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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성당 역사 | ||
년도 |
간추린 건축 내용 |
비 고 |
1565 |
예수회에서 건축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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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 |
예수회 로면경(羅明堅) 신부가 大三巴에 작은 집을 짓고 교리실로 사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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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2 |
발리냐니 신부에 의하여 수도원을 구건물에서 새건물로 이사하면서 부설성당( Materdei)과 성 바오로 대학을 설립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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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 |
극동지방 최초 서양식 대학으로 인가 받음, 중국인들은 大三巴 書院이라 부름 당시 학생 200명, 교수 59명으로 극동지방 각 교구 성직자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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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 |
첫번째 화재로 전소되어 다시 신축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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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 |
두번째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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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 |
마카오 경제 호황기로 재건축 시작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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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 |
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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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 |
세번째 화재로 앞 전면부만 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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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은 성당 전면부로만 성당의 내력을 알 수 없지만, 석벽에 새겨진 내용으로 창세기에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가톨릭의 교리를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이 바오로 성당의 건축은 유럽 문예부흥시대의 건축양식과 동양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오랜 기간 중국과 외국의 건축, 문물, 예술가들에게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중요 시 해 왔다. 성당의 안쪽으로
들어서면 당시 성당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양쪽의 기둥이 서 있던 자리와 화재 이후 잠시
묘지로 사용했음을 보여 주는 묘지터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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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
중앙의 문 위에 라틴어로 MATER DEI (天主之母)라고 성당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양쪽 옆의 문에는 예수회의 표지인 IHS (耶人類的救主) 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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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
예수회의 4명의 성인들의 동상이 서 있는데, 왼쪽부터 성 Francisco Borja,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루이스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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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
중앙에 동으로 된 성모상과 주변에 여섯 천사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오른편에 생명나무와 용의 머리를 밟고 있는 성모상과 [聖母踏龍頭: 성모님이 용의 머리를 밟다]가 새겨져 있다. 일곱머리를 가진 용은 칠죄 종(교만. 인색. 미색. 탐도. 분노. 질투. 나태)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 옆으로 죽은 사람의 모습과 [念死者無罪: 죽음을 생각하면 죄짓는 것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왼편으로는 생명수를 상징하는 분수대와 항해하는 배(지상의 교회를 상징)와 그 배를 지켜보는 성모님 그리고 마귀가 죽어 있는 모습과 마귀는 사람을 죄로 유혹한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성모상 주변에 새겨진 국화와 모란은 중국과 일본의 기술자들이 함께 작업했음을 보여 주며, 서양의 건축양식과 동양의 문화가 혼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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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 |
중앙에 소년 예수상이, 양 옆에는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형구들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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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층 |
삼각형으로 천주 성삼을 상징하고, 천지창조를 설명하며, 성령을 상징하는 동으로 만든 비둘기와 해, 달, 별 등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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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자들의 순례단이 처음 찾은 곳은 마카오 성 바오로 성당이다. 마카오를 대표하는 성당 유적지라 표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합당한 표기다. 영문과 한문으로는 다음과 같이 표기 사용한다. Macau Ruins St. Paul's Church/ 澳門大三巴牌坊, 고작 세나도 광장에서 불과 10분거리에 있다. 현재 그곳으로 가는 길은 좁은 골목길로서 수많은 음식점과 육포를 만들어 파는 상점들이 뻬곡하게 차 있어 항상 인파들로 붐빈다. 성당 유적에 대한 역사는 다음과 같다.
17세기 초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가 마카오에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설계한 성당으로 마카오를 대표하는 성당 유적지이다. 종교 박해를 피해 나가사키에서 온 일본인들의 도움으로 1602년부터 20여 년간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예수회의 대학으로 사용되다가 1835년 태풍과 세 번의 화재로 인해 본관이 붕괴되었고, 현재는 5단 구조의 정면 벽과 계단, 지하 납골당만 남아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마카오의 상징물이 되었다. 정면 벽에는 성직자들의 청동상이 있으며, 성당의 외벽에는 에덴 동산, 십자가, 천사, 악마, 중국 용과 일본 국화, 포르투갈 항해선, 아시아에서 점차 정착하기 시작한 가톨릭의 전파 과정 등을 정교한 조각으로 새겨 놓았다. 지하에는 선교사들의 유골과 16~19세기의 가톨릭 성화와 조각품을 전시한 마카오 종교 미술 박물관이 있다.
폐허! 마주 보면서 나도 모르게 폐허란 낱말이 새어 나왔다. 성당의 가치로서 상실된 웅장한 석조건물 잔해는 그리스 언덕위에 서서 수천년 풍상을 견디고 있는 어느신전 같았다. 보통 폐허라하면 잡초가 우거지고 찾는 이들도 없이 무거운 침묵이 흘러야 하는데 이곳은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났다. 성당으로서 기능이 상실된 성 바울 성당, 동서양의 아름다운 결합이 시선을 잡아 끈다. 마카오의 랜드마크가 되어 버린 성 바오로 성당은 마카오 관광의 보물이다. 성당 전면부로 사용되던 수직데라코타 화강석 벽면 건축은 중국인 기술자와 종교적 박해를 피해 마카오로 도망친 일본인 석공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사실이 참 경이롭다. 완전한 건물이었다면 지금 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겠지만, 현재 존재하는 전면부만으로도 성당의 모든 실체를 궤맞춰 볼 수 있을 것 같다. 찾는 이들 모두가 각자 석공이 되고 목수가 되어 성당건축에 참여할 수 있는 상상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성 바오로 성당이다아닌가 한다.
영국처럼 전쟁을 불사하며 조차한 홍콩과 마카오는 거리가 멀다. 무역이란 대 명제 아래 빌리고 빌려주면서 마카오에는 동서양의 문화가 절묘하고 신비스럽게 결합을 시작하였다. 성 바오로성당은 1580년 예수회에서 수많은 은을 투입하여 완성한 성당이다. 1595년과 1601년 화재가 발생하여 목재를 사용하여 건축된 성당이 훼손되었지만 1602년 이탈리아 예수회에서는 재건축하여 동양최대 유럽풍 성당이자 동북아시아 최고 선교의 거점이 된다. 그러나 1835년 포루투칼 정부에서 성당을 국유화 선언하던 시기에 알 수 없는 화재에 휘쌓여 현재의 모습만 남게 되었다.
성당의 전면부(facade)와 오르는 계단만 남았고 나머지는 전부 소실되어 성당 기능은 전부 상실한채 유적지화 되어 버린 것이다. 7년의 시간 동안 일본인 석공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파사드에는 바울 성인과 성모마리아 천사, 꽃 , 바다의 별, 포르투칼 범선, 머리가 일곱개인 용과 중국식 사자 형상이 가득차 있고 성경 속의 인물과 이야기가 전개되어 있다. 면면이 아주 성령이 가득한 작품이다.
실내로 들어 가면 종교 예술을 비롯하여 종교 박물관이 있다. 천사장 미구엘(Migule)은 화마에도 손실되지 않았다는 기적도 볼 수 있으며 지하 공동 묘지를 통해 여러 유골을 대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예수회 소속 발리그나노 신부묘, 베튼암 묘와 일부 일본인 선교사들의 유골도 볼 수 있다. 17세기 각종 종교적 유물도 관람할 수 있고 화재로 소실되기 전 모습인 목조 성당, 전면부 석조 중간 트러스 목재부분등 마감재 까지 볼 수 있는 성당 모형도도 관람할 수 있다.
조선의 세 소년이 당도했을 때 이미 성 바오로 성당은 화재로 소실된 상태였다. 지금도 성당에 입당할 때 중앙문은 성직자가 이용하는 문이고 일반 신자들은 양 옆문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다. 세 소년은 이곳을 종종 찾을 적 마다 무릎으로 기어 오르며 기원했을 것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제로 나가는 길을 걷겠습니다.언젠가 저의들도 저 중앙문을 이용하여 성당을 드나들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민란으로 필리핀으로 피난 후 그곳에서 공부를 하다 다시 마카오로 돌아 오지만 신학공부를 하기에 환경이 적절하지 않아 풍토병으로 요절한 최방제 소년을 제외한 두 소년은 프랑스 함대를 이용하여 만주로 이동 한다. 소팔가자란 마을에 머물며 나머지 신학공부를 마치고 부제품을 받는 곳이 바로 소팔가자다. 첫 사제를 배출하기 위하여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방신부로 부터 세례를 받은 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첫 사제의 꿈울 안고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소년이 마카오 안토니오 성당 바로 옆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본부 조선신학교에서 머물며 이곳을 찾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쉽게 다음 순례지로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역사를 만드는 사람은 분명이 있기 마련이다. 한국의 첫 사제의 역사는 조선의 세 소년이 한양 주교동에서 걸어서 의주까지 다시 만주에서 광동의 마카오까지 고난의 길을 걸어 도착함으로서 시작된다. 한 소년을 제외 한 두 소년이 바로 한국 천주교사의 주춧돌이다.
까모에스 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커다란 조형물과 함께 분수대가 맞이 한다. 성 안토니오 성당을 측면을 마주 보고 있고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본부 건물 옛터와 나란히 서있다. 지금은 주상복합 건물로 변모되었고 골목안으로 롯데리아가 들어 있는 위치가 엣 조선신학교 자리다. 나도 모르게 감회가 몰려 왔다. 지금 환경으로 따지면 고등학생 시기의 소년들이었다. 부모들이 천주교를 믿으니 자식된 도리로서 따라 믿었을 것이다. 당시 사회적 관습이나 가풍에서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후 고국을 떠나 걸어서 6개월 이상 걸려 도착한 이곳, 소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낮선 환경과 음식과 무더위 등이었지만 잘 이겨내며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고 한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당시 모습을 상상하며 주변을 유심히 관찰해 보았다 그리고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까모에스 공원은 겉에서 보기와 달리 안으로 들어 갈 수록 잘 정비되어 있고 빽백한 숲을 이루고 있어 도심속의 오아시스 역활을 하고 있었다. 이 공원을 찾아 시를 즐겨 썼다는 포르투칼 시인 루이스 데 까모에스(Luis Camoes )의 흉상이 동굴안에 있다. 까모에스 공원은 부근에 있는 까사 정원과 함께 동방기금 재단의 주요 자산이다. 이 재단은 포르투칼 상인 마누엘 페레이란 가문의 재산을 바탕으로 설립된 재단이다. 까모에스의 직업은 원래 군인이었다.민족주의자며 애국시인이었던 그는 포르투칼 혼(Os Lusiadas)이라는 시를 써서 많은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시인은 삶은 아주 시적이면서 극적인 삶의 소유자다.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연적과 결투를 벌이다. 연적을 죽이게 된다. 이 사건으로 국내에서 마카오로 추방형식으로 이주하게 된다. 동인도 회사를 운영하는 친구 회사 옆에 저택을 마련한 후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까모에스 정원이 된 것이다. 그를 좋아 하는사람들은 그를 기념하는 흉상을 제작하여 동굴 안에 모셔 놓았다. 불같은 사랑이 이 정원을 만들었고 덕분에 이 부근에서 신학공부를 하던 조선의 소년들도 이 정원을 산책하며 고국의 부모형제를 그리워하였을 것이다.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을 맞으며 김대건 안드레아 첫 사제 동상으로 다가갔다.
1985년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성인으로 추앙받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기념하기 위하여 한국주교회의에서 조각과 김세중씨에게 의뢰하여 제작 설치한 동상이다. 그러나 관리가 부실하다 보니 정원 다른 구석에 놓여 있는 것을 본 홍콩주재 특파원들의 항의를 통해 바로 설치되었고 홍콩 마카오에 거주하는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의 노력에 의해 1997년 지금 이 자리에 제대로 봉헌 설치될 수 있었다.
어느새 빛은 느릿하게 변하고 있엇다. 빛은 순환으로 모든 생명체들에게 생명의 고귀함을 잃지 않도록 도와 준다. 아침 빛이 다르고 정오의 빛이 다르고 저녁 빛이 다른 이유는 생명의 안전성을 유지시켜 주시려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넉넉함 때문이다. 시시각각 빛처럼 변화는 것도 없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며 파리외방전교회 있던 위치와 조선신학교 자리를 보며 길을 건넜다. 성 안토니오 성당으로 가 미사를 봉헌하기 위하여 성당으로 다가갔다. 성 안토니오 성당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목각상이 있고 유해 일부가 제대 중앙에 모셔져 있는 곳이다. 목각상은 홍콩 천주교 한인교우들이 제작하여 봉헌하였다.
성 안토니오 성당은 개항당시 마카오에 이민오는 포르투칼 인들의 필요에 의해 예수회에서 작은 목재 건물을 짓고 사용하다 점점 이민 인구가 늘어가자 1558년 건축을 시작하여 1565년 완성한 성당이었다. 마카오에서 성 로렌즈 성당, 망덕 성모성당과 함께 가장 오랜된 성당이다. 중국인들은 화왕당(花王堂)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포루투칼인들이 결혼식을 많이 올려 항상 꽃이 성당에 넘쳐나 붙여진 이름이다. 1609, 1809, 1874년 세 차례 화재가 있었는데 그 중 잋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1874년 9 월 22일. 엄청난 해일이 일어 산아래 정박해 있던 상선, 어선, 주택을 덮쳤다. 배에 있던 많은 사람들과 바닷가의 주민들이 육지로 급히 피신을 하는데 칠 흙 같이 깜깜한 밤이라 많은 이들이 바다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성당에 벼락이 내리쳐 화재가 발생했다. 그 불이 해안 일대를 환하게 비춰주어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무사히 육지로 올라와 목숨을 구했다. 다음날, 날이 밝아서야 사람들은 성당이 다 타버린 것을 알게 되었고 하늘이 그들을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매년 그 날을 風災節로 정해서 기념한다.매해 그날이 오면 성 안토니오 상을 지고 마카오 거리를 행진하는 행사가 진행된다. 화재 이후 성당을 1875년 완전히 수리하였고, 1930년에 이르러 다시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성당 외벽에는 부활을 의미하는 종나무, 사다리, 비둘기 조각, 예수의 수난을 증거하는 면류관, 채찍이 그려져 있다. 이곳은 1903年, 高神父가 성 안토니오 구제회를 창립하여 빈민들 특히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았다. 현재도 일년에 한번 성당에서 교우들에게 성 안토니오의 빵을 나누어 준다. 성 안토니오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난 성인으로 궁중기사의 아들로 태어나 15세 되던 해에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한 후 사제로 서품이 되었다.
주보성인은 성 안토니오(1195- 1231) 축일 6월 13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 - 1846) 축일 7월 5일 이다.
안토니오 성당에서 미사참례.
미사준비를 해 주시는 데레사, 체칠리아 자매님, 순례내내 수고해 주셨다.
2016년 8월 11일(목)- 성녀 글라라 동정 기념일.
순례중 첫 미사를 드리는 장소는 조선의 첫 사제와 두 번째 사제의 기록을 남긴 두 소년이 머물던 조선신학교 부근 성당이었고 아씨시 성녀 글라라 동정기념일이라 감회가 더욱 더 깊었다. 프란치스코처럼 자유롭고 글라라처럼 열렬하게 라는 글을 떠 올리며 세 소년과 성녀 글라라와 우리들의 영원한 사부 성프란치스코를 기억하며 기도를 드렸다.
독서: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 에제키엘 에언서 12.1- 12)
헬레나 자매님이 봉독해 주셨다.
복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가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오 18,21 - 19,1)
강론,
성찬의 전례:
순례 기념촬영.
홍콩 한국 천주교 교인들이 십시일반 비용을 만들어 제작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목각상이 성 안토니오 목각상과 나란히 서 있다.작은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 후 서 있는 순간 카타리나 프란치스카 자매님이 지나 가시다 카메라에 잡혔다.
석고상에선 데레사, 체칠리아 자매님이 카메라에 잡히고 ~~
참, 평화의 기운이 넘치는 성당이었다. 순례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신앙선조들의 흔적이다. history가 당신의 역사인 것처럼 마카오란 도시는 한국 천주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도시다. 종일 걸음을 옮기며 순례를 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인데,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고 건너와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성모발현지를 순례한 후 다시 마카오로 돌아와 나머지 일정을 챙기려고 한다.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세나도 광장과 인근에 있는 성 도미니코 성당을 순례하기 위하여 걸음을 옮겼다.
성 도미니크 성당(lgreja de S. Domingos, St. Dominic's Church).
1587년 마카오는 개항하자 마자 포르투갈 상인, 예수회 회원, 그리고 다른 수도회의 아사아를 왕래하는 관문이 되었다. 1587년 3명의 스폐인 도미니코 수사들이 멕시코와 마닐라를 거쳐 남중국해를 지나다 배가 침몰한다. 그 후 3명의 수사가 마카오로 들어와 선교를 하면서 성당과 수도원을 지었다. 초기에는 나무와 흙으로 지었다고 중국인들은 반정통이라 불렀다. 도미니코회는 창립할 당시(1215년) 기존 수도회와 달리 도시 거주민을 선교 대상을삼고 설교를 중심으로 선교를 하였다. 그런 이유로 마카오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세나도 광장에 성당을 세운 것이다.
성당 제대 중앙에 묵주를 들고 계신 성모님이 모셔져 있어 현지인들은 매괴당이라 부른다. 조아우에 도미니코 성인과 시에나 성녀카타리나(도미니코 회원)이 세워져 있다. 매년 5월 13일 파티마 성모 축일에 성모상 행렬은 이 성당을 출발하여 주교산까지 로사리오 기도를 받치며 걷는다. 그날은 수많은 교우들과 인근에서 찾아 오는 홍콩, 베트남, 말레시아 교우들과 여행객들이 혼잡을 이루는 국제적 행사가 된지 오래다. 이 행사는 1917년 5월 13일 포르투칼 파티마 마을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날 것이라고 예언한 기적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축제를 시작한 것이다.
성 도미니크 성당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1590년 스페인 출신의 도미니크 신부에 의해 성당이 건립된 후, 1644년 미사 도중 포르투갈을 반대하고 스페인을 지지하던 장교가 제단에서 살해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707년에는 도미니크 신부들이 마카오 주교의 파면 명령에 불복하여 로마 교황을 지지하면서 3일동안 성당에 머무르면서 포르투갈 군인과 대치하기도 하였다. 1834년에는 로마 카톨릭에 대한 탄압 정책으로 신부들은 제압 당하게 된다. 이후 한동안 성당은 마카오 정부에 의해 물류창고, 관공서로 사용되었다. 성 도미니크 성당 내부. 나무 천장에 제단은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졌다. . 17세기에 재건축 하였다가, 18세기 초에 식민지 바로크풍인 지금 모습처럼 건축 하였다. 현재 건물은 1997년 새롭게 복구하여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정면은 노란색 외관에 흰색 돌로 치장하였고, 녹색의 창문을 덧 달았다. 성당 뒤쪽의 종탑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의 카톨릭 선교에 관한 그림, 조각품들, 제구 등 포르투갈 예술품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세나도 광장(Largo do Senado, Senado Square)은 마카오의 중심지이다. 세나도의 뜻은 시청이란 뜻이다. 광장 양쪽의 파스텔 색조의 건물들은 19세기~20세기초에 지어진 건물이다. 1893년 광장의 도로를 포르투갈의 리스본 광장을 본떠서 물결무늬로 장식하였다. 포르투갈에서 가져온 돌을 하나하나 손수 모자이크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물결무늬의 검은색 포장길은 성 바울 성당의 유적까지 이어진다. 중앙에 분수대가 있다.
물결무늬로 대표되는 깔싸다(Calcada)는 포르투갈의 도로 포장 기술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시작하여 로마를 거쳐 포르투갈의 전통적인 방식이 되었다. 포르투갈 보행자 거리나 브라질, 마카오 같은 옛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볼 수 있다. 세나도 광장에도 사용 되어졌다. 시공방법은 석회석을 작게 잘라 검은 돌과 흰 돌을 서로 맞물려 끼워 맞추는 식으로 길을 만드는 방식이다. 별이나 물결무늬, 문자, 기하학적인 문양, 초상화 등을 그려 넣기도 한다. 분수대를 배경으로 물결무늬 선을 중심으로 순례단원을 세우고 다시 단체 사진을 찍었다. 분수대 중앙에는 포루투칼인들이 항해를 하면서 사용했던 천구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평일날인데도 여행객들이 세나도 광장에 넘쳐 났다. 바오로 성당까지 가는 음식과 육포거리는 걷기 조차 불편할 정도로 인산인해 였다.
자비의 성채(Santa Casa da Misericordia, Holy House of Mercy).
순결을 상징하는 흰색 건물로 중국어로 인자당(仁慈堂)이라 부른다. 현재 건물은 1905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개축한 것이다. 건물 정면에서 왼쪽 골목안으로 들어가면 박물관 입구가 나온다. 그 골목 안에서 단체, 개인 사진을 찍은 후 포루투칼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리를 옮겼다. 석식 후 마카오 공항으로 가 Nx875편으로 Da Nang우로 날아 갔다. 약 1시간 거리를 날으면서 내일 순례 할 짜기우에 대하여 머리속으로 스크린 하기 시작하였다.
샬롬~ 순례기와 걸음여행 이야기는 둘 째날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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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동의 순간들 ......감사합니다
수고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