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인데 이 사람아!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저런 현판글씨를 지금도 걸어놓고 있는가? 당장 떼어 내리게! ”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로 귀양가다 친구 초의선사를 만나려 해남 대흥사를 들렸다.
김정희는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현판 글씨 '大雄寶殿'을 보고 이렇게 호통을 쳤다.
그리고 붓과 종이를 가져오게 하여'大雄寶殿'이라고 써주었다.
그리고는 내친김에 “無量壽閣”이라는 글씨까지 써주면서 판각해 걸어 놓으라했다.
추사 김정희는 귀향 가는 길에서도 후한 대접을 받으며 제주도에 들어갔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8년 3개월 동안 위리안치 된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다시 대흥사를 찾았다.
“내게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현판은 어디 있는가?
내 글씨를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주게. 내가 그때는 잘못 보았어.”
추사 김정희는 초의선사에게 솔직한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은 것이다.
이경석의 묘비이다.비좌는 네 면에 당초문이 있으며 상부에 전후 5엽 좌우 1엽의
화려한 단판 복련문이 조각되어 있다. 비신은 백색 대리석제로 예서체(隷書體)의 비문은 네 면에 있다.
“有明朝鮮國領議政文忠公白軒李先生景奭墓 貞敬夫人全州柳氏祔左"
앞면에 세로 석 줄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비문은 현손인 광회(匡會)가 찬하고 광사(匡師)가 썼다.
묘표의 4면에 가득한 이광사의 글씨는 정갈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이경석 신도비와 함께 독특한 이광사의
서예를 볼 수 있는 18세기의 대표적인 묘비이다.
서계 박세당이 찬술한 백헌 이경석의 신도비다.이 비의 글씨는 완도의 신지도에 유배되었던 원교 이광사가 썼다.
이광사는 백헌 이경석의 형 석문 이경직의 고손이다.이광사는 조선후기의 양명학자 서예가로 정재두(鄭齋斗) 윤순(尹淳)의
문하이다. 일찍이 윤순에게서 글씨를 배워 가학으로 전수받은 학문과 필법(筆法) 에 대한 풍부한 소양과 자신의 개성을
살려 꾸준히 서예를 연마한 결과 18세기에 있어서 가장 이름높은 인물이 되었다.
이광사는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 양명학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긍익의 역사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다.
이긍익은 1736년(영조 12) 서체로 유명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정종의 서자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자, 이경직(李景稷)의 5대손이다. 이경직은 동생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호란 때에 왕을 호위하여 호조판서에까지 이르렀고, 이경석은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는 등 당대 명망 높은 명문 집안이었다.
그러나 소론 강경파였던 이 가문은 여러 차례 큰 화를 입었다. 백조부 이진유(李眞儒)는 이조판서 재직 당시 경종이 승하한
사실을 청나라에 보고하기 위하여 고부부사(告訃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경종을 쫓아내려는 노론에 맞섰다가 영조의
역적으로 몰려 옥사하였다. 조부 이진검(李眞儉)은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앞장섰다가 영조의 즉위 이후에 처형당했다.
이 집안의 환란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20살 때에 아버지 이광사는 1728년(영조 4)의 이인좌(李麟佐)의 난과 1755년(영조 31)의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가 1777년(정조 1) 적소(謫所)인 신지도(薪知島)에서 사망하였고, 남편의 투옥에
충격을 받은 이긍익의 어머니는 42살의 나이로 자결하였다.
집안이 풍비박산된 상황에서 이긍익은 평생 벼슬을 외면한 채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는 데만 전념하였다.
약 30년간에 걸쳐 『연려실기술』을 저술하게 된 데에는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불우한 삶을 살아야 했던 개인적인
아픔이 계기가 되었다.
조선 야사(野史) 연구의 선두주자가 되다
노·소론의 당쟁 속에서 뼈아픈 가정사를 겪은 이긍익은 자신의 불운한 환경을 원망하기보다는 역사에 대한 관심과
저술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켰다. 부친의 유배지인 신지도에서 그는 여동생을 데리고 채소밭을 가꿔 생계를 이으면서
역사서인 <연려실기술>을 편찬했다.
이 책의 탄생은 실로 운명적이었다. 13살 때에 이긍익은 임금이 내준 운(韻)에 대구를 짓는 꿈을 꾸게 되었다.
꿈 이야기를 들은 부친 이광사는 ‘길몽’이라고 기뻐했고, 이긍익도 훗날 어전에서 붓을 잡을 징조[日後簪筆之兆]라고 생각했다.
잠필(簪筆)이란 붓을 휴대한다는 의미로, 그는 ‘임금 곁에서 붓을 드는 신하[簪筆之臣]’ 즉, 정사(正史)를 편찬하는 사관(史官)이
될 것이라 믿었다. 집안이 몰락하면서 꿈꾸어 왔던 입신의 꿈은 사라졌지만 조선시대 야사(野史)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를 편찬할 것이라는 예언은 적중한 셈이다.
강화도 사기리에 있는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1852-1898)의 생가 명미당(明美堂)이다.
강화도 출신으로는 최후의 강화학파의 효장이 다름 아닌 이건창(李建昌:1852~1898)이다.
대대로 이름난 벼슬아치나 학자들을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난 영재(寧齋) 이건창은 자가 봉조(鳳藻:鳳朝)요,
당호는 명미당(明美堂)이었다.
영재의 할아버지 사기 이시원(沙磯 李是遠:1790~1866)은 그의 아우 이지원(李止遠)과 함께 외국의 군대에 함락된 병인양요의
억울함을 참지 못해 형제가 나란히 목숨을 끊어 자결했던 당대의 의인이다.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른 고관대작으로 나라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버린 할아버지의 의혼을 이어서 영재도 나라를 위해서는 의로운 벼슬아치로 살았지만 끝내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명성을 얻어 의리와 문장이 함께 빛나는 역사의 땅으로 강화도를 자리매김해주었다.
강화도 초봉산(椒峯山) 아래에 살면서 초원(椒園)이라는 호로 불리던 이충익은 벼슬보다는 학자로 높은 이름을 얻었다.
그 아들 대연 이면백(垈淵 李勉伯)은 진사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다산 정약용 등과 교류가 있었던 당대의 학자였다.
그 아들이 이시원 판서, 판서의 아들이 이상학(李象學)으로 양산군수를 지냈고 그 아들이 이건창·이건승이고
그의 당질이 난곡 이건방(蘭谷 李建芳)으로 위당 정인보의 스승이었다. 모두 양명학을 계승한 강화학파의 주요 멤버들이었다.
이건창·이건승·이건방의 세 학자만으로도 강화도는 학문의 고장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글벗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 써 붙인 현판 명미당(明美堂)이다.
명미당(明美堂), '맑고 아름다운 집'이다. 그 집 주인의 인품이 그렇다는 뜻이 아닐까.
1905년(광무 8년)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1908년(융희 3년)에 이 나라 사법권이 일본으로 넘어 갔을 때
매천 황현은 이미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상실했다. 죽기 전에 한 번 더 영재 이건창의 생가와 무덤을 둘러보았다.
그때 마지막 한풀이로 시 한 수를 남겼다.
"죽어서 외롭다고 서러워 말 것이(無庸悲獨臥),
그대는 살어서도 혼자가 아니었던가(在日己離群)"
해학 이기, 창강 김택영, 매천 황현은 영재와 함께 나라를 걱정했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영재 이건창이 강화도에서 이웃에 살던 고관 출신 두 친구를 함께 거명했다. 이계 홍양호의 후손인 홍승헌, 하곡 정제두의
6대종손인 정원하는 두 분 모두 참판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이들은 세 사람이 연명해 상소를 올리며 나라를 제대로 바로잡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일 때문에 모두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런 가까운 친구들이 있었기에 사후의 영재는 외롭지 않았다.
아우 이건승의 노력으로 영재의 문집인 ‘명미당집’ 20권이 중국에서 활자로 간행될 수 있었고, 김택영은 문집의 서문을 지어
영재의 인품과 문장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내렸다.
매천 황현은 영재의 죽음에 제문과 만사를 지어 슬픔도 표했지만 인물에 대한 평도 올바르게 내렸다.
이건승은 죽은 형의 행장을 지어 일생을 소상하게 밝혔고, 친구 이조참판을 지낸 홍승헌은 영재의 묘갈명을 지어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의 일생을 대체로 바르게 평하고 있다.
해학 이기(1848~1909)는 김택영의 문집인 ‘소호당고’의 서문에서, 조선 500년간 당·송나라의 문장을 이은 조선인으로는
월사 이정귀·계곡 장유·농암 김창협·연암 박지원·연천 홍석주·대산 김매순 등 5~6명뿐인데 이들을 이을 수 있는 사람은
이건창과 김택영 두 사람이라고 했다. 김택영도 영재의 문집 서문에서 조선 후기의 문장가로는 홍석주와 김매순인데
이들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이건창으로 조선 후기 3대가라고 지목했다.
조선 500년을 대표하고 조선의 끝자락을 상징할 수 있는 문장가가 바로 이건창이라는 것을 당대에 함께 글을 짓고 세상을
논했던 친구들이 사심없이 내린 평가였다면 그 이상의 어떤 평가가 필요하겠는가.
이건창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아우인 경재(耕齋) 이건승이다.
나라가 망하자 친구들과 함께 자결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죽기가 쉬운 일인가. 마침내 형의 친구이자 자신의
친구들인 홍승헌·정원하 등과 함께 가족을 이끌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풍찬노숙으로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나,
이제는 종적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너무나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