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바다에 몸을 실을 수 있는 채비를 갖추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떠올리자니 우선 고등어 떼가 어른거린다. 그 초록색 바닷물결 속에서 떼를 지어 소풍을 가는 모습이 연상된다. 새끼 고등어들이 어미 고등어를 따라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언젠가 보았던 그 푸르고 아득한 하늘. 바다에 몸을 담근 채 말없이 누워있던 그 하늘빛은 어쩌면 그토록 청청할 수가 있었는지. 그 속에서 나는 또 얼마나 허우적거려야 했는지.
나에게 바다는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대상이다. 언제든지 찾아가 감상에 젖어도 좋을 만만하며 안온한 대상이다. 가슴 한 켠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다. 바다로의 항해를 상상해보면 두려움이 엄습해 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겨울바다 가득히 물새 떼가 비상하여 海霧 속으로 날아드는 가운데 저 만치서 손바닥만한 크기로 돛을 치켜달고 고기잡이 나서는 배를 연상하고 있다. 그 고기잡이 나서는 배를 흥겨운 가락으로 밀어내는 바람만을 연상할 뿐이다. 내 안에서 바다는 그저 황홀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한여름 밤의 밤바다에서 명멸하는 고깃배의 불빛과 바다의 살아 있는 것들이 발하는 오묘한 빛이, 그리고 검은 우단을 펼친 듯한 어둔 밤하늘의 흩뿌려진 별자리들과 겹겹이 밀려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이 어우러져 그 자체로 황홀하기만 하는 그런 모습으로만 내 안에 자리하고 있다. 오늘 나는 그런 환상 속으로 뛰어들고자 한다. 그런 별천지를 향해 머나먼 여행을 떠나려하는 것이다. 목적지는 보길도. 孤山 윤선도가 평생을 은신하고자 제주를 향해 남하하던 중 그 산수의 경관이 너무도 빼어나 가던 길을 멈추고 정박했다는 곳.
2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를 보고 넋을 잃을 때가 있다. 감색 물결 위에 옅은 안개가 보일 듯 말 듯 깔려있고, 점점 푸르러지는 山色은 눈을 취하게 하고, 파도며 구름이며 폭포며 자연이 만들어놓은 모든 것은 신이 와서 펼쳐놓은 듯 수려하기 그지없을 때 우리는 그만 넋을 잃고 그 풍경 속에 갇혀 버린다. 더구나 산 좋고 물 맑은 화폭 속에 나무꾼이나 한 사람 걸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금방 스스로가 그 나무꾼이 되어 길을 걷게 된다. 孤山이 안내하는 화폭 속에는 그와 같은 서경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우거시 벅구기가 프른거시 버숩가
이어라 이어라
어촌 두어 집이 냇 속에 나락들락
지국총 지국총 어와
말가 기픈소희 온갖고기 뛰노다
-<춘사>, 제4수
멀리 뻐꾸기 우는 먼 산이 보이고 안개 속으로 보일 듯 말 듯 어촌 두어 채가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신록이 우거진 버들숲이 있고 바로 눈앞에는 맑고 푸른 물 속에 고기 떼가 놀고 있다. 초장에서는 먼저 청각과 시각의 대비 속에서 遠景을 보여준다. 우는 것과 푸른 것의 대비, 뻐꾸기와 버들숲의 대비와 짝짓기를 통해 멀리 떨어진 경치를 가깝게 느끼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뻐꾸기인가, 버들숲인가”하고 반문형의 화법을 구사하는 것도 듣고 보는 이를 끌어들이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이어서 중장에서는 저 멀리 안개 속에 어촌 두어 집이 보일락 말락한다고 함으로서 초장의 동적인 구조를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동양화의 원근 화법을 끌어들인 점이다. 문인화가는 우선 바다의 배 위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하늘 사이로 안개를 풀어놓는다. 그 안개 사이로 집인 듯 집이 아니게, 집이 아닌 듯 집일 수 있게 먹점 두어 개를 찍어놓는다. 그리고 배 위의 한 어부의 시선이 그 안개 사이의 먹점을 지그시 바라보게 한다. 동양화에서 시선과 물체 사이의 거리는 언제나 여백으로 채워진다. 집이 아닌 듯 집인 그 먹점 두어 점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면 그 어부의 시선은 안개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달고 아예 화폭을 벗어나 버릴지도 모른다. 이렇듯 시선과 물체 사이에 놓인 여백은 묘사대상을 간결하고 함축성있게 보여주면서도 선명하고 두드러지게 하여주며 전체 화면에 생동한 공간감을 안겨 준다. 종장에서 화자는 맑고 깊은 沼에서 뛰어노는 온갖 고기를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화자의 그런 흥분은 맑고 깊은 沼의 색깔로 쪽빛의 색감을 연상시켜 주는 데에 기여한다. 또한 초장과 중장의 동적인 구조를 종장으로 다시 연결시켜내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 된다.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이 시의 색감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바로 음악성이다. 이 시의 초장은 그 율조가 우리네의 가장 전통적이며 우리 호흡에 알맞은 4 ․ 4조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댓구를 사용하고 있는 점도 음악성을 고려한 조치이다. 우리가 중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나락들락’이라는 의태어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시어에 의태어를 많이 활용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반복적 요소를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시의 외형률적 음악성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들락나락’을 ‘나락들락’으로 말바꾸기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런 감각이 이 시를 살리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이 시에서는 자 ․ 모음의 活用 허웅, 국어음운학
을 잘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종장에서의 첫 음절 ‘ㄹ’ 받침은 ‘ㄹ’음 특유의 유동성, 연속성 등을 가져오게 하면서 전체에 맑고 쾌활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시조의 종장은 또 모든 모음들을 ‘ㅏ’ 아니면 ‘ㅗ’로 사용하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듯이 ‘ㄹ’과 같은 경쾌하고 매끄러운 느낌을 주는 유성자음군과 ‘ㅏ’, ‘ㅗ’의 개구 유성모음을 지배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시의 리듬은 말할 것도 없고 분위기마저 경쾌하고 밝게 만들고 있다. 이 시를 통해 결론적으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孤山이 우리말의 특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는 점, 그런 남다른 의식과 조예가 있었기에 이렇게 우리말을 세련되고 아름답게 구사할 수 있었을 거라는 점이다.
이 시는 한 폭의 그림이다. 강촌의 풍경이 淸楚하고 신선한 느낌을 준다. “우짖는 뻐꾸기”의 소리와 “푸른 버들숲”의 색체는 조화롭기 그지없어 전원적 풍경의 우아한 맛을 내고 있다. 안개 사이로 보일락 말락하는 “어촌 두어 집”은 한 폭의 산수화에서 빠져서는 안될 그 무엇이다. 운치가 그 속에 있고 맛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촌 두어 집이 냇 속에서 나락들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배의 흔들림, 물결의 흔들림 속에 ‘어촌 두어 집’이 ‘나락들락’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흔들림이 없다면 상상력은 발동되지 않는다. 그 흔들림이 있어 ‘어촌 두어 집’이 더 아름답게 인식된다. 물결의 움직임은 사물을 아름답게 비치는 속성이 있다. 또한 그 어떤 추억 속으로, 상상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속성이 있다. 이 시의 묘미는 ‘어촌 두어 집’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냇 속에’ 비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의 아쉬운 점도 바로 거기에 있다. 너무도 아름다운 화폭이 그 자체로 끝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는 현실도피적 이상주의로서의 당연한 결과로 비쳐지기도 한다. 위와 같이 서경의 극치를 보여준 작품으로는 동사, 제4수가 있다.
간밤에 눈이 개었다. 어부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혔다. 그래서 경치가 달라졌다. 앞에는 유리같이 맑고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고 뒤에는 겹겹이 둘러싸인 백옥같은 산이 웅장하게 서있다. 이 경관을 보고 어부는 <여기는 신선이 사는 선경인가 부처가 사는 淨土인가. 인간이 사는 속세는 아니로다>라고 감탄하고 있다. <仙界>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道家일 터이고 <佛界>의 존재를 긍정하는 사람은 佛家라고 볼 수 있다.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선계>나 <불계>는 주로 <인간세상>에서 실패나 좌절을 한 사람들이 동경하는 세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어부의 감탄은 <선계>나 <불계>가 아닌 <인간세상>에 강조점이 찍혀져 있다. 다시 말해 눈 갠 후의 山野와 바다는 너무나 깨끗하고 아름다웠기에 그것이 신선이 사는 세상인지, 부처가 사는 세상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가 사는 인간세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겨울 산수에 대한 서경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겨울의 바다에서 푸른 바다와 흰 산이 대조가 되는 것을 바라보며, 또 빙설로 꾸며진 경치를 둘러보며 <내가 지금 신선이 사는 선경에 서있는 것인지 부처가 사는 정토에 서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감탄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물아일체의 심정인 것이요, 한 폭의 그림 같은 세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동양화의 기법이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 곳은 중장이다. 초장에서는 눈 갠 후의 경치를 둘러보고 있는 것으로서 近境과 遠境이 혼재되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장에서는 동양화에서의 원근 화법의 이치가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 앞에 놓인 <만경유리>는 근경이고 뒤에 서있는 <천첩옥산>은 원경이다. 작자가 닻을 올리고 노를 저으며 바다 한 가운데 떠있기에 색감 역시 근경은 푸른색으로, 원경은 흰색으로 처리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종장에서는 경치의 감상을 통한 마음의 세계를 추상적으로 그려넣는 美感을 발휘하고 있다. 작자는 실제로 바다 한 가운데서 눈에 들어오는 경치에 넋을 잃고 지그시 흰 눈으로 덮여 있는 먼 산을 바라보다가 신선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우리는 여기서 눈으로 보는 세계와 머리로 상상하는 세계가 하나로 이어짐을 본다. 또한 머리로 상상하는 세계는 작자의 잠재의식 속에 늘 들어있었다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종장의 <선계인가 불계인가 인간이 아니로다>의 표현은 감탄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절박한 표현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작자의 가슴 한 켠에서 늘 <인간세상>을 떠나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당파싸움으로 가득한 현실에서 벗어나 인간의 원초적 고향이랄 수 있는 자연 속에 파묻히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생애 가장 많은 시간을 보길도에서 보낸 작자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늘 바다로 가고자하는 작자의 마음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는 듯하다. 바다는 모든 생명체의 본향이다. 인간이 바다에 대해 근본적으로 향수를 가지고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이다. 작자 역시 삶의 고향으로의 회귀본능같은 것을 늘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 그같은 점을 읽을 수 있다.
孤山이 인간세계로부터 멀어지려는 심정을 안으로 지니고 있었다는 점은 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집착을 벗어나 초연한 경지로 이끌고자 한 수많은 대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無心 白鷗는 내 좃가 제 좃가(하사, 제2수)>라고 토로하는 대목에서는 어부인 자신과 백구가 한데 어울려 녹아 하나의 자연 속으로 몰입된 모습을 보게 된다. 이렇듯 자연 속에 자신의 존재를 놓아버리는 모습은 <어부사시사>의 여러 시편들에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중장의 “여름 바람이 일정할쏘냐”의 대목에서 우리는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화자의 자세를 엿보게 한다. 또 “가는 데로 흘러가게 그냥 두어라”라는 대목에서 대자연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道家적 자세를 느끼게 된다. 종장의 “배가 북으로 가건 남으로 가건 고기야 낚든 못 낚든 관계하지 않겠다”는 대목에서는 초월의 경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이 시에서는 자연에 대한, 사물에 대한 작자의 그 어떤 적극성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서 느껴지는 어부의 흥겨움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바다를 소재로 한 이 시는 바다의 그 어느 부분도 특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다만 화자의 정서적 토로가 시의 표면에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시를 아무런 부담도 없이 읽으면서 자연과 일체가 된 어부를, 그리고 그 속에서의 여유와 또 그 여유를 즐기는 어부의 모습 속에서 그 어떤 흥겨움까지를 찾아내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물 흐르듯 흘러가는 시의 흐름 속에서 나오는 듯하다. 화자의 정서적 토로가 물 흐르듯이 흐르고 있으니 읽는 이가 쉽게 빨려들게 된다. 그 또한 작자의 기교다.
지금까지의 작품들이 서경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거나 그 어떤 초월의 경지를 보여준 것이라면 다음의 시는 孤山의 처절한 번뇌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평생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달려온 孤山의 번뇌가 <인간세상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는 대목에서 아프게 드러난다. 그만큼 그는 인간세상에 대한 혐오감, 속세의 인간들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속세를 피하려는 그의 몸부림은 자연에 취해보려는 의식과 반비례한다. 그는 지금 현실에서의 패배를 자연에서 씻고자 하는 것이다. 이 시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그의 의지가 대단히 강하다는 점이다. 그는 지금 소극적으로 세상사를 잊으려 하는 게 아니다. 세상을 잠시 잊어보려는 의지는 승자의 여유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세상을 철저하게 부정하면서 그 세상을 완전히 뇌리 속에서 없애버리려는 의지는 처절하게 패배한 자에게서 나오는 절박한 절규일 수밖에 없다. 그는 절박한 절규를 감탄사 따위로 처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하게 아픔을 삭이는 모습으로, 그래서 절제된 아픔으로 표출한다. 이 시에서 “머도록”의 표현은 바로 그 점에서 더욱 더 읽는 이를 사로잡는다. “인간 세상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에서의 이 “멀수록”의 표현에서 우리는 인간 세상의 철저한 부정과 함께 작자 자신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 세상에 대한 집착의 끈을 거두어들이려는 처절한 몸부림까지를 읽게 된다. 유교적 현실에서 인간에 대한 집착은 곧 자기에 대한 집착이기도 할 터이다. 또 인간인 이상 인간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하여도 쉽게 벗어나지는 게 아닐 것이다. 문제는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작자가 “머도록”의 표현을 쓰며 자기자신을 다잡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집착의 끈(마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절박한 자기 심정의 표출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
<어부사시사>는 춘사 또는 하사 등으로 명명되는 바와 같이 계절의 노래이다. 이 계절의 노래 40수는 歌唱을 전제로 지어졌기 때문에 문학적인 음미에 앞서 음악적인 측면의 파악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봄바람이 잠깐 부니 물결이 곱게 일어난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쪽 호수를 돌아보며 서쪽 호수로 가자꾸나.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가까워 온다. 이 시가 뱃노래임을 알리는 가장 명시적인 대목은 여음구이다. 餘音은 글자 그대로 ‘남은 소리’이다. 때문에 여음구의 주된 기능은 그 말에 담긴 뜻보다는 노래의 흥을 돕는 데에 있다. 여음이 보통 의성어나 의태어로 이루어진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시에서 ‘지국총, 지국총’은 노를 젓고 닻을 감을 때 나는 소리로서 ‘찌그덩 찌그덩’하는 소리를 뜻하고, ‘어사와’는 노젓는 사람이 흥을 돋구기 위해 ‘어기여차’하고 연발하는 소리를 말한다. 이로써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는 뱃노래의 흥취를 자아내기 위한 시적장치임을 알 수 있다. 또 ‘돛 달아라 돛 달아라’는 뱃노래 특유의 의미를 갖는 여음으로서 시적 흐름을 매끄럽게 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때문에 전후의 내용에 따라 배 띄워라 닻 들어라, 노 저어라, 돛 내려라, 배 세워라, 배 매어라, 닻 내려라, 배 붙여라 등으로 적절히 바뀌어서 사용되는 것이다. 그밖에 이 시에서 음악성을 살리는 주된 요소로 눈에 띄는 것은 댓구 사용이다. 중장에서의 ‘동호와 서호’, 종장에서의 ‘앞산과 뒷산’ 그리고 ‘지나간다’와 ‘나아온다’의 댓구 사용은 율동감을 만들기 위한 작자의 세심한 조치이다. 보통의 경우 체언의 댓구를 사용하지만 여기에서는 서술어에 있어서도 댓구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율동감을 주면서 그 흐름을 보다 더 음악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다음으로 이 시에서 음악성을 고려한 세심한 흔적으로 시간의 순차성을 들 수가 있다. 봄바람이 건 듯 부니 물결이 곱게 일어난다. 물결이 출렁이니 돛을 달아야 할 터이고, 돛을 달았으니 동쪽 호수를 돌아보며 서쪽 호수로 가고자 한다.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가까워 온다. 시 전체가 시간선상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진행은 대상에의 접근을 용이하게 만드는 이점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노래로 불리워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확산되고 후대로 전승되기 위해서는 우선 노랫말이 쉬워야 했으리라. 기억하기 쉽고 따라 부르기 쉬워야 했으리라. 그러나 쉽게 쓰는 것이야말로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이 시가 씌어지던 당대의 시적 흐름에 비추어볼 때 이렇게 쉽게 쓰면서도 우리말의 독특한 맛을 살려낸 것은 전적으로 孤山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시의 맛은 시간의 순차성 위에 댓구의 사용을 곁들이는 데에서 나온다. 댓구의 적절한 반복은 시의 리듬을 부드럽게 할 뿐만 하니라 흥을 끌어올리는 데에도 기여한다. 거기에 다시 여음구가 가미되어 있으니 그 흥취가 더해질 것임은 당연한 이치이다.
나는 지금 막 孤山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귓가엔 아직도 노 젓는 소리라 들리는 듯하다. 갈매기가 물결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바다 위에 배를 띄우고 낚시질하는 漁翁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탁주병을 배에 싣고 흥에 겨워 ‘찌그덩 찌그덩 어기여차’하고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아직까지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나는 지금 바다의 속삭임도 듣는다. 내 안으로, 내안으로…아마 그것은 필름처럼 돌아가는 <어부사시사>의 화폭 속에서 나는 울림 같기도 하다. 나는 아직도 孤山속에 있는 것이다.
첫댓글너무 아름다운 우리의 글이지요 아마도 영역으로 이맛을 낸다면 고산의 시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시중에선 으뜸일겝니다 /여음구라고 하신 의태어성 지구총지국총 어사와등등 이런댓구도 요즘시에 사용한다면 어떤현상이 생길런지요 /제가 이런 글귀를 아주 좋와 합니다만 /너무 좋거던요
첫댓글 너무 아름다운 우리의 글이지요 아마도 영역으로 이맛을 낸다면 고산의 시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시중에선 으뜸일겝니다 /여음구라고 하신 의태어성 지구총지국총 어사와등등 이런댓구도 요즘시에 사용한다면 어떤현상이 생길런지요 /제가 이런 글귀를 아주 좋와 합니다만 /너무 좋거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