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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MBC 일요초대석
나의 고향은 50여 가구가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고향을 떠올리면 늘 귀가 멍멍할 정도로 울어대던 매미소리,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 잘 자란 소나무들과 바람에 실려 오던 솔향이 생각난다.
나는 1950년 충남 천안시 성남면 대흥리 대양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한학과 천문지리에 밝으셨다. 아버지는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이다. 내게 처음 단군을 알려주신 분도 아버지다. 다른 사람들이 다 서기를 쓸 때도, 당신만은 늘 단기를 쓰셨다. 늘 책을 끼고 사시던 아버지 대신, 어머니는 살림과 농사를 도맡아 하셨다. 기질이 활달하고 담이 크셨으며, 잠시도 가만히 계시지 않고 늘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셨다.
내게 처음 단군을 알려주신 아버지
3남 2녀 중 장남이었던 나는 유난히 여리고 겁이 많았다. 몸도 약했고 학교 공부에는 도통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 글씨를 쓰려하여도 삐뚤빼뚤 도무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고, 5분 이상 가만히 앉아 있으면 좀이 쑤셨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공책 한 권을 변변히 다 채워본 적이 없다. 상이라고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시계 보는 법을 알고 있었던 덕에 받은 노력상이 전부다.
지금 생각하면 심각한 집중력 장애를 겪었는데, 성적이 형편없다 보니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교감선생님이었던 아버지를 난처하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또래 아이들하고 노는 것이 재미가 없어서 혼자 뒷산을 쏘다니며 온갖 산열매를 따먹곤 했다. 가끔 내가 내 몸 속에 갇혀 있어서 너무 답답하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곤 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가기 싫다는 친구의 등을 떠밀어 저수지에 수영을 하러 갔다가 친구가 물에 빠져 죽는 큰 사고가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와 불안을 겪게 되었다. 학교공부와는 더 담을 쌓게 되었고, 마음 둘 곳이 없었던 나는 태권도, 합기도 등의 무술에 무서울 정도로 매달렸다.
고등학교 때는 지독한 염세주의자가 되었다. “야, 넌 왜 사냐?” 는 질문으로 친구들을 당황하게 했고, “인간은 죽으려고 사는 거야”라고 되새기며 성실히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질문과 원망으로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하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부모님은 대학 진학을 바라셨지만 공부와 담을 쌓고 산 나로서는 쉬울 리가 없었다. 부모님 등쌀에 못 이겨 대학 입시 준비를 위해 서울에 올라갔지만, 학원비는 무술공부를 한답시고 다 써버리고, 대학시험에는 두 번이나 연거푸 떨어졌다. 마음속으로 대학을 거의 포기하고 있던 내가,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몇 가지 있었다.
한 가지는 호박을 심고 가꾼 일이다. 몇 년 묵은 고향마을의 쓰레기를 한 달 내내 치우고 호박을 심어 가꾸면서,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스스로가 대견해보였다. 일하는 보람과 창조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고, 나 뿐 아니라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기 위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호된 꾸지람이다. 내게서 대학진학에 집중하려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아버지는 정년퇴임이 3년 밖에 남지 않았는데, 갑자기 사직을 해버리셨다. 늘 천문과 풍수지리 책자를 가까이 하셨는데 어느 날인가는 “이놈의 천문도 소용없다. 천하를 호령해도 모자랄 운세를 타고 난 놈이 왜 이 모양이냐. 개똥철학은 집어치우고, 먼저 사람이 되어라.”고 호통을 치시며 보시던 책자를 아궁이에 태워버렸다.
마지막 한 가지는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꾼 꿈이다. 꿈속에서 머리가 집채만 한 호랑이를 만났다. 그때 내 뒤에는 내가 태권도를 가르치던 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학생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에 두려웠지만 도망갈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달려드는 호랑이의 다리를 두 손으로 꽉 잡았는데 호랑이가 입을 딱 벌리고 내 머리를 통째로 물어버렸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나자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마음이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3분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던 내가, 그날은 3시간이나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때 이후로 사물과 공부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몇 개월 후에 나는 서울 보건전문대학 임상병리학과에 입학했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께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고마움을 느낀다. 나 때문에 그렇게 속이 상하셨을 텐데도 끝까지 나에 대한 꿈과 기대를 버리지 않으셨다. 대기만성을 입버릇처럼 얘기하시며, 너는 언제가 큰일을 할 거라고 격려해주셨다. 산다는 것이 너무나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그 시절에, 아버지의 그 한 마디에 나는 다시 힘을 얻곤 했다.
스물두 살에 나는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서울 보건전문대학 임상병리학과에 입학해 기초의학과 기초병리학을 배웠다. 임상병리학과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체육교육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광복체육관이라는 작은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내가 정식으로 체육관을 운영하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을 때, 사실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대뜸 “그래, 한 번 해봐.” 하시면서 당신이 받아두셨던 퇴직금의 반을 건네주셨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아버지가 평생을 몸담아오셨던 교육계를 떠나면서 받으신 퇴직금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든지 체육관을 잘 운영해야 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다행히 내 학비와 막내동생의 학비를 댈 수 있을 만큼은 운영이 되었다. 군대 갈 때는 체육관을 팔아서 아버지가 빌려주신 돈을 갚아드렸다. 흐뭇해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졸업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결혼을 했다. 아내는 내가 군대 가기 전, 임상병리사 자격 시험을 치를 때 시험 감독을 맡았던 사람이다. 조선시대 때 왕비가 세 명, 정승이 열댓 명이 나온 청송심씨 가문의 딸이라는 자부심이 유전자 속에 도도하게 박혀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내의 맑은 눈빛과 도도한 기품이 마음에 들었다.
임상병리사 필답고사에 합격하고 실기고사를 보아야 하는데 입영 날짜가 실기고사 전으로 잡혔다. 입영 연기를 위한 필답고사 합격증이 필요해서 보건원에 들렀다. 서류를 떼고 나오다 계단에서 아내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저 군대 좀 갔다 오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이런 인사말이 툭 튀어 나왔다. 아내는 어이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 그런 보고를 왜 저한테 하시죠? 다시 볼 것도 아닌데.”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다. 내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아내는 본의 아니게 내 생각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일을 하려고 서류를 챙겨 들면, 그 속에서 툭 하고 내 서류가 빠져 나오곤 했고, 그 서류를 집어 들면서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는 것이다. 후에 물으니 아내는 나의 고독해 보이는 눈빛과 철학적인 분위기가 좋았다고 한다.
결혼 후에는 오산 기독병원 등에서 병리실장으로 있기도 하고, 화성군 보건소, 공해담당관 등을 거치면서 다양한 일을 경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아들 정한이가 태어났고, 생활은 안정되어 갔다. 부모님과 내 자신에게 약속한 대로 대학도 졸업하고 결혼도 하고 괜찮은 직장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흔히 말하는 착실한 가장으로 열심히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매일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울컥 서러움이 목까지 치밀어 오르고 한없이 외로워졌다.
생활은 안정되었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을 찾아 방황하던 시절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생활이었지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나의 외로움과 허무감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이제 막 재롱을 피우기 시작한 정한이 녀석의 얼굴을 볼 때마다 더 가슴이 아팠다.
‘세상에 나서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자식 커가는 재미를 보며 살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 인생에서 무얼 더 찾을 게 있다고 이러고 있나…’
수없이 나 자신을 설득해 보았지만, 삶의 의미를 모른 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내게는 여전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나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또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산에서 수도했다는 사람들을 찾아 다녔고, 어디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열 일 제쳐놓고 쫓아가 보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에 크게 와 닿는 것이 없었다. 한 소식 했다는 사람을 만나도 그것은 그 사람의 소식이었지 내 소식이 되지 않았다. 외로움과 허무함은 갈수록 깊어만 갔다.
결혼을 하고 남부럽지 않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인생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던 20대 후반, 어느 날 공부할 책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에 있는 한 고서점에 갔다. 기와 역학, 한의학 관련 책자를 찾으러 자주 들르던 곳이었다. 서가를 훑어보는데 불에 타서 표지가 반쯤 떨어져 나가고 없는 책이 눈에 띄길래 무심코 집어들었다. 태극권에 관한 책이었다. 책 중간을 펼치자마자 “선(仙)을 통해서 기를 터득하면 천하무적이 된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마치 감전된 것처럼 너무나 강력한 에너지가 순간적으로 몸을 타고 흘렀다.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기와 무술에 관한 책을 숱하게 읽어왔다. 그런데 이런 평범하고 새로울 것 없는 구절에 내 몸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가.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이번에는 온몸의 전율이 잦아들면서 안온하고 편안한 무언가가 몸 전체를 안개처럼 감싸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나도 모르게 경건해졌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시 한번 놀라게 되었다. 아! 이 느낌은... 언젠가 한번 경험한 적이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눈 쌓인 산길을 달리면서 경험한 바로 그 느낌이었다.
나는 가만히 책을 덮어 제자리에 놓아둔 채 책방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나는 조심조심 걸었다. 그 느낌을 잃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흐트러져도 그 느낌이 날아가 버릴까봐 걸을 때도 버스를 탈 때도 조심조심 움직였다. 집에 도착해서도 아내가 물어보는 말에는 건성으로 대꾸하고, 조용히 자리에 누웠다. 이 느낌을 간직한 채 내일도 그대로 일어나고 싶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야겠다. 그리고 수련을 해야지.
다음 날 새벽에 눈이 딱 떠져서 시계를 보니 1분도 어긋나지 않은 4시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났다기보다 몸이 저절로 일으켜 세워졌다. 그리고는 산으로 갔다. 역시 내가 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몸이 가고 있었다. 의지를 갖는 순간, 몸이 의지를 앞서 간다 싶을 정도로 금방 움직여지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나를 끌고 가는 것 같았다.
그날부터 내 생활은 180도로 달라졌다. 기운 속에서, 기운을 타고 노는, 기운에 취한 생활이었다. 책을 좀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손이 책 있는 곳으로 쭉 뻗어진다. 밥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손이 수저를 드는 것이 아니었다. 기운이 내 손을 들어올린다.
기를 전혀 느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게 기운을 타고 움직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할 것이다. 무중력 상태에서 유영하는 우주비행사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마치 나의 그런 모습을 또 다른 내가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몽환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의식은 아주 명료했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몸의 어느 곳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가끔은 모든 동작이 슬로 비디오를 보듯 아주 느리게 인식되곤 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새벽 4시만 되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마음에는 잡념이 전혀 없고 사람을 대하면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흥얼거려졌다. 맙소사! 내가 콧노래를 부르다니... 세상의 모든 고뇌를 홀로 짊어진 듯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던 내게, 그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무엇을 하고 있어도 내 온 신경은 몸에 집중되어 있었다. 앉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허리가 곧추 세워지고 참선하는 자세가 나왔다.
그때 내가 들인 정성을 말로 표현하기란 정말 어렵다. 나는 정말로 경건했다. 걸음도 조용조용 걸었다. 처음으로 맛보는 이 커다란 평화를 놓치게 될까봐 두려웠다. 잠깐이라도 딴 생각을 하면 그 느낌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내가 얼마나 정신일도 상태였는지 나중에는 자는 동안에도 옆에서 이야기하는 다른 사람의 말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의학적으로 보면 불면증이라고 해야겠지만 나는 분명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내게 중대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분명히 달라져 가고 있었다. 말도 없이 내 몸을 움직이는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동안 책에서만 보았던 ‘내기(內氣)’였다. 합기도와 태권도를 시작한 이후 무술, 한방, 기 관련 서적에서 내기라는 말을 수도 없이 만났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는 내기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체험해 보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내기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 특별한 느낌이 어릴 때부터 고민해오던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우연히 내기를 터득하고 기운 속에서 생활하게 된 첫날부터 나는 백일 정진을 결심했다. 백일 수련은 그냥 절로 되었다.
매일같이 새벽 4시가 되면 눈이 저절로 떠져서 나도 모르게 뒷산에 가서 앉아 있게 되었으니까. 새벽이면 누운 자리에서 몸이 저절로 솟아나듯이 일으켜 세워졌다. 컴컴한 가운데 30분 가량 산을 오르다 보면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지는 데가 있다. 그러면 그곳이 내가 앉아서 공부할 자리다. 자리를 잡고 앉아 호흡을 고르면 온몸에 기운이 돌면서 눈 앞에 붉은 빛기둥이 내려오다가 황금빛 광채가 나는 사람이 보였다. 그 황금빛 광채는 내가 눈을 뜨고 일어나면 사라져버렸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그것은 내 몸에서 나오는 인광(人光)이었다.
이상하게도 아무리 오랫동안 앉아 있어도 힘들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는지 없는지조차 잘 모를 정도로 호흡은 깊어졌다. 앉기만 하면 온몸의 몸무게가 사라져버리고 저절로 호흡이 되었다. 손이 저절로 둥실 떠올라 한번도 배운 적이 없는 무예 같기도 하고 춤 같기도 한 동작이 계속 되었다. 내 맥박 뛰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크게 들리고, 몸 안에서 혈액이 흐르는 소리가 폭우가 쏟아진 뒤 콸콸 흐르는 계곡물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내 임상병리실에 찾아온 방문객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혈압이나 혈당량 등의 수치가 떠오르는 일도 있었다. 나중에 검사를 해보면 신기하게도 정확하게 일치하곤 했다. 그런 일들이 처음에는 나로서도 신기하고 대견스럽게 여겨졌지만 곧 시들해지고 말았다. 여전히 그 모든 것은 다양한 기 현상의 체험일 뿐 그 현상의 배후에 있는 원리는 아직도 내게서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백일 수련 끝 무렵이었다. 그 전날 방송에서 다음날 출근길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를 밑돌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 강추위라면 수련을 쉬어야 하나 생각도 들었지만 그 동안 들여온 정성때문에라도 접을 수 없어서 평소와 다름없이 집을 나섰다.
그러나 막상 산에 올라 바위 위에 앉으니 웬걸 내가 그날 추위를 너무 얕보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눈이 꽁꽁 얼어붙은 바위 위에 앉아마자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도무지 정신 집중이 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볼 수 있던 황금빛 인광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몸이 물리적으로 얼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눈도 아려 왔다. 눈밖으로 배어나온 눈물은 이미 언 것 같았다. 무릎을 짜르르하게 하는 냉기가 견디기 힘들어지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몸이 언다면 큰 일인데...하지만 포기하기 싫었다. 일종의 오기 같은 것이 생겼다.
‘하늘이 때가 되어 데려가겠다면야 갈 수 밖에 없지. 내가 살고 싶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다고 해도 뜻대로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도대체 얼어죽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구경이나 해 보자.’
추워서 잔뜩 치켜진 어깨를 아래로 느긋하게 낮추고 단전에 기를 모으며 호흡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추우니까 몸만 덜덜 떨릴 뿐 호흡이 되지 않았다. 서서히 몸이 마비되는 듯 했고,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내가 정말 잘못 판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늦기 전에 멈추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온몸이 마비가 되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후회가 밀려왔다. 막상 아무리 애를 써도 내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엄습해 오는 것은 감당 못할 두려움이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온몸을 덮쳐왔다. 어떻게 해서든 움직여보려고 갖은 애를 다 애썼지만, 내 몸은 돌이 된 듯 굳어버렸다.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아도 정말로 생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게 간절한 기도가 우러나왔다. “하늘이시여... 이제 모두 버립니다. 하늘이 나를 받아 주십시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호흡이 편안해지며 아랫배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아랫배에서 무언가가 물컹 하고 꿈틀대기 시작하더니 단전이 뜨거워지면서 온몸에 열기가 폭발하듯이 돌기 시작했다. 극한 상황에서 몸 안의 원기(元氣)가 발동한 것일까? 나는 몸 안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을 지켜보았다. 온몸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고 땀이 쏟아졌다. 주위의 눈도 녹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온몸에 진동이 일어나며 몸이 들썩들썩 솟구치기 시작했다. 격렬한 떨림이었다.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는데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하더니 갑자기 높이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순간 팔다리의 관절들이 쑥 빠졌다가 스물스물 다시 제자리를 찾아 스며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몸의 열기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몸이 불덩어리같이 뜨거워지고 속에서 터져나오는 엄청난 힘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너무 기운이 넘쳐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옆에 있는 작달막한 소나무 한 그루를 잡아챘다. 겨울 소나무 뿌리가 얼마나 단단한가. 그런데 꽁꽁 언 땅에 박혀 있는 나무가 뿌리채 쑥 딸려왔다.
백일 수련 끝에 이런 체험을 하고 나니 내가 비로소 내기(內氣)를 체득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나 내기를 완전히 터득했다는 그 충만감도 잠시, 나의 내면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기를 체득했는가? 하지만 단지 기를 몸으로 안 것 뿐이다. 생명의 본질과 실상을 내가 꿰뚫었는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
한계를 안다는 것은 괴로움만 키울 뿐이었다. 백일 수련이 끝났다. 하지만 나의 수련은 끝나지 않았다. 백일일, 백이일… 나의 수련은 강도를 더해 가는 궁극적인 의문과 함께 더욱 깊어져 갔다.
"산으로 가야겠어."
어느 날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마음먹은 이상 그 어떤 말로도 나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아내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산으로 가시게요." 아내가 담담하게 물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산으로 갈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새벽 수련 때마다 간절히 하늘에 길을 물었다. 어느 날이었다. 하늘에 있던 일곱 개의 북두칠성이 내 정수리로 들어와 머리 속의 상단전에서 계속 돌기 시작했다. 머리는 한없이 맑아져서 아예 없어져 버린 듯했다. 우주 전체가 내 머리 속에 올라가 있는 것 같았다.
"산으로 가고자 합니다. 어디에서 공부를 해야 되겠습니까?"
나는 간절히 물었다. 그러자 상단전에서 돌고 있던 일곱 개의 별이 인당으로 튀어 나가더니 어떤 산 앞의 호수 같은 곳에서 멈췄다. 별은 잠시 호수 위에 멈춰 있다가 산으로 쏜살같이 들어갔다. 나는 갑자기 별의 행방을 놓쳐버렸다. 순간 인당에서 밝은 빛이 서치라이트처럼 뻗어나가더니 별이 사라진 산을 비추었다. 별은 산 속의 어느 장소 위에 멈추어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순간, 일곱 개의 별들이 어미 모母자 형상이 되었다가 다시 한 덩이의 빛으로 뭉치더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나는 어미 모자가 있는 산으로 가야된다는 것을 알았다.
21일 수행을 했던 모악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구이저수지가 보인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물었다.
"혹시 어미 모자가 있는 산을 알고 있소?"
"어미 모자요? 우리 친정집 뒤쪽이 모악산이잖아요."
처가는 모악산 아래 고샅밭이라는 동네에 있었기 때문에 나도 모악산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련 중에 보았던 산의 형상이 모악산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서서히 산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3년 가까이 근무하고 있던 한독병원 병리실장을 그만두었다. 내가 없는 동안 가족들이 생계 걱정을 하지 않도록 작은 생수대리점을 마련해 동생에게 맡기고, 아내와 두 아들을 잘 보살펴달라고 신신당부를 해두었다. 그러나 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시간이 더뎌져 할 수 없이 안양시 보건원에서 의약감시원으로 다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두칠성이 머리에 내려왔다가 인당으로 튀어나간 후부터는 아무리 수련을 해도 사람 형상의 황금빛 에너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 빛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 빛이 나타나지 않으니 눈을 감고 앉아 있어도 답답하기만 했다. 나는 다시 모든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6개월 간 재직하던 의약감시원일도 잠시 그만두었다.나는 아내에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산을 나오지 않겠으니 기다리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악산으로 향했다.
모악산서 수행 할 때 큰 도움을 주신 김양순 할머니의 선덕비
모악산 중턱에는 동곡사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김양순 할머니라는 보살이 세운 절이다. 김양순 할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산기도를 많이 하신 분인데 백일 기도 중에 부처님이 나타나 절터를 알려줘 이곳에 동곡사를 지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순창, 임실, 김제, 완주, 옥구군 일대에 꽤 이름이 알려졌던 분이다. 춘궁기 때만 되면 마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퍼주고, 6.25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토굴에 숨겨 주었다. 특히 이유없이 시름시름 앓는 병이나 신병을 잘 고치기로 유명했다. 동곡사에는 치성 드리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할머니가 지은 밥을 먹고 공부하면 시험에 잘 붙는다고 해서 고시공부를 하러 오는 학생들도 많았다. 당시 일흔이 넘은 할머니는 내가 편하게 수련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나를 극진히 배려주었다.
나는 동곡사 옆에 작은 움막을 쳤다. 첫날 밤,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눕기는 왜 누워,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생각도 아니다. 몸 전체로 선연하게 와서 박히는, 의심을 하거나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알아챈 어떤 느낌이었다. 나는 그 느낌에 따라서 눕지 않았다.
나는 상근기는 3일, 중근기는 7일, 아무리 하근기라도 21일을 용맹정진하면 깨달음에 이른다는 구절을 책에서 여러 번 읽은 적이 있다. 깨달음은 사색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내가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백일수련을 통해 극한 상황에서는 나의 의지가 아닌 어떤 힘이 와서 나를 이끌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21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눕지도 않고 수련에 몰두해보기로 마음먹었다.
1980년 7월이었다.
처음에는 모악산 입구에서부터 동곡사까지 하루에 세 차례씩 오르내렸다.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러나 3일쯤 되니까 배고픔은 견딜만한데 쏟아지는 잠이 문제였다. 졸음을 참기 위해 밤에도 산속을 걸어다녔다. 단지 깨어있기 위해 마냥 걸어야 했던 때도 있었고, 소나무 한그루를 붙들고 몇 시간을 서 있기도 했다.
5일쯤 되니까 눈꺼풀이 내려앉으며 눈이 잘 안 떠졌다. 진짜 눈뜨기가 어렵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어찌나 잠이 쏟아지는지 다리가 휘청거렸다. 동곡사 옆에는 두 길 정도 되는 높이의 작은 폭포가 하나 있다. 나는 졸음을 참기 위해 폭포가 시작되는 절벽 쪽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절벽 바로 밑은 바위이기 때문에 잘못하여 떨어지면 크게 다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절벽 위에서도 깜빡 졸다가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세 번이나 말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어느 한 군데도 다치지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느껴지는 극한 상황이 일곱 번 지나갔다.
먹고 자지 않는 21일수련을 했던 폭포와 바위. 지금은 '천화폭포'라 불리운다.
21일 수련이 진행되는 동안 오감의 세계를 넘어선 초의식 상태에서 수많은 기적(氣的), 영적 체험을 했다. 나는 잠을 자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거의 반수면상태였던 것 같다. 내가 수련을 할 때 눈은 감고 있으면서도 옆에서 소곤거리는 말소리도 생생하게 들렸던 것처럼. 몸은 반수면 상태에 들어가 있는데 의식은 명료했다고 할까.
눈을 감으면 하늘에서 글씨가 내려오기도 했고, 책에서 읽었던 성인들의 영상이 나타나 나에게 이런 저런 메시지를 주기도 했다. 다음날 산에 누가 올라올 거라는 것을 미리 보기도 하고, 모악산의 아랫동네에서 일어나는 일들, 고향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눈앞에 훤히 보이기도 했다. 모악산 정상에 앉아서 구이 저수지의 물고기가 노니는 것을 보기도 했다.
21일 수련의 막바지가 되었다. 견디기 어려운 두통이 찾아왔다. 머리가 마치 깨질 것처럼 아팠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과 귀에도 통증이 너무 심해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머리뼈가 늘어나기라도 하는 듯이 빠지직빠지직 하는 소리가 울려 왔다. 이대로 머리가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알이 터질 것 같다 싶더니 코피가 푹 하고 터져 나왔다. 기운이 온통 머리로 쏠렸기 때문인가 보았다. 머리로 몰린 기운을 내리려고 별별 시도를 다 했다. 있는 힘껏 껑충껑충 뛰어 보기도 하고 물구나무를 서 보기도 하고 목을 눌러 보기도 했다. 심지어는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고통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 감각조차 이미 마비되어 있었다.
마침내 나는 모든 노력을 포기했다. 머리가 부서져야 이 고통이 사라진다면, 그래, 부서져 버려라. 나는 다시 있는 힘을 다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호흡을 조절하고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나 자신의 격심한 고통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이런 생각 하나가 번갯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아픈 것인가? 그래, 아픈 것은 내 머리일 뿐이지 않은가. 머리, 그것은 내가 아니다. 내 머리는 내 몸일 뿐 내가 아니다. 내 몸은 내 것일 뿐 내가 아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 내가 내 몸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등 뒤쪽으로 나의 의식이 마치 한 걸음 물러서듯이쑤욱 빠져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이었다.
“꽝!”
갑자기 머리 속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같은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나는 생명이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었다. 머리가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았다. 머리는 그대로 있었다. 언제 머리가 아팠느냐는 듯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모든 고통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그 평화는 너무도 큰 것이었다. 갑자기 내 몸과 주위를 구분짓던 피부가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한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확연해졌다.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초월한 자리, 신성의 자리, 생각이 끊어진 자리... 이것이었구나. 의심의 밑바닥을 몇 번이나 꿰뚫어야 했고, 수많은 유혹을 밟고 넘으며 고통의 시간을 지나야 했던 길. 바로 이것이었구나. 나는 일시에 모든 먹구름을 걷어가 버리는 형언할 수 없는 밝음의 순간을 만났다.
나를 찾아온 그 밝음과 평화 속에서 나는 그 동안 내 질문에 답해 주곤 하던 것이 결국은 나 자신이었으며, 내 존재의 이유를 묻게 만든 것도, 이렇게 모악산을 나에게 알려주고 나를 이끈 것도 결국은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내면의 소리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의심없는 대답이 내 속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천지기운이다.”
“나는 천지마음이다.”
천지를 가득 채운 이 기운이 나다. 나는 천지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으나, 사실은 태어난 적이 없다. 태어난 것은 내 몸, 이 육체일 뿐이다. 나는 내가 이 몸을 받기 전부터 있었다.나는 홀로 스스로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내 가슴에는 우주의 음악이 울리고, 피부로는 자연의 숨결이 드나들고 있었다. 이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고, 이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었다. 내가 천지의 주인이구나. 모든 것이 하나로구나. 하나!
마침내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모악산에서 21일 수련이 끝난 후 다시 21일을 더 머물렀다. 처음 며칠 동안은 한없는 밝음 속에서 말을 잃었다. 그저 침묵 속에서 존재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일몰 무렵 바위에 앉아 점차 어둠 속으로 잠겨드는 마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늘을 태울 듯 일렁이던 장대한 노을빛이 사라지면서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기고 멀리 마을의 불빛이 흐릿하게 깜박거렸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깨달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며칠을 그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명상 중에 인류의 미래에 관한 또렷한 두 개의 영상이 내 의식 앞에 펼쳐졌다. 하나는 평화와 조화로 빛나는 지구요, 하나는 참혹한 파멸의 지구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몸서리를 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인류의 운명이 곧 내 운명이 되어 내 심장을 파고 들어왔다. 나와 인류의 운명이 하나란 느낌이 내 심장 깊숙한 곳으로 찌르고 들어오자 그것은 영원히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 순간 나는 내 목숨을 던져 할 일을 찾았다. 인류의 운명을 행복과 평화로 바꾸는 일에 기여하는 것, 그것이 내 사명이었다. 그 큰 사명을 향해 달려 가라고, 그 일을 하는 것이 내 존재의 이유라고 나의 본성은 외치고 있었다.
그 소리가 너무나 크고 너무나 진실해서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해야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내게 무슨 능력이 있어 그렇게 할 것인가? 하늘은 나에게 그런 엄청난 사명을 안기면서 사람 한 명, 수표 한 장 보내 주지 않았다. 세상 사람 그 누구도 그 일을 해달라고 나에게 부탁하지도 않았다. 누가 나에게 그것을 바라겠는가? 한낱 평범한 전직 임상병리사에게.
내가 나에게 스스로 용기를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그 일을 내 존재 이유라고 느낀 이상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의미가 없다. 나는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 보자. 사람들은 나에게 오지 않는다. 내 쪽에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가자. 길을 모르면 물어서 가고, 물어서 길이 없다면 그 길을 만들어서 가면 되겠지. 나는 이런 다짐을 하면서 모악산을 내려왔다.
집에 돌아와 새벽에 일어나 보니 어렴풋한 어둠 속으로 어린 정한이 녀석이 이불을 걷어차 버리고 웅크린 채로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는데 별안간 내 의식 속을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예의 그 목소리다.
"네가 누구냐?"
지체 없는 대답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천지기운이다."
그런 대답이 내 입에서 터져 나온 순간 아직도 내 손은 아이의 이부자락을 잡고 있었다.
참으로 기묘한 느낌이었다. 나는 틀림없이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이 장면은 무엇인가? 현실이다. 이것이 진짜 현실이라면 그 깨달음은 허상이었단 말인가? 아니다. 그 역시 진짜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늘과 대화를 나누고 돌아온 지금, 이 방 안을 보니 또 다른 그림이 펼쳐져 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그 둘을 모두 나의 현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틀림없는 천지기운은 천지기운인데, 또 이렇게 옹송거리고 자는 자식 새끼들도 있고, 아내도 있고 그렇구나.
깨달음은 그 동안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의식 차원의 먹구름을 말끔히 걷어가 주었다. 그러나 그뿐, 현실의 먹구름은 그대로였다. 그동안 밀쳐 두었던 모든 문제가 이제 더 실감나는 얼굴을 하고 달려들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의 경제사정은 해결되지 않은 채 악화되어 가고만 있었다.
나는 모악산으로 떠나기 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생수대리점 사업을 시작했다. 내가 산으로 들어가더라도 가족의 생계는 어떻게든 보장해주고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공무원생활, 직장생활을 하면서 10년 가까이 모은 박봉을 털어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새로운 사업은 쉽지 않았다. 생수사업을 몇 개월 하는 동안 이익은 커녕 보증금까지 거의 다 까먹었다. 할 수 없이 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시 개인 병리검사실을 차려 일을 하고, 대신 동생한테 생수대리점 운영을 맡겼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동생에게 가족의 뒷일을 부탁하고 모악산으로 향했었다.
모악산에서 돌아와보니 생수대리점은 완전히 거덜이 나버렸다. 내가 운영할 때도 쉽지 않았지만, 씀씀이가 헤픈 동생이 버는 것의 곱절을 써버리는 바람에 그나마 있던 기반도 깡끄리 날아가 버렸다. 그 현실을 바라보고 있으니,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영적인 세계에서는 나는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었다. 이 세상을 쥐었다 폈다 할 정도였고, 지구를 콩알같이 작게 만들어서 콧구멍에 넣었다 뺐다 할 정도로 이 지구가 작게 보였다. 그러나 눈 앞의 현실은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그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이 정말 컸다. 도대체 내 깨달음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도 이렇게 선명하게만 느껴지는 내 깨달음이 착각이란 말인가? 현실의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는 나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내가 겪었던 내면적인 갈등과 고뇌의 무게를 전달하고 싶어도, 글로써는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다. 내가 얻은 깨달음의 세계를 현실의 물질세계에서 펴나가는 것,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가자. 길을 모르면 물어서 가고, 물어서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면서 가면 되겠지. 사람들이 내게 오지 않는다면, 내가 사람들이 있는 곳으면 가면 되겠지…'
그렇게 마음을 먹고 모악산을 내려왔지만 내 앞에 놓인 깨달음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정말 컸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얻은 깨달음과 사명이 진짜인지 확인해보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전달해보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 깨달음을 전달해도 사람들이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내 깨달음은 착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내 깨달음이 전달되어, 내가 느낀 천지기운 천지마음을 그들도 느낄 수 있다면, 나의 깨달음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나는 다음날 새벽부터 공원에 가기로 했다. 공원에서 사람들을 만나 함께 수련하고 대화하는 데는 자격증이 필요없다. 공원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공간이다. 그래 좋은 생각이다, 공원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자, 그렇게 새로운 씨앗을 뿌려보는 것이다.
이제 바람도 선선해진 늦여름 새벽, 어둠이 조금씩 물러가고 있는 안양 충현탑 공원에 사람들이 손님처럼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다. 나는 높이 솟은 충현탑을 등지고 서서 멀리서 나타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떻게 시작해야 하지?
처음 단학을 지도했던 경기도 안양의 충현탑 공원(현재 현충탑 공원)
그때 멀리서 쩔뚝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중풍을 맞은 노인이었다. 그는 공원의 한귀퉁이에 이르더니 불편한 몸짓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그가 하고 있는 동작이 그다지 도움이 되어 보이지 않았다. 아, 몸을 이렇게 움직여보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를 돕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나의 발이 그를 향해서 움직여 갔다.
"많이 불편하시지요?"
"예, 풍을 맞은 지 좀 돼서..."
"운동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해 보시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나는 우선 그의 등 뒤로 가서 어깨와 등을 잠시 주물러주었다. 그리고 몇 군데를 짚으면서 물었다.
"여기가 퍽 답답했을 것 같은데요?"
"예. 그랬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하네요."
"왜요,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갑자기 몸 전체가 굉장히 시원한 느낌이 들어서... 젊은 양반은 의사 선생이오?"
"아뇨. 그냥 운동을 하다 보니 건강법을 좀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몇 가지 동작을 알려 주면서 따라 하게 했다. 그러나 워낙 불편한 몸이라 손을 털고 몸을 가볍게 흔들어 주는 정도의 동작만 겨우 할 수 있을 뿐 가능한 동작이 많지 않아 안타까웠다. 30분 이상 나는 그의 몸 이곳저곳을 주물러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그의 얼굴에 서서히 행복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사실 더 행복한 것은 나였다. 그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를 도와줄 수 있는 힘이 나에게 있다. 그리고 그가 나의 도움을 반기고 있다. 그래, 이렇게 시작해 보는 거다. 한 사람에게 건강과 행복을 전하고, 또 한 사람에게 건강과 행복을 전하고… 이렇게 나의 깨달음을 전해보는 것이다. 한 사람, 두 사람, 내 눈 앞에는 그렇게 사람들이 불어나는 모습과 함께 커다란 그림이 하나 그려지고 있었다.
"내일도 오시면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오래된 중풍이라 완치까지는 불가능할지 모르나, 계속 수련을 하면 생활하기에 크게 불편하지 않을 만큼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구, 이렇게 고마울 데가...! 그런데 저 혼자만 좋자고 그런 폐를 끼쳐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내일 아침에도 꼭 나오겠다고 약속하며, 훨씬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공원을 내려갔다.
새벽의 공원에서 나는 가장 행복했다. 모악산에서 하늘에 약속했던 그 일을 작으나마 이렇게 시작했다는 기쁨이 가슴을 뻐근하게 채워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 중풍환자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면서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하는 이상한 동작들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기웃거리던 사람, 먼 발치에서 힐끗거리며 따라해 보던 사람, 여기저기서 소문을 듣고 온 사람까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 아침 열 명을 훌쩍 넘는 사람들이 새벽마다 나와 함께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당신의 가슴 속에 이 지구의 운명이, 인류 전체의 운명이 바로 당신 자신의 운명이라는 느낌이 절실하게 밀려든 경험이 있는가? 다시 말하면 인류의 문제가 자기 자신의 문제 이상으로 심각하게 걱정된 순간이 있는가? 인류가 아니라면 조국이나 민족, 혹은 그보다 작은 공동체, 최소한 가족에 대해서라도. 당신은 당신의 '더 큰 나'를 자신보다 더 염려했던 순간이 분명 있을 것이다.
혹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너무도 짧은 시간 스치듯 지나간 그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을지라도, 어느 누구라도 그렇게 느낀 적이 전혀 없었을 수는 없다. 남을 생각하고 남을 위하는 마음, 자기보다 더 큰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느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였는가? 대부분의 경우, 현실의 자아가 벌떡 들고 일어나 그렇게 위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고 그 생각을 눌러 버린다. 아니면 한 개인의 힘으로 그런 문제를 감당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별 수 없다는 체념 속에서 괴로워하다기 결국 그 자각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정상적인' 프로세스를 밟는다.
어쩌면 나는 그 부분에서 비정상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체념 대신 설계도를 그리기로 마음 먹었다. 인류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설계도. 누가 봐도 황당하고 무모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그 설계도를 실행에 옮기겠다고 단순하게 결심했다는 점이 남들과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인류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는 것, 그것은 옳은 일이다. 옳은 일은 해야 한다.
내가 그린 설계도의 요점은 간단하다. 내가 깨달았듯이, 많은 사람들이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인류의 운명도 당연히 바뀌고, 세상은 변하지 마라 하여도 변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많은 사람이 그렇게 된다면 승산이 있지 않겠는가? 물리학의 임계치처럼 말이다. 65억 전체 인류 중 1억이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이 지구가 달라져도 크게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1억이 적은 숫자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깨달음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본성이 말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널리 뭇생명을 이롭게 하는 홍익의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자신을 더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게 만들고, 더불어 남의 건강, 행복, 평화에도 도움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면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지와 망각 속에서 파멸을 향해 달려갈 때, 어느 한 사람이 지구 한모퉁이에서 조용히 작은 생명의 꽃을 피운다면, 인류의 운명이 달려가는 궤도는 아주 미세할지언정 변화를 맞게 될 것이다. 백 명의 사람이 꽃을 피우고, 천 명의 사람이 꽃을 피우고, 만 명의, 마침내 1억의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이 세상은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천지를 진동하게 할 하나의 거대한 깨달음, 한 사람의 위대한 성인이 나와 세상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그런 시대는 지났다. 그런 깨달음, 그런 성인이란 없다.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힘은 한 가지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각성과 진보가 모여 이루어지는 그 변화의 힘이다.
인류 역사상 깨달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깨달음을 안고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깨달음은 반쪽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진정한 깨달음이라면 인간 세상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 깨달음은 혼자만의 것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깨달음은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실현될 수 없는 깨달음, 전달될 수 없는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다. 나는 '깨달음이 상식이 되는 인류 사회'를 위한 설계도를 그리고, 그 설계도에 따라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 설계도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엄청난 실험이다. 그것은 인류가 인류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자, 나의 깨달음, 내가 깨달은 진리에 대한 실험이다. 지금은 그 실험을 대신해 줄 사람도, 그 실험을 도와줄 사람도 하나 없다. 도와줄 사람은커녕 이 설계도를 믿어줄 사람조차 없다. 하지만 해보는 거다. 혼자서 계란이 되어 바위를 향해 날아가 보는 것이다. 나는 그 실험에 나를 던지기로 했다.
매일 새벽 안양의 충현탑 공원에 모이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던 그때, 내 안에서는 내 진리의 실험을 위한 설계도의 초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안양의 충현탑 공원에서 새벽수련을 시작한 지 몇 달이 흘렀다. 함께 수련을 하는 사람이 40-50명으로 불어나 있던 시점이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겨울 공원에서 간단한 운동이야 할 수 있었지만 긴 시간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운동만 했지만 점차 명상이나 호흡, 때로는 우리 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오갔다. 대화가 깊어지다 보면 본의 아니게 강연이 되기도 했는데, 사람들을 칼바람 앞에 세워놓고 긴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젠 정말 겨울이구나 싶은 새벽이었다. 날카로운 바람에 눈을 잘 뜰 수가 없었다. 수련을 겨우 마친 뒤 사람들에게 나는 말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새벽 수련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내년 봄에 다시 만납시다."
며칠 전부터 예고해 왔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보다 더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해산을 한 뒤에도 여남은 명은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우리는 근처 해장국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날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나는 잊을 수 없는 두 개의 선물을 받았다.
식사 중에 나이가 지긋하고 몸이 야윈 신사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평소 말이 없던 사람이었다. "저는 위장병을 심하게 앓아 왔습니다. 근 십 년 동안 해마다 가을 한 달 정도는 병원에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금년엔 처음으로 가을을 그냥 넘겼습니다. 모두 이 선생의 수련 덕분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막 좋아지는 참에 수련을 중단해도 될까 걱정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알고 보니 그는 자기 소유의 빌딩을 가지고 있었다.
"제 건물에 마침 마땅히 입주할 사람이 없어서 비어있는 곳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환호를 올리며 말했다.
"거기가 어딥니까? 당장 가 봅시다."
"너무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그렇게 번듯한 곳은 아닙니다. 게다가 지하에 있고..."
우리의 새벽 수련은 장소를 옮겨 겨울에도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지하의 임시 수련장이나마 그런 공간이 생겼다는 것은 내게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각별한 하늘의 선물 같은 것이었다.
선물은 그것말고도 또 있었다. 그들은 조금씩 성의를 모았다며 푸른색 운동복 한 벌을 내게 건넸다. 나는 특별히 다른 옷을 입어야 할 상황이 아니면 언제나 그 운동복을 입었다. 나중에는 소매쪽이 너덜너덜해지고, 색깔도 바랬지만 나는 유니폼이라도 되는 듯이 늘 그 옷만 찾았다. 그 운동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서면 뒤에서 아내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젠 그것 그만 입을 때도 되지 않았어요? 제발 그것 좀 버려요. 사람까지 추레해 보이잖아요."
"아직 괜찮은데, 뭐가 어떻다고 그래?"
나는 그 푸른색 운동복이 좋았다. 단지 편해서가 아니었다. 내게는 그 운동복이 내가 깨달은 진리, 내가 선택한 사명, 내가 걸어가는 이 길에 대해, 세상이 건넨 첫 화답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가 하는 일로 도움을 받고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래, 나는 지금 옳은 길을 가고 있다. 나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옷은 피부처럼 내 몸을 감싸고, 나의 사명과 신념을 매일매일 되새겨주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중풍환자 한 사람 돕는다고 세상이 바뀌나?' 내가 그런 생각으로 그날 하루만 공원에 나가고 말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그 뒤로 아무 일도 안 일어 났을지도 모른다.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계속 공원에 간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을 가르치고 대화하는 가운데 내 깨달음을 더 잘 전달할 방법을 고민하고 연구하다 보니 단학의 체계를 정립하게 되었고, 센터를 열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른 새벽 공원에 간 그 작은 실천이,지금은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건강과 행복에 도움을 주는 큰 일의 시작이 된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난 한 생각을 가꾸어 나가는 것은, 마치 뜨게질을 하는 것과 같다. 뜨게질을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떤 색깔과 어떤 패턴을 써서 만들겠다는 마음 속 그림을 가지고 시작한다. 아무리 또렷한 그림을 가지고 시작하더라도, 처음 한두 바늘을 뜰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계속 뜨다보면 모자도 만들어지고 스웨터도 만들어진다. 한 땀 한 땀 뜨게질을 하듯이, 작은 생각을 하나씩 실천에 옮기는 단순한 과정을 통해 큰 일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의 한두 걸음은 아무것도 아니다.하지만 그 일을 10년쯤 한다고 생각해보라.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한다는 것이다. 누에가 처음에 자기 몸에서 실을 뽑아낼 때는 단지 한 가닥의 짧은 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한참 후에는 누에고치를 아름답게 만들어내고 빛나는 날개를 가진 나비를 탄생시킨다. 그것이 누에 속에 숨어 있는 생명의 신비다. 우리 안에도 똑같은 것이 있다. 우리 안의 생명을 믿고, 우리 안의 위대하고 거룩한 그 마음을 믿고, 자신이 선택한 것을 계속해서 실천해보라.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공원지도와 다른 여러 일들을 병행하며 미래를 구상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다. 어느날 병리실에 앉아 있는데 문을 빼꼼히 열고 들여다 보는 사람이 있었다. 아주머니였는데 눈이 이상하게 생겼다. 한쪽 눈은 무슨 문제가 있는지 흰자위만 보이고, 나머지 한쪽 눈도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데다 눈빛도 아주 불안해 보였다.
아주머니는 초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여자 아이와 사내 아이를 데리고 쭈볏쭈볏 들어섰다. 아이들 둘은 얼굴이 누렇게 떠 있고 비쩍 말랐는데도 배만 볼록했다. 간에 심한 이상이 있다는 느낌이 왔다.
병리실은 병원도 아니고 오다가다 들를 수 있는 곳도 아니어서 어떻게 왔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들 학교 양호선생이 아이들 건강이 심상치 않은 것 같으니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고 했다. 병원에 갔지만 검사비가 너무 비싸 발길을 돌리려는데, 병원의 한 직원이 나를 소개해주어서 왔다고 했다. 눈으로 보기에도 아이들은 심한 황달이었다.
아주머니는 검사비라며 내게 꼬낏꼬깃한 만 원 짜리 지폐 한장을 내밀었다. 만 원으로는 두 녀석 중에 한 녀석밖에 검사를 하지 못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녀석 다 검사를 해주었다. 아니나다를까 입원을 해야할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아니, 어쩌다 애들을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들었습니까?"
아주머니 혼자 애 둘을 키우는데, 정해진 직장도 없어서 어쩌다 생기는 도로공사 부역에 나가 받는 몇 푼으로 근근히 먹고 산다고 했다. 아이들이 몇 달 동안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했다고 했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빨리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라고 했다. 풀이 죽은 아주머니는 계속 "병원은 못 가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아이들을 데리고 일어섰다. 참으로 딱하고 안쓰러웠다. 나는 검사비로 받은 돈 만원을 아주머니 손에 다시 쥐어주며, 내가 소개해준 약국으로 가보라고 했다. 병원 갈 형편은 도저히 안 되니, 아이들이 약이라도 먹고 나아지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두 녀석을 잠깐이나마 활공을 해서 보냈다.
아주머니가 문을 나서자 나는 그 약국에 전화를 했다. 내가 약사감시원으로 일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마음이 잘 통하는 약사였다.
"잠시 후에 아주머니 한 분이 애 둘을 데리고 갈 건데, 아무말 말고 아주머니가 내미는 돈만 받게. 그리고 아이들 증세에 맞는 약을 제일 좋은 걸로 열흘치씩만 눈 딱 감고 지어 주게나."
겨우 원가나 나올까말까 할건데, 그 약사는 고맙게도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안양 시내의 모 초등학교에서 내게 전화를 했다. 전교생들을 대상으로 간염검사를 해야하는데, 나더러 그 일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눈이 이상한 아주머니가 데리고 온 아이들이 바로 이 학교 학생들이었다. 아이들은 그날 그렇게 지어준 약을 먹고 병이 씻은 듯이 나아 버렸다. 아주머니가 이 일을 양호선생에게 이야기했고, 양호선생이 교장선생에게 보고해, 이왕 하는 간염검사를 내게 맡기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 초등학교의 검사가 겨우 마무리되어 한숨을 돌릴 무렵, 또 다시 다른 초등학교에서 검사를 요청하는 전화가 왔다. 알고 보니 그 교장 선생이 안양시 교장단 회의에 참석해서 또 그 아이들의 일을 모든 교장에게 이야기해서, 여기저기서 검사요청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안양 시내 거의 모든 초등학교가 나에게 검사를 요청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그 일만 하느라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덕분에 이리저리 변통했던 크고 작은 빚들을 죄다 청산할 수 있었다. 조그마한 주택에 살다가, 좀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나중에는 안양시가 아닌 광명시의 초등학교에서도 요청이 들어왔다. 이렇게 밀려오는 검사 수요를 당해 내려면 간호사도 몇 명 더 뽑고, 차도 한 대 더 장만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그날도 나는 검사장비를 차에 싣고 간호사와 함께 광명시의 한 초등학교를 향해 서둘러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길 중간쯤 가다가 나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이 정도면 가족들은 먹여살릴 수 있지 않나. 내가 돈 벌려고 마음 먹었으면 예전의 직장을 그냥 다녔지. 이건 내가 아니야."
나도 모르게 정신이 번뜩 차려졌다. 그 이후 나는 간염검사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나에게는 나의 사명이 따로 있는데, 이제 그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와 아이들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장만하겠다고 그렇게 곤역을 치룬 건데, 마침내 때가 왔구나. 이제부터는 정말 내 일을 할 수 있겠구나.
나는 그 아주머니를 그때 이후로 다시 보지 못했다. 그 아주머니로 인해 시작된 그 일련의 일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꿈을 꾼 것처럼 신기하기만 하다. 가끔은 그 이상한 눈의 아주머니와 두 녀석이 하늘에 내게 보내준 천사가 아닐까 생각해보곤 한다. 새삼 모든 인연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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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개인의 생일이나 결혼 등의 기념일에 ㅇㅇㅇ의 날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하면 즉시 지정해 줍니다.한국에서 덕수궁을 입장하고 싶다면 요건만 되면 누구나 가능합니다.특별한 것이 아닙니다.물론 약간의 절차비용은 지불하겠지요.미국의 도시마다 방문하여 ㅇㅇㅇ의날로 지정해 달라고 하면 됩니다.시장과 사진좀 찍자고 하는데 거부하겠습니까.이것을 대단한 것처럼 보도하는 기자는 과연 미국의 정서를 알고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기사 제목도 웃기네요. 어디에서 받은 박사입니까.국민정서에 맞는 기사를 요구하는 것이 나만의 희망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