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라스트 미션>
나이가 든다는 것은 쓸모없음을 확인하는 과정일까? 아니면 젊은 날의 공과에 대한 응보와 대면하는 시간일까? 특히 화려하고 방종할 정도의 자유로움을 추구했던 사람에게 남은 생은 어떤 의미일까? 영화 <라스트 미션>은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90이 다 된 얼(클린트 이스트우트)은 평생을 ‘백합농장’을 경영하면서 친구들과 너무도 쾌활하고 자신있는 삶을 영위했다. 매력있고 유머스러운 그의 외모와 성품은 수많은 여인들과의 로맨스 또한 일상의 사건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밖으로만 향한 그의 삶은 가족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입학, 졸업, 결혼 등 가족이면 당연히 해야 할 의무적인 참여도 그는 실천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자유로움에 지친 가족들은 그를 멀리했다. 자신에게 살아갈 힘과 부가 있을 때는 이러한 상황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늙고, 친구들은 하나 둘 사라졌으며, 집마저 경매로 차압되었을 때, 그의 삶은 어찌할 수 없는 극단적인 고통의 끝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믿고 있을 때,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일을 만나게 된다. 우연하게 마약 밀매 조직으로부터 마약운반을 비밀리 제의받았던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했을 때, 그것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그가 한 일이 커다란 수입을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마지막 테스토스테론의 분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얼은 운반으로 받은 댓가를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에 사용한다. 손녀의 학비를 지원하고, 폐업 일보 직전인 참전용사의 바를 다시 살렸으며,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불법을 통한 수입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확인시켜 주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얼과 가족의 화해는 전형적인 미국의 드라마 문법에 따른다. 가족에 대한 잘못을 시인하고 진정으로 가족에게 도움을 주었을 때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은 오랜 원한과 상처를 잊고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화해와 용서, 너무도 익숙한 미국의 해결 방식이다. 상처와 고통이 이토록 단시간에 해결될 수 있다면 그것의 힘은 무엇일까? 인간성에 대한 관대한 믿음일까? 아니면 돈이 제공하는 강력한 힘의 상징일까? 아내가 죽기 전에 얼에게 한 말은 어쩌면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당신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어도 당신을 받아들였을 거예요.”(아무런 물질적 지원도 하지 못한 채 용서를 간구하는 사람에게, 또는 오히려 용서를 빌미로 물질적 지원까지 바라는 사람에게 용서는 쉽게 이루어졌을까?)
영화는 감독 자신의 세대의 자랑스러움을 투영하고 있다. 인터넷 사용 때문에 차량의 바퀴도 교체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들 세대가 가졌던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고 그것은 지금의 젊은이들이 무시할 그러한 삶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얼의 자부심은 재판에서 자신의 죄를 완전히 시인하고 감옥에 들어가는 모습에서 확인된다. 변호사의 만류에도 그는 부끄럽거나 도망치지 않는 용기를 선택한 것이다. 영화 마지막, 감옥에서 백합을 가꾸는 모습은 최후까지 희망과 의지를 버리지 않는 강인한 인간상을 구현하고 있다.
대부분 노인들의 늙음을 그리는 영화들의 마지막 장면은 가족과의 화해를 주제로 하고 있다. 비록 젊은 날의 방황과 독단적인 삶일지라도 가족이라는 공간 속에서 서로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또는 새로운 가족과의 결합을 통한 안정의 방식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메시지는 인간의 고독은 ‘불행’이라는 개념을 담고 있다.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주입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육체의 쇠락은 정신의 빈곤을 초래한다. 무언가와 투쟁할 수 있는 힘을 파괴하는 것이다. 결국 ‘늙음’은 의존과 돌봄으로만 해소될 수 있는 상호적 관계이다. 그러나 ‘늙음’이 이러한 방식으로만 표현되고 규정될 때, 그러한 삶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은 더욱 커진다. 수많은 노인들이 의존과 돌봄에서 벗어난 채 살아가고 죽어가는 현실에서 ‘가족’을 통한 노년의 행복을 그리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불편하다.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더 큰 절망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때론 가족과의 관계가 아닌 방식으로, 타인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난 관계의 형태로, 노년의 긍정성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혼자서 철저하게 독립적인 방식으로 살다 소멸해가는 인간의 자율성을 객관적이면서도 따뜻한 방식으로 서술하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인간은 ‘혼자’라고 하면서도, ‘혼자’라는 사실을 못 견디게 두려워하고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안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얼’은 독립적인 삶이 가능했던 인물이었다. 가족과의 화해가 없었더라도 결코 불행하거나 위축되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던 인물이었다. 영화는 가족이 모든 것에 우선된다는 메시지를 남겼지만, 얼의 모습을 새롭게 해석하고 가공한다면 가족과 유리되었지만 독립적으로 타인과 살아갈 수 있는 자율적인 한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냈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의존하지 않고 마무리되는 멋진 형태의 삶을 만나고 싶다. 볼 수 없다면 만들고도 싶다. 삶은 정해진 방식으로만 진행되는 것도 아니며, 규정된 방식으로만 평가되는 것도 아니기에, 그저 나만의 삶을 살고 싶다.
첫댓글 "의존하지 않고 마무리되는 멋진 형태의 삶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