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대통령의 용인 술은 특히 민간출신 중 김재익 경제수석을 전격적으로 중용한데서 빛을 발한다. 10·26이후 극도로 어려웠던 경제상황에서 몇 년 후 세 마리 토끼를 잡게 된 일은 대단한 업적이었다. 「3저 호황 덕분」이라고 깎아 내리는 측도 있으나 세계적으로 보아도 3저 호황의 흐름을 제대로 탄 나라는 몇 안 된다. 뒷날 전 대통령 본인은 80년 당시 경제문제에 대한 중압감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여러 차례 술회했다.
『80년에 대통령이 되고 보니 나라가 망하게 되어 있었어. 나라꼴이 될게 없었어요. 가슴이 철령하고 답답했어요. 제갈공명이면 몰라도 방안이 없더라고. 정치라는 게 국민이 먹고 사는 걸 해결해야지, 국민이 못 산다면 정치가 아니고 횡포 아니냐 이거지. 내가 그 때처럼 고민이 많았을 때가 없었어요. 내가 왜 대통령이 됐나…. 1년간 참 고민 많이 했어. 누구한테 얘기할 수도 없고 얘기해 봐야 뾰족한 비법을 주는 사람도 없고. 그러나 책임졌으니 끌고 가야겠다, 결심을 단단히 하고, 경제는 배우고….내가 학자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먼저 물가를 잡아야 된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고 했어요. 안정과 성장이란, 두 마리의 토끼와도 같아 둘 다 잡으려면 다 놓치기 쉽다는 거였습니다. 내가 전문가가 아니었으므로 결심하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물가가 오르면 남미의 ABC나라들처럼 된다, 그러니 물가를 잡아야겠다, 물가가 올라서 성장을 해봐야 그게 무슨 성장이냐 하는 결심을 확실히 굳혔습니다.…지침을 주면서도 내가 불안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국가 경영이란 시험해 볼 수 없는 게 아닙니까. 일단결심하고는 밀어붙였습니다.』(김성익 저「전두환 육성증언」)
이 같은 과정에서 김재익 경제수석은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전 대통령 본인은 불론 국가를 위해서도 행운이었다. 김 수석에 대해 대부분의 평자들은 지금까지도 극찬을 서슴지 않는다. 혹자는 그의 출중한 실력과 혜안을, 어떤 이는 그의 성직자에 가까운 생활태도와 공인으로서의 귀감 됨을 손꼽았다. 뒤에 설명되겠지만『김 수석에게는 대단히 비정한 면이 있었다』고 술회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대한민국이 다시 얻기 어려운 인재』라는 평가에 공감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시작하면 불도저 식> 전두환 장군의 첫 경제가정교사였던 박봉환 씨(전동자부장관)는『먼저 인플레를 잡아야 한다』는 신념을 그의 학생에게 심어 주었다.『1차대전후 독일의 극심한 인플레는 사회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혼란을 틈타 히틀러가 집권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히틀러를「인플레의 양아들」이라고도 부릅니다』 『레닌도 말했습니다.「자본주의를 무너뜨리려면 사회혼란을 유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그 사회의 통화를 타락시켜야 한다」고 말입니다. 통화를 타락시키는 것이 바로 인플레입니다』 등등의 비유를 드는 방식이었다. 실권자인 전두환 장군에게는 정보채널이 많았던 만큼 박씨의「경제학습 지도안」이 잘못된 것이라고 딴 죽을 걸어오는 소리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전두환 학생은 경제학 자체에는 무지했지만 줏대하나는 누구보다 강했다.
박봉환 전 장관의 회고. 『다른 채널을 통해「안정화시책은 결국 경제발전을 저해한다」는 주장들이 전 장군에게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당시 경제상황을 예로 들며 차근차근 설명했어요.「인플레를 무릅쓰고 성장 위주로 가면 결국 장기적으로는 국가와 민족에 손해가 됩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특히 「국가와 민족」부분에 공감하면서「그러면 안되지」라고 결론을 짓더라고요. 아, 육사교육이라는 게 꽤 민족주의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후임자인 김재익 수석은 더욱 강하게 전장군의 머리를 사로잡았다. 안정·자율·개방이라는 5공경제의 기조가 이때 터를 잡기 시작했다. 김재익 씨는 국보위 경과위원장을 거쳐 80년 9월10일 청와대경제수석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국보위·청와대 행에 대해 부인 이순자씨(55·숙명여대 교수)는『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지금은 다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어쩔 수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이도 청와대에 들어가 일하면서 제게 종종 이런 말을 했습니다.「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이런 위치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는 게 아니야. 나는 행운아야」라고요. 집 주변으로 산보하러 갈 때도 혹시 호출이 있을지 몰라 삐삐를 갖고 가고, 외국인들을 만나 우리나라 경제를 설명하느라 자기는 식사도 제대로 못하면서도 무척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고 「시간이 너무 드는 운동이라 싫다」며 골프는 대통령이 자꾸 권했어도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보필 잘하면 괜찮아"> 이순자씨는 또 김 수석이 청와대에 들어가면서『정치자금은 절대로 저와 의논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요구해 전두환 대통령의 다짐을 받아 냈다고 말했다. 김재익 씨의 고향친구이자 대학동창인 L씨는 국보위시절의 김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서로 집이 가깝기도 해(서울반포) 김씨는 저녁이면 슬리퍼를 끌고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어요. 80년은 흉흉한 시절 아니었습니까. 전두환 장군에 대한 세간의 반감도 대단했지요. 나는 김에게 그랬어요.「야, 너 같은 친구가 왜 전두환 같은 자를 받드느냐」고 노골적으로 면박을 주었어요. 그랬더니 이 친구 하는 말이「그게 아니야」 라는 거예요.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전 장군은 부지런한데다 공정 하려고 애쓰고, 가정 생활 깨끗하고, 밤잠 안자고 나라걱정을 한다」는 겁니다.「곁에서 누가 잘만 보필하면 괜찮을 사람」이라는 거예요. 나는 기가 차「이놈아, 예수 믿으면 예수가 제일이고 부처 믿으면 부처가 제일이라 더니 너 혹시 권력에 취한 것 아니냐」고 했지요. 나는 그때 10·26사건 수사 발표를 하던 군복차림 전장군의 독해보이는 눈매가 좋지 않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어요. 그랬더니 김은「여하튼 지금 상황에서 그 양반을 대체할 권력자가 있느냐」고 되묻더군요.』
김재익 씨는 1938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9남매 중 막내로 모친이 43세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터라 부인 이씨가 가끔「당신은 노인아들」이라고 놀렸다고 한다. 6·25 전란 중에 부친이 희생됐고 형들 중 3명도 그 와중에 행방불명되었다. 독실한 카톨릭 집안으로 김씨의 곧고 맑은 성품이 종교의 영향 때문이라고 짐작하는 이들이 많다. 누나 중 2 명은 수녀로 각각 성심여대학장·성심수녀원 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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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김재익의 만남을 두고「힘과 꿈의 결합」이라고 표현한 이가 있다. 적절하면서도 재미있는 말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방면 지식이 당초에는 백지에 가까웠음을 들어『김재익이 아닌 다른 학자라도 전대통령을 사로잡았을 것』이라며 『백지에는 먼저 그림을 그려 넣는 사람이 임자』 라고 둘의 만남을 깎아 내리는 측도 있다. 그러나 김 경제 수석은 평범한 화가가 아니었다. 백지(전대통령)도 단순한 백지는 아니었다. 많은 화가들이 서로 자기 그림을 먼저 그려 넣으려고 달려들었지만 이중에서 김 수석을 선택한 사람은 전대통령 자신이었다. 생전의 김 수석에게는 적이 많았다. 신 군부의 창업공신들이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관료사회, 특히 경제관료 가운데도 비판자가 많았다. 업무방향에 대한 소신 때문에 김 수석을 공격한 이들도 있었으나 권력·자리다툼이라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외화는 걱정 마라"> 김 수석의 입장에서는 본래의 업무를 추진하기 위해 권력게임이라는 체질 외의 일과 전혀 무관할 수는 없는 입장이어서 일종의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82년에 일어난 쌀 도입파동을 농수산부 관료로 가까이 서 겪었던 A씨는 김 수석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고인에 대해 평하기가 매우 조심스럽다』며 증언하기를 꺼리던 A씨에 따르면 외 미 파동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김 수석은 대단치 냉혹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김 수석도 그 살벌한 권 부 안에 들어와 자기 소신을 관철하려다 보니 모질어 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의 이지적인 면모는 냉정한 측면으로, 명석한 판단력은 비정한 면으로, 설득력 있는 논리구사력은 목표달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측면으로 바뀌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A씨)
A씨가 김 수석을「다시 보게 된」전말은 이렇다. 80년 새 정권이 출범하게 된 마당에 유사 이래의 대 흉년이 들었다. 냉해 탓이었다. 옛날 같으면 나라인구의 세 명중 한 명은 굶어 죽거나 풀뿌리로 연명해야 했을 정도의 흉년이었다고 한다.
A씨의 말. 『80년 당시 평년작(지난 5년간의 작황을 근거로 한 예상수확량)은 3천8백만 섬이었는데, 실제 수확량은 2천4백66만 섬이었습니다. 무려 1천3백만 섬이 모자랐던 겁니다. 신 군부 입장에서는 초비상이었지요. 새「군주」가 등장하는 마당에 찬란한 서기가 뻗치지는 못할 망정 대 흉년이 들었으니 얼마나 긴장했겠습니까, 이해 10월 농수산부의 관계자 B씨에게 김 수석의 지시가 떨어졌어요. 외국쌀 도입계획을 세워 보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B씨는 1천1백60만 섬을 도입하겠다는 계획서를 만들어 김 수석에게 보고했으나 기각 당했어요.「1천5백만 섬으로 늘려 잡아라」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청와대의 기류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쌀을 들여와 국민을 굶기지 말자는 식이었습니다.』
B씨는 어려운 외환사정 등을 들어 1천5백만 섬 도입에 난색을 표했으나『외환 같은 것은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는 김 수석의 면박만 받고 하는 수 없이 지시에 따랐다고 한다.
『쌀 도입이 계속 진행돼 81년 2월 들어서는 이제 일본쌀 2백만 섬(약 30만t)만 수입하면 되겠다는 것이 농수산부의 판단이었습니다. B씨가 그 내용을 보고하러 남덕우 국무총리의 방에 갔어요. 뜻밖에도 김 수석이 그 방에 와 있더라는 겁니다. 거기서 농수산부의 30만t안은 김 수석의 60만t안과 다시 대립됐어요. 남 총리가 중재에 나서서 50만t으로 결론이 났지요.』결과적으로 청와대의 강력한 종용으로 농수산부의 당초안보다 5백만 섬 가까이 더 수입됐다는 말이었다(쌀 1t은 약 7섬에 해당 됨).
<민심동요 가장 걱정> 흉년으로 민심이 동요하는 것을 새 정권은 가장 겁냈던 듯하다. 전대통령 본인도 나중에 식은 땀 났던 당시 상황을 술회하고 있다.『80년 도에 흉작이 들어 쌀을 외국에서 사 오느라고 애를 먹었는데 내가 농수산부에 지시해 심리전을 썼습니다. 외국에서 들여오는 쌀을 하역하는 장면을 매일 탤리비전에 찍어 내보내도록 하고 열차도 지방에 내려보내는 것을 소비자들에게 보여 주라고 했어요. 광주에 가는 쌀을 송정리에 내려놓으니 사람들이 못 보는데 쌀을 광주까지 싣고 가서 광주시내를 뱅뱅 돌아 송정리에 가게 하라고 했습니다. 왜관에서 내리는 것은 대구시내를 돌게 하고.』(전 대통령의 87년 발언. 그러나 농수산부는 이 때문에 수송비를 낭비했다는 이유로 감사원의 감사에 걸려 곤욕을 치렀다)
또 쌀의 도입가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김주호 당시 조달청장이 보여 준 뚝심은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 김 청장은 박정희 대통령시절부터 우리나라에 대한 쌀 수출을 도맡아 오면서 막대한 이익을 남기던 코넬사(미국)의 압력과 유혹을 뿌리치고 최대한 낮은 가격으로 쌀을 구매해 뒷날 전대통령으로부터「애국자」라는 칭찬을 자주 받았다.
『미국사람들이 참 대단합디다. 자기네가 직접 우리의 예상 쌀 수확량을 조사하는가 하면 느닷없이 새벽에 커다란 선물가방을 싣고 우리 집을 찾아오더군요. 물론 열어 보지도 않고 돌려보냈지요. 나중에 대통령이 된 부시가 그때 부통령이었는데, 한국을 방문해 대사관 관계자를 통해 우리 집에 전화를 한 적도 있습니다. 「미 대사관저에서 함께 테니스를 치자」는 것이었어요. 직급도 직급이려니와 쌀 도입 책임자이던 내가 응할 리 없었지요. 그때 정말 놀란 것은 내가 테니스를 끔찍이 좋아한다는 걸 정확치 알아낸 그들의 정보력·로비실력이었습니다.』(김주호씨·60·현 사료협회장)
<돌연 "사표 쓰라" 압력>
문제는 과다한 도입물량이었다. 낮은 가격을 고집한 한국 측의 태도에 앙심을 품은 코넬사 등은 82년 3월 들어『한국의 조달청관리가 쌀 도입 과정에서 6백만 달러의 뇌물을 받았다』고 미국법원에 얼토당토않은 제소를 했다. 이 소식이 날아들자 우리 국회는 곧「외미 도입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해 따지기 시작했다. 사건초기의 한국언론은 외신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대문짝 만하게 보도하기 시작했고, 김 조달청장에게는 한동안「6백만 달러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국회의 조사과정에서 뇌물부분은 사실무근인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과다한 도입물량은 문제로 남았다. 앞서 언급한 A씨의 계속되는 증언.
『국회조사를 앞두고 청와대에서 정부관계자들이 김 수석의 주재로 대책회의를 연 것으로 압니다. 그때 금수석이 농수산부에서 불려 간 B씨에게「국회답변과정에서 청와대가 개입하거나 지시했다는 말을 하면 불경죄로 다룰 테니 조심하라」고 경고하더랍니다. 그 말이 아니더라도 농수산부가국회의원들에게 장관 위선을 언급할 처지는 못되겠지요. 어쨌든 과다도입에 따른 책임은 농수산부가 뒤집어썼어요. 그런데 국회조사가 마무리되자마자 그 B씨는 장관으로부터「청와대 김 수석의 통보다. 사표를 써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됩니다. 파동을 진정시키기 위한 회생양민 셈이지요. 김 수석에게 이렇게 냉랭한 구석이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사표는 우여곡절 끝에 반려되고 B씨가 한직으로 좌천되는 선에서 일이 매듭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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