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억분의 1의 사나이 ‘최배달’ 그는 누구인가? 그는 전 세계를 평정한 김제출신 무도계의 거성이었다 명성에 비해 고향에서 그의 존재 인식 미미
?편집자 주=2009년은 어느해보다 김제시가 바쁜 한 해가 될 듯 싶다. 국립청소년수련원 등 굵직한 대규모 사업들이 유치되는 수확을 거뒀다. 이제 본격적인 사업추진을 앞두고 시민들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에 서 있다.
장도의 무도 인생을 조명해본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 그리고 내고향 김제가 그립다. 김제의 들판이 보고 싶다. 와룡산에 다시 오르고 싶다.“
1994년 71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극심한 민족차별과 가난과 배고픔을 오로지 무도일념으로 극복하며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운 진정한 한국인 파이터요, 김제의 긍지라 할 수 있다.
좌)도일직전, 용지면 교회 앞에서 형제들과 함께 (좌로부터 최배달, 영정, 영종, 누나, 아버지)
비행조정술을 배우던 중 종전을 맞이한다. 종전 후 사설도장에 나가 가라데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 후 그는 사설도장에 나가 가라테를 직접 배우고 24세때 교토에서 열린 전후 최초의 무도대회 가라테 부문에서 우승을 하게 된다. 이어 그는 18개월 동안 완전히 인간세상의 문명과 단절된 심신수련의 고행길에 오른다. 폭포수 밑에서 좌선을 하고 야생동물과 싸우고 맨손으로 나무와 바위를 치면서 끝없는 단련의 시간을 보낸다.
52마리의 황소의 뿔을 잘라내…일약 세계적 스타로 부상 52마리의 황소와 맨손으로 결투를 해 그중 26마리의 소뿔을 잘라버리고 세 마리를 즉사시키는 위력을 과시한다. 그 상황을 쇼오찌쿠 영화사가 20분짜리 필름으로 전국에 내보내게 되고 이를 계기로 그는 일본에서 일약 스타로 떠오른다.
이후 동경으로 52년 이주해 미국 순회시범공연을 하게 되는데 위스키 병을 공중에서 산산조각을 내는 신기를 펼치는가 하면 당대 최고의 프로복서들과 프로레슬러들을 연전연승 한방에 KO 시켜 버리는 기염을 토한다.
미국에 알리는 최초의 계기를 만든다. 이로써 최영의는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라데 마스터가 된다.
그 후 61년 선 수행과 함께 자유롭고 거친 기술을 강조하는 극진회를 창립한다. 그는 다시 59년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뉴욕, 켈리포니아 등지에 분관들을 설립하고 30개의 기왓장을 한번에 박살내는 등 격파술 시범을 통해 미국대중의 우상으로 우뚝 서게 된다.
전세계 520개 가라데 분관 설립, 일본 청소년의 우상으로 전세계를 누비며 무도를 전파한 520개가 넘는 극진회관이 현재 세계 각지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 때의 제자들이 지금 세계 격투계를 움직이는 인물들이다.
최영의는 무도가로서 오직 한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전설같은 일화를 남긴 최강의 파이터로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도이론을 책으로 발간하는 이론가로서, 대중의 가슴을 흔들어 놓기에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언변가로서도 많은 인기와 감동을 주었다. 또한 이론가로서‘생명의 가라데’, ‘가라데는 무엇인가’ 등 무려 62권이나 되는 저서를 남겼다.
그가 쏟아낸 숱한 말들은 가히 대중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으며 그의 무도인으로서 정신세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강인함과 지독한 정신력을 가진 그는‘일본의 위대한 역대 10걸’중의 한명으로 뽑히는 등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군림하게 된다.
60억분의 1의 사나이, 목표는 세계 최고 최배달의 명성은 지금까지 일본 전역에 자자하다. 끝없는 정신수양을 통한 무도의 본질을 몸소 보이면서 무도는 사람을 죽이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데 사용돼야 한다는 진정한 무도인의 정신세계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언제나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 조국을 잃고 민족의 아픔과 뼈저린 비애를 극복하는 길을 오직 세계 최강자로서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다.
고향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었고 힘의 원천!
그것은 세계최고가 되는 것이다“고 했다. 최고가 되는 길 만이 조국의 자존심을 찾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세계 정상들을 쓰러뜨리는 ‘신의 손’으로서 정상에 등극했다. 그리고 고향을 찾아 극진가라데를 조국에 전파하려고 시도했지만 그 때는 태권도가 널리 홍보되던 때라 성공하지 못했다. 고향을 위해 무엇인가 해주고 싶었던 그 뜻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최배달은 71세의 일기로 94년 4월 홀연히 죽음을 맞이한다.
아쉽게도 고향땅을 밟지 못했지만 그의 이러한 전무후무한 일대기는 일본에서는 물론 한국에서 스포츠서울 신문에 ‘바람의 파이터’란 제목으로 연재가 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이후 양동근 주연의 ‘바람의 파이터’가 영화로 제작돼기도 했었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 중에서
생가복원추진위, 최영의 기념사업 본격 착수 최배달의 친동생인 영정(75, 전 언론인), 영종(72, 추진위회장)과 조카인 최경수씨(69, 사무국장)를 주축으로 최배달 생가 복원추진위원회를 설립, 요촌동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지난해 말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제10회 김제지평선축제 때 (좌로부터 최경수, 탤런트 심양홍, 김혜정, 이건식 김제시장)
기념관 건립, 극진공수도 테마파크 등을 조성, 성지화하고 10만평 세트장을 건립해 극진가라데 후예들의 산실로 조성해나갈 계획이다.
김제지역 발전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된다.
생각복원추진위는 이를 위해 지난 18~22일까지 김제시를 통해 일본 세계극진가라데연맹 총본관을 방문, 최영의 기념사업을 위해 상호 협조 서약식을 체결하고 최영의의 미공개된 사진 등 자료를 입수했다.
추진위는 또한 무도인의 교류 활성화에도 상호 적극 협조할 것과 전세계 2천여명의 무도인이 참여하는 ‘마스 오야마 메모리얼 컵(대산배달 최영의 추모 기념대회)’ 가라데 대회를 올해 지평선축제 기간에 개최할 것에도 의견을 모아냈다.
현재 생가복원추진위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최경수 씨는 “세계적인 무도인으로서 한국을 빛냈던 최배달의 일생이 의미없이 지역에서조차도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버리는 안타까움에 늦게나마 동생들이 살아있을 때 추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기념사업을 착수하게 됐다”며 “우리지역 인물인 최배달을 제대로 조명해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김제인의 자긍심을 살리기 위한 복원사업에 시민들이 앞장서 참여하고 힘을 보태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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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희망김제 On-air 원문보기 글쓴이: 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