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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할리우드스타 원문보기 글쓴이: 스티브 맥퀸
스티브 맥퀸(1930. 3. 24. ~ 1980. 11. 7.)
출생지 : 미국 인디애나주 비치그로브
사망지 : 멕시코 치와와주 시우다드후아레스 소재 후아레스 병원
본명 : 테렌스 스티븐 맥퀸
닉네임 : Bandito(강도)
King Of Cool
Mac
McQ
키 : 177cm(출처 : IMDB)
수상 경력 :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1963, '대탈주')
들어가며
'아메리칸 드림'의 산증인이자 인간 승리의 표본으로서 일생을 통해 바람처럼 자유와 스피드를 갈구하고 누렸던 스티브 맥퀸은 스크린의 광대이기 이전에 한 자유인이었다.
맥퀸은 내면이든 외면이든 꾸밈과 가식을 운명처럼 치렁치렁 달아야 하는 배우로서보다는 본능과 진정성으로 주체적인 자리에 선 자연인에 가까웠다. 물론 자연인이라고 해서 '가식'이라는 인간 생존의 원리를 갖추지 말란 법은 없지만, 맥퀸은 적어도 자신의 출생부터 성장, 그리고 임종까지 한 순간도 나태하지 않고 시기, 콤플렉스, 방황 등 인간의 자아를 세우게 하는 원죄적 요소들과의 끊임없는 투쟁과 극복을 통해 자신의 진면모를 스크린으로까지 확장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관찰은 참으로 흥미롭고 가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맥퀸은 여느 배우들과는 달리 자신의 삶과 연기가 유리되지 않았다. 그에겐 연기도 치열한 삶의 연장선이었다. 맥퀸은 인생의 쓴맛과 단맛, 좌절과 영광을 모두 맛보고, 관객들도 그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스크린에 놀랍도록 고스란히 재현한 배우였다. 맥퀸은 영화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말대로 평생 인생 낙오자로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그의 영화에서 삶의 의미와 삶에 대처하는 자세를 통찰할 수 있고, 또 그럴 필요가 있다.
그는 관객에게 때로는 매혹과 찬탄을 심어 주고, 또 때로는 열등감을 안겨 준 독특한 배우였다. 뭇 여성들은 그를 원했고, 뭇 남성들은 그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른바 '비틀즈 세대'로부터 가장 열광적인 인기를 누렸던 스티브 맥퀸. 그의 연기 이력은 곧 그의 삶의 궤적이었기에 본인은 여기서 맥퀸의 잡초 같은 삶과, 아슬아슬했지만, 거침없이 달려온 그의 영화 인생을 시대별로 아울러 살펴보기로 한다.
파란 많은 성장기, 곡절 많은 청년기(출생부터 1960년까지)
'상처뿐인 영광'(1956)에서
'블랍'(1958)에서
'네버 소 퓨'(전쟁과 애욕·카친 수색대, 1959)에서
'황야의 7인'(1960)에서
맥퀸의 인생 자체가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특히 그의 어린 시절은 누구도 쉽게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기구하고 불우했다. 그는 후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워야 했다. 얘기할 상대가 아무도 없었고 늘 혼자였다. 난 자연스럽게 자립심을 배웠다. 17살 때, 난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을 만큼 뼈저린 가난과 고독에 시달려야 했다.
본명이 테렌스 스티븐 맥퀸인 스티브 맥퀸은 1930년 3월 24일, 미국 인디애나주의 비치그로브란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1929년에 미국에서 촉발된 대공황의 그림자가 한창 거세질 무렵에 출생한 것도 불운이려니와, 전(前) 순회 곡예 비행사였던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자 미혼모에 부양 능력이 없는 알콜중독자였던 어머니가 결국 3살 난 맥퀸을 미주리주의 슬레이터에 살고 있던 자신의 부모에게 맡긴 것부터 그의 인생은 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맥퀸은 그래서 아버지의 존재를 몰랐고,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다.
대공황의 여파가 마을을 덮치자 얼마 후 맥퀸은 외조부모와 함께 외조모의 오빠, 곧 슬레이터에서 작은 농장을 경영하던 맥퀸의 외종조부에게로 이사한다. 다행히 맥퀸의 외종조부는 맥퀸을 손자처럼 대해 주고, 맥퀸은 잠시나마 그런 외종조부와 지냈던 어린 시절을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했다고 한다. 그가 간직했을 어린 시절의 그리움은 영화 '멤피스로 간 세 도둑'(1969)에서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맥퀸은 8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와 계부가 살고 있던 인디애나폴리스로 가는데, 어려서부터 실독증과 귓병으로 인한 부분적 청각 장애를 앓았던 맥퀸은 자신의 새로운 삶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는 거리의 갱들과 어울렸고, 사소한 범죄들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맥퀸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게 된 그의 어머니는 결국 다시 그를 슬레이터에 보냈다. 그러다 맥퀸이 12살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가 자신의 외삼촌에게 자신이 다시 재혼한 남편과 살고 있던 LA로 맥퀸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해 맥퀸은 LA로 가게 되는데, 맥퀸이 자신과 어머니에게 폭력을 일삼는 계부와 갈등을 빚고, 곧 다시 반항의 길로 들어서게 됨에 따라 그는 도로 외종조부가 있는 시골로 보내진다.
맥퀸은 14세 때, 결국 외종조부의 농장을 떠나고, 잠시 서커스단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다 맥퀸이 다시 LA의 어머니와 계부에게로 돌아가게 된 후 그는 서서히 갱단의 일원으로서 잡범 생활을 재개하기 시작했고, 맥퀸과 계부와의 갈등은 자연스레 깊어져 맥퀸의 어머니는 결국 남편의 설득으로 맥퀸을 캘리포니아의 차이노 힐즈(Chino Hills)에 소재한 주니어 갱생 학교인 '보이즈 리퍼블릭(Boys Republic)'에 보내게 된다.
여기서 맥퀸은 서서히 변화하고 성숙하게 된다. 간혹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키도 했지만, 거기서 18개월을 보내는 동안 학교의 취지를 이해하게 된 맥퀸은 훗날 자신이 유명해진 후 정기적으로 학교를 찾아 아이들과 대화했으며, 평소 소문난 구두쇠였던 그가 유언장을 통해 아이들을 위한 기부금으로 20만 달러를 쾌척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16살에 학교를 나온 후 다시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살고 있던 어머니에게 돌아가지만, 곧 다시 어머니 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가는 상선에서 선원으로 일하다가 도망쳐 미국, 캐나다 등지를 떠돌며 석유 굴착 인부, 벌목공, 권투 선수, 매음굴 잔심부름꾼, 잡상인 등의 온갖 직업을 전전하던 중 맥퀸은 1947년에 해병대에 입대하는데, 군 생활에 대한 부적응으로 오래 못 가 예전의 반항심을 되찾고, 결국 탈영의 죗값으로 영창에 41일 동안 수감된다. 그리고 군 복무 중에 맥퀸은 신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는데, 몇 주 동안 보일러실에서 보일러를 수리하거나 해체하는 처벌을 받다가 단열재 등에 있는 석면에 노출돼 이것이 결국 그를 이른 죽음으로 모는 원인이 된다.
이후 맥퀸은 점차 자기 개선의 의지를 보이고 해병대의 규율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북극에서의 훈련 중 배에 있던 탱크가 바다 속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하자 맥퀸은 탱크가 빙하에 부딪히기 전에 탱크 안에 있던 5명의 동료 대원들을 구조해 내는 영웅적 행동을 보이는데, 그로 인해 트루만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고, 이윽고 1950년에 명예롭게 제대해 사회에 나온다.
제대 후 뉴욕에 온 맥퀸은 생계를 위해 다시 도박사, 택시 운전사, TV 수리공, 신문 배달부 등의 직업을 전전하는데, 친구의 제안으로 연기에 관심을 갖게 된 맥퀸은 1951년에 연기 학교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에 입학했고, 1955년엔 2000여 명이 오디션에 참가한 '액터즈 스튜디오' 입학 시험을 치른 끝에 마틴 랜도와 함께 단둘만이 바늘구멍 같은 관문을 당당히 뚫는다. 그럼으로써 맥퀸은 험프리 보가트, 제임스 캐그니, 스펜서 트레이시, 존 웨인 같은 스타들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으며 본격적으로 연기 수업을 받는다. 그는 당시 연기 학교의 비싼 수업료를 대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도 쉴 새 없이 새벽까지 트럭을 모는 일과 오토바이 경주 대회에 나가 상금을 버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쨌든 뉴욕은 그에게 '기회의 땅'이나 다름없었다.
학교 졸업 후 몇몇 단역배우로 활동하던 맥퀸에게 1956년, 드디어 두 차례 행운이 한꺼번에 찾아오게 된다. 이미 1955년에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해 'A Hatful of Rain'(빗물 가득)이라는 연극에서 벤 가자라의 대역으로 잠시 출연하다 얼마 못 가 해고됐던 맥퀸은 그 사이에 교제했던 연극 배우 출신의 닐 애덤스를 반려자로 맞이하고, 자신의 필모그래피의 출발점이나 다름없는 영화인,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상처뿐인 영광'에 출연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맥퀸은 '상처뿐인 영광'(이 영화는 로버트 듀발, 로버트 로지아 등의 신인들을 등장시킨 스타 등용문과 같은 영화이기도 했다)에서 비록 하찮은 역할이나마 날것 그대로의 건달 연기를 인상 깊게 펼치는데, 후에 이것이 인연이 돼 정확히 십 년 후 로버트 와이즈는 대작 '산파블로'에서 본래 주역으로 내정됐던 폴 뉴먼을 대신해 맥퀸을 기용하고, 맥퀸은 은혜에 보답하듯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펼쳐 이듬해 자신의 생애에 있어 유일하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까지 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상처뿐인 영광'에서 맥퀸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의 상처를 입게 된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지만, 그 상처의 가해자는 바로 폴 뉴먼이었다. 영화의 히어로로서 일약 할리우드의 신성으로 떠오른 뉴먼은 이후 탄탄대로를 걷게 되는데, 이 영화에서 맥퀸과 악연 아닌 악연을 맺게 되는 것이다. 즉 할리우드란 허영의 시장이 늘 그렇듯 배우들에 대한 대우는 그 위상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바, 뉴먼에겐 리무진과 경호원들이 딸리는 등 뉴먼은 어느 출연자들과는 다른 융숭한 대접을 받는데, 어느 날, 눈치 없는 맥퀸이 뉴먼의 리무진에 동승하려다 경호원들에게 제지돼 끌어내려지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제서야 맥퀸은 할리우드의 냉혹한 자본주의 논리를 터득하고 뉴먼을 자신의 필생의 라이벌로 설정해 절치부심하는데, 그것은 맥퀸에게 있어 거대한 성장 동력이 돼 그 후로 18년 뒤인 1974년, 초호화 대작 '타워링'에서 적어도 동등한 대우를 누려 자신의 이유 있는 콤플렉스를 보상받게 된다.
어쨌거나 맥퀸은 그 후 뉴먼처럼 순탄하진 않을지라도 차근차근 연기 경력을 쌓게 되는데, TV 서부극 시리즈 'Wanted: Dead or Alive'(떠돌이 총잡이, 1958 ~ 61)에서 주역을 맡아 그 인기로 브라운관에서 먼저 인지도를 쌓기 시작하고, SF 호러물 '블랍'(1958)에서 처음으로 주역을 맡아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리고 1959년, 그에게 다시 호기가 찾아온다. 'Never So Few'(전쟁과 애욕·카친 수색대, 1959)에서 맥퀸은 존 스터지스, 프랭크 시나트라와 만남으로써 영화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 것이다.
당시 할리우드엔 이른바 '랫 팩'[Rat Pack, 1940, 50년대에 험프리 보가트 등 일군의 배우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그들만의 호사스런 밤 문화를 흥청망청 즐기는 것이 꼭 쥐 떼들 같다 하여 보가트의 아내 로렌 바콜이 이름 붙인 것. 이것은 험프리 보가트의 사후에 프랭크 시나트라를 필두로 한 배우들에게 전염됐고, 또 80년대엔 이와 유사한 행태를 보인 일군의 청춘스타들에게 부여된 '브랫 팩'(Brat Pack, '애송이들의 무리'란 뜻)으로 변형되었다.]이라 불리는 일군의 배우들의 영향력이 지대했는데, 영화가 크랭크인되기 전 이미 'Wanted: Dead or Alive'에서 맥퀸을 인상 깊게 본 시나트라가 자신의 왼팔이나 다름없는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를 내치면서까지 맥퀸을 감독인 존 스터지스에게 추천해 출연케 했고, 결국 맥퀸에게 비중 있는 배역이 맡겨지는데, 맥퀸과 시나트라, 스터지스의 인연은 앞서 맥퀸과 뉴먼, 와이즈의 인연 못지않게 맥퀸에게 결정적인 인연으로 작용한다. 촬영 내내 맥퀸과 시나트라는 인간적으로 서로 호감을 가져 촬영장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고 한다. 시나트라는 맥퀸에게 자신의 무리로 들어올 것을 권유하며, '오션스 일레븐'(1960)의 출연 제의로 맥퀸을 망설이게 했다는데, 그러던 어느 날, 맥퀸은 여배우이자 친구인 헤다 호퍼로부터 시나트라의 하수인이 되기 보다 독자적인 사람이 되라는 조언을 듣고서 출연 제의를 과감하게 뿌리쳤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스티브 맥퀸이 얼마나 영리한 배우인지를 알 수 있다. 비록 대모 같은 선배 여배우에게서 들은 조언 덕이라고는 하지만, 초짜 배우로서 어쩌면 명성 있는 배우의 우산 속에 들어가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일 수도 있을 유혹을 뿌리치고 스스로 비록 멀고 험하더라도 자신이 우직하게 가야 할 길을 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퀸의 영리함은 자신의 후견인과 같은 존 스터지스 감독의 다음 연출작인 '황야의 7인'(1960)에서도 빛을 발한다. 비록 당시 거물 배우였던 율 브린너에 밀리는 조연이었다고는 하지만, 맥퀸은 율 브린너의 기에 눌리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각본에 없는 돌출 행동으로 관객의 시선을 붙잡으려 했는가 하면, 비교적 단신인 키로 인해 자신이 조명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해 특히 율 브린너와 함께하는 신(scene)에서는 자신의 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브린너보다 항상 높은 곳에 자리하려 했다는 일화는 유명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촬영장에서 브린너는 맥퀸을 상당히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맥퀸과 스터지스는 이후로 '대탈주'(1963)에서도 호흡을 맞추고, '대탈주'는 맥퀸의 대표작이 될 만큼 맥퀸을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해 스터지스 감독은 맥퀸의 영화 인생에 있어 최고의 은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기를 누릴수록 고개를 숙이기는 어려워서인지 1960년대 후반에 이미 슈퍼스타로 커 버린 맥퀸은 점차 성격장애가 수반된 안하무인식의 독불장군이 돼 가고 만다. 1971년작인 스포츠 영화 '르망'(영광의 르망, 1971)에서 맥퀸은 다시 한 번 스터지스 감독과 일할 기회를 얻지만, 당시 제작에 깊숙이 관여한 맥퀸은 촬영 내내 스터지스 감독과 마찰을 빚어 결국 자신이 감독을 교체하는 상태에 이르고, 이후 맥퀸과 스터지스는 다시는 얼굴을 보지도 않는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고 한다.
아무튼 1950년대 후반에 비로소 배우로서 자립하게 된 맥퀸은 1960년대라는 할리우드 황금기를 맞아 자신만의 독특한 아우라로 자신의 역량과 개성을 맘껏 펼치게 된다.
1960년대의 맥퀸, 금빛 날개로 스크린에서 화려하게 비상하다
'허니문 머신'(걸 한트, 1961)에서
'지옥의 영웅들'(돌격대, 1962)에서
'워 러버'(순간에서 영원으로, 1962)에서
'대탈주'(에스케이프, 1963)에서
'버려진 본능'(1963)에서
'신시내티 키드'(1965)에서
'네바다 스미스'(1966)에서
'산파블로'(1966)에서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화려한 패배자, 1968)에서
'블리트'(1968)에서
'멤피스로 간 세 도둑'(1969)에서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다시 1960년대로 돌아가 얘기하자면, 맥퀸은 한마디로 제임스 딘 사후에 새로운 스타를 원했던 미국인들의 열망에 화답하듯 보다 색다른 영웅으로서 자신의 야망을 일관되면서도 질리지 않을 스타일로 분출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체득된 자유의지와 반항적 기질을 가지고 이른바 '안티히어로', 혹은 '도회적 터프가이'라는 시대의 요구에 멋지게 승차해 스크린에서 고스란히 재현하고 확장했던 것이다.
맥퀸에게 스크린은 놀이터였고, 카메라는 신기한 장난감이었다. 맥퀸은 연기에 임할 때, 항상 감독에게 성가실 정도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진지함을 보이면서도 아이처럼 즐거운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로서 결코 잘생긴 외모도, 그렇다고 큰 키도 가지지 못했지만, 삶의 고단함이 담긴 특유의 깊은 주름과 그을은 피부,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 그리고 불만에 가득 찬 듯 잔뜩 찡그린 얼굴과 삐딱하면서도 순진무구한 표정을 트레이드마크 삼아 자신의 매력을 한껏 발산했다. 근심 어리면서도 낙천적인 그의 아이러니한 모습은 그래서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반응자(Reactor)'라 여길 만큼 연기에서 본능적 감을 중요시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의 연기 스타일은 같은 '액터즈 스튜디오' 출신의 말론 브란도, 폴 뉴먼, 제임스 딘, 알 파치노 등의 배우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맥퀸의 연기는 얼핏 단순 명료해 보이는 것 같아도 그 내면들 들여다보면 자신의 인생처럼 복잡 미묘했다. 섬세하거나 매끄럽지 못한 날것 그대로의 연기였지만, 그 배후엔 정중동(靜中動)의 활력과 박력이 넘치는 연기가 계산되고 있었고, 무표정한 침묵 중에 살포시 짓는 미소엔 세상을 향한 조롱이 천연덕스럽게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 이면엔 또 부끄러운 자기 연민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의 맥퀸이 '황야의 7인', '지옥의 영웅'(돌격대, 1962), '대탈주', '네바다 스미스'(1966), '블리트'(1968) 등으로 이어지는 잇따른 액션 수작으로 액션 스타이자 흥행 보증수표로서의 입지를 굳힌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연기 변신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맥퀸은 간간이 '버려진 본능'(1963), '신시내티 키드'(1965), '산파블로'(1966) 같은 드라마나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화려한 패배자, 1968) 같은 일명 케이퍼 무비(Caper Movie, 범죄 스릴러물), 그리고 '멤피스로 간 세 도둑' 같은 잔잔한 코미디를 통해서도 색다른 재능을 선보인 바 있는 것이다. 물론 '멤피스로 간 세 도둑'이 흥행에 실패하자 그것을 자신이 코미디에 맞지 않는 탓으로 여긴 맥퀸은 더 이상 드라마적 요소가 강한 영화에 미련을 갖진 않았다지만, 큰 틀에서 볼 때는 작품을 선택할 줄 아는 안목으로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60년대의 스크린을 거침없이 달려갔다고 말할 수 있다.
맥퀸의 그러한 질주엔 아내 닐 애덤스의 공이 컸다. 중등 교육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학력을 가진 맥퀸은 연기에 큰 장애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필리핀계 혼혈로서 다분히 동양적 사고를 가졌던 닐 애덤스가 맥퀸의 일정 체크와 작품 선정에 관여하는 매니저 역할 및 대사 연습의 파트너 역할을 자임하면서까지 16년의 결혼 생활 동안 맥퀸을 꾸준히 내조했던 것이다. 둘은 1남(배우 채드 맥퀸, 1960 ~ ) 1녀(테리 맥퀸, 1959 ~ 1998)의 자녀를 두었는데, 닐 애덤스는 어려서부터 부모 없는 자식으로서의 설움을 겪어야 했던 맥퀸의 고독과 고통을 십분 이해하고, 맥퀸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모성으로 감싸 가정을 지켰다. 맥퀸 역시 그러한 자신의 상처를 반면교사 삼아 '블리트' 이후의 주체할 수 없는 인기로 70년대 초반까지 마약과 술, 그리고 여자에 탐닉하는 동안에도 자식들에 대한 사랑만은 지극 정성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60년대의 맥퀸의 인기와 주가, 그리고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언젠가 보란 듯이 뉴먼을 뛰어넘고야 말겠다는 자신의 다짐대로 이지적인 뉴먼과는 확실히 다른 매력으로서 60년대의 대표적인 할리우드 스타로 군림하는 데 성공한다. 맥퀸은 실제 프롤레타리아였고, 스크린에서 주로 프롤레타리아 역을 멋지게 연기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영웅이었다.
당시 스티브 맥퀸의 절대적인 위상과, 그에 따른 주변의 시기와 과심을 증명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들로서 1969년에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부인이자 여배우인 샤론 테이트 외 4명을 살해한 사건으로 그 끔찍한 죄상이 만천하에 발각된 바 있는 광신적 폭력 집단 '맨슨 패밀리'의 '히트 리스트'(이른바 '유명인 살해 리스트')와, 1972년에 닉슨 정부가 비밀리에 작성해 놓은 '정적(政敵) 리스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스티브 맥퀸은 프랭크 시나트라, 리차드 버튼 등과 함께 '맨슨 패밀리'의 주요 공격 표적이 되었고, 그레고리 펙, 폴 뉴먼, 제인 폰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과는 닉슨 정부가 경계하던 블랙리스트에 올랐는데, 특히 스스로 보수적 애국주의자라 자처했던 맥퀸이 닉슨 정부의 경계 대상에 올랐다는 사실은 당시 연인이자 진보적 영화인이었던 알리 맥그로우마저도 믿지 않았을 만큼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당시 맥퀸이 미국 사회 내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는지를 반증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위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맥퀸은 폴 뉴먼, 존 웨인과 함께 1967년부터 75년까지 배우의 인기 척도라 할 수 있는 '박스 오피스 스타' 순위에서 9년 연속 베스트 10에 나란히 얼굴을 보인다. 존 웨인이 로맨틱한 미남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등장해 남성적 스타들의 입지를 위협했을 때, "레드포드? 그 녀석은 한 세대의 인기 배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섯 세대에 걸쳐 인기를 지켰다. 보가트·쿠퍼·스튜어트의 시대, 홀든·그랜트·펙의 시대, 레먼·커티스·랭카스터의 시대, 뉴먼·맥퀸·코네리의 시대, 거기다 레드포드·호프만·레이놀즈의 시대다."라고 말했던 것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스티브 맥퀸은 존 웨인처럼 과묵하고 스턴트맨을 싫어한 배우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맥퀸은 영화 제작에도 관심을 보인다. 1961년에 제작사 'Solar Productions'를 설립해 자신의 출연작 상당수에 지분을 댔는가 하면, 입김 센 제작자로서 마이클 더글라스 같은 젊은 스타들을 등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2년엔 라이벌 폴 뉴먼,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시드니 포이티어, 더스틴 호프만 등과 함께 공동으로 제작사 'First Artists'를 설립해 각자 자신들이 출연하는 영화의 재정적 숨통을 틔워 주기도 했던 것이다. 두 제작사 모두 맥퀸의 사후에 소멸하고 말았지만, 특히 'First Artists' 같은 경우는 맥퀸과 뉴먼의 우호적인 협력 관계를 살펴볼 수 있어 둘 사이의 관계에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얘기를 돌려 맥퀸에게 초점을 맞추자면, 맥퀸이 자신의 영화에서 소화해 낸 캐릭터는 주로 아웃사이더이자 단독자로 실존하는 굳건한 인물이었다. 그 인물은 한결같이 자유를 갈구하였고, 그 의지는 매번 실천으로 옮겨졌다. 총잡이냐, 군인이냐, 죄수냐, 형사냐 하는 신분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을 뿐 그 내면은 어느 누가 방해하든 고단한 현실로부터 적극적인 탈출을 감행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관철시키려는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성공이냐 실패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환경, 혹은 외압과의 타협 없는 투쟁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크린에선 그렇게 기득권과 치열하게 대립했던 맥퀸이 실제론 점차 할리우드의 대표적 보수 영화인으로 자리해 간 것은 역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70년대 들어 미국 정계는 닉슨의 보수 정권이 들어섰는데, 할리우드엔 이미 60년대 후반부터 베트남전에 대한 반성과 비판 등의 진보적 가치를 내건 사회운동의 대두에 발맞춘 듯 이른바 '아메리칸 뉴 시네마'라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해 신선한 돌풍이 불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맥퀸은 그런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관된 이미지로 대중의 관심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않았다. 워렌 비티, 더스틴 호프만 등의 젊은 배우들이 그런 바람을 타고 기성 배우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할리우드의 기대주로 떠올랐음에도 맥퀸의 인기만은 여전했고, '빠삐용'(1974)에선 더스틴 호프만과 공연해 결코 밀리지 않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맥퀸은 자신의 인기 최절정기이자 전성기였던 1960년대 후반부터 외부와의 싸움이 아닌 내부와의 싸움으로 제2의 방황을 겪기 시작한다. 성장기 및 청년기의 방황이 가난과 몸에 밴 반항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 제2의 방황은 바로 자신도 감당 못할 인기에서 파생된 방종과 오만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는 작품 안에서는 감독 등의 스태프와 대립했고, 작품 밖에서는 팬들에게 오만불손했으며, 사생활에서는 마약과 술, 그리고 여자에게서 좀처럼 헤어 나오질 못했다. 오죽했으면 노만 주이슨 감독이 맥퀸을 자신이 함께 일해 온 배우들 가운데 가장 까다로운 배우로 언급했을까.
갈수록 영화와 현실 모두에서 고집불통으로 변모해 가던 그는 70년대 들어선 더욱 완강해진 마초맨의 이미지로 시대의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맥퀸의 이러한 60년대 후반의 방황은 맥퀸도 부족할 것 없는 현실 앞에선 한 인간으로서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방증이 아닐까 한다.
1970년대의 맥퀸, 고단한 날개를 접어 마침내 영원한 자유인으로 안식하다
'르망'(영광의 르망, 1971)에서
'영광의 라이더'(1971)에서
'주니어 보너'(로데오 맨, 1972)에서
'겟어웨이'(1972)에서
'빠삐용'(1973)에서
'타워링'(1974)에서
'민중의 적'(1978)에서
'톰 혼'(1980)에서
'헌터'(1980)에서
1970년대 초반의 할리우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여전히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영향력하에 놓여 있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인간사의 진리가 영화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듯 시대 변화의 지각변동이 거세질수록 맥퀸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아졌다. 물론 맥퀸은 한눈팔지 않고 예전보다 더하면 더했던 의욕과 열망으로 자신의 역량을 한껏 쏟아 부었지만, 관객들은 서서히 맥퀸에게서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1971년 한 해, '영광의 라이더', '르망'(영광의 르망) 등의 다큐멘터리, 혹은 장르 영화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음에도 일부 국가에서만 체면치레를 했을 뿐, 정작 미국 시장에서는 철저히 외면을 받아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맥퀸은 1972년에 폭력 미학의 거장 샘 페킨파를 만남으로써 멋지게 재기에 성공한다. 그에게 있어 샘 페킨파는 로버트 와이즈, 존 스터지스와 더불어 영화적 은인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1972년에 맥퀸은 페킨파 감독과 2편의 영화에서 연이어 호흡을 맞추는데, 바로 '주니어 보너'(로데오 맨)와 '겟어웨이'였다. 특히 '겟어웨이'는 샘 페킨파 감독의 최고 흥행작이 됐을 만큼 맥퀸과 페킨파 감독이 상생하는 결과를 낳게 했는데, 또 하나 여기서 팬들의 화제를 모았던 것은 바로 영화 속 커플이었던 맥퀸과 알리 맥그로우가 실제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당시 파라마운트사 부사장 로버트 에반스의 아내이기도 했던 알리 맥그로우는 전작 '러브 스토리'(1970)에서의 청순한 이미지로써 일약 할리우드의 신성으로 부상해 남편의 추천으로 이 영화에까지 출연케 되는데, 맥퀸과 눈이 맞아 배은망덕하게도 자신을 스타로 키워 준 남편을 뒤도 안 돌아보고 차 버렸던 것이다. 사랑에 눈이 먼 것은 맥퀸도 예외일 수 없어 조강지처인 닐 애덤스를 버리고 말았다. '야성'(맥퀸)과 '지성'(맥그로우)이 만난,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이 진짜 러브 스토리는 당시 할리우드와 미(美)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옴은 물론 전 세계의 영화 팬들에게도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둘은 결국 이듬해, 맥퀸이 '빠삐용'에 출연하는 중에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그러나 가정환경과 성장 환경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인지 아내가 배우로서가 아닌 평범한 가정주부 역에 충실할 것을 바란 맥퀸과, 연기 활동 및 사회 활동을 병행하고 싶어 했던 맥그로우 간의 불화가 잦아지고, 맥퀸의 가정 폭력이 빈번하던 끝에 둘은 결국 결혼 생활 5년만에 파경을 맞게 된다.
어쨌거나 '겟어웨이'에서의 멋진 성공으로 자신감을 찾은 맥퀸은 이듬해, '빠삐용'이란 대작에 출연해 다시 한 번 드라마에 도전한다. 마치 자신의 어두운 과거로부터 도피하려는 듯 맥퀸의 연기 열정이 총결집된 이 영화가 수준만큼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무척 아쉬우나 맥퀸이 일관되게 실천해 온 자유의지와 저항 의식이 꽃을 피웠다는 점만으로도 영화의 가치는 자못 크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엔 드디어 영화 안팎으로 벌어진 맥퀸과 뉴먼 간의 자존심 대결로도 유명한 초호화 캐스팅 재난 영화 '타워링'이 세상에 모습을 보인다. 그 전에 '내일을 향해 쏴라'(1969)에서 이루어질 뻔했으나 맥퀸의 영화 외적인 피해 의식으로 무산됐던 두 배우 간의 자존심 대결이 마침내 어렵사리 성사된 것이다. 공연 배우들의 신경전이 치열하면, 흔히 영화는 중심을 잃고 겉돈다고 하지만, 오히려 프로들의 대립은 무서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타워링'은 전 세계적인 흥행을 거두고, 맥퀸이나 뉴먼 모두 서로의 인기를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인기 정점을 찍은 의미 있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타워링' 이후 맥퀸은 무슨 일인지 돌연 스스로 방황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40대의 나이에 들어서면서부터 "연기는 다 큰 어른이 할 짓이 못 된다."고 공공연히 말해 왔던 그는 말리부에서 자발적으로 준은퇴나 다름없는 은둔 생활에 들어가는데, 인기 스타로선 치명적인 공백이라 할 수 있는 그 기간은 무려 4년여 가까이나 지속됐으며, 그동안 명망 있는 감독들로부터 숱한 러브콜이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맥퀸은 자꾸 안으로만 침잠해 갔다.
그가 뿌리친 대표적인 영화들로는 바로 모두 1970년대 후반에 제작된 명작들인 리차드 아텐보로 감독의 '머나먼 다리'(1977),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소서러'(워맨, 1977), 촉망받던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1977), 그리고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1979) 등을 들 수 있다.
맥퀸이 '머나먼 다리'의 주역을 거부한 이유는 판단이 옳든 그르든 이미 '타워링'에 출연했을 때, 그 그림자를 보아서인지 다시 초호화 캐스팅 영화에 출연하는 것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인데, '대탈주'에서 공연했을 때부터 맥퀸과 친분을 쌓아 온 리차드 아텐보로는 맥퀸의 고사가 섭섭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후일에 "맥퀸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스펜서 트레이시와 같은 성격파 배우가 됐을 것이다."라며 맥퀸을 한껏 치켜세운 바 있다. 또 맥퀸이 '소서러'를 거부한 이유는 시나리오는 맘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건 한 가지 조건, 즉 아내(알리 맥그로우)와의 동반 출연 조건에 윌리엄 프리드킨이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었다. 로이 샤이더로 대체된 영화의 흥행 참패 후에 윌리엄 프리드킨은 자신이 맥퀸의 조건을 거부했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지와의 조우' 같은 경우는 맥퀸의 솔직한 연기관과, 그에 공감한 스필버그의 양해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는데, 스필버그는 영화의 설계도를 그리자마자 먼저 자신이 평소 흠모해 마지않았던 맥퀸을 찾아가 못 마시던 술까지 함께하며 읍소하듯 출연을 제의했고, 맥퀸은 "나는 감정에 치우친 연기를 잘할 자신이 없다."며 자신을 찾아온 젊은 감독에게 최대한 정중히 고사의 뜻을 내비쳤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지옥의 묵시록'과 관련해서는 맥퀸의 가족애를 짐작할 수 있는데, 코폴라가 배역과 시나리오를 수정해 가면서 맥퀸에게 매달렸음에도 맥퀸은 영화의 촬영지인 필리핀에서 오랜 시간 동안 촬영에 임하면서까지 자녀들과 떨어져 있을 순 없다는 이유로 고사를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맥퀸이 공백기 이전이든 그 이후이든 아깝게 놓친 영화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중요한 건 바로 그가 자신의 가치를 믿는, 그러면서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자기애를 견지하되 인기 캐릭터, 혹은 전편의 인기에 기대는 아류작이나 시리즈물의 출연엔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는 투철한 연기관으로 배우의 길을 걸어왔다는 점일 것이다. '블리트' 이후 더 이상 같은 형사 역을 맡지 않겠다는 이유로 1971년에 연이어 제작된 명작 '프렌치 커넥션'이나 '더티 해리'의 출연을 고사했던 일, 그리고 비록 제작은 무산됐다지만, '타워링' 이후 자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출연진이 영화의 제작자인 어윈 알렌과의 계약 아래 놓여 있었음에도 맥퀸만이 '타워링 2'의 출연을 거부했던 일은 그러한 맥퀸의 소신을 충분히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은둔했지만, 결코 주위의 관심과 손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공백기를 보낸 맥퀸은 드디어 1978년에 입센의 유명 희곡을 영화화한 '민중의 적'이란 의외의 영화로 다시 스크린에 복귀하게 된다. 어느새 대중에게서 서서히 잊혀져 간 맥퀸의 존재를 부각하기엔 역부족인 영화였지만, 사회의식 짙은 영화를 선택함으로써 연기 변신을 시도했다는 점만으로도 분명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1979년, 맥퀸은 LA 인근의 산타 파울라라는 작은 해안 도시에 있는 대농장을 구입하고서 약혼자였던 모델 출신의 바바라 민티와 함께 이주하는데, 그 해 크리스마스 직전에 석면 노출에 의한 암 진전이란 뜻밖의 진단을 받고 만다. 그리고 이미 암세포가 온몸에 타격을 주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존 웨인처럼 병을 부인하며, 병마와 사투를 벌였던 맥퀸은 팬들에게 안타까움과 절망을 심어 준 해인 1980년에 '톰 혼'과 '헌터'라는 본래 자신의 몸에 맞는 작품들을 선보이는데, 물론 두 영화 역시 예전만한 명성과 흥행을 가져오진 못했지만, 그간 야성에 굶주렸던 사자처럼 그는 현실의 감옥을 뛰어넘어 스크린에서 남은 연기 열정을 활활 불태운다. 그러나 '톰 혼'의 촬영 후에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한 맥퀸은 '헌터'의 촬영에 임하면서부터는 몰라볼 정도로 체중이 빠져 배우로서 쉰이란 원숙기의 나이에 노년으로 보일 만큼 몸이 수척해진다.
스스로 '헌터'가 자신의 유작이 될 것임을 직감하고 맥퀸은 매순간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하는데, 그가 이렇게 일종의 폐암과 외로운 사투를 벌이면서도 꿋꿋하게 이겨 낼 수 있었던 데는 1980년 정월에 결혼한 세 번째 부인 바바라 민티의 노력이 참으로 큰 몫을 했다. 젊은 아내와 함께하는 동안 그의 짧은 여생은 무척 소탈하면서도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고 하는데, 맥퀸은 아내와 비행 강사인 새미 메이슨의 인도로 기독교에 귀의했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함께 성경 공부를 익히며 그토록 좋아하던 담배도 끊었다고 한다.
'헌터' 촬영을 마친 1980년 여름, 맥퀸은 미국인 의사의 부정적인 예후(豫後)로 마지막 남은 지푸라기라도 잡듯 레트릴(Laetrile, 살구·복숭아 씨에서 얻는 항암제, 수잔 헤이워드도 사망 직전에 사용한 자연 요법)이라는 실험적인 치료를 위해 멕시코의 한 병원을 찾는다. 몇몇 종양을 제거하는 데는 성공적이었지만, 수술 후 심장 기능이 정지되고 마는데, 이윽고 11월 7일, 맥퀸은 유골을 태평양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눈을 감고 만다. 그의 나이 50세 때의 일이었다. 스피드광이었던 그는 인생도 그렇게 스피디하게 살다 가고 말았던 것이다. 만약 맥퀸이 생을 지속해 80년대에도 연기 활동을 했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배역이 거의 내정된 것이나 다름없던 '람보'나 '보디가드' 등의 영화에서 중후한 연기를 보여 주며 또 다른 시대의 변화도 꿋꿋하게 견뎌 냈을 것이다.
피는 속이지 못해서일까. 현재 그의 친손자인 스티븐 R. 맥퀸(1988 ~ )이 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연기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나가며
맥퀸은 비단 광대로서뿐만 아니라 한 시대의 패션리더이기도 했고, 제임스 코번 등과 함께 브루스 리에게서 절권도를 배워 동양 무술에 조예가 깊었던 무술인, 그리고 '나는 경주하는 배우인지 연기하는 레이서인지 잘 모르겠다.'라고 스스로 말했을 만큼 평생을 레이싱에 몰두해 폴 뉴먼, 제임스 가너 등과 함께 명성을 떨쳤던 프로급 자동차 및 오토바이 경주 선수이기도 했다. 또 율 브린너에게는 속사(速射) 기술을 가르쳐 줬을 만큼 닉네임 그대로 다재다능한 'King Of Cool'이었던 것이다. 각종 자동차와 비행기를 사다 모은 수집광이었던 그에게 벗 제임스 코번이 "커다란 장난감을 즐기는 덩치 큰 어린이"라고 회고했을 만큼 그에겐 순진한 면도 있었다.
그는 반세기의 인생을 지치지 않고 한결같이 달려온 집념의 사나이였다. 평탄하지 못한 삶이었어도 영화 속 어느 주인공보다도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스티브 맥퀸은 비록 쉰이란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그가 달려온 치열한 삶과 스크린에서 보여 준 역동적인 연기 사이의 간극은 너무도 좁아 대중은 위태로움과 짜릿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그 빛은 사후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팬들의 눈을 부시게 하고 있고, 그 그늘은 여전히 남성미와 쿨함을 추종하는 젊은 배우들에게 범접하기 힘든 전범(典範)으로 드리우고 있다.
맥퀸의 시대는 다양한 실험과 변화가 시도된 할리우드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진정 맥퀸의 시대부터 비로소 배우가 영화를 주도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열렸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맥퀸은 25년의 짧은 연기 활동 기간 동안 극영화 출연작이 채 30편도 안 될 만큼 과작(寡作) 배우였다. 하지만 그 말은 그만큼 맥퀸이 작품 한 편을 골라 연기하는 데 신중했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맥퀸이 펼쳐 보인 눈빛, 표정, 몸짓 연기 하나하나는 자연스럽고 마술 같았다. 맥퀸은 명배우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분명 한 시대의 타고난 광대였던 것이다.
스티브 맥퀸이 올해로 어느새 탄생 80주년, 사망 30주기를 맞았다. 어둡고 불행한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과 맞서 투쟁함은 물론 그것을 스크린에서까지도 멋지게 승화시킨 스티브 맥퀸은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한 영웅으로 자리할 것이다. 아직도 세계 곳곳의 영화 팬들이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 지금, 그는 언제까지나 팬들의 추억에서 활활 타오를 스크린의 스타로 영원히 기억되리라.
"스티브 맥퀸은 문제아로 여기에 왔지만, 사나이가 되어 여길 떠났다. 그는 영화 스타로 계속 성공했으나, 자신과 자신의 재산을 나누기 위해 종종 이 캠퍼스로 돌아왔다. 그의 유산은 지금 여기 있는 학생들과 앞으로 올 학생들을 위한 희망과 격려이다."
-'보이즈 리퍼블릭' 소재 '스티브 맥퀸 레크리에이션 센터' 내에 있는 기념 청동판(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