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막걸리 기행
막걸리 마니아인 야마시타 다쓰오와 정은숙씨는 일본에 '막걸리 붐'을 일으킨 주역들. 아직 막걸리 열풍이 본격화하기 전, 둘은 의기투합해 2005년 국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양조장과 대폿집을 취재했다. 그 결과물이 2007년 일본에서 먼저 출판되고 지난 3월 국내에 역출판된 '막걸리 기행'이다. 웬만한 서울내기보다 서울 지리를 더 잘 아는 야마시타와 정은숙씨를 함께 만나 서울시내 막걸리 탐방에 나섰다. 서울 마포구 공덕시장에서 강동구 천호동까지, 종횡무진 막걸리 기행.
◆온갖 전이 한자리에―청학동 부침개
'막걸리 기행' 취재를 다닐 때, 지방 대폿집에서 정은숙씨를 매혹시킨 건 "인정 많은 주인아주머니, 찾아든 주객들의 정겨움"과 "흥취에 올라 함께 했던 노랫가락, 순박한 춤사위". 그 풍경을 가장 많이 닮은 서울시내 공간은, 당연히 시장이다.
그와 함께 찾은 시장은 공덕시장. 주위로 고층빌딩 사이에 분지처럼 자리 잡은 공덕시장은 난데없다. '족발 골목'이 이곳의 가장 큰 자랑거리지만 유난히 안개 자욱했던 지난 17일, 정씨의 발걸음은 공덕시장'청학동 부침개' 집으로 향했다.
이곳 진열대를 보고 있으면 군침이 절로 돈다. 녹두전부터 동태전·홍합전·굴전·고추전·새송이전·소 간전·파래전·느타리전·수수부꾸미전 등 30여 개의 전이 총출동했다. 모둠 전 소(7000원·400g)자를 시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낙서로 가득한 벽을 배경으로 나무 탁자 다섯 개쯤이 놓였다. 막걸리는 평범한 서울 이동막걸리(한 병 3000원). 그러나 군데군데 찌그러진 양은그릇이 술맛을 돋운다.
정씨는 비 오는 날 주로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비 오는 날이면 기름 냄새가 고소한 부침개가 더 그리워지는 까닭이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 256-30, (02)706-0603
정씨가 말했다. "막걸리를 무척 좋아하시는 분들은 막걸리에 어울리는 안주로 물김치 같은 순한 음식을 꼽아요. 막걸리 자체의 맛을 음미하기 위해서죠. 그러나 맛보다 분위기를 위한다면, 발효 음식이야말로 흥을 돋우는 데 최고죠."
툇마루집은 발효 음식 초보자에게 추천할 만한 식당이다. 이곳 별미는 함경도식 가자미식해(1만4000원)다. 가자미를 좁쌀·무·고춧가루·엿기름가루 등으로 버무려 발효시켰다. 부담 없을 정도의 산미와 단맛을 가진게 특징. 정씨는 "톡 쏘는 맛이 오감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술맛을 돋우는 데 좋다"고 했다. 실제로 이곳 막걸리(주전자 7000원)는 서울 이동막걸리보다 탄산이 적어 식해와 궁합이 좋다.
정씨가 가자미식해를 처음 맛본 곳은 '아바이 마을'로 더 잘 알려진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이다. 그곳 실향민들은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가자미식해를 해먹는다고 했다. 그만큼 음식에 담긴 지역색이 강하다는 뜻일 게다. 다만 서울에선 내놓는 곳이 별로 없는데, 툇마루집이 몇 안 되는 식당 중 하나. 서울 종로구 인사동 4-2, (02)739-5683
- ▲ 식당 이름이 ‘30년 전통 홍어찜·회’. 이 간판을 단 게 13년 전이니, 어느덧 43년째다. 깊은 맛의 홍어찜과 직접 빚은 막걸리가 이 집의 자랑거리. / 영상미디어 김승완 기자 wanfoto@chosun.com
가자미식해가 발효 음식 입문과정이라면, 삭힌 홍어는 고급과정이다. 마땅히, 정씨의 기준에 막걸리 짝으로 홍어만 한 게 없다.
다만 문제는 난도가 좀 있다는 것. 보기 드문 외국인 홍어 마니아 야마시타는 "아사히 신문사에 사롱란(死籠卵·병아리로 부화되기 직전 곯아버린 달걀) 등 아시아의 별의별 음식을 다 먹어본 40대 기자가 있는데, 그가 유일하게 못 먹겠다고 한 게 바로 홍어"라 했다.
홍어와 막걸리가 '기막힌 궁합'을 자랑하는 곳으로 정씨가 꼽은 곳은 신당 목재 골목의 허름한 식당. 김희임(85) 할머니 홀로 홍어를 요리할 뿐 아니라 막걸리도 직접 빚는다. 이곳 이름은 다만 '30년 전통 홍어찜·회'다. 그 간판을 단 게 13년 전이니, 이 식당은 어느덧 43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씨가 처음 찾았을 때 우연히 중견 배우 김용건씨를 마주친 곳이기도 하다.
메뉴는 단출하게 홍어찜과 홍어회. 홍어찜 소(2만원)자를 시키니 양은냄비에 고춧가루 등으로 양념한 홍어찜에 삶은 채소를 수북하게 올려 내놓는다.
다행히도 이곳 홍어찜의 난이도는 제 나름으로 조절 가능하다. 삭힌 홍어의 깊은맛을 그대로 느끼고 싶다면 야채를 얹지 말고 바로 먹을 것. 파주산 고춧가루의 매콤함이 홍어 맛을 강조해 눈물이 날 만큼 톡 쏜다. 그게 부담스럽다면 삶은 양배추로 홍어를 돌돌 말아 막걸리 식초로 만든 소스에 찍어 먹자. 삭힌 홍어의 산미가 양배추로 한층 완화되고,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만 남는다. 이때, 정씨의 조언. "딱 그때 막걸리를 마셔줘야 해요. 그 속이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막걸리를 부르는 거니까요."
이곳 막걸리(주전자 5000원)는 찹쌀과 누룩으로 김희임씨가 직접 빚은 것. 단맛이 그리 세지 않고 톡 쏘는 탄산이 별로 없어 묽은 편이다. 첫 입에 확 끌어당기는 맛이 없어도 벌컥벌컥 들이켜며 갈증을 해소하기 알맞을 맛. 서울 중구 흥인동 12-4, (02)2252-5493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속담은 식당에도 통한다. 제아무리 맛이 괜찮아도, 멀면 자주 찾기 어렵다. 해서 단골집의 첫째 기준은 가까운 곳.
길동 주민 정씨에게 '할매집'은 그런 곳이다.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이 소박하게 손님을 맞는다. '할매집'이나 할머니 대신 상냥한 미모의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주는 곳. '포장마차' 분위기답게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나 막걸리 식초 양념에 무친 도토리묵 무침(7000원), 단품 메뉴론 보기 어려운 홍어애(5000원) 등이 별미다. 특히 정씨가 이곳을 자주 찾는 건 공짜 안주로 나오는 '콩탕' 뚝배기 때문. 비지찌개처럼 보이나 콩을 통째로 갈아 맛이 거칠지 않고 부드럽다.
막걸리(작은 뚝배기 3000원)도 찹쌀로 직접 빚는다 '30년 홍어찜·회'보다 단맛과 톡 쏘는 맛이 강한 편. 그만큼 젊은 사람 입맛에 더 가깝다. 서울 강동구 천호4동 361-38, (02) 473-3753
◆팔도 막걸리의 향연―술익재
시장이나 허름한 식당 분위기가 낯설다면, 전국 각지의 막걸리를 맛보고 싶다면, 교대역 인근 술익재를 찾는 것도 괜찮겠다.
이곳 장점은 다양한 막걸리. 강원 주문진탁주·경기 배다리막걸리·경남 금정산성막걸리·경북 은자골탁배기·전남 설성동동주·전북 송명섭막걸리·충남 입장탁주·충북 덕산막걸리 등 전국 각지의 유명 양조장 막걸리를 판매 중이다.
이 중 정씨는 배다리막걸리(750 mL·7000원)를 추천했다. 현존하는 도가 중 가장 오래된 도가에서 생산하는 막걸리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즐겨 마신 것으로 유명한 술. 정씨는 "산미와 단맛이 강해 맛이 경쾌하다"고 했다.
단, 신선한 막걸리를 먹고 싶다면 월요일은 피하는 게 좋다. 보통은 전날 막걸리를 공수해 오는데, 월요일엔 전주 금요일에 가져온 막걸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1576-6 서교빌딩 2층, (02)521-0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