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드 에이스, 클럽 투, 하트 쓰리, 그리고 스페이드 포어를 첫번째 토스에서 받은
바둑이 플레이어는 대부분이 카드를 바꾸지 않고 맥시멈 배팅으로 블러핑을 해보고픈
강렬한 유혹을 이기기 힘들고 사실 종종 이 전략은 맞아 떨어지곤 한다. 마지막 디클레어시점에 자신의 강한 로우패를 인정해서 상대방들이 하이로 도망갈 때의 쾌감은, 그러나 끝까지 따라와 마지막 카드까지 교환하고 메이드 퀸 탑으로 로우를 잡는 타짜가 있을 때 느끼는 아득한 심정을 담보로 해야 한다. 이 경우 조용히 덮어진 넉장의 카드, 이게 바로 카드의 죽음일 게다. 하지만 이 죽은 카드들은 바로 그 다음 라운드에서 화려한 부활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며칠 전 병구가 한마디 말과 한 잔의 술이라는 글에서 피력했듯이 우리 인생의 죽음과는 다른, 리버서블 데쓰인 셈이다.
병무와 희준이의 죽음은 그 당시 나에게 그다지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글을 전개하기 위한 멘트이다. 양해있기 바람). 단지 어쩌다, 그 비싸고 아무도 못 들어 가는 것으로만 알았던 호텔에서 일을 당했나 하는, 경외심이 죽음이라는 현실을 압도했었던 터이다.
이 비현실 감은 그러나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날아온 동혁이의 죽음으로 해서 비로소 현실감으로 자리하기 시작했다고 기억된다. 동혁은 나의 신혼여행에 동반했었고 그보다 먼저 대학입학 후에 같이 쏘다니던 지금으로 말하면 미팅,혹은 등산 동아리의 가까운 멤버였다. 그의 죽음, 과로사, 돌연사라는 극히 사무적인 사인과 함께 전해진 비보로 나는 상당기간동안 어이없어 했었다. 1990년 아버지의 장례는 여러모로 퀭하기 그지없는 작품이었다. 뉴욕에서 날아오느라, 첫날의 상주의 자리를 두 여동생의 남편들이 히마리없이 지키게 된 것도, 오랫동안의 격조로 내 친구들에게 알릴 시간,여건이 모두 안된 점등이 그러했다. 아버지를 보내는 외아들의 심정을 적는 것은 이 글의 포커스가 아니니 비키고. 그런데 이상했던 것은 내 대학동기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인 것이다. 앞에 말했듯이, 와야 할 이유가 없는 녀석들과 맞절을 몇 번 하고는 어찌 알고 왔냐고 어눌하게 묻는 내 질문에 그들이 나 못지않게 계면쩍게 그리고 착잡하게 이 응종의 죽음을 말했을 때 나는 정말로 묘한 기분이었다. 실제 삶에서 겪는 우연과 극적 반전을 소설이 당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영정 바로 옆 자리에 간암으로 죽은 대학동기의 사진이 걸려 있는 모습은 원인 모를 배반감마저 느꼈을 정도였다. 더구나 발인날짜까지 같았던 그 친구의 죽음에서 나는 이미 이 죽음이라는 것이 낯설은 조우의 대상이 아니라 주위의 이곳 저곳에서 이빨을 들어내고 우리를 이죽거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했다.
아들이 태국에서 변을 당했을 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화여대 교수 종준이가 보여준 의연한 모습에서 저게 바로 종교의 지고선이라는 것인가 하는 존경스러움이 우러나 이 죽음의 외침은 어렵사리 잊어질 수 있었지만 정작 이놈의 이빨에 치를 떨었고 손을 들고 만 것은 윤 창용 박사의 죽음에서였다.
윤 박사는 내가 KT에 근무할 때부터 가까이 지낸 분이었다. 같은 분야의 공부를 하고 외국직장생활에서도 먼저 였던 그는 한참 페이저(삐삐)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서울이동통신의 사장으로 재직할 때도 나만 만나면 월급쟁이 언제 그만 두게 될지 모르니 나중에 선생님이라도 할 수 있게 전문분야의 자기계발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던 아주 편안한, 그리고 배울 것이 많은 소주 친구이자 선배였다. 페이저가 휴대폰에 형편없이 밀림과 때를 같이해 옷을 벗은 그가 잠시 벤쳐회사를 맡고 있을 때에도 종종 같이한 저녁자리에서 어김없이 윤 박사는 학교로 가고픈 속내를 드러내곤 하였다. 작년 가을로 기억되는 어느날 중부대학 대학원장 윤 창용이라는 주소변경 안내문 한 장이 직장으로 배달되어 드디어 이루셨군이라는 안온한 마음으로 곧바로 번호를 눌러 대학원장과의 연결을 부탁한 나는 참으로 기막힌 말을 들어야 했다. 돌아가셔서 연결이 안 된다는. 학교로 짐을 옮기고 친지들에게 새로운 연락처를 배포한 후 축하전화, 확인전화 등으로 분주하여야 할 때 돌.아.가.셔.서 연락이 안되다니. 정신없이 도착한 삼성병원 영안실에서 미망인에게 총총히 들은 대략과 나중에 더 들은 윤 박사 죽음의 얘기는 안 할 수가 없다. 중부대학 정보통신 대학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며칠 후 그 당시 정통부 장관, 중부대학교 총장과 함께 한 격려성 저녁식사 및 술자리가 파한 후 태워주겠다는 두 사람의 제의를 굳이 사양하고(충분히 예상되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하필이면 그는 불법영업개인승용차를 탔고 크레딧카드를 뺏기고 그 이튿날 새벽 하남의 어느 한적한 곳에 버려진다는 끔찍한 이야기지만. 그날 나는 급작히 만들어진 그의 영정사진 앞에서 많이 울었다. 그러나 초췌한 모습으로 영안실을 떠나던 나는 내 마음의 한 구석에서 투명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사실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죽음이란 곳곳에 이빨을 보이며 도사리고 있는 음모가 아니라 극히 범상한 시선으로 어루만져야 할 일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또 한 해가 저물고 있고 송년모임, 새해 설계 등으로 마음이 분주하고 어쩌면 들떠 있어야 걸맞을 이때 잿빛이야기를 늘어놓고 나니 갑자기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너희가 무지하게 그립구나. 백수광부의 위 둥더덩셩 아으 다롱디리를 읊으며 살아있음에 찬사의 잔을 우리 바텀스 업! 그러면 우리도 화려한 부활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