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글쎄요?
담임목사께서는 마태복음 6장16~24을 설교내용으로 정하시고 설교하시기 전에 3회에 걸쳐서 재정에 관한 내용으로 말씀을 하시겠다고 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을 돈과 관련해서 국내 목사 두 분과 웨슬리 목사의 예를 들었다. 즉, 보물과 돈을 같은 선상에 두고 말씀을 했는데 과연 이것이 맞을까?
이 설교를 하실 때 문득 교회 재정이 어렵다는 것은 느끼겠다. 그런데 굳이 이 비유가 돈(재정)과 관련해서 선포되어야 하는지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우선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전에 ‘범돌’님이 말씀 하신 것처럼 재정 해결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씀의 힘’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오늘 선포된 말씀은 많은 아쉬움을 남기게 한다. 오늘 설교의 결론은 “헌금 많이 내라”이다.
도미닉크로산의 말을 빌려서 비유(은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왜 이런 비유가 나왔는지를 그 당시 유대지역의 상황을 살펴보겠다.
은유(Metaphor)라는 말은 두 개의 그리스 어원, 즉 “건너서” 혹은 “가로 질러”라는 뜻의 ‘페레인’(pherein)에서 온 말이다. 즉 은유(비유)는 한 사물로부터 다른 것으로 “건너서 나르는”는 것, 그래서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보는 것” 혹은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말하는 것”을 뜻한다. 은유는 “~로 보는 것” 혹은 “~로 말하는 것”이다. 보물에 대한 비유적인 이야기는 항상 외부적으로 그 이야기 너머의 보다 폭넓고 다른 어떤 지시 대상을 기다린다. 비유는 그 실제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결코 그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다. 즉 오늘의 설교에서 보물 곧 돈이라는 등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비유들은 사실성과는 무관하게 ‘참’일 수 있다. 진리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유, 즉 비유적 설명의 진리는 사실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비유의 사실적 진실성을 문제의 핵심으로 생각하면 그 비유의 요점을 놓치게 된다. 그 비유의 요점은 의미이다. ‘비유를 이해하는 것’은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가 4:3~9에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비유는 한 농부가 서로 다른 종류의 밭에 씨를 뿌리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최초의 청중들과 후대의 독자들은 그 비유가 무엇이든 간에, 씨를 뿌리는 것에 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게 된다. 그 비유는 “씨를 뿌리는 것에서 벗어나는” 어떤 것에 관한 것이다. 이 비유를 예로 들면 혹자는 오늘 설교가 하나님의 일에 광한 성취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라고 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럼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었던 유대 지역 시대 상황으로 들어가 보자.
유대는 로마의 친정체제(유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되면서 유대 사회는 계층 간의 갈등문제가 심화된다. 도시의 중산층은 바리새파 형성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으며, 여유 시간을 갖게 된 중산층 사람들이 그들의 사업 외에 성경 해석과 볍적인 문제에 점차 많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율법에 관한 해석학적 지식이 풍부한 계층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는 평신도 서기관의 숫자가 증가하고 평신도 서기관들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로마의 친정체제하의 중산층 증가는 농어업 종사자의 수탈을 의미하게 된다. 로마와 결탁한 귀족층(대제사장, 고위급 제사장 계급, 지주들, 부유한 상인들)은 점점 부유하게 된 반면에 농민들은 귀족층의 소작농 혹은 빚쟁이로 전락하게 된다. 유대의 수도 세포리에서 농민들의 수탈이 극에 달해 세원 증대의 한계를 느끼자, 로마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리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로마 당국의 관심을 사면서 갈릴리 바닷가를 디베라 바닷가(수도 티베리아스)로 명명하여 수탈을 감행한다. 그리하여 유통과정마다 과중한 새금을 부과하게 된다. 이는 어민들의 어족 자원의 고갈로 이어진다. 사회가 현실적인 곤궁에 처할 때, 두 가지 반응이 나온다. 현실 도피와 현실 타파이다. 종교적으로는 내세 추구 경향이 강해진다. 바리새파에게는 부활과 영생 등 내세 사상이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현세에서 다 맞아 떨어지지 않는 보상과 처벌의 원리가 내세에서 완성된다하여 사회적 약자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었지만, 심각한 사회적 불만 자체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하층민의 주된 관심사는 자기들의 현실적인 곤궁을 해결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약 성서에는 먹는 것과 관련된 비유가 많은 것이다.
내용을 정리하겠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보물은 ‘재물 욕심’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하자. 더 넓은 의미에서 세상의 유무형의 하나님을 떠난 세속적인 욕심이 아닐까한다. 그러나 하늘의 보물은 당시 내세관인 하늘에 소망을 두라고하신 것이라 생각이 된다. 왜 ‘하늘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하냐 하면 6:22~23을 보면 ‘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구절에서 빛과 어둠, 하늘나라의 빛과 세상의 어둠을 대비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야기를 더 전진시키면 6:25~34에 주님께서는 사회에서 소외된 자(하층민)에게 던져준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저 주는 진정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시대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와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신자유주의 물결이 소시민 각자의 생각과 다르게 온통 이 사회를 쓰나미로 휩쓸고 있고, 유익한 것이 옳은 것이라는 공리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무한 경쟁 시대에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근로자의 필요 감소로 인하여 사회적인 소외 계층이 형성되고 있다. 배움에 있어서도 있는 자가 좋은 대학을 가는 사회, 태어나면서부터 불평등한 사회가 형성되었다. 신종 현대 사회의 양반구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중산층이 없는 사회로 가고 있다. 개신교의 도덕적인 타락은 사두개파를 닮아가고, 겉으로의 경건함과 속으로의 음흉함은 바리새인을 닮아가고 있거나 더 못하다. 지금 예수님을 파는 자들은 '교회 놀이'에 익숙해져 있다. 깊어지지 않는 영성 훈련, 교회 넓히려는 땅따먹기 놀이, 헌금을 쥐어짜내기 위한 많은신앙 고양 훈련, 샤머니즘을 능가하는 신비주의 몰입 등. 바리새인을 욕하지 마라, 현재의 이스라엘이 누구의 실존인가. 바리새파유대교가 종교의 근간이다.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꿋꿋이 지켜낸 의지의 백성이다. 예수님 안 믿는 것만 빼놓고 말이다.
예수사상이 무엇인가. 독식 비판이다. 나만이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욕심, 그러나 결국은 같이 욕심에 허우적대다가 생을 끝마치는 부초와 같은 생을 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그 ‘독식’을 조장하고 있다. 세상에 빛이 되는 메세지가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이 하나님 앞에 안전하다는 지극히 단순한 종교 본능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간단하다. “하나님께 목숨을 다하여 순종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마지막으로 이 교회에 ‘말씀의 힘’이 살아나 교회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많아지길 빈다.
첫댓글 오늘 본문말씀의 보물이란, 꼭 돈이라기 보다는, 가치의 지향을 두고 말씀한 것이라 봐야겠죠?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 것인가,,, 현실에 붙잡혀 소유의 삶에 매달릴 것이냐, 아니면 그러한 현실을 넘어서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믿음의 삶을 살 것이냐.., 사실은, 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시험이 아닐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저축해둔다는 의미는 아닐 것 같은데 ㅋㅋ
전 이런 이야기글 하고 싶은거죠. 예수님 당시에 그 비유로 말씀하시고자 하는 시대상황이 있다는 것입니다.오늘날 설교자들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읊어대지말라는 것이지요. 그 비유가 오늘 시대를 매개할 수 있는 진정한 메세지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비유 뒤에는 대부분 그에 대한 예수님의 메세지를 전달 받는 대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곤 합니다.. 그런데 설교자들은 그 이야기를 거세해버리는 만용을 부리지요.
뭔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런 걸, 말씀의 도구화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는 말씀들이, 그 말씀의 본래적 맥락과 무관하게 설교자의 입맛에 따라 응용되는 경우들을 꽤 자주 접하게 되죠.
그런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그것이 그 말씀의 본 뜻이라고 받아들이고, 또 다른 사람을 그렇게 가르치기도 하구요.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성도들이 스스로 공부를 해야하는데... 공부~~~ 그쵸?