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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니 왕이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저희가 고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저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찌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 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고한 그 사람의 모양이 어떠하더냐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이에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저가 엘리야에게로 올라가서 본즉 산 꼭대기에 앉았는지라 저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인을 사를찌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서 저와 그 오십인을 살랐더라 왕이 다시 다른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니 저가 엘리야에게 일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엘리야가 저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인을 사를찌로다 하매 하나님의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서 저와 그 오십인을 살랐더라 왕이 세번째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보낸지라 세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의 앞에 이르러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컨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인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전번의 오십부장 둘과 그 오십인들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하매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저를 두려워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신지라 엘리야가 곧 일어나 저와 함께 내려와서 왕에게 이르러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사자를 보내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하니 이스라엘에 그 말을 물을만한 하나님이 없음이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찌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니라 (열왕기하 1:5-16)
<설교> 사람이 죽음에 대해 자유롭기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짊어진 무거운 짐을 감당하지 못해서 그 해결책으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한 것일 뿐입니다. 무거운 짐은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는 길은 짐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을 벗을 방도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택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어 버리면 모든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살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결국 무거운 짐으로 인해서 자신이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때문에 진심으로 죽음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세상에서 어떤 짐이 지워지든 그 짐으로 인한 결과를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라도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자유를 누리지를 못한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사는 길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내가 사는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세상에서 낮아지고, 초라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살기 위한 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우상을 찾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든 아하시야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을 찾아가 병이 낫겠는지를 물어보고자 한 것도 오직 살고자 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얘기가 병이 들었을 때 병 낫기 위해서 힘쓰면 안되고 가만히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단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죄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본질이며 그것이 곧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라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낫고자 하는 열망만을 가진 채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상은 인간을 죽이지 않습니다. 항상 인간이 꿈꾸는 행복한 삶을 이루어주고 성공을 도와주는 신으로 존재합니다. 즉 인간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능력자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되 나를 죽이시는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하나님을 부른다면 그것은 바알세붑을 찾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하시야는 에그론으로 가던 사자들이 돌아와서 엘리야의 말을 전합니다. 아하시야는 그 말을 전한 자가 엘리야인 것을 알고 오십 부장과 오십 인을 엘리야에게 보냅니다. 오십 부장과 군사 오십 인을 보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를 정중히 모셔오기 위한 것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 엘리야를 붙들어다가 옥에 가두거나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겠습니까? 이들이 엘리야를 찾아가서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9절)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 인을 사를찌로다”는(10절)말을 하고 이 말대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오십 부장과 오십 인을 살라버립니다. 그리고 아하시야가 다시 두 번째로 오십 부장과 오십 인을 보냈지만 그들 역시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의해서 같은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우린 성경을 보면서 나와 상관없는 아주 먼 옛날의 남의 얘기로만 간주하기 때문에 ‘하나님인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임을 당한 당사자가 여러분의 자식이나 가까운 친척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인데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할 수 없다고 아우성일 것입니다. 그러면 두 오십 부장과 백 명의 군사들은 왜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그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그들이 죽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로 갔던 오십 부장과 오십 인들의 군사는 살았지 않습니까? 똑같은 죄인인데 왜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죽이시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군사들의 죽음은 단순한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불에 의해 죽었다는 것은,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군사를 보내서 엘리야를 데려오도록 한 것은, 자신의 왕의 권세를 내세워서 자기 뜻대로 엘리야를 불러 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주관되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아하시야의 모든 생각에는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고 뜻하는 대로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십 부장도 역시 아하시야와 같은 생각을 보여줍니다. 오십 부장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았다면 엘리야가 왕의 명령에 복종할 사람이 아님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할 뿐이며, 또한 하나님이 주관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권세로도 그를 붙들 수 없고 명령할 수 없음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십 부장은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면서도 왕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십 부장이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하시야의 권세에 복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 번째의 오십 부장과 오십 인이 하나님에 의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아하시야는 계속해서 오십 부장과 오십 인을 보냅니다. 그리고 오십 부장 역시 엘리야에게 가서 처음의 오십 부장과 같은 말을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권세를 인정하지 않고 복종하지 않는 인간의 완악함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오십 부장은 달랐습니다. 13,14절을 보면 “왕이 세 번째 오십 부장과 그 오십 인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 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의 앞에 이르러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컨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인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전번의 오십 부장 둘과 그 오십 인들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하매”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엘리야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명이 여호와께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하시야가 엘리야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아하시야나 자신들의 생명 또한 자기들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오십 인의 생명을 귀히 여겨달라고 애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생명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세를 알고 그 권세에 복종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왕이 엘리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하나님의 권세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흘러간다면, 세상의 마지막은 분명 심판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살기 위해서, 영원히 존재하기 위해서 모든 지식을 동원하고 의학과 과학을 발전시킨다고 해도 영원한 심판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이러한 현실을 모른다고 해도 신자는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펴면 보게 되는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취되어가는 말씀의 세계가 아닙니까?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세상은 하나님의 권세를 벗어난 적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긋나거나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복종해야 할 분 역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여호와께 있음을 알고 겸손한 가운데 우리의 생명을 여호와께 맡기고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세상의 힘과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살 길을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기고 선하신 여호와께서 내 인생을 사용하여 어떤 선을 이루시는가를 바라보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오십 부장이 엘리야를 말로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일컫는 것처럼, 신자 역시 말로만 하나님의 다스림과 권세를 얘기해서는 안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세상처럼 오로지 사는 것에 마음 뺏기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선포된 우리의 실체를 바라보면서 여호와의 긍휼을 구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에서 많이 떠들고 있는 영적치유니, 내적 치유니 하는 것들은 살기위해서 바알세붑을 찾아가는 아하시야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자신들을 치유하시는 분으로만 바라볼 뿐, 죽이시는 분으로는 보지를 않습니다. 죽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본질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사망에 처한 영혼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육신을 이롭게 하시고 육신을 살리시고 마음만 편안하게 해주면 그것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만족을 채우려고 할 뿐입니다. 세 번째 오십 부장은 자신의 생명이 여호와께 있음을 알았고,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을 함으로써 살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이 자신의 보잘것없는 생명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신의 생명의 실체를 보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에게 누군가가 영적 치유를 말하면서 유능한 강사를 소개해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그 사람을 찾아가서 성령의 역사와 함께 치유를 받고자 하겠습니까? 생명이 여호와께 있고, 여호와의 긍휼만이 우리의 모든 것을 치료함으로써 사망에서 건짐 받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게 할 것인데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다만 여호와를 바라보며 자신의 생명을 부탁하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할 것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부터 접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믿으신다면 하루하루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살고자 하는 나의 노력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세에 내 몸이 복종됨으로써 살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살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는 가운데서도, 질병으로 고생을 하는 가운데서도, 실패한 가운데서도 신자가 구할 것은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형편에서든 죽게도 하시고 살게도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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