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서 2장 14절 – 20절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호소하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회복과 부흥을 위한 선지자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이 가장 번영하던 시기에 호세아서를 전했습니다. 당시 여로보암 2세는 외세의 침략이 없는 평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상태는 절망적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결과 이웃들과의 관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권세자들은 힘없는 자들을 폭력으로 대하고 힘없는 자들의 재산을 늑탈하고 포악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의 평화의 시기는 곧 다가올 북이스라엘의 환란의 전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시기에 수많은 선지자들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 일으키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의 말씀을 멸시하고 대적하였습니다. 그 당시 거짓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사이의 관계를 막아서고 있었습니다. 거짓선지자들은 당시 회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했습니다. 회중들은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들에게 반드시 성취되길 바랐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 있는 듣기 좋은 말씀을 골라서 회중들에게 이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고 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것을 듣는 회중들은 연호할 수 있고 교회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럴찌라도 성령은 근심하시며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회중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회중들에게 전하라고 주시는 그 말씀을 설교자가 먼저 듣고서 전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는 호세아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호세아 당시 사람들은 호세아서 2장 5절에서 극명하게 보여주듯이 자기를 위한 종교, 자기를 위한 예배 그리고 자기를 위한 수고가 타락의 중심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 중심에는 자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자기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를 위한 것에 집중되고 자기가 원하는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자원으로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시대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을 따라 나오길 열망하시는 것입니다. 그 회복은 바로 자기중심적인 삶의 자세에서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자기를 위한 종교로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던 자들을 하나님중심적인 신앙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삶의 전환은 우리의 삶에서 몇가지를 고친다고 되지 않습니다. 삶의 중심이 전환되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자세가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전환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전환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광야 즉 거친들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 광야는 모세에게는 말 그대로 광야였습니다. 여로보암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나라의 멸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뢰하고 의지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상실되는 것 그것이 광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예배하던 바로 그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재물을 의지하고 재물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던 자들에게는 재물이 사라지는 것이 광야입니다. 우리는 그 광야에서 자신이 그렇게 자부심을 가졌던 신앙이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근심케 하였는가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광야에서 씻기십니다. 우리자신이 그렇게 열망하고 바랐던 것들이 도리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들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광야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그렇게 열망했던 것들을 이제는 미운 물건 가증한 물건 보듯이 하게 됩니다.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들을 알게 되고 미워하게 되고 이제 하나님을 착고 구하는 자기 됩니다. 광야는 하나님 이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성령의 비추심을 따라 우리의 더럽고 추한 것들을 씻게 됩니다. 시편에서 다윗이 모압을 빨랫통이라고 한 것처럼 광야는 우리의 빨랫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데리고 가시되 먼저는 우리에게 사랑의 말씀으로 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는 광야에서 조차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대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광야에서 우리를 위로 하십니다. 하나님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신 이유와 목적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알리십니다. 그 때 우리는 도리어 광야의 삶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의 성취를 열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광야에서 포도원을 주십니다. 포도원은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함께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포도원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또한 포도원은 우리가 즐거움을 누리는 곳입니다. 이전에는 세상이 우리의 즐거움이였다면 이제는 광야가 우리의 즐거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삶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환란의 골짜기가 소망의 문이 되게 하십니다. 바로 광야가 우리로 소망을 가지게 하고 우리는 광야에서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우리를 인도하시되 하나님이 옛적에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인도하심같이 하십니다.
우리는 광야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알이 아니라 남편이심을 알고 고백하게 됩니다. 바알이란 노예와 주인의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친밀함이 열리지 않습니다. 주인이 무섭고 두렵기 때문에 말을 듣는 상황에서는 친밀함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의 남편이 되십니다. 옛적부터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