날숨이 가빠왔다. 다시 큰 북소리가 들려왔다. 사춘기는 아니겠지만 순수한 사랑이랄까, 뭐 그런 건데… 울굴히 분기하는 내 안에 타인 하나. 살의殺意. 그는 아내의 상반신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아 잠시 뒤를 흘끔거렸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부인이 너무 과민반응을 보였던 거죠. 잠시 말다툼이 있었고, 부인은 그걸 위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학생이 부인을 성폭행을 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부인은 학생을 피해 베란다로 쫓기기까지 했던 거죠. 아무런 의식도, 의지도 없었다. 그의 손은 이미 그의 통어를 벗어나 아내의 목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단지 떨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어쨌든 부인이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날 수 있었던 건 다행한 일입니다. 학생은 좀더 조사해 봐야겠지만 지금으로 봐선 뚜렷한 혐의가 없는 것 같고, 잠시나마 잘못 가진 사랑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때 아내의 눈에서 눈물을 본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순간 급소를 찔린 듯 내 어깨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그는 두 손을 늘어뜨렸다. 식은땀이 등골을 적셨다. 답답한 가슴에 커다란 공동이 느껴졌다. 그는 링거병의 호수를 눌리거나 꼬이지 않도록 바로 잡았다. 아내가 자고 있지 않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5
포장마차 밖에 설치된 발전기 소리가 조금은 아득하게 들려왔다. 붉은 전구 아래 포장마차 주인의 얼굴 역시 불콰해 보였다. 서툰 손놀림으로 안주 접시를 갖다놓는 탁자 앞엔 두 남녀만이 앉아 있었다. 병원 주변에서 밤 11시 이후 들어갈 수 있는 음식점이란 포장마차가 제일 만만했다. 하지만 쓰린 속을 달래려는 의욕만큼 선뜻 무얼 먹을지 결정하지는 못했다. 그는 우동을 시켜놓고 간신히 국물 몇 수저를 떠 넣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아내는 내 눈을 맞추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미안하다는 말만 연거푸 깨물며 환자복 소매를 적셨다. 살아가는 일의 버거움에 대해, 그의 아내로 살아가는 일의 고통스러움에 대해 밀려든 회한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나뭇가지에 긁힌 아내의 얼굴을 일회용 물티슈로 닦아주었다. 그리고 아내가 사과할 일이라고 밝힌 사실 하나도 용서했다. 미안해, 자기. 나 그 동안 자기 속였어. 결혼 3년이 되도록 우리에게 아기가 안 생긴 건 내가 계속 피임약을 먹었기 때문이야. 어이가 없는 고백이었지만 이제 그것을 따져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면 될 일 아닌가. 똑같은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이혼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이혼이 본심은 아니겠지만, 그 말이라도 해야 미안한 마음을 덜 만큼 아내의 회한은 처절한 것인가 싶었다. 그는 담담한 마음으로 아내의 손목을 가져다 입술에 댔다. 입맛이 없으시면 반주를 한 잔 하세요. 시늉만 내는 수저질에 포장마차 주인은 묻지도 않고 소주 뚜껑을 땄다. 인상으로 보아 소주 한 병 더 팔려는 상술 같지는 않았다. 그는 소주 한 잔을 따라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쓰린 속에 흘러든 알콜 기운이 짜릿한 느낌을 전해왔다. 취해서는 안 되겠지만 소주 반 병 정도는 괜찮겠다 싶었다. 그는 우동국물을 안주 삼아 소주 한 잔을 더 따라 마셨다. 금방 속쓰림이 마비된 것인지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제서야 우동가락을 젓가락으로 건질 수 있었다. 아까부터 티격태격하던 두 남녀 중 여자가 먼저 일어나 포장마차를 나가고 그 뒤를 급히 남자가 따라 나갔다. 탁자 위를 치우는 포장마차 주인의 웃음에서 방금 지나간 사랑싸움이 묻어났다. 그는 우동가락을 다 건져 먹고 나서 술의 힘을 보태준 주인을 살폈다. 포장마차 주인은 40대 중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듯한 쾌활함이 엿보였다. 비교적 깨끗한 포장마차는 시작한 지 얼마 안 됨을 말했다. 그는 포장마차 주인의 전직이 궁금했다. 강원도에서 삽자루를 하청 받아 만드는 공장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중국산 삽자루가 들어오면서 삽 제조회사로부터 주문이 줄더라는 것이었다. 품질은 참나무로 만든 우리것이 자작나무로 만든 중국산보다 훨씬 견고해 잘 부러지지 않고 좋았다. 하지만 가격면에서 싼 중국산을 따르지 못했다. 삽 제조회사 입장이야 원가를 따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문제는 경쟁을 인정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야 충분한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건데, 이전의 독점납품 관행에 너무 젖어 안이하게 대응했던 게 잘못이었죠. 자유시장의 논리 앞에 애국심 따위가 통할 리도 없었구요. 사실 어음 결제 조건이 아니라면 그 회사도 더이상 우리와 거래할 이유가 없었던 거죠. 결국 그게 부도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는 포장마차 주인의 말에서 경쟁과 독점이란 단어에 주목했다. 아내와 자기 사이에서도 그런 것이 있었을까. 그는 취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다시 하며 소주잔을 반만 기울였다. 만일 있었다면 단지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아내는 그런 의식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내가 아기보다 내집갖기를 먼저 원했던 것은, 그래서 지독하게 일을 했던 것은 그저 함께 잘 살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그것을 왜 유난하다고 여기고 시기했었는지 지나친 건 자신인 것이었다. 한기가 무릎을 스쳤다. 젊은이들 한 떼거지가 포장을 밀치고 들어섰다. 어색한 모양새의 첨단 패션 차림을 한 그들은 들어서자마자 라면과 소주를 외쳤다. 탁자를 옮겨 붙이고 빙 둘러앉는 품이 어디서 신나게 놀고 와서도 2차를 계획하는 듯했다. 몇몇이 씩씩대는 꼴은 뭔가 의견이 잘 안 맞는 것인지. 그는 포장마차 주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장사가 잘 돼 다행이네요.
웃옷 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렸지만,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은 상쾌하게 느껴졌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탓도 있었겠다, 심정적으로 편안함이 아직 쌀쌀한 밤길을 앞서 걸었다. 술 몇 잔과 우동 한 그릇에도 따뜻해지는 것이 사람이겠지 싶었다. 거리의 상가를 밝혔던 불빛들이 점멸해갔다. 불빛 하나 점멸에 밤하늘이 한 뼘씩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까만 유리알처럼 빛나면서 눈 시리지 않게. 그는 병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문득 멈추고 미소를 지었다. 베란다에 걸어둔 빨래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집에 계신 어머니가 안으로 들여놨겠지만 전화라도 걸어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집에서 나올 때 전화기 코드를 뽑아 통화가 불가능할 것이었다. 어머니가 어련하시려구. 그는 머리를 들어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까만 유리알이 출렁, 바다처럼 넓어지고 있었다.
* 2002년 경기문학 신인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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